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도패건은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마주친 연수의 눈에서 연수의 심중을 읽을 수 있었다.
얼핏 지루한 듯 무관심한 저 눈의 뒤로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은 하오문 따위를 고민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상관이 없는 거군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당신에게는 큰 감흥이 없는 것 같소.”
“음···. 네가 내 제의를 거절하면 사패련과 함께 지워버리면 그만이야. 물론 네가 사황성의 편으로 돌아서 준다면 제일 좋겠지. 하지만 목매며 부탁을 할 생각은 없어. 나는 네게 좋은 기회를 주는 거야. 살 기회. 하오문이 망하지 않을 기회를.”
너무나 오만한 그의 말에 도패건은 입을 벌리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시, 십만의 목숨입니다.”
“십만이든 백만이든 상관없대도 그러네. 물론 내가 사람을 못 죽여 안달 난 미친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 약해서 죽여야 할 놈들을 살려주는 바보는 아니야.”
“시, 시간을···.”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 내가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것 같아도 나름 바빠. 해야 할 일도 많고. 게다가 네가 데려온 무인들···. 제법 대단한 전력이잖아? 솔직히 하오문에 이만한 고수들이 이렇게나 많을지는 생각도 못 했다고. 싸울 거면 밝을 때 족치고 싶어. 원한의 뿌리는 확실히 뽑아 놓는 게 좋으니까.”
절정고수만 삼십여 명이었다. 지난 세월 피땀을 흘려 키워놓은 하오문의 최정예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류의 고수 백 명 나머지 이류고수 이백 명을 박박 긁어 데려왔는데, 눈앞에 남자는 그들과 싸움을 마치 가벼운 운동이라도 하는 듯 말하고 있었다.
‘입신경. 절대의 경지라···.’
지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수의 눈빛이 점차 부담스러워지던 도패건의 등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모인 하오문의 전력은 팔파일방의 명문이라 해도 단일 문파에서는 무시하기 힘든 전력이었다. 그런 전력을 상대로 저 지루한 표정이라니.
“하아. 믿겠습니다. 당신의 말 패신살성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겠습니다.”
“그 말은?”
“사황성을 지원하죠. 다만! 만에 하나 십만에 하나. 당신이 진정 마교와 연이 닿아 있다면···.”
“네 마음대로 해. 배신하던 등에 칼을 꽂던 신경 안 써.”
“좋습니다. 그리고 사황성을 지원한다 하여 하오문이 사황성의 산하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것 또한 네 마음이지.”
“그럼 저희 하오문에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간단해. 사패련과 무림맹의 눈을 빼앗고 싶었을 뿐이니까. 아무리 나라도 맹주가 온갖 고수들을 데려오면 혼자서 어쩔 도리가 있겠어?”
“그럼 앞으로 뭘 하려고 그러십니까?”
“여기는 사천이잖아. 사천에 똬리를 틀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어?”
“!! 설마···.”
“사파인들에게 사천은 참 계륵 같은 곳이었지. 차지만 한다면 강북으로 뻗어 나가 중원 전체를 아우를 수 있지만 사천에는 쟁쟁한 정파가 셋이나 있으니. 기껏해야 사천에는 군소방파와 흑도 무리가 사파의 전부였어. 이 사천을 빼앗아볼까 해.”
“모든 정파인들이 달려올 겁니다.”
“글쎄.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아서 말이야. 좀 크게 판을 벌여 보려 한다.”
“사패련을 뒤에 두고 앞으로 적을 만든단 말입니까?”
“같은 편이 돼서 하는 말인데. 사패련 따위가 내 적이 된다고 생각해? 사황성이 열세인 상태에서도 정파와 전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성주라는 절대의 고수가 있었기 때문이야. 성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화산과 남궁세가를 지웠지. 그게 절대 고수의 힘이야. 겨우 망노 따위가 련주로 있는 사패련 따위 사황성과 내가 힘을 합치는 순간 지워버릴 수 있어.”
