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137화 (137/202)

# 137화

한참의 침묵을 깬 것은 비영이었다.

“성주님! 아무래도 맹주와 독대는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성의 전력과 합류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양반이 나를 많이 우습게 볼 거야.”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성주님의 안전입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저희의 몫. 성주님의 안위를 돌보는 것 또한 성주님의 자리에서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주는 직언하는 비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 젊은 시절 제일 경멸했던 자들이 있었지. 말만 앞서고 행동할 때는 뒤에 서는 자들. 그들을 비난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같은 변명을 해댔어. 위에 서는 자는 자리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고상한 말이지만 결국은 앞장서 피 흘리기 두려운 겁쟁이의 변명일 뿐이라고 평생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제 와 호적수를 앞두고 경멸해왔던 변명을 앞세워 물러서고 싶지가 않다.”

연수는 성주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자신 또한 전생에서 말만 앞서며 입으로만 떠드는 자들을 질리도록 많이 보아왔다.

정치인. 정작 책임을 지고 행동해야 할 때는 누구보다 뒤에서 지켜보는 자들.

그러면서도 말은 참 잘했다. 자리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기에 신중할 뿐이라고.

자신도 그들을 경멸하며 살아왔기에 지금 성주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사황성을 위해 위험을 피하라는 말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

“성주님의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이런 말 하기 싫지만, 사황성에서 성주님만 바라보는 부하들을 생각해 보세요.”

성주는 미간을 모으며 독주를 연거푸 따라 마셨다.

“빌어먹을! 하루를 살아도 이런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았거늘! 비영.”

“예!”

“돌아간다. 지금부터 따라붙으면 반나절 안에 성의 전력과 합류 할 수 있겠지.”

연수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어려운 결정 하셨어요. 어차피 중요한 협약은 끝났습니다. 이제 와 독대를 청하는 맹주의 저의는 심히 의심스러워요.”

“쳇! 얕보려면 얕보라지.”

성주는 여전히 개운치 못한 얼굴로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영과 연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 성주의 뒤를 따랐다.

꼭대기 층에서 내려와 주루의 화려한 정문을 나서려는데 성주가 뒤로 물러서며 기막을 둘렀다.

성주의 기막에 막히며 퍼지는 분진.

그와 동시에 주변에 들어차 있던 주루의 손님들이 병장기를 뽑아 들며 덤벼들었다.

“흥! 누구한테 암수를!”

이미 계단을 내려오면서부터 위화감을 느낀 연수의 두 손에는 어느새 단도가 들려있었고, 그런 연수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싶은 순간 일행의 뒤를 공격해 오던 다섯 무사의 가슴이 쩍 갈라지며 고꾸라졌다.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쓰러지는 무인들.

연수가 일행의 뒤를 막는 동안 성주와 비영은 주루의 입구를 뚫고 있었다. 하지만 백 명이 넘는 무인들이 주루의 입구를 막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들을 뿌려대는 통에 쉽게 인의 장막을 뚫어낼 수가 없었다.

“비영! 독을 조심해라. 수시로 혈맥을 살펴!”

성주는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무인들을 베어내며 소리쳤다.

과연 전 무림에 넷밖에는 없다는 입신경의 고수답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무인들을 상대로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도를 휘두르며 막아내는 사황성주였다.

순식간에 성주의 앞으로 시신이 쌓이며 입구를 막아버리자 밖에서 밀려 들어오던 무인들은 더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비영은 잠시 내기를 돌려 혈맥을 살피고는 옆에서 창을 찔러오는 무인 하나의 몸을 가로로 갈라버리며 소리쳤다.

“특이점은 없습니다.”

성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비영의 옆으로 물러나 주변을 잠시 살폈다.

연수는 자신 못지않은 은신의 고수 다섯 명을 상대로 암수 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은신의 고수들은 은신술만 놓고 보면 자신 못지않은 은신의 고수였다.

