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안에는 늙은 도사 한 명과 젊은 도사 한 명 그리고 젊은 미남자 한 명이 일어서서 성주를 맞았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무당의 서현인 이오.”
“아아, 오랜만이군. 그대도 많이 늙었어.”
옆에 있던 젊은 도사가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당의 가덕비라 합니다.”
잠시 젊은 도사를 보던 성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를 잘 두었군.”
성주의 말에 빙글 웃어 보이는 서현인이었다.
“제 제자라서가 아니라 앞으로 무당을 짊어질 아이지요.”
잠시 젊은 도사를 바라보던 성주의 시선이 젊은 미남자에게 머물자 청년이 포권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갈세가의 제갈휘라 합니다.”
“이야기는 몇 번 들었다. 일문백견 이라는 별호로 유명하더군.”
“허명일 뿐입니다.”
“글쎄, 나는 그게 허명이었으면 좋겠다만.”
성주의 말에 미소로 답하는 제갈휘였다.
어린 나이에 강호에 넷밖에 없다는 고수 중 하나인 사황성주 앞에서 전혀 주눅 듦 없이 당당하고 노련한 것이 인상적인 무인이었다.
“이쪽은 적영대장과 진벽가주, 귀형가주.”
진벽가주와 귀형가주의 인사가 끝나자 연수는 간단하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적영대장이오.”
노도사는 연수를 빤히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혹 그대가 암수일살 맞소?”
‘쳇.’
일부로 성주도 그렇고 적영대장이라는 말만 했는데 역시나 연수를 알아보는 도사였다.
“암수일살 고연수 맞습니다.”
두 도사는 연수를 노려보았다.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노려보는 두 도사.
성주는 분위기가 굳어지자 입을 열었다.
“일단 앉지. 자네들도 원수를 갚자고 온 것은 아닐 테고, 은원은 전장에서 따지자고.”
성주의 말에 굳은 표정을 풀며 미소짓는 노도사였다.
“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명성이 자자한 암수일살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여 실례를 범했습니다.”
자리에 앉으며 뒤늦게 너스레를 떠는 노도사.
자리에 앉자 접객당의 시비가 차를 내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진벽가주가 입을 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런 시기에 이리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본론을 꺼내는 진벽가주를 잠시 바라보던 노도사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휴전과 연합제의를 하러 왔습니다.”
“!!!”
네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노도사를 바라봤다.
성주는 제일 먼저 표정을 수습하며 입을 열었다.
“마교가 중원침략이라도 준비한다던가?”
“예.”
“!!!”
다시 한번 놀라는 성주. 그냥 해 본 이야기였는데 설마 그럴 줄 예상치 못했던 성주였다.
“우리는 전혀 그런 정보가 없었는데.”
믿지 못하겠다는 강경한 표현에 노도사는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입을 열었다.
“마교의 월령대와 암천대가 십만대산을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뭣?!”
-죄송합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신강쪽은 전혀 신경을 쓰지 못 했습니다.
찻잔으로 입을 가린 진벽가주의 전음이 성주의 귀에 날아 들었다.
월령대라면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암천대라면 입신경의 고수인 일월신교의 암주가 이끄는 조직이었다.
“어쩌자고···.”
“저희 무림맹은 지금 중원인들 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비록 사황성에서 시작한 정사 대전이었지만 저희는···.”
-쾅!
진벽가주는 탁자를 내려치며 노도사의 말을 끊었다.
비영과 연수는 평소와 다르게 과격한 진벽가주의 모습에 짐짓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확실히 하시지요. 정사 대전은 무림맹에서 시작한 게 아니오?”
“큼큼!”
노도사가 헛기침을 하자 제갈휘는 여유 있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정사 대전이 발발한 이유는 성주님도 아시다시피 무림맹의 보물을 사황성에서 훔쳐간 것이 시초 아니겠습니까?”
“그 전부터 정파가 전쟁을 준비해 왔던 것은 세 살짜리 애도 아는 사실이오.”
“글쎄요. 오해가 아닐까요? 저희는 어떤 전쟁의 준비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혹시 모를 적을 대비하여 조금 준비를 했을 뿐이지요.”
