# 114화
배에서 내린 일행이 두 무리로 갈라지며 반대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느긋하게 걸으며 전성을 보내는 연수.
-표정 좀 풀어. 누가 봐도 싸우러 가는 줄 다 알겠다.
역시나 노련한 경도평은 경직된 표정을 풀며 조금 더 여유 있게 걸었다.
그렇게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착한 태령검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장원 앞.
지는 해를 등지고 멀찍이서 현판에 시선을 둔 연수의 입이 열렸다.
“최대한 빠르게 하지만 화끈하게. 손닿는 무인은 다 죽여.”
경도평의 눈썹이 씰룩거리며 연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암살 작전이 아닙니까?”
“작전변경이라니까. 최대한 시끌벅적하게 하고 가는 거야.”
“어째서입니까?”
“무림맹의 시선이 호북에 있을 때 난리를 쳐 놓아야 계속 그들의 시선을 이곳에 묶어놓기 편해. 태령검문이 무너지게 되면 무당파와 제갈세가는 움직임이 굼떠질 수밖에 없어. 내가 호북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곰곰히 생각을 하던 경도평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추적을 당하게 되면 저희의 동선을 들킬 겁니다.”
“그래. 그러니 관건은 적들의 추적을 얼마나 철저하게 따돌리고 흔적을 지우냐가 될 거야.”
“그럼···. 언제 시작합니까?”
경도평의 눈에 살기와 투기가 어우러지며 광망이 새어 나왔다.
“저 해가 다 지면. 바로 돌입한다. 은신술을 최대한 이용해서 죽이면서 쭉 올라가면 나오기 싫어도 나오겠지. 난전을 유도하고 주요고수들의 목을 전부 따면 잔챙이까지 다 정리해서 기둥뿌리 뽑는 거야.”
“예!”
느릿느릿 지며 모습을 감추는 해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경도평. 붉은 노을이 그의 얼굴에 닿으며 붉게 물들어가자 더 섬뜩한 얼굴로 보이는 경도평이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잠시 타오르던 노을마저 져 버리니 사위가 어둑어둑해지며 어둠이 내리깔렸다.
“가자.”
광망을 쏟아내는 두 무인이 태령검문을 향해 다가갔다.
채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신형이 사라져 버리는 두 무인.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정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를 마무리하려던 무사는 갑자기 선임 무사가 쓰러져 버리자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목줄기로 차가운 바람이 한 줄기 스치고 지나간다고 느낀 순간 쓰러진 선임 무사의 목줄기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너무 놀라 호각을 꺼내려는데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기울었다.
두 명의 문지기를 시작으로 빗살처럼 태령검문의 중앙을 향해 쏘아지듯 움직이는 두 무인.
속도를 줄이지 않은 연수의 손이 흔들거리는 순간 경계 근무를 서던 세 무사의 목줄기가 갈라졌다.
경도평은 곳곳에 은신한 무인들이 있나 살피며 발견할 때마다 그대로 태도를 찔러 넣었다.
태령검문에 들어선 지 겨우 일각이 채 되지 않아서 이미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무사들을 베었다.
경도평의 눈에 이야기를 나누는 남녀가 들어왔다.
태령검문의 잡일을 하는 행색으로 보이는 여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하급 무사.
순간 그 무사의 목이 하늘로 떠오르자 여인의 눈이 점점 커지며 입이 크게 벌어졌다.
여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전에 경도평의 태도가 휘둘러졌다.
-깡!
그런 경도평의 태도를 막은 연수.
경도평이 의문을 담은 눈으로 연수를 바라봤다.
“민간인은 건드는 게 아니야. 무인만 죽인다. 민간인과 아이는 놔둬.”
“예.”
-꺄아아아아아악!
그런 두 무인의 뒤에서 놀란 여인의 비명이 터져 나오며 태령검문을 울렸다.
비명과 함께 다시 사라지는 두 무인의 신형.
여인은 만약 쓰러져서 주위를 피로 물들이고 있는 무사의 시체가 아니라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두 무인이 빗살처럼 움직이기 시작하자 긴 호각소리가 태령검문의 하늘 위로 길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는 둘.
“여기부터는···.”
“알고 있습니다.”
말을 하며 경도평을 바라보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돌아본다.