그들과 쫓고 쫓기며 서로의 꼬리를 물기 위한 치열한 신경전과 암전을 하고 있을 때 성주의 전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왼쪽 창가에 둘. 천장에 하나. 큰 기둥 위쪽으로 하나. 그리고···.

-퍼석!

-지금 죽인 놈이 마지막.

성주의 손아귀에 잡혀 머리가 으스러져 눈이 튀어나온 채 허물어지는 살수 하나를 확인하는 순간 성주가 알려준 장소 곳곳에서 피 분수가 일어나며 허공 위로 목이 갈라진 시체 넷이 땅으로 떨어졌다.

성주의 등 뒤로 신형을 들어내며 거칠게 주변을 노려보는 연수.

“이 빌어 처먹을 정파 새끼들이! 성주님 서둘러 뚫고 나가야 해요.”

“그래.”

순간 성주의 도에 거칠게 일렁이는 붉은 기운이 맺히는 순간 성주의 일도가 허공에 그어졌다.

일순간 주변 상황을 잃고 멍하니 성주의 일 도를 바라보는 연수.

한순간 시선을 빼앗으며 주변을 빨아들이는 듯한 그 일 도의 위력은 참으로 엄청났다.

-스오오오

성주의 도에서 튀어나온 반월을 닮은 커다란 강기는 입구를 막고 있는 시체들을 가볍게 토막 내며 지나가서는 입구와 함께 입구를 막고 있는 수십의 무인들을 썰어버렸다.

몸이 반으로 잘리고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시체들.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주위에는 쥐죽은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제야 광기에 휩싸여 성주의 일행을 공격하던 무인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름이 제 각인 되었다.

패천후.

현 사황성을 만들고 사파인들을 규합하여 정파의 무림맹에 대적하고 있는 자. 현 무림에 단 넷밖에 없다는 입신경의 고수.

무공의 경지가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입신경.

순간의 망설임은 여지없이 공포심을 가져왔고, 공포심은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드는 게 당연했다.

기세 좋게 덤벼들던 무인들은 소극적으로 대처하며 성주 일행의 퇴로를 막고 농성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 요량입니다.

연수의 전성에 성주의 눈매가 좁아졌다.

“감히! 나를 상대로!”

성주의 일갈과 함께 다시 한번 성주의 도로 주변 모든 공기가 빨려든다 싶은 순간 어떤 무인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 모두 피해!”

순간 성주의 앞을 막고 있던 무인들이 산개하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너무도 늦었다.

성주의 도는 전과 다르게 순식간에 여덟 번이나 휘둘러졌고, 그의 도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강기는 길을 막고 있던 무인들을 스치듯 가르고 지나갔다.

하나하나가 재앙 같던 강기 여덟 개가 사라지자 장내에는 지옥이 펼쳐졌다.

신체 일부를 잃고 바닥을 구르며 신음하는 자들부터 기묘하게 조각나 죽어있는 시신들. 피 한 방울 나지 않고 토막 난 신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은 너무나 섬뜩했다.

제대로 온전히 서 있는 무인은 겨우 다섯밖에는 되지 않았다.

백이 넘는 무인들이 강기 세례 몇 번에 전멸해 버리자 일행의 뒤에서 성주를 붙잡고 늘어지려던 무인들은 뒤로 물러서며 공포에 물든 눈으로 성주를 바라봤다.

“이 개자식들아 화합하자며 휴전한 지 하루가 채 안 지났거늘! 이딴 짓거리를 벌인 심판은 두고두고 받을 것이다!”

비영은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고는 성주의 재촉에 장내에서 몸을 빼냈다.

“시간이 촉박해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노릴 정도라면 이미 근처에 함정을 깔아놓고 덤벼들 겁니다.”

연수의 말에 비영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성주와 연수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으므로 비영의 물음에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연수는 그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다른 건 몰라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일념은 느껴져요. 전 무림의 비난을 감수하고 이런 짓을 벌였다면 둘 중 하나에요. 성주님을 죽이는 것이 비난받는 것보다 큰 이익이 되던지 절대 밖으로 새지 않게 할 자신이 있던지···. 불행한 것은 어떤 쪽이든 성주님을 죽일 자신이 있다는 판단하에 저지르는 일이라는 겁니다.”

