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피를 뒤집어쓴 세 무인이 흉신악살같이 얼굴을 구기며 연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을 바라본 채로 뒤로 신형을 미끄러트리는 연수가 그들과 손을 섞기 시작했다.
-까깡! 카카캉! 캉크그그그그!
세 개의 검과 세 개의 장이 휘둘러졌지만 단 두 개의 단도로 모두 막아내며 태령진과 멀어지는 연수.
문주의 얼굴이 점점 화를 누르지 못해 붉어져 오고 있었다.
간악한 암수일살이 태령진과의 대결을 피하며 아들놈들과 식객 고수들을 격파하고 있었는데 이를 도무지 막을 수가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암수일살! 정정당당히 싸우자! 겁나느냐?”
통하지 않을 도발을 해 보는 문주.
순간 여유 있게 물러서며 세 무인의 공격을 막던 연수의 신형이 반전하며 다가서는 세 무인에게로 향했다.
“물러서라!”
놀란 문주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던, 무인들은 물러서든 연수가 갑자기 마주 부딪혀 올 줄 생각지 못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신형을 틀기 힘들었다.
눈치가 빠른 문주의 아들 둘은 그나마 억지로 신형을 틀어 연수를 비껴갔지만, 가운데에 껴 있던 식객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식객의 가슴이 붉게 물들어갔다.
식객은 자신만 놔두고 땅에 몸을 구르며 암수일살을 피해낸 두 무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쓰러졌다.
겨우 암수일살을 피해낸 문주의 두 아들의 표정에 수치심이 담겼다.
“정정당당히 싸우자고 했지? 한번 어우러져 보자!”
씩 미소지으며 달려드는 암수일살을 보며 태령진을 유지하는 장로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가능한 잘 봐둬.
오십여 명이 펼치는 검진을 상대하며 집중하던 경도평의 머릿속에 울리는 전성.
슬쩍 눈길을 돌려 보니 연수가 태령진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고 있었다.
“중진세!”
태령진이 마치 학익진처럼 벌어지며 연수를 상대해 갔다.
가운데에 있는 문주가 슬쩍 뒤로 물러서며 연수를 끌어들이자 진의 양 끝에 있던 장로들이 연수의 측면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마치 연수를 품는 듯한 태령진의 형국이었다.
문주를 뺀 여덟 명의 장로들이 부드럽게 검을 회전시키며 진세를 키우자 마치 물속에 들어온 듯 움직임이 무거워지는 연수였다.
서로의 노림수가 맞아 들어갔다는 듯 눈을 빛내는 무인들.
-스스스스슷! 파파팟!
태령진의 기세와 연수의 기세가 부딪히며 사방으로 경기가 날아들었다.
잠시 후 태령진의 위로 솟아오르는 연수의 신형.
연수를 본 경도평의 눈이 부릅떠졌다.
여기저기 연수의 무복이 베여 있었다.
피가 비치지는 않고 있었지만, 무복이 저리 베였다는 것은 태령진이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였다.
솟아오르는 연수를 따라 뛰어오르는 무인들.
하지만 문주만은 연수를 상대하던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뒤늦게 그런 문주를 발견한 그의 아들 둘이 서둘러 문주에게 다가서며 아비를 살폈다.
“아버님!”
“큭! 괘, 괜찮다. 태, 태령진의 빈자리를 채워라···. 정유세로 상대해야 한다.”
이를 악문 장남이 뛰어오르며 태령진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다.
그 사이에도 허공에서는 쉴새 없이 공방이 펼쳐지고 있었다.
느릿한 유검을 펼치는 여덟 장로의 검격이 반 박자 차이로 계속해서 날아들다 보니 쾌검을 상대하는 만큼 손이 바빠지는 연수였다.
하나 쾌검처럼 가볍지도 않아 유중검의 검세를 연격으로 받다 보니 충격이 몸 안에 쌓이고 있었다.
게다가 첫 검격보다 두 번째 검격에 이할 정도 힘이 더해지고 다음 검격에는 또 이 할 정도의 힘이 더 해지고 있었다.
허공에서 일곱 번째 검격을 처 내는 연수의 단도가 처음으로 반 치정도 뒤로 밀렸다.
마지막 검격을 날리는 장로의 눈빛이 반짝였다.
부드러운 바람같이 무거운 강물같이 도도히 뻗어 나오는 검.
이를 악문 연수는 처음으로 두 단도를 교차시켜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꽝!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땅으로 빠르게 처박히는 연수의 신형.
바닥에 등이 닿기 직전 몸을 빙글 회전하며 땅에 두 발로 떨어진 연수가 몸을 세우는데 아홉 명의 무인이 태령진의 진세를 유지하며 연수 주위로 떨어져 내렸다.