진벽가주는 기세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지금···. 우리 사황성을 모욕하는 거요? 우리가 바보로 보인다 이겁니까?”
제갈휘는 과장되게 손을 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혀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저희의 입장은 그렇다는 거지요. 저희는 전쟁의 의도는 전혀 없었고, 전쟁의 단초가 된 것은 사황성에서 저희의 보물을 가져갔기에 불가피했습니다. 이것이 저희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진벽가주는 제갈휘를 한참 동안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는 가운데 성주의 한마디가 침묵을 깨어버렸다.
“우리가 무슨 보물을 훔쳤는데?”
“그건···.”
말을 잇지 못하는 제갈휘.
아무리 제갈세가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기재라 해도 알 턱이 없었다. 전극공합의 존재를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성주의 말에 노도사의 눈썹이 실룩였다.
사신으로 오면서 맹주와 장문인에게 끈질기게 물었지만, 그 둘은 정파의 보물이 무엇인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 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성주가 노골적으로 물어오자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정파인들의 말문이 막혔을 때 연수의 입이 열렸다.
“뭔가 잊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뒷말을 흐리자 자연스럽게 연수에게로 시선이 집중됐다.
“사황성에는 개방 승개 출신의 전향자가 있습니다. 정파가 이미 그 전부터 정사 대전을 준비했다는 것은 그의 입을 통해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마교고 뭐고 휴전이 될 리가 없습니다.”
“무화개···!”
이를 으드득 갈며 씹어뱉듯 말하는 노도사였다.
그렇지않아도 그의 전향사건과 관계되어 개방과의 사이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다.
그나마 무림맹주가 무당 출신이기에 버티고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 분열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개방에는 추룡소개 방천일이 버티고 있었다. 개방의 방주이자 정파에는 이제 셋밖에 남지 않은 초절정고수.
만약 무당제일검 소현풍이 죽지만 않았어도 십 년 안에 초절정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하던 찰나에 그마저 죽어버리며 개방과 되돌리기 힘든 원한을 쌓아버린 무당은 입장이 난처했다.
지금도 개방에서는 서호의 분타주 죽음을 가지고 책임추궁과 진상규명을 하자며 무당을 압박하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전쟁과 마교의 움직임을 명분 삼아 개방을 누르고 있긴 했지만 언젠가 터질 화약고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성주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 있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정사 대전의 발발은 정파의 무리한 사파 침공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마교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휴전을 맺는다. 정도로 괜찮겠나?”
“그, 그건···.”
“우리는 말이야. 이미 산화를 각오하고 이 전쟁에 임하고 있다는 말이지. 불과 어제 사황성 무인들을 모아놓고 이 전쟁에서 장렬히 산화하자며 일장연설을 했는데, 나도 체면이 있지. 단 하루 만에 휴전협정을 맺어 버리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우리도 명분이 중요한 사람들이야.”
성주의 연설내용을 모를 리가 없는 노도사였다.
내력을 잔뜩 실어 쩌렁쩌렁 외쳐대니 이 접객당까지도 또렷이 들려 왔기 때문에 알기 싫어도 알 수 밖엔 없었다.
그런데도 노도사는 물러설 수 없었다.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냐는 정파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나 맹주는 사파인들의 도발과 보물을 빼앗겼던 것을 명분 삼아 구파일방을 설득하여 이번 전쟁을 일으켰다.
그마저 소림의 반대 속에서 일어난 전쟁이었고, 그 와중에 화산과 남궁세가가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
물론 몇 개의 성을 뺀 모든 중원의 사파 인들의 거처를 뿌리 뽑듯 밀어낸 것은 큰 성과였고 정파의 큰 이득이겠지만 골치 아프게도 그들의 씨를 말린 것은 또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정파의 선제공격을 인정하는 휴전을 맺으면 맹주는 수많은 정파인들의 비난을 피하기 힘들 것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노도사의 입이 힘들게 열렸다.
“자, 잠시 시간을 좀 주시오.”
“얼마나?”
“이틀만···.”
“허참! 자네들 뭔가 착각하는 것 아닌가? 지금은 전시야. 이런 와중에 이틀이나 뭘 믿고 자네들한테 시간을 달라는 거야?”