“...”

비영은 인상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수의 이야기는 틀린 점이 없었고, 그 악의 가득한 맹주의 선택은 지금 확실히 성주에게 위기로 다가오고 있었다.

말없이 빠르게 현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서는 일행.

달리면서 성주와 연수의 안색을 살피던 비영은 이를 꽉 물며 이를 갈고는 입을 열었다.

“성주님! 일단 먼저 가십시오. 제가 흔적을 지우면서 뒤따르겠습니다! 적영대장! 성주님을 부탁한다.”

뒤늦게 자신의 속도에 성주와 연수가 맞춰 주고 있었음을 깨달은 비영의 말이었다.

“헛소리 하지 말고 부지런히 따라붙어. 너는 내 후계자다.”

“하지만···.”

“하지만 같은 소리 할 시간에 이 악물고 따라붙어요.”

칼같이 비영의 말을 끊어내며 비영을 재촉하는 연수였다.

비영은 입술을 잠시 달싹이다가 이내 포기하고 다물었다.

성주와 연수는 절대 자신을 버리고 갈 성격이 되지 못했다.

한참을 길도 나지 않은 숲을 통과하는데 몇십 장 뒤로 폭죽이 하늘을 수놓으며 펑펑 소리를 냈다.

“이상합니다. 추적의 속도가 너무 빨라요!”

정파의 추격을 받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던 연수의 말에 성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 안의 내기를 휘돌렸다.

성주의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자 연수와 비영도 성주를 따라 몸 밖으로 열을 내뿜었다.

“추종향 생각을 못 하다니 정말 나도 다 됐나 보군.”

성주의 자조 어린 말에 비영과 연수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일각을 채 이동하지 못해 일행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암행복을 입은 무인들.

-멈추지 않고 돌파한다! 내 뒤로 바짝 붙어.

성주의 전성에 연수와 비영은 성주의 등 뒤로 바짝 붙으며 내기를 더 끌어 올려 대비했다.

달리는 속도 그대로 성주의 도가 뽑혀 나오자 성주의 앞으로 무시무시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앞을 막은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서 폭죽을 꺼내 하늘 위로 쏘아 보냈다.

붉은 불꽃이 하늘 위로 솟아올라 터지며 저녁 하늘을 수놓는 순간 성주의 도강이 앞을 막은 무인들을 향해 난사되었다.

-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도강.

하지만 일행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먼지구름 속에서 멀쩡하다 못해 강렬한 기세가 뚫고 나오며 일행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는 일행.

야행복을 입고 복면을 뒤집어쓴 무인 중 유난히 강렬한 기세를 내뿜는 무인에게 성주와 연수의 시선이 쏠렸다.

눈만 내놓은 복면 사이로 보이는 눈매는 어딘지 익숙한 인상을 떠올리게 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옥현인! 무림맹의 맹주라는 네가 이런 짓을 하다니···.”

성주의 말에 앞으로 나서며 복면을 벗는 무인의 얼굴이 드러나자 연수는 죽음의 각오를 다지며 두 손에 쥔 단도에 힘을 주었다.

복면 밖으로 드러나는 옥현인의 젊은 얼굴.

정사 대회에서 보았던 훈훈하고 인자한 웃음을 싹 지운 그의 얼굴은 사뭇 교활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런 짓이라니. 다 중원 무림을 위한 일이니. 잔말 말고 곱게 죽거라.”

“크크크. 뭐 살 만큼 살았다. 오늘 간들 좀 더 살다 간들 뭐가 그리 다를까? 하지만 곱게 죽어줄 수는 없지.”

화르륵

성주의 진신 기세가 일어나자 마치 성주의 주위로 큰불이 난 듯 뜨거운 기세가 일렁이며 퍼져 나갔다.

하지만 맹주가 무심하게 검을 중단 앞으로 뻗자 성주의 기세가 갈라지며 맹주의 일행을 피해서 지나갔다.

