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별말 없이 보내주는 연수에게 고개를 숙이는 여후상.
“고맙네. 무슨 일이 있거든 바로 연통해 주면 달려오겠네.”
연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휘청이며 몸을 일으키고는 서둘러 주렴각을 떠나는 여후상.
그가 떠나자 모도산과 두 무인의 맥을 짚어보던 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정신만 차린다면 큰 위험은 없을 듯했다.
안정된 부하들을 확인한 연수는 밖에서 수련 중인 정회를 불러들였다.
꽤 넓은 방에 두 환자가 누워 있고, 그 가운데에 모도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일곱 명의 무인이 들어차니 좁은 감이 느껴지는 방안.
좌중을 잠시 둘러 본 연수는 기막을 치고는 정파의 사신들과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럼 정사 대전은 끝나는 거야?”
공숙의 물음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와 공숙은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리며 연수에게 직설적으로 묻는 소개.
“그렇다면···. 원한 맺은 자를 내가 지명할 수도 있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소개야. 네 원수는···.”
“알아. 네 손에 죽었지.”
“그 자리에서 무당의 전원을 지명하고 생사투를 벌일 수는 없어.”
“그 또한 알아.”
“...”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공숙이 물었다.
“남궁세가의 남은 세력들 또한 나타날까?”
“글쎄요. 그들이 남궁세가의 어린 핏줄들과 합류했다면 세가의 재기를 준비하느라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누이와 소개의 복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특히나 소개는 원수를 갚기 위해 사황성에 투신한 거고. 일단은 이리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에요. 언제고 정사 대전은 다시 일어날 것이니···. 소개야 일단은 이번 대회에서 살아남아야 해.”
연수의 말에 눈을 부릅뜨고 따지듯 물어오는 공숙.
“살아남다니? 누가 소랑을 죽이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분명 소개의 전향을 꼬투리 잡아 비무 신청을 해 올 것이 분명합니다. 상대는 아마도 개방 내지는 무림맹의 고수가 되겠지요. 명목은 비무이지만 평범한 비무일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조건을 걸어오면···.”
“무슨 조건?”
“오늘 그 제갈휘라는 놈을 보고 어렴풋이 느낀 거예요. 그 구렁이 같은 놈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명분을 걸어 무공을 빼앗으려 할 수도 있다고 느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제 사부가 훔치고 제가 기초를 쌓은 무당과 종남에서 비무에 패하면 패배를 인정하고 무공을 폐하라고 조건을 걸겠죠. 소개의 경우에는···.”
뒷말을 흐리는 연수.
“배신의 대가로 개방에서 받은 무공을 내놓으라 하겠지.”
대신 말을 잇는 소개였다.
“소랑···.”
공숙을 똑바로 보며 말하는 소개의 눈빛에는 한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공매. 나는 내 결정에 한 톨의 후회도 없어요. 그들에게 질 생각도 피할 생각 또한 없고요.”
잠시 불안한 눈빛을 하던 공숙 또한 소개의 당당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호검문도 나타나겠지?”
눈을 빛내며 이야기에 끼어드는 정회였다.
“분명 모습을 보이겠지.”
“그럼 나도 호검문주에게 비무 신청을 할 수 있을까?”
“네가 원한다면 내가 그리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십 중 십 네가 죽겠지.”
주먹을 꽉 움켜쥐는 정회.
그런 정회의 주먹을 두 손으로 감싸 쥐는 도화였다.
“정회야···.”
“이 자리에서 분명히 단언하지. 너는 호검문주에게 도전할 실력도 명성도 없어.”
“네가! 호검문주에 대해 뭘 안다고?”
“나는 모르지만, 여기 소개는 좀 알지.”
정회의 뜨거운 시선이 소개에게 옮겨지자 소개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를 본 것은 대략 십이 년 전쯤, 연수가 사부를 만나 서호를 떠난 직후였어요. 당시 제 사부와 호검문을 찾아가 문주를 직접 본 적이 있었죠. 당시 이립 정도 되었던 호검문주의 무위는 절정의 수준이었어요. 사부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죠. 자신보다 밑이 아니라고.”
소개의 말에 정회는 연수를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일류와 절정의 차이가 그렇게도 큰 거야?”