“그렇다 해도, 또다시 정사 대전이 일어날 뿐입니다.”
“상관없어. 그때의 휴전은 맹주의 암수였을 뿐. 사황성과 정파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적어도 맹주의 모가지를 딸 때까지는.”
“무, 무모합니다.”
“글쎄. 그럴까?”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연수를 보는 도패건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소한 일이 아니다. 중원 무림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런 태도라니.
도패건은 어쩌면 자신이 선택한 자가 희대의 미친놈이 아닐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말을 사실로 상정해 놓으면 맞지 않았던 조각이 딱 맞아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얼마든지.”
“맹주는···. 그는 마교의 주구입니까?”
“주구라···. 한낱 개새끼치고는 제법 덩치가 있지?”
“농담이 아닙니다. 정말 그는 마교와 결탁했습니까?”
“그래. 그가 어떤 조건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마교와 결탁한 것이 맞아. 아마도 비검대라는 맹주의 직속조직은 상당수가 마교인 일걸?”
“하아. 오늘 너무 여러 번 놀라 이제는 놀랄 힘도 없군요.”
“이제 해 줘야 할 일을 일러주지. 다른 것 없어 세 가지만 하면 돼. 사패련과 무림맹에 일절 정보를 차단한다. 사황성을 찾고 사패련을 예의 주시한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곧바로 내게 알려준다.”
“그뿐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
“그거면 충분해. 걱정하지 마. 고수를 지원해 달란 소리는 안 할 테니까.”
“...”
잠시 도패건을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연수.
“그럼 또 보자고.”
“예.”
유유히 연성루 밖으로 걸어나가더니 신형을 감춰버리는 연수.
그런 연수가 사라진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패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군.”
말을 마친 도패건의 신형 또한 땅으로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혈개문이라는 붉은 글자의 현판이 걸린 장원의 커다란 앞마당에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이한 초식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갑자기 솟아나는 연수의 신형.
“음, 좋아 좋아. 아주 제대로 헛짓을 하고 있어.”
연수의 목소리에 그를 발견한 몇몇 무인들이 달려와 연수를 맞았다.
덩치가 산만 한 전 백웅파의 두목인 백웅산은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민첩하게 달려와 연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그 옆으로 화련파의 전 두목 수화연 역시 같은 자세로 꿇어앉았고, 그 외에도 몇몇 무인들이 달려와 부복했다.
“저, 저희가 뭘 잘못하고 있습니까?”
“하아, 어떻게 내가 가르쳐 준 권법이 저런 모양이 됐냐?”
“예? 그게···.”
말을 잇지 못하는 무인들.
연수는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혈개문에 들어온 흑도인들에게 가르친 권법은 나름대로 상승의 무리를 담아 만들어 낸 무공이었다.
형은 우각뭐라하는 그 권의 형을 빌어 초식을 바꿔 종남의 상승 무리를 섞어 놓아, 제대로만 익힌다면 얼마든지 상승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는 나름대로 회심의 무공이었는데···. 분명 그랬을 진데, 수련하는 모습을 보니 전에 흑우방의 사내들이 수련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가 않았다.
“아무리 초식의 형이 비슷해도 그렇지. 말했잖아. 이 권법은 직선적인 권로와 이어지는 연격으로 힘을 받아 내지르는 쾌 권이라고. 그런데···. 저렇게 딱딱 끊어지게 초식을 수련하면 어쩌자는 거야? 초식을 연결해 수련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어.”
“죄,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지. 니들 실력이 안 늘지 내 실력이 안 느나. 열심히 배워놔. 알려준 구결들은 다 외웠고?”
그래도 무공을 제법 익혔다는 수화연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거의 다 외웠습니다. 저희 애들은.”
“저, 저희 애들은 머리가 굳어서···.”