성주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맹주를 노려보았다.

“평생을 궁금했었지. 비슷한 시기에 입신경에 오른 너와 나. 평생을 사도에서 구르며 경쟁의식을 버리지 못했지. 과연 누가 더 위일까?”

“무슨 상관인가? 설령 네가 나보다 고수인들 어차피 오늘 여기서 죽을 것인데.”

맹주의 말에 맹주의 뒤로 서 있던 시커먼 야행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무인 열넷이 세 개의 진을 짜며 성주의 일행을 노려보았다.

그 진을 노려보며 기세를 올리는데 성주의 전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미안하다. 나로 인해 이리되었다.

비영은 강렬한 눈매로 고개를 저으며 성주를 바라봤고, 연수는 바로 전성으로 답했다.

-어차피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무인의 삶입니다.

-적영대장. 아니, 연수야. 네게 미안한 부탁을 해야겠구나.

성주의 말에 연수는 피식 웃었다.

-여기가 제 무덤입니다. 이미 정했어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길동무합시다.

성주의 입매가 비틀리며 유쾌한 호선을 그렸다.

-비영. 너에게는 성을 지키고 후일을 도모할 책임이 있다. 철목가와 화령가가 도움을 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연수한테 와는 다르게 삶을 명하는 성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으려는 비영.

-나와 적영대장이 무슨 수를 쓰든 길을 열 것이다. 살아야 한다. 마지막 명령이다!

처음으로 비영은 성주가 원망스러웠다.

연수에게 말한 것처럼 죽으라 명령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열 번이든 천 번이든 한목숨 버릴 준비는 되어있었다. 하지만 성주는 명령이란 이름으로 삶을 강요했다.

자신과 적영대장을 버리고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라 명령했다.

동료의 목숨을 발판삼아 적에게 등을 돌리고 비겁하게 도망가라는 그 명령을 내린 성주가 너무나 원망스러운 비영이었다.

그런 비영의 심정을 안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연수.

그런 연수의 얼굴을 바라보니 너무도 밝게 웃으며 전성을 보내는 연수.

-제 일행들 잘 부탁드립니다. 도화는···. 부디 망노의 손에서 지켜주세요.

비영은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도 여기서 명예롭게 죽고 싶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떼를 쓸 때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비영.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성주와 연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콰쾅!

야행복을 입은 무리의 한가운데에 나타나며 강기를 난사하는 성주와 세 무리의 진을 펼치는 무인들을 고루 암습하며 시선을 끄는 연수.

비영은 눈을 꼭 감고 몸을 돌리며 달렸다.

“절대 살아남는 놈이 없어야 한다!”

맹주의 외침에 연수를 지나치며 비영을 붙잡으려는 무인들.

-따따따따따따따따따땅!

하지만 무인들은 연수가 뿌린 독침을 막느라 비영을 뒤쫓지 못하고 발을 붙잡혀 버렸다.

“비겁한!”

한 무인이 무릎에 박힌 독침을 뽑아내고는 내력으로 독기를 몰아내며 외쳤다.

무의미한 논쟁 따위 할 생각이 없던 연수는 곧바로 은신하며 무인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몇몇 무인들이 비영이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리려 했지만 번번이 나타나 매서운 암습을 가하는 연수에게 발목을 잡혀 버렸다.

비영을 추적하려던 무인들은 이내 추적을 포기하고 먼저 연수를 잡기로 했는지 세 진을 이뤄 연수를 삼각대형으로 둘러쌌다.

정면으로는 원진이 양쪽 후면은 열진을 짠 무인들이 등을 노리며 연수를 압박했다.

‘젠장!’

연수는 자신을 상대하는 고수들이 만만치 않음에 절로 욕을 삼켰다.

독침에 당한 두 무인마저 별반 어려움 없이 독기를 누르며 진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절정고수의 경지가 틀림없었다.

‘하긴 맹주가 직접 끌고 온 놈들이 만만할 리가 없지.’