씩 웃은 연수는 뒷말을 삼켰다.
검진을 짜며 사방에서 조여오는 무인들의 기세가 기감에 걸렸다.
조금 기다리자 역시나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검진을 펼치고는 두 무인을 포위하며 긴장의 눈빛을 띠었다.
그중 다른 무사들과는 조금 다른 행색을 한 무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정체가 무엇이냐? 감히 태령검문에 침입하고 문도를 해치다니!”
“음···.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지.”
연수의 말에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형을 감추었다.
그와 동시에 가슴으로 모이는 연수의 두 팔.
‘회련쾌참격’
모았던 팔을 휘둘러 피며 빙글 돌자 연수의 두 단도에서 무서운 기세로 검기가 난사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검진을 펼치고 있던 무사들은 당황하면서도 검진을 유지하며 강력한 검기를 막아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큰 피해 없이 검기를 막아낸 무사들의 합쳐진 기세가 크게 일렁거렸다.
무사들을 이끄는 거로 보이는 무사는 다친 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몹쓸 암습을 한 무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 모두 사주경계를 하면서 문여각으로 이동한다!”
만약 모습을 감춘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고수가 문주를 노리고 있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우르르 검진을 유지하며 이동하는 무사들을 중심으로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런 무사들의 뒤를 은신한 채 따라가는 두 무인.
무사들이 검진을 유지한 채 문여각에 도착하자 문주를 비롯한 여러 장로와 식객들까지 모두 뛰어나왔다.
“무슨 소란이냐?”
무사들을 인솔해 온 무인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침입자입니다. 확인된 수는 둘. 벌써 스무 명 가까운 문도들이 죽었습니다.”
“뭐야!”
인상이 구겨지며 노성을 터트리는 문주.
그의 뒤로 서 있던 여덟 명의 장로들과 세 명의 문주의 아들들 또한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이렇게 다들 모여줘서 일이 편하게 되었다. 빨리 끝내지. 내가 할 일이 많아서.”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앞으로 다가오는 연수에 의해 장내에 뜨거운 분노어린 기세가 상승했다.
“이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암수일살.”
한 마디에 장내의 뜨겁던 기세가 가라앉으며 차게 식었다.
입을 떡 벌리고 말을 잇지 못하는 문주였다.
“쳐.”
연수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가 시발점이었다.
긴 태도를 쥔 경도평이 달려나가며 검진을 이루고 있는 오십 명의 고수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태방진을 펼쳐라! 고수다! 절대 대열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몇몇 장로와 식객 고수가 경도평을 노려보며 움직이려고 했으나 그들은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새 그들의 앞으로 나타난 연수의 살기가 무섭게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으로 갑자기 닥친 위기상황으로 목숨이 위험하다는 신호가 울려댔다.
보통의 살기가 아니었다.
“태, 태령진을 펼···.”
문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본능적으로 방위를 잡으며 진을 펼치는 아홉 명의 무인들.
그 옆으로는 문주의 세 아들과 네 명의 식객들이 서로 등을 맞대어 만전에 대비했다.
원진을 이룬 식객 고수들의 위로 떨어져 내리는 연수의 신형.
연수를 발견한 무인들의 검기가 난사되어 날아왔다.
-스스슷!
한줄기 기사로 몇몇 검기만을 반으로 가르자 연수의 몸에 적중되는 검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퍼져!”
원진을 이룬 고수들이 산개하며 연수를 둘러싸고 태령진을 펼친 무인들이 안으로 난입하며 연수를 상대하려 했다.
하지만 잔상만 남고 사라진 연수의 신형이 산개한 무인들을 물고 늘어졌다.
-깡!
뒤늦게 지척에 다가온 연수를 눈치챈 한 식객이 검을 휘둘렀지만, 간단히 막은 연수가 순식간에 중년 고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푸슉!
검을 휘둘렀던 오른팔을 휘감듯 나타나는 검상에서 피가 튀었다.
식객의 팔에서 피가 튈 때는 연수의 단도가 식객 고수의 목에 닿아 있었다.
“태령문과 관계없는 자는 지금이라도 물러선다면 보내준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세 명의 식객.
목에 들이민 단도에 힘을 주며 다시 한번 묻는 연수.
“어쩔 거야?”