연수의 시선이 부축을 받으며 서 있는 문주에게 잠시 머물자 장로 하나가 노성을 터트렸다.
“꿈도 꾸지 말아라! 이놈!!!”
노성과 동시에 다시 동시에 검을 회전시키며 압박해 오기 시작하는 무인들.
-방금 있었던 공방이 보통의 능유제강에 당하는 공방이다.
전성을 들은 경도평의 안색이 그제야 풀렸다. 혹여 고전하며 위험한 것이 아닌가 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던 그였다.
“정유세로!”
문주 장남의 외침에 검을 회전시키며 진세를 키우던 장로들의 신형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캉!
그러면서 첫 번째 검격이 연수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떨어져 내리는 검을 힘껏 올려친 연수.
장로의 신형이 살짝 흔들리며 반보 정도 뒤로 밀렸다.
재빨리 방위를 다시 밟으며 물러서는 장로의 뒤에서 또 다른 검이 뻗어져 나왔다.
눈을 반짝이며 뻗어져 오는 검 끝을 향해 마주 단도를 뻗는 연수.
검과 단도가 정확히 허공에서 만나는 신기와 동시에 사방으로 경기가 퍼져 나간다.
-깡!
잠시 서로를 노려보는 연수와 장로.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로의 발이 주르륵 뒤로 밀리며 땅에 질질 끌리는 족적을 남겼다.
그렇게 일곱 번째의 검격까지 똑같이 받아쳤다.
그리고 날아오는 여덟 번째 검격.
-꽝!!!
처음으로 밀리지 않고 연수를 지나치는 장로.
이제 마지막으로 진세의 기운을 모두 흡수한 문주의 장남이 검을 찌르며 날아왔다.
그의 검에 어스름한 푸른빛이 서려 있었다.
인상을 굳힌 연수는 땅을 박차며 마주 부딪혀갔다.
-카카카 콰앙!
도무지 검과 검이 만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우레가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캉 그극!
이어져 들려오는 소리에 상대하던 무사들을 크게 밀어낸 경도평이 슬쩍 물러서며 연수를 살폈다.
찔러 오는 검을 세 번 단도로 찔러 검의 위력을 깎는 것까지는 확인은 했는데 그러고도 계속해서 단도를 빠르게 찔러넣어 상대의 유검세를 죽인 것 같았다.
상대의 검력을 순식간에 쾌도를 연속으로 뻗어 위력을 죽인 후 일격을 먹여 밀어냈다.
생각보다 컸던 경기의 폭풍에 순간 집중력을 잃은 문주 아들놈의 목을 따려 했는데 눈치 빠른 장로들이 자신의 단도를 막아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조금씩 비틀리던 진세였는데 장로들이 무리하여 방위를 벗어나자 온몸을 압박하며 무겁게 누르던 진세가 거의 사라졌다.
-결국, 유검은 쾌검과 강검으로 찢을 수 있다.
전성을 마친 연수의 신형이 흐려진다고 생각한 순간.
-스스스 화아아.
기묘한 소리와 함께 연수의 신형이 문주의 앞으로 나타났다.
부자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싸늘한 바람이 부자의 목줄기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순간 멍하니 태령진을 유지하고 있던 아홉 무인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연수가 뒤로 돌아서는 순간 피분수와 함께 허물어져 가는 부자.
“문주님!!!”
눈이 시뻘게져서는 피를 토하듯 소리치는 무인.
-얼마나 알겠어?
“요체는 거의 알 것 같습니다. 흉내는 못 내겠지만.”
대답하는 경도평은 존경의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보았다.
“그럼 됐다. 끝내자.”
순간 둘의 신형이 태방진을 펼치는 무인들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쾅!
중년인이 먼저 기사를 뿜어내며 치고 들어가자 겨우 중년인을 막아낸 진세가 크게 흔들렸다.
-슥슥슥!스걱!
서늘한 소리와 함께 연수가 치고 들어간 태방진의 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두 도망쳐! 검강이다!!”
단도 위로 한치가 넘게 뻗친 선명한 붉은 검강.
앞을 막는 모든 걸 썰어버리며 무인들을 베어내는 연수였다.
오십 명의 무인들이 제대로 도망조차 치지 못하고 몰살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지체되었어.”
“바로 움직이시죠.”
온몸에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경도평이 소매로 얼굴 가득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하자 연수는 문주의 시체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갈 때 가더라도 확인은 좀 해야지. 장로들의 시체를 뒤져봐.”
문주의 품에서 한 권의 비급을 발견한 연수는 품속에 비급을 갈무리해 넣었다.
“뭐 좀 있어?”
경도평은 두 권의 비급을 흔들었다.
“두 권 건졌습니다.”
“그럼 가지.”