압박 중인 성주에게 연수의 전성이 날아들었다.
-너무 압박하시는 거 아니에요?
-일월신교 놈들이 움직인 이상 저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같은데요?
-재들이 더 급해.
한참을 말없이 침묵하던 노도사 대신 제갈휘의 입이 열렸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떠십니까?”
“어떻게?”
성주의 강렬한 시선에 침을 꿀꺽 삼키는 제갈휘.
“사황성과 무림맹은 얼마 전까지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서로 간에 원한 또한 사무치는 무인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교를 상대로 연합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습니다. 저희는 정사 간 대회를 크게 열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원한을 정리하는 자리를 갖고자 합니다. 그 대회를 통해 은원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성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 서로를 향해 검을 들이대다가 하루아침에 손을 잡고 연합한다는 것은 많은 부작용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해서?”
“그 정사 대회는 명분상 정사 간 은원을 씻는 자리가 되겠지만···. 분명 승자와 패자는 나오겠지요.”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화합을 위한 자리임에도 서로의 은원을 씻다 보면 분명 분위기상 승자와 패자는 갈릴 것이 분명했다.
“방식은?”
성주의 물음에 잠시 노도사의 눈치를 보던 제갈휘는 노도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파의 대표들과 사파의 대표들이 서로 중 은원자를 지명하여 각자의 원한을 밝히고 상대와 서로 목숨을 뺏지 않을 비무로 원한을 푸는 것입니다.”
성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제갈휘를 바라봤다.
“그정도로 피로 맺어진 원한이 씻겨나갈 것으로 생각하는 건가?”
보란 듯이 씩 미소를 지으며 제갈휘가 말했다.
“패배자는 승자에게 자신의 죄를 사죄하고 패배를 인정해야 합니다.”
“음···.”
-이거 독한데요? 정사의 웬만한 무인들은 다 모이는 자리에서···.
-너 괜찮겠냐?
-제가 왜요?
-몰라서 묻냐?
잠시 생각에 잠긴 연수는 한숨과 함께 제갈휘를 노려보았다.
“이거 한 사람만 계속 지목하면서 죽이고자 하면 못 죽일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제한을 둘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사황성의 무인들이 입을 닫았다.
분명 무림맹에서 가지고 온 정사대회는 명분을 갖춘 실용적인 방식이었다. 문제는 덥석 물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았다.
특히나 현재 정파와 가장 큰 원한을 쌓은 무인을 꼽자면 단연 암수일살일 것이다. 그의 손에 저승으로 간 정파의 이름만 대면 알만한 무인들이 수두룩했다.
-이거 받아야겠는데요.
-감당할 수 있겠어?
-저 암수일살이에요.
-허세는!
-안 받아도 답이 없어요.
“좋아. 받아들이지. 네 말은 분명 정사 대전발발의 책임을 패자에게 씌우자는 이야기겠지.”
“씌운다는 표현보다는 책임을 진다는 표현이 좋겠습니다.”
“엎어트리나 자빠트리나.”
씩 웃는 제갈휘를 보며 연수는 저 젊은 무인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른 시일 내에 연통하겠습니다.”
“그래.”
무림맹에서 나온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성주의 입이 열렸다.
“어떻게 생각해?”
“기필코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죠.”
“저 또한 적영대장과 똑같이 생각합니다.”
동조하고 나서는 비영. 성주는 진벽가주를 바라보았다.
진벽가주는 잠시 깊은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지?”
“이건···. 정사 간 공평하고 합리적인 해결법처럼 보이지만, 결국 고수싸움으로 가자는 것밖엔 안 됩니다. 그리되면···.”
성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벽가주는 성주를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성의 고수들이 운무검제, 추룡소개, 소림신권을 이겨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
성주의 단언에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을 깨는 연수.
“말을 바꿔 보죠. 그 세 고수가 저희 성의 초절정고수들과 직접적인 원한이 있습니까?”
씩 웃는 성주.
“다른 이들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그럼···?”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연수.
“오로지 너만 그 세 고수와 원한을 맺고 있지.”
“...”
인상을 가득 구기고 생각에 잠기는 연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