“우문이군. 너도 잘 알잖아? 굳이 대답을 원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해주지. 일류에서도 실력 차가 확연한 경우가 많은데 일류와 절정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지. 단순히 한 단계 차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절정 안에서도 그 실력 차가 천차만별이야.”
“하지만! 절정고수끼리의 실력 차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잖아.”
포기하지 않고 항변하는 정회를 잠시 바라보던 연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같은 절정끼리의 이야기지. 어떨 때는 그 종이 한 장 차이를 죽을 때까지 넘지 못하는 경우도 하루 만에 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리 표현할 뿐. 쉽게 말해서 여기 있는 공숙 누이 또한 절정고수고, 도평역시 절정이야. 둘의 실력 차가 얼마나 날 것 같아?”
“...”
공숙과 경도평을 번갈아 보더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만 굴리는 정회.
“너는 둘의 실력을 가늠할 수준도 못 되는 거야. 물론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여기 누이는 절정에 오른 시간도 꽤 되었고, 누가 보더라도 완연한 절정의 경지. 즉 절정고수 중에서도 꽤 상위권이야. 하지만 도평과 싸우면 백번을 싸우더라도 백번을 지겠지. 비슷한 무인들끼리의 싸움은 상성이 크게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숙 누이는 독공의 고수야. 상성으로는 어떤 고수에게도 밀리지 않지. 그런데 왜 같은 절정인 도평에게 백번을 싸워도 한 번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까?”
정회는 자존심 강한 공숙이 한마디의 반발도 하지 않는 모습에 연수의 말이 전혀 거짓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만큼 확연한 차이가 난다는 거겠지.”
“맞아. 여기 있는 도평은 모르긴 해도 절정의 경지에 오른 지 십 년도 넘었겠지.”
“십이 년 되었습니다.”
“그렇다는군. 지금 도평은 흔히 정파에서 말하는 신검 합일의 경지라는 무기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경지야. 내가 죽였던 무당제일검 또한 똑같은 신검 합일의 경지였고 그와 싸우던 나 또한 비슷한 경지였어. 즉 도평은 언제고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서도 이상할 게 없는 경지인 거지. 호검문주가 절정에 오른 지 못해도 십이 년은 넘었고, 그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그의 자질이 도평 못지않다면, 어떨까?”
정회는 여전히 인정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너는 무공입문 십이 년 만에 초절정에 올랐잖아? 도평 아저씨는 십이 년이나 절정인데 너는 바닥에서부터 십이 년 만에 아저씨를 추월한 거잖아?”
내심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아 뿌듯하던 경도평은 정회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에 절로 어깨가 처졌다.
“그건 내 재능이 도평과의 세월 차를 뛰어넘을 만큼 뛰어났으니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하는 연수였지만 정회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비영만이 눈매를 좁히며 투덜거릴 뿐이었다.
“뻔뻔하기는.”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성주님 마저 인정한 재능이니.”
결국, 눈시울이 붉어지며 분에 찬 눈물이 고이는 정회. 그런 정회를 꼭 안아주는 도화였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지. 네가 가진 무공은 절대 호검문의 무공에 밀리지 않아. 종남의 상승 무리가 잘 녹아있지. 하지만 너에게는 호검문주와 매울 수 없는 세월의 차이가 있고 네 재능으로는 그 세월의 차이를 절대 넘을 수 없다.”
확신에 차 못을 박는 연수. 그의 말에 끝내 참았던 정회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도화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연수에게 눈총을 주었다.
“너는 자질이 나쁘지 않아. 만약 네가 호검문주를 넘고 싶다면 그보다 더 노력해야만 할 거야. 그가 하루 한 시진의 수련을 한다면 너는 두 시진. 그가 두 시진을 한다면 너는 네 시진. 그가 네 시진을 한다면 너는 여덟 시진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오 년. 적어도 오 년 안에는 그의 목숨을 노려볼 정도는 될 거야. 그렇게 만들어 줄 자신은 있어.”
도평은 눈을 부릅떴다. 정회의 실력은 잘 쳐줘봤자 모도산과 비슷한 경지였다.