“하아, 그래. 뭐 머리가 굳었으면 어쩔 수 없지. 천천히 외워도 상관은 없는데 그거 나름 좋은 심법이니까 꼭 잘 익혀두라 해···. 됐다. 가봐.”
연수는 빠른 포기와 함께 무인들에게서 신경을 껐다.
그간 제법 많은 이들의 무공을 보아주었지만 이렇게나 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처음 겪어보았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모두 쓸만한 고수들로 키워 성에 이바지할 재목들로 키워볼 요량이었다.
그랬던 연수가 그들을 포기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 뒤채에서 따로 수련하는 흑개파 출신의 아직은 어린 거지들이 희망이었다.
겨우 스무 명밖엔 되지 않았지만, 나이도 어려 근골이 완전히 굳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자질이 달랐다.
열심히 하는 건 모두 똑같았지만 받아들이는 습득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지금도 분명 몇 번을 알려준 초식이었는데, 며칠 봐주지 않았더니 저리 전혀 다른 길로 새어 버리는데 마치 소귀에 경을 읽는 느낌이었다.
반면 아직 어린 거지들은 그럭저럭 흉내를 제법 내어 볼 때마다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이 제법 대견했다.
뒤채로 걸음을 옮기는 연수는 역시나 열심히 수련 중인 아이들을 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오셨습니까?”
-다녀오셨습니까?
“아아, 계속해.”
-옛!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아이들을 보니 방금 받았던 충격이 제법 가시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의 수련은 가만 지켜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안에서는 아이들 나름의 고민이 보였고, 또 그에 대한 해답 또한 보였다. 간혹 잘못된 길을 가려 할 때는 한, 두 마디의 조언만으로도 제 길을 찾아가니, 무인에게 무공을 가르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련을 끝낸 설개와 호개는 연수에게 달려와서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문주님.”
“말해.”
“저, 저희는 언제쯤 심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너희는···. 좀 나중에.”
호개는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어째서 저희에게만 심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희가 저 사람들에 비해 약하기 때문입니까?”
“아니.”
“그럼 왜···.”
“너희는 삼재심공이면 충분해.”
“하지만 저 사람들은···.”
“무공은 남과 비교를 하는 게 아니야. 자신의 경지를 높여가는 데에 신경을 기울여야지 어째서 남과 자신의 무를 비교부터 하고 그래?”
“...”
“일단 단전부터 만들어. 저들은 이미 저마다 작게나마 단전을 만들어 내기를 쌓은 자들. 나는 그들에게 적당한 심법을 던져 줬을 뿐이야. 너희는 너희의 길이 있는 거다. 삼재심법을 우습게 봐서는 안 돼. 나 또한 시작은 삼재 심법이었다.”
연수의 말에 그제야 설개와 호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희를 가르칠 사부를 만나기 전까지 쓸데없는 심법은 배울 필요 없어. 싫어도 그가 상승의 심법을 전수해 줄 것이야.”
“도대체 그분이 누구십니까? 언제나 돼야 뵐 수 있습니까?”
“아! 내가 말 안 했나?”
설게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하셨습니다만.”
“그랬어? 강호에는 혈개라는 별호로 제법 유명한 것 같던데···. 소개라고 내 막역한 친구야.”
두 눈을 부릅뜨며 입을 떡 벌리는 두 거지.
“혀, 혈개라면···.”
“개방의 배신자이자 무당의 공적···.”
“응. 왜 배신자라 싫으냐?”
고개를 저으며 호선을 그린 입을 여는 설개.
“그럴 리가요. 저희의 사부로서 그 자격이 충분합니다.”
“하하하. 그놈이 방금 그 얘기를 들어야 했는데. 하여간 물건들이구나.”
언제봐도 패기가 넘치는 두 거지였다.
막 이야기를 끝내며 발길을 돌리려는데 뒤채의 쪽방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아저씨!”
연수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뛰어오는 아이.