자신을 포위한 무인들에게 집중하며 내기를 모조리 끌어올리자 연수를 중심으로 진득한 살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왔다.

“갈! 사람의 살기가 아니구나! 이 마두놈!”

원진을 이룬 무인이 일갈하며 연수에게 달려들자 원진이 교묘히 회전하여 연수에게 차륜을 걸어왔다.

피하지 않고 강기를 뽑아내며 맞서는 연수.

-깡! 까까깡!

처음 연수의 강기를 겨우 막아낸 무인이 뒤로 빠지자 원진이 반대로 회전하며 뒤로 빠진 무인을 보호하고 세 군데서 공격이 들어왔다.

날카로운 공격을 쳐 내자 또다시 회전하며 연속적으로 검을 뻗어 오는 무인들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도 두 진이 연수를 덮치며 포위해왔다.

‘회련쾌참격!’

빠르게 회전하며 잔상을 남기고 회전하는 연수의 팔.

그와 동시에 연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뿌려지는 날카로운 강기들.

“수!”

원진속 무인 하나가 외치자 세 진이 뒤로 물러서며 난사되는 한 자쯤 되는 강기들을 침착하게 막아냈다.

모든 강기를 큰 어려움 없이 막아내고는 가운데에 있던 연수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무인들의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신형을 숨기고 사라져 버린 연수.

“림!”

원진의 무인에게서 또다시 외침이 튀어나오자 세 진이 하나로 합쳐지며 좀 더 큰 원진으로 바뀌었다.

하나의 진으로 합쳐지자 연수와 원진 속 무리를 이끄는 무인의 눈썹이 씰룩였다.

이 경지에 오르고 성주를 제외한 인물에게 은신을 들킨 것은 처음인 연수는 빠르게 신형을 이동시키며 강기와 독침을 동시에 흩뿌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모두 막아내는 무인들이었다.

무인들이 진세를 합쳐 강기를 막아내며 그 안의 독침을 쳐내는 사이, 다시금 은신하려던 연수는 고개를 저으며 이를 악물고 또 한 무더기의 강기를 뿌리며 동시에 그들을 향해 지쳐 들어갔다.

“해!”

외침과 동시에 산개하여 피하는 무인들 그중 한 무인이 연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깡! 까깡! 스슷

푸쉭!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갈라져 허물어지는 무인 하나. 하지만 연수의 어깨 위로도 피가 튀었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열넷의 무인 중 겨우 하나를 잡는데 피를 보아야 할 정도로 상대는 만만치가 않았다.

적어도 비영 정도의 신검합일을 이룬 무인이 세 명은 넘는 것 같았다.

‘이런 고수들을 언제 키워 숨겨 놓은 거지?’

신검합일의 고수 하나가 무당제일검이라며 추켜세워질 정도로 신검합일이라는 경지는 높은 경지였다.

그런데 하나도 아닌 셋씩이나 이런 주요고수들을 몰래 숨겨 놓았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위선자 새끼들이!”

흥분한 연수는 아직 진을 완전히 채비하지 못한 무인들에게 달려들었다.

-깡! 까끄그그극

둘, 셋씩 모여서 검강이 맺힌 연수의 단도를 막아내는 무인들.

그 사이 진을 결성하며 사방에서 검을 뻗어 오는 무인들.

연수는 미묘한 흐름을 느끼며 그 흐름에 몸을 맡겨 아슬아슬하게 연격들을 피해내며 작은 틈을 비틀어 벌리듯 단도를 찔러 넣었다.

어느새 둘러싸여 날아오는 여덟 개의 검을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피해내는 연수.

그런 연수의 왼쪽 팔뚝과 오른쪽 종아리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야행복을 입은 세 고수는 허공으로 몸을 띄우며 휘릭 몸을 뒤집고는 연수에게로 검을 뻗어내며 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막 좁은 바닥으로 등을 대며 세 개의 검을 피해낸 연수의 가슴으로 여섯 개의 검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세 개의 검은 특히나 그 기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떨어져 내리는 세 무인의 검 끝에 희미한 빛이 맺히며 어설픈 강기가 형성되어 연수의 코앞까지 떨어지자 연수의 두 팔이 교차하며 역수로 쥔 두 개의 단도에 붉은 강기가 튀어나와 여섯 개의 검을 막아냈다.