“오, 오 년 만에 일류고수를 절정고수로 만들 수 있다고 단언하십니까?”
“응.”
“어, 어떻게?”
도평의 의문은 당연했다.
절정의 경지란 선택받은 자들의 경지였다. 자질과 무공 그리고 피땀 어린 노력이 만났을 때 겨우 한줄기의 깨달음을 얻어야 들 수 있는 경지.
그런 경지를 무조건 올려놓을 수 있다며 단언하는 연수이니 아무리 도평이라도 믿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자질은 충분해. 자질만 충분하다면 하루 아홉 시진씩 굴리면 싫어도 절정쯤이야 오르겠지.”
이성적으로는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지만,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자신하는 연수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도평이었다.
“그, 그러면 저는···.”
체면마저 잊고 말을 꺼내는 도평.
그런 도평을 보며 연수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 절정의 벽을 허무는 것과 초절정의 벽을 허무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 너는 오늘 당장이라도 초절정에 올라서도 이상하지 않아. 그렇지만 죽을 때까지 초절정에 오르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당제일검 역시 초절정까지 십 년을 보고 있다고 했다지? 하지만 그도 나도 결국 그 벽을 한순간에 깨버렸지. 물론 그 직후 그는 죽었지만.”
“그, 그렇습니까?”
“그때의 깨달음은 어떻게 전해주려 해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아마 정파를 통틀자면 도평 너 정도의 고수가 얼마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도평이 입을 열었다.
“화산을 지울 때는 화산에만 신검 합일의 고수가 셋이 있었습니다.”
“그중 전대고수를 빼면?”
“하나입니다.”
“그럼 구파일방을 모두 통틀면 열에서 스물 사이겠지?”
“예.”
“그런데 그들 중 왜 초절정의 고수가 쉽게 나오질 않는 걸까?”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도평을 보며 고개를 젓는 연수.
“모르는 것 같은데?”
“수련에 매진하라는···.”
“아니.”
“?”
동그랗게 눈을 뜨고 연수를 바라보는 도평이었다.
“화산에 은거했던 전대고수 중 초절정은 몇이었지?”
“셋이었습니다.”
“많았네. 그런데 왜 남은 둘은 그 경지를 못 밟았을까? 그건 단순해. 그들이 은거했기 때문이야. 무당제일검과 목숨 건 사투를 하며 다시 한번 깨달았지. 무인의 성장은 목숨 건 사투 중에 이루어 진다는 걸. 명상? 수련? 물론 좋지. 하지만 목숨을 걸고 상대와 부딪히는 그 순간의 경험은 무인을 순식간에 성장시키는 거야.”
“그, 그럼···.”
“물론 죽을 확률도 높지.”
“...”
말없이 연수를 바라보는 경도평. 그의 눈빛에는 찝찝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냥 그렇다고. 어떻게 내가 다시 한번···.”
“괜찮습니다.”
연수의 말을 딱 끊는 경도평이었다.
지난번에 연수에게 두드려 맞은 이후 다시는 초절정의 고수와 손을 섞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였다.
그런 도평을 대신해 비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어떻게 안 되겠나?”
“남는 게 없어서.”
“같은 사황성 무인들끼리 돕고 사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보시다시피 짐들이 많아서.”
“치사하게.”
“그럼 도평과 둘이 목숨 건 사투를 한번 해 보세요. 또 알아요? 사투 속에서 한줄기 깨달음이 초절정의 벽을 허물어 앞으로 길을 열어줄지.”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전 암영대의 대장과 전 암검대의 대장으로서의 자존심 걸린 기 싸움을 하던 둘은 동시에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군.”
“동감이오.”
둘의 부정적인 말에 직설적으로 묻는 연수.
“왜 안 되지?”
도평은 입을 다물었고, 잠시 도평을 바라보던 비영이 입을 열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테니까.”
“사투라는 게 그런 거죠.”
“이럴 때에 같은 사황성의 무인끼리 그런 부담을 질 수는 없어.”
“암검대와 암영대라···. 재미있는 싸움이 될 텐데.”
“성주님의 검과 그림자가 싸우는 일은 없어야지.”
“그 역시 동감이오.”
말과는 다르게 둘의 기세가 묘하게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