식객 고수는 눈을 감으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스팟!
그와 동시에 그의 목이 갈라졌다.
그 모습을 본 세 명의 식객 고수들은 고민이 더 깊어졌다.
“이놈!”
태령진을 유지하며 연수에게 달려드는 문주.
하지만 연수가 보기에 태령진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어딜 갔느냐! 모습을 드러내라 이 빌어먹을···.”
-푸슛!
“커어억.”
문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차남이 절명했다.
“암수일살!!! 죽여버린다!”
문주는 결국 태령진을 벗어나며 연수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발을 맞추며 사방에서 달려드는 무인들. 그 뒤로 태령진을 여전히 유지하며 장로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캉! 그그그극!
앞에서 찔러오는 문주의 검을 쳐내고 몸을 틀며 옆구리를 찔러오는 검을 단도로 밀어내자 불꽃이 튀며 마찰음을 냈다.
펄쩍 뛰어오르며 봉익퇴를 뻗는 연수.
-퍽!
아슬아슬하게 연수의 등을 찌르지 못한 식객 한 명이 가슴에 발길질을 당하며 뒤로 날아갔다.
연수의 신형이 허공에서 빙글 돌며 땅으로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까까까까까까까깡!
천근추를 이용해 몸을 떨어트리기 무섭게 연수가 있던 허공으로 여러 개의 검기가 날아들며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경기를 날려 보냈다.
두 단도를 빠르게 휘둘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경기를 모두 쳐낸 연수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단도를 뻗었다.
-깡!깡! 스걱!
문주의 검이 연수의 단도를 두 번 막아냈지만 세 번째에는 반으로 예리하게 갈라졌다.
문주는 크게 뒤로 물러서며 피를 토했다.
검이 잘려나가며 검에 두르고 있던 검기가 함께 잘렸고, 그로 인해 약한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주의 부릅떠진 눈에는 경악감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미미한 내상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검을 가르는 순간의 암수일살의 단도 날에 슬쩍 맺혀있던 붉은 기운을 분명히 보았다.
믿을 수 없지만 검기를 두른 쇠 검을 그리 쉽게 베어낼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검강밖에는 없다.
‘왜?’
하지만 진정 그것이 검강이었다면 어째서 암수일살이 검강을 이용하여 단박에 싸움을 끝내지 않는단 말인가?
의문이 가득한 문주였다.
경도평은 무사들의 진을 상대하며 희끗희끗 연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과연 휘몰아치듯 상대의 한가운데에서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적들의 공격을 피하고 정면으로 상대를 몰아치는 저 무위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연수였다면 문주가 뒤로 물러서는 순간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그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하지만 물러서는 문주를 가만두고는 몸을 돌려 식객과 두 명 남은 문주의 아들을 상대하며 몸을 빼는 연수.
이번에도 태령진은 연수에게 그 어떤 공격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진을 허물고 암수일살을 상대해서는 승산을 장담할 수도 없었다.
태령검문의 평무사 들이 쓰는 철검을 던지며 입을 여는 장로.
“문주님! 괜찮으십니까?”
문주는 검을 받아들며 입 옆으로 흐르던 피를 쓱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가 다시 태령진의 한 축을 차지하며 외쳤다.
“화각세로!”
진을 꾸리고 있는 장로들의 위치가 바뀌며 태령진이 조금 더 빠르고 유연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사이에도 연수는 두 명의 식객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연수의 단도를 두 번 이상 막아내지 못하고 연신 물러서는 식객들.
그들을 물고 늘어지는데 뒤로 세 개의 검이 연수의 등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빙글, 몸을 돌리며 계속 물러서는 식객들의 방향으로 신형을 미끄러트리고 세 개의 검을 쳐내는 연수.
-카카캉!
물러서던 식객 둘은 이를 악물며 눈앞에 훤히 드러난 연수의 등으로 검을 찌르며 달려들었다.
빙글.
씩 웃으며 다시 몸을 돌린 연수가 자신에게 검을 디밀며 다가온 두 식객의 곁을 스쳐 지나가자 그 둘의 목에서 피 분수가 뿜어졌다.
두 식객의 몸이 허물어지자 그들의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문주의 두 아들과 식객.
뒤로 돌아 웃고 있는 연수의 모습과 눈을 마주친 그들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