-쾅!

사방으로 경기가 날아들며 연수를 합격하던 무인들이 흠칫 흔들렸다.

-까까까깡!

연수를 찍어누르던 무인들이 뒤로 나자빠지며 연수의 신형이

빠르게 회전하여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연수의 팔뚝에서 흐른 핏방울이 회전하며 사방으로 튀었고, 연수의 단도에 요혈을 당한 몇몇 무인들은 혈색이 창백해지며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열···.’

신형을 허공에서 뒤집으며 다시금 무인들에게 떨어져 내리는 연수는 속으로 남은 무인의 수를 세며 눈매를 좁혔다.

그 순간 성주의 다급한 전성이 울렸다.

-피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맹주의 검에서 공간을 베는 듯한 강기 하나가 연수를 향해 빠르게 뻗어져 나오고 있었다.

-꽝!

단도를 교차해 강기를 막은 연수의 신형이 빠르게 날아가며 커다란 거목에 처박혔다.

우드드득 소리를 내며 우는 듯 묵직한 소리를 내는 거목.

연수의 신형이 주르륵 거목에서 미끄러져 내리자 연수가 처박힌 곳이 움푹 꺼져있었다.

휘청거리며 자세를 잡는 연수의 입매로 한줄기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런 연수에게 달려드는 열한 명의 무인들.

잠시 긴 숨을 몰아쉰 연수가 신형을 앞으로 기울이며 빠르게 회전시켜 앞으로 쏘아졌다.

마치 앞으로 쏠려 달려나가는 팽이 같은 연수의 신형. 그의 단도에서 붉은 검강이 뻗어 나오자 마주 달려오던 무인들이 연수를 향해 검기와 장력을 쏟아부었다.

-스아아아.

기이한 소리와 함께 모든 장력과 검기를 갈라 소멸시킨 연수의 신형이 원진의 중심에서 모든 무인을 지휘하는 무인에게 쏘아졌다.

“까까까깡! 푸슉!

무인들을 지나친 연수의 양 옆구리가 쩍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무심하게 혈을 두드려 지혈하고는 몸을 돌리는 연수.

그런 연수의 시야에 복면이 세로로 갈라지며 벗겨지는 복면인의 맨얼굴이 들어왔다.

제갈신이.

오대세가 한 축의 가주이자 현 무림맹의 총 군사인 거인인 얼굴이 반으로 쪼개지며 숨을 거뒀다.

핏물을 뿜어내며 얼굴이 반으로 쪼개져 양쪽으로 늘어지는 모습은 너무 괴기하고 흉측하여 보고 있던 무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허물어져 죽은 제갈신이의 시체를 바라보던 무인들의 시선이 연수에게 모이기 무섭게 앞으로 다시 달려나가며 단도를 휘두르려는 연수.

그때 등 뒤로 날아오는 묵직한 소리에 슬쩍 뒤를 보니 성주의 신형이 처박히듯 날아오고 있었다. 얼른 단도를 숨기며 성주의 등을 부드럽게 받아내자 안색이 창백해진 성주는 피를 토하며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크크크 천하에 무림맹주 옥현인이! 독이라고!”

어깨부터 가슴이 피로 물들어있는 옥현인은 신형을 비틀거리며 다가와 입을 열었다.

“어쩌겠는가? 자네가 나보다 한 수 위인걸.”

“이, 내가···. 독에 죽는다?”

“무인의 삶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인상을 굳히고 옥현인을 노려보며 성주의 등에 짚은 손으로 내기를 불어넣어 독기를 누르는 연수.

“이형합독···.”

연수의 낮은 중얼거림에 옥현인이 혀를 찼다.

