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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18화 (118/202)

# 118화

온 전각이 불타오르는데 그 불길 사이로 살벌한 모습으로 한기를 뿜어내어 불길마저 피해 가게 만드는 여인이 연수의 시야로 들어왔다.

“누이!”

연수의 부름에 달려오는 공숙.

“어찌 된 거야? 안색이 왜 이래?”

“조금 다쳤습니다. 누이는 복수를 다 한 거예요?”

“하나 빼고는 다 죽였어. 아무리 시체를 뒤지고 다녀도 그 한 놈이 보이질 않아.”

“그래요? 혹시 바깥으로 도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 이 기회에 아주 다 죽여버려야 하는 건데···.”

“악연이 있다면 꼭 만나는 날이 있겠죠.”

경도평또한 연수의 안색을 보며 조심히 물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아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며칠 요상하면 털고 일어날 테니까.”

소개는 제법 놀라는 표정이었다.

“며칠씩이나?”

연수 같은 초절정의 고수가 며칠을 요상해야 할 정도라니 보통의 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검강에 베여서 내상을 같이 입었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연수의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고, 일단 정리하자.”

그렇게 뭉친 네 명의 무인들은 사방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 손에 든 채찍을 휘두르며 무인들을 몰아치고 반대 손으로 독장을 뿌려대는 공숙과 개방의 취룡장을 사방으로 난사하며 숨을 몰아쉬는 소개.

그리고 긴 태도에서 기사를 뽑아내며 곳곳에 있는 검진을 무너트리는 경도평의 무위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무서운 전력이었다.

하지만 도를 뽑아 들고 검강을 사방으로 난사하여 상대의 한줄기 전의마저 꺾어 버리는 사황성주 패천후의 무위 앞에서는 적아를 막론하고 모든 무인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무인이 죽고 최후까지 모여서 발악을 하던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검을 버렸다.

“항복해도 살려줄 순 없어.”

성주의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긴 수염의 무인은 당당하게 말했다.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성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세가 내에는 잡일을 도와주는 민초들이 있다. 그들만은···.”

고개를 끄덕이는 성주.

“너희의 목숨 건 위선을 봐서 더 이상의 살육은 없도록 하지.”

성주의 말에 두 눈을 감는 무인. 그 뒤로 무인들 또한 당당하게 서서는 두 눈을 감았다.

성주의 중도가 길게 휘둘러지자 뻗어 나온 검강이 단번에 삼십여 명의 무인들을 스쳐 지나갔다.

-투툭. 툭. 툭.

떨어지는 목들.

“남궁세가를 지웠다! 이 이상의 살육은 없다!”

-우와아아아아!!

-성주님 만세!!

-이대로 무림맹을 밀어버립시다!!!

한동안 이어지던 승전의 환호가 잦아들자 철목세가의 가주가 성주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호북으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성주의 눈에 고민의 빛이 어렸다.

“전 반대에요. 이대로 몇 개의 문파를 더 지운다 해도 본성이 무너지면 모든 전선이 뚫릴 겁니다.”

내상 입은 연수를 매섭게 노려보는 철목가주.

“흥! 그렇게 되면 무림맹을 치면 그만이다.”

“무식한 소리 하지도 마쇼. 성이 무너지면 당신들 본가는 멀쩡할 것 같아? 적들의 앞마당에서 몰매 맞아 죽고 싶으면 혼자가든지.”

철목가주의 주위로 뜨거운 투기가 올라왔다.

아직 가시지 않은 전투의 흥분으로 금세 살기를 뿜어내며 가뜩이나 거대한 그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그에 반응하듯 연수에게서 특유의 진득한 살기가 맞서 뿜어져 나왔다.

눈썹을 꿈틀거리는 철목가주.

“그만. 진벽가주.”

“예.”

진벽가주 황류문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어찌 생각해?”

“적영대장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무림맹에서 이곳으로 무인들을 급파했을 겁니다. 게다가 전선을 꾸리고 있던 맹의 움직임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겨우 남궁세가와 무당 정도를 잡고 성과 남은 호남, 강서, 복건을 잃게 되면 저희는 돌아갈 곳을 잃게 됩니다.”

철목가주는 황류문을 한동안 노려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화령가주 주염철은 진벽가주를 나무라고 나섰다.

“겨우 그따위 것이 두려워 물러선단 말인가? 승기를 잡은 것은 우리야!”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는 연수.

“쯔쯧,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뭣?”

화령가주 주염철.

그는 성미가 급하기로는 열두 가문의 가주들 중 단연 첫 번째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연수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하던 그는 전투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단번에 출수했다.