이제 다섯 살에서 여섯 살 정도 되었다는 아이는 젖먹이 시절 호개에게 발견된 버려진 아이였다. 설개와 호개가 젖동냥까지 다니며 키웠다는 어린 계집아이는 어린 두 거지가 흑도에 투신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했다.
연수에게 달려와 연수의 다리에 매달리는 계집아이.
팔과 다리로 연수의 다리를 꽉 조인 아이는 굳센 표정으로 놓아줄 의사가 없음을 표현했다.
연수는 그런 계집아이를 들어 안아 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호설이 깼어요?”
“웅! 아저씨 어디 갔었어? 오빠들이 놀아주지도 않고 호설이 심심했어!”
“이구 오빠들 나빴네. 이제 아저씨 왔으니까 호설이 아저씨랑 놀까?”
“웅!”
“그럼 우리 호설이 뭐 하고 놀까?”
“휘야휘야 할래! 휘야휘야!”
호설이의 신이 난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지은 연수는 그대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휘~ 야!”
덕창현 곳곳이 작게 보일 만큼 하늘로 솟구친 연수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며 호설에게 주변 구경을 시켜 주었다.
“또! 또 해줘!”
“그럴까?”
“웅!”
“휘~ 야!”
연수가 처음 호설을 품에 안고 무리를 이끌고 오는 두 거지를 보았을 때는 제법 놀랐었다.
자신도 거지 생활을 해 보아서 잘 알고 있다.
어린 거지들이 아이를 거둬 키운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저 어린 계집아이를 안고 들어오는 그들에게 사정을 들었을 때는 어린 두 거지가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두 거지의 이름을 따서 만든 호설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를 연수가 가까이하며 귀여워하자 처음에는 호개와 설개는 의심의 눈초리로 연수를 경계하기도 했었다.
호설이 네 살을 넘길 때부터 간혹 아이를 팔라는 제의를 해 오는 자들이 적지 않았기에 혹여 연수 또한 호설의 이쁘장한 외모에 못된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지 경계가 드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며칠 둘을 지켜보니 연수는 호설에게 못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호설이 놀라울 만큼 연수를 잘 따랐다.
평소에는 자신 둘을 빼고는 낯을 심하게 가리는 호설이었는데, 연수를 서운할 만큼 잘 따랐기에 다른 걱정은 되지 않았다.
“또! 또 해줘!”
“또? 날이 추워져서 안 돼. 호설이 감기 걸려. 봐봐 벌써 코랑 볼이 빨개졌네. 콧물도 나오고···. 흥해”
“크으응!”
연수가 손수건을 갖다 대주자 두 주먹을 꽉 쥐며 코를 푸는 호설.
“이제 호설이 뭐 하고 놀까?”
“움···. 그럼 휙휙하고 놀래.”
“에이. 추워서 안 돼요. 아니면 우리 호설이 당과 먹으러 갈까?”
“당과? 먹을래!”
“그럼 가자!”
“와아아! 아저씨 최고!”
연수가 호설이 나온 쪽방을 향해 손을 뻗자 아이의 외투가 빨려 들어왔다.
“그럼 우리 호설이 당과 먹으러 가야 하니까 외투 입자.”
“그거 답답한데···.”
“그래도 입어야 당과 먹지?”
“우웅.”
연수가 입혀주는 대로 앙증맞은 팔을 끼워 넣는 호설.
연수는 아이의 외투를 꼼꼼히 채워 주고는 호설을 목말 태우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개와 설개는 그런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초식의 수련이 끝나면 본격적인 체력 단련의 시간이었다.
“오늘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면 안 된다! 끝까지 버티고 그들보다 빨리 완주하는 거야!”
-옛!
체력 단련을 위해 단체로 모인 혈개문의 무인들이 가까운 산으로 구보를 가는 모습을 보며 연수와 호설은 시장으로 향하며 당과를 찾았다.
막 발견한 당과장수에게 다가가는데, 느껴지는 살기에 연수의 눈썹이 씰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