“쯔쯧. 아까운 인물이 갔구나. 네가 죽인 저자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주루에 모든 술에 주리분을 넣어놓고 화진분을 이용해 중독시키는.”

이형합독.

하나하나는 전혀 무해 한 두 성분을 합쳐 중독시키는 교활한 방법으로 연수가 간혹 쓰는 이독합살의 전 단계였다.

‘주리분과 화진분이라···.’

연수는 눈매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맹주!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성주님을 죽이려는 이유가 뭐요? 어차피 죽을 거 이유나 알고 갑시다.”

맹주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뻔하지 않으냐? 그 이유는···. 염라대왕에게 묻거라!”

말을 끌며 갑자기 달려드는 맹주.

연수는 밀어낸 독기를 압박하며 성주의 운문혈을 단도로 찌르고는 앞으로 나서서 강기를 쏟아냈다.

성주의 운문혈로 검은 핏줄기가 뻗어 나오며 대부분의 독기가 뽑혀 나왔다.

달려들던 맹주는 연수의 강기를 가볍게 막아내고는 뒤로 한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이놈! 만사천독전을 어찌 아느냐?”

“내가 물을 말이네. 댁은 어찌 알아? 무당은 뒷구멍으로 별 더러운 짓을 다 하나 보네.”

연수의 도발에 맹주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싸구려 도발로 이 상황을 반전 시킬 수 있겠느냐?”

“도발은 해서 뭐 한다고? 어차피 죽을 목숨 할 말은 다 하고 가야 억울하지나 않지. 솔직히 무당 따위 소림의 뒷구멍 빨기 바쁘던 놈들의 모임 아니던가?”

싸늘하게 웃던 맹주의 낯빛에 웃음이 지워졌다.

예의 그 교활한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자 더 싸늘하고 차갑게 보였다.

“그 세 치 혀 꼭 뽑아주마.”

씹어 뱉듯 말하고 천천히 다가오는 맹주.

연수는 빙글 웃으며 단검을 교차해 자세를 낮췄다.

연수의 두 단검에서 붉은 검강이 뻗어 나오자 비웃음을 짓는 맹주의 검에서 세 자는 족히 넘는 맑은 하얀 검강이 뻗어 나왔다.

반투명한 그의 검강을 보는 연수의 머릿속으로 전성이 울렸다.

-지금!

순간적으로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는 연수. 그런 연수의 잔상을 가르며 성주의 일도가 맹주에게 날아들었다.

-쾅!

굉음과 함께 날아드는 경기. 그 사이로 연수의 신형이 당황한 무인들 사이에서 솟아났다.

연수는 독침과 함께 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무인들은 또다시 진을 이루며 연수에게 맞서 왔다.

제법 피를 많이 흘리고 단전의 가득하던 내력도 고갈된 연수는 처음과 다르게 둔해졌지만 진을 이루고 연수를 상대하는 무인들은 여전히 안정된 진세로 연수를 압박했다.

시간이 갈수록 연수의 몸에 검상이 늘어갔다.

성주의 싸움 역시 썩 잘 풀리지 않고 있었다.

해독한다고 했지만, 내상이 꽤 깊었고, 무엇보다 맹주는 벌써 몇 개의 영약을 먹었지만 성주는 겨우 하나의 영약으로 버티고 있었다.

대정혼옥구환을 먹었음에도 내상이 깊어 요상을 하지 않고는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맹주의 맑은 검기와 성주의 타오르듯 이글거리는 검강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

-꽈앙!

두 사람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거센 바람과 경기들.

그 순간에 맹주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바늘.

-깡!

도를 비틀어 막아내는 성주.

“두 번 당할 것 같은가?”

말을 마치고 도를 휘두르려는 성주가 인상을 굳히며 뒤로 물러섰다.

“당했군. 두 번.”

맹주의 말에 성주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까지 이렇게···. 너 같은 놈을 내 평생의 호적수라 생각하고 살았다니···.”

-깡! 퍼펑!

맹주의 일장에 뒤로 날아가 처박히는 성주.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키는 성주의 오른팔이 사라졌다.