뜨거운 불꽃 같은 강기를 흩뿌리며 연수에게 지쳐 드는 화령가주.

하지만 당하고만 있을 연수가 아니었다.

어느새 손에 쥐고 있던 두 개의 단도에는 검붉은 선명한 검강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퍼펑!

주염철의 장력을 베었다고 생각한 순간 장력이 폭발하며 연수의 내부를 뒤흔들어 놓았다.

스치듯 지나가는 둘.

다시 한번 달려들려는 화령가주와 안색이 좋지 못한 연수.

그 사이를 사황성주가 끼어들었다.

“주염철이.”

싸늘한 사황성주의 부름에 화령가주 주염철의 어깨가 흠칫 떨려왔다.

“서, 성주님.”

“너···. 살 만큼 살았구나?”

분명 성주는 웃고 있는 낯이었지만 주염철은 잘 알고 있었다. 성주의 저 차가워 보이는 미소는 죽음의 미소라는 것을.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는 주염철.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번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한참 주염철을 바라보는 성주였다.

등 뒤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화령가주.

“우웩!”

싸늘한 침묵을 뚫고 연수의 피를 토하는 소리가 울렸다.

시커먼 죽은 피를 토해내는 연수.

“괜찮으냐?”

성주의 물음에 씩 웃는 연수였다.

“늙은이 한둘 정도 데려갈 힘은 남았어요.”

화령가주가 출수했을 때 같이 출수를 준비하던 철목가주를 노려 보며 말하는 연수.

그에 불타는 전각을 바라보며 고개를 돌리는 철목가주 철가군이었다.

“요즘 말이야. 내 명령이 잘 안 먹히는 것 같아. 둘 중 하나겠지. 내 말이 우스워졌거나, 너희 간땡이가 너무 커졌거나.”

진벽가주는 무거워진 장내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어떤 결정을 하던 빨리 움직이셔야 합니다.”

성주는 잠시 철목가주와 화령가주를 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성으로 돌아간다.”

-옛!

열두 가주는 고개를 숙이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

피를 뒤집어쓴 삼천여 명의 무인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을 빛내며 흉흉한 기세와 함께 이동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주저앉게 만들 만큼 위협적이었다.

안휘에서 이틀 밤낮을 달려서 겨우 강서로 돌아온 대규모의 무인들은 덕남산에 들어서며 지친 몸을 달랬다.

“모두 힘내! 우리는 승자들이다! 패잔병처럼 늘어지지 마라. 승전의 기쁨을 안고 성으로 당당히 복귀하는 거다!”

철목가주의 우렁찬 독려에 지친 무인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지쳐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무인들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진벽가주는 성주에게 다가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주님. 이대로는 전력의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눈이라도 붙이게 하는 것이···.”

“겨우 오 일 밤 새우고 강행군을 했다고 이 모양이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연수.

“겨우 오 일은 성주님 기준이고요. 저도 죽겠습니다. 요상이라도 하게 시간 좀 줘요. 안 그래도 내상이 심해져서 죽겠습니다.”

말을 마치며 화령가주를 노려보는 연수.

화령가주는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많이 힘드냐?”

“누구 덕에 내상이 심각하게 도졌어요. 이러다 주화입마 오면 사황성에 전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겁니다.”

“일단 요상 좀 하고 있어.”

연수의 앞으로 나선 성주는 내력을 담아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두 시진 동안 쉬고 이동한다.”

기력을 쥐어짜며 몸을 세웠던 무인들이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여기저기 코를 골며 곯아떨어지는 무사들.

성주는 연수의 앞에서 무서운 눈빛으로 철목가주와 화령가주를 노려보았다.

“큼큼!”

아예 연수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무사들을 편히 쉬게 하는 두 가주.

급하게 요상을 마친 연수가 눈을 뜨자 성주가 물어왔다.

“좀 어때?”

“후우, 일단 급한 불은 껐어요. 자칫 기혈이 죄다 꼬여서 큰일 날 뻔했습니다.”

“엄살은.”

말은 그리해도 두 시진을 연수의 앞에 서서 호법을 서던 성주는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던졌다.

“뭡니까?”

“몸에 좋은 거야. 먹어둬.”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단약을 입에 넣는 척하며 숨기는 연수.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성주마저 속았다.

“아껴 둔 거야. 정말 위험할 때 먹으려고 한 건데···. 저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성주의 노기가 가득 담긴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더 부하들을 독려하는 화령가주였다.

성주의 생색을 보니 제법 쓸만한 영약인 것 같았다.

사실 성주의 말처럼 엄살을 부리기는 했지만, 연수의 내상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다.