두 사람이 떠난 장내에는 육십 구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땅이 젖어 커다란 피 웅덩이가 생기고 있었다.
두 사람이 태령검문을 벗어난 지 일각이 채 지나지 않을 무렵 태령검문위로 붉은 불꽃이 날아올랐다.
“생각보다 빠른데요?”
“예상범주 안이야.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예.”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퇴로인 관도 옆 숲길로 들어서자 공숙과 소개가 뛰어나왔다.
“애들은?”
연수의 물음에 소개는 산 중턱을 가리켰다.
“도평.”
경도평이 연수의 의도를 알아들었는지 산 중턱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대체 얼마나 죽인 거야? 저 양반이나 너나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 아수라를 방불케 한다.”
“태령검문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거야.”
파견 나간 무인들을 제외하면 문주를 포함한 고위 무인들을 모두 죽였고 문내를 지키던 칠십 명의 무사들을 몰살시켰다.
게다가 문주의 세 아들을 모두 죽였으니 아마도 태령검문이 다시 일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소개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주었다.
하지만 고개를 젓는 연수.
“혈향이 강해서 흔적이 남을 거야.”
“알아. 하지만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어. 누이.”
고개를 끄덕이는 공숙.
“알아. 준비는 끝내놓았는데 어떨지는 모르겠네.”
“검주독과 누이의 혈독을 섞었죠?”
“응. 시키는 대로 했어.”
“그럼 됐어요. 매복하고 계시다가 제가 신호하면 독공을 운용하며 전에 가르쳐 준 대로 제게 독기를 몰아주면 돼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수를 바라보는 공숙.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야? 아무리 너라도 중독되면···.”
뒷말을 흐리는 공숙.
“걱정하지 마세요. 독의 대가라는 사천당가의 직계 아들놈에게 배운 독진 운용법이에요. 제가 다칠 일은 없어요.”
“알았어.”
소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도망치는 게 더 낫지 않아? 굳이 여기서···.”
“일차 추적자들을 몰살시켜야 무림맹의 추적속도를 늦출 수 있어. 초동추적조를 몰살시키는 것만으로 시간을 많이 벌 수 있거든.”
직접 무림맹과 정파인들의 추적을 받으며 몸소 익힌 경험이었다.
“네가 그렇다면···. 도울 일은?”
연수는 소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독진을 통해 중독을 시키게 되면 일단은 그놈들은 거동에 제약을 받을 거야. 너는 곧 내려올 도평과 그들의 퇴로 쪽으로 매복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탈주자나 뒤쫓아 오는 추적자들을 추살해줘.”
“응.”
고개를 끄덕이는 소개.
잠시 후 산의 중턱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올랐고 도평이 내려왔다.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잘했다. 너는 소개와 함께 매복해.”
“예.”
이제 숲의 한 가운데에는 연수만이 남았다. 연수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기감을 넓게 펼치며 곧 다가올 적들을 기다렸다.
반 시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연수의 기감으로 열여덟 명의 무인이 들어왔다.
잠시 다가서던 무인들이 삼십 장 정도를 남겨두고 움직임을 멈췄다.
‘호오, 눈치 빠르네.’
한참을 주위를 살피더니 조금씩 연수를 향해 다가오는 무인들.
드디어 멀리서 연수를 발견한 열여덟 명의 무인들.
극자를 수놓은 무복을 입고 삿갓을 눌러쓴 열여덟 명의 무인들은 연수를 경계하며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쿨럭! 쿨럭···!”
피를 토하고 휘청거리며 일어서서는 열여덟 명의 무인을 노려보는 연수.
“다쳤군. 하긴 태령문이 몰살을 당할 정도인데 아무리 암수일살이라도 멀쩡할 순 없지.”
슬슬 다가오는 추적자들.
그들이 다가오자 연수의 손이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연수에게로 밀려오는 묵직한 독기.
몸이 뜨거워지며 쌓이는 독기를 은은하게 무영심공을 이용하여 주변으로 회전시켜 다시 공숙에게 보냈다.
그러기를 한참 공숙과 독기를 주고받는데 한 무인이 품속에서 나무통을 꺼내 들었다.
“황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속으로 혀를 차는 연수는 한 움큼의 피를 더 토하며 다리를 미세하게 떨었다.
“우웩!”
제일 앞에서 추적조를 이끄는 무인이 씩 웃으며 손을 들어 나무통을 꺼낸 무인을 만류했다.
“됐다. 넣어둬. 이대로 제압한다.”
“예? 하지만···.”
“다 잡은 공이다. 굳이 시간을 버려가며 무살조에게 공을 가져다줄 필요가 있느냐? 우리로 충분하다.”
“예.”
더 토를 달지 못하고 물러서며 나무통을 품속에 갈무리하는 무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