“너희 사파 놈들도 잘 하는 암습이 아니던가? 정파는 하면 안 된다고 누가 그러던가?”

성주는 허무한 표정으로 사라진 오른팔이 있던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하···.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성주.

점점 그의 웃음에 강맹한 내기가 담기기 시작하자, 연수를 상대하던 무인들은 뒤로 훌쩍 물러서며 귀를 막았다.

연수는 팔을 잃은 성주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순간 성주의 웃음이 끊기더니 뻗어진 왼손으로 잘려나간 오른손에 꽉 쥐어진 도가 빨려 들어왔다.

성주에게서 폭발적인 기세가 터져 나오자 맹주는 멀찍이 물러서며 따라붙는 성주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연수는 내기를 아끼지 않고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성주의 머릿속에 무인들을 향해 달려나가는 연수의 전성이 울렸다.

-그간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마지막을 함께해 주어서 고맙다. 못다 한 이야기는 저승 가는 길에서 나누자.

둘의 전성이 끝이 나자 성주의 기세가 한 번 더 폭발하며 맹주에게 따라붙었고 둘의 병장기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며 뒤섞이기 시작했다.

이미 박살 난 숲이 점차 허허로운 공터로 바뀔 무렵 연수의 단도 역시 방어를 도외시하고 무인들의 요혈로 날아들고 있었다.

그때 맹주의 외침이 울렸다.

“한동안 피하거라! 어울려 싸우면 안 돼!”

“쳇!”

방진을 단단히 하며 연수를 피하는 무인들과 어떻게든 그들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연수.

-솨아아아

기이한 소리와 함께 성주의 기세가 사라졌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원을 폭발시켜 사용하던 성주의 진원진기가 떨어지자 맹주의 검에 성주가 쓰러졌으리라.

전 무림에 한 획을 긋고 사황성을 만들었던 큰 별이 졌다.

“다 뒈져라!”

발악하듯 진원을 폭발시키며 강기를 뿌리는 연수.

강기를 뿌림과 동시에 신형을 늘어트리며 무인들에게 달려드는데 그런 연수의 앞으로 흐릿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퍽!

“허어어어···.”

검상을 입어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어도 신음을 흘리지 않던 연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림맹주 옥현인의 일 권이 정확하게 단전에 박히며 그대로 단전이 깨져 버린 연수는 몸 안을 충만히 채워 주던 내기가 흩어짐을 느끼며 허탈한 감각에 절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패성신살? 흥! 그 알량한 명성에 얼마나 많은 정파인들의 목숨과 명예가 날아갔는지 아느냐?”

허망한 눈으로 맹주를 올려다보는 연수.

“죽여라.”

“곱게 죽을 생각이었더냐?”

싸늘한 비웃음과 함께 맹주의 검이 휘둘러지자 마치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을 받는 연수였다.

-푸슉!

소리와 함께 잘려나가는 근맥.

잘린 팔다리의 근맥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이미 출혈이 적잖은 연수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죽여라.”

한결같은 연수의 말에 복면한 무인이 나서며 검을 휘둘렀다.

두 눈을 감는 연수.

‘후회는 없는 삶이었다.’

-깡!

복면인의 검을 걷어내는 맹주.

의문의 눈길을 받은 맹주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죽을 놈. 이대로 기어 다니며 천천히 죽도록 놔두지. 너에게는 편한 죽음마저 사치다. 퉤!”

연수의 머리에 침을 뱉고 돌아서는 맹주.

그런 맹주를 따라 연수에게 침을 뱉고는 시신을 수습하며 떠나는 무인들.

그런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연수가 쓰러졌다.

쓰러진 연수의 시야에 목과 몸이 분리된 성주의 시신이 들어왔다.

“가, 같이 가진 못할 거 같습니다···.”

내상과 출혈 깨어진 단전, 깊게 끊긴 팔다리와 허리의 근맥.

죽음을 기다리는 연수는 문득 바닥에 눌려 가슴에 느껴지는 전극공합에 생각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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