강기에 당했던 내상은 튼튼한 혈맥과 경락 덕에 자연스레 동공을 펼치며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드러내면 화령가주와 철목가주에 대한 압박이 되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계속해서 창백한 안색과 지친 기색을 연기했다.

‘빌어먹을 늙은이들. 부상자에게 암습을 해? 두고 보자.’

그런 연수의 옆으로 다가오는 일행.

“좀 괜찮으십니까?”

경도평의 표정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보다 그놈들이 더 걱정이다.”

위험한 교란을 맡은 세 무인이 떠오르자 안색이 어두워지는 경도평.

“괜찮을 겁니다.”

“그래야 할 텐데 말이다.”

공숙은 눈치를 살피며 입을 가리고 전음을 보내왔다.

-왜 아픈 척이야?

-진짜 아픈데요?

-내가 널 모를까 봐?

-누이 눈은 못 속이겠네요.

-그러니까 왜 그러는 건데?

-제가 멀쩡하게 있으면 지금처럼 성주가 영약을 풀었겠어요? 그리고 저 빌어먹을 늙은이들을 최대한 압박해 놔야 헛소리를 안 할 겁니다. 지금도 저 늙은이들이 진격을 하느니 마느니 할까 봐 조마조마해요.

공숙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성주님이 정한 일이야.

-만약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끝까지 진격하자고 하고도 남을 위인들이에요. 머리는 쓸 줄도 모르는 늙은이들이 용감하기만 해서.

작게 소리죽여 웃던 공숙이 소개와 함께 연수의 옆으로 앉았다.

“연수야. 남궁세가의 가주는 네가 죽인 거야?”

“마지막은. 내가 손을 썼지. 성주님과 붙어서 상처를 입었거든.”

“다친 채로 네게 중상을 입힌 거야?”

“응. 모르긴 해도 아마 나보다 고수였어. 그렇죠?”

성주를 바라보며 뒷말을 던지는 연수.

성주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멀쩡한 가주가 싸웠다면 누가 이겼을까요?”

“무인의 승부에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팔 할로 네가 죽었을 거다.”

연수는 일부로 목소리를 높였다.

“성내에서 성주님을 빼면 그와 승부를 장담할 고수가 있습니까?”

연수의 의도를 읽은 성주가 피식 웃으며 단언했다.

“없다.”

순간 철목가주와 화령가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무림에 공식적으로 드러난 아홉 명의 초절정고수.

사파의 귀형신살, 적화염무. 강괴철권 그리고 정파의 제왕검군 남궁진환, 운무검제 부전완, 추룡수개 방천일, 소림신권 혜공. 나머지 일월신교의 쇄신마살과 음마환권이 있었다.

그중 정파의 가장 약한 초절정 고수로 꼽히는 것이 연수가 죽인 제왕검군 남궁진환이었다. 가뜩이나 수적으로도 열세인데 질적으로도 떨어진다 생각하니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주는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이 깊어 보이는 철목가주와 화령가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철가군이 남궁진환과 붙었다면 팔 할로 죽었을 것이고 상성 상 주염철이 붙었다면 칠 할로 죽었겠군. 망노가 붙었다면 그나마 육 할로 해볼 만했을 것인데.”

생각보다 정파의 벽이 높다는 것이 실감 나는지 인상을 굳히고는 말을 하지 못하는 두 가주.

“하지만 저희는 한데 모여 힘을 모을 수 있지요. 저들은 다들 집을 지키느라 주요고수들이 한데 모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벽가주의 말에 겨우 표정이 풀리는 두 가주였다.

“문제는 이제 저들이 힘을 모을 거라는 겁니다.”

찬물을 붓는 듯한 연수의 말.

화령가주는 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따지고 들었다.

“근거 없는 소리!”

하지만 진벽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분명 그러겠지요.”

“어째서?!”

진벽가주는 화령가주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을 해 주었다.

“남궁세가가 무너졌으니까요. 이제 저들은 깨닫겠지요. 이대로 분열되었다가는 위험하겠다고. 명분 또한 생겼습니다. 무림맹에서는 이걸로 명문들의 힘을 한데 모으려 할 겁니다. 남궁세가가 무너진 이상 제 몸 사리며 힘을 아낄 수 있는 명문은 없습니다. 명문이 나서면 중소문파들 역시 따르겠지요.”

“하, 하면···. 이번 전쟁은···.”

성주는 기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우리의 승률은 사할 이 채 못될 것이야.”

연수는 성주의 말에 의견을 보탰다.

“저는 삼할 이 안 된다고 봅니다.”

두 가주의 시선이 진벽가주에게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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