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다면···.”
진벽가주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며 현 정세와 힘의 균형을 잡을 방법이 수도 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떠들며 각종 생각을 토해내는 진벽가주.
연수는 그런 직벽가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먼저 세 무가를 찾아가시는 거로 시작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갔다가 여의치 않으면 봉문시킬 겁니다.”
“그, 그건···. 일단 가셔서 잘 설득해 보고 나서 추후에 따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일단 가 보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연수를 보며 진벽가주가 당황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단 말입니까?”
“같은 사천인데요. 뭘.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아닙니까?”
“그 전에 이 친구들 변장도 준비해 놔야 하고···. 또 할 일이 적지 않은데요.”
“남은 일은 진벽가주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빙글 웃으며 사라지는 연수.
진벽가주는 황당한 표정으로 연수가 사라진 공간을 멍하니 보고 있더니 황급히 모도산을 비롯한 무사들에게 연수와 같은 옷을 갈아입으라며 재촉했다.
멍하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 무인은 갑작스러운 재촉에 당황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덕창현과 그리 멀지 않은 감락현.
뒤로는 아미산을 두고 덕창과는 관도로 이어진 감락현에는 당문과 아미 청성이 연합을 이룬 세 정파의 연합전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혈개문이 있는 덕창과 제일 가까운 곳이 아미파였기에 그 앞에 감락에 전선을 유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감락의 호연장이라는 장원을 빌려 그곳에서 매일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세 정파의 수뇌들은 치열한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호연장의 담을 가볍게 넘는 연수.
호연장의 주변 장원 곳곳에는 세 정파의 핵심전력들이 진을 치고 있었음에도 연수는 담담하게 호연장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크지 않은 호연장의 전체에 기감을 펼치며 잠시 살펴본 연수는 많은 고수의 기척이 느껴지는 안채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장원 곳곳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너무나 당당히 장원을 활보하는 무인을 보며 고개만 갸웃거릴 뿐 전혀 제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무슨 정파인이 등에 시뻘건 색으로 살이라는 글을 새겨놓고 다니는지 특이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안채의 앞에는 열두 명의 무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그들의 앞으로 당당히 걸어오는 연수를 보며 제일 나이가 많은 당가의 무인이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혈개문에서 왔다고 안에 전해주시게.”
새파랗게 젊은 놈이 존대했더니 대뜸 하대해 대자 당기효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젊은 놈의 입에서 나온 혈개문이라는 단어에 잠시 머릿속이 마비되며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혀, 혈개문이라면···.”
“패신살성 고연수. 세 정파의 수장들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고 전해주게.”
순간 눈을 부릅뜨며 연수를 둘러싸는 열두 명의 무인들.
“아아, 싸우러 온 게 아니야. 대화하고자 찾아왔으니 일단 안에 전해주라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단신으로 제갈세가를 멸문시킨 사파의 고수이자 마교의 주구라는 놈이 찾아와, 대화를 하자 한들 그들의 경계심이 수그러들 리가 없었다.
열두 무인의 투기가 점점 강렬해지자 연수의 미간이 구겨졌다.
“거참···. 좋게 말하잖아. 거 윗대가리들 얼굴 좀 보자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풀려나오는 살기.
연수의 살기와 함께 뜨거운 기운이 열두 명의 무인들을 감싸자 전의가 확 꺾이며 인상을 구기는 무인들.
순간 주변을 휘감는 살기에 안채에서 회의하던 무인들의 인상이 싸늘하게 굳었다.
방문을 부술 듯 박차며 튀어나오는 무인들.
그 안에는 세 정파의 수장들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힘겨워하는 열두 명의 무인들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연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웬 놈이냐!!”
검을 뽑아 들며 맨발로 마루에서 바닥으로 날아내리는 아미파의 장문 진여덕.
그녀의 뒤로 청성파의 장문 우공과 당가의 가주 당일수 또한 버선발로 뛰어 내려섰다.
장내를 휘감은 살기는 보통 고수의 살기가 아니었다.
이토록 무겁고 진득한 기분 나쁜 살기는 평생을 살아오며 느껴본 적이 없던 세 고수는 자신들의 지위마저 잊고 연수를 향해 합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아 대화를 좀 하려고 찾아왔는데, 오해가 좀 생겼네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든 무인을 긴장하게 하던 살기가 사라졌다.
집중적으로 연수의 살기를 받던 열두 명의 무인들은 한숨과 함께 겨우 몸을 세우며 연수를 노려보았다.
짧은 순간 동안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그들은 수치심을 느끼며 연수를 향해 투기를 끌어올렸다.
세 정파의 수장들마저 체면을 잃고 버선발로 뛰어나올 정도의 살기였다. 열두 명의 무인들의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공은 살기를 지우고 뒷짐을 진 채 여유 가득한 연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구신데, 이리···. 무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이곳에 있는게요?”
지독한 살기라고 말을 꺼내려던 우공은 말을 한번 걸러서 뱉어냈다.
“고연수라 합니다. 여기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드릴 말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고연수라는 이름 석 자가 튀어나오자 기세를 끌어올리며 출수준비를 하는 세 무인. 그들의 반응을 보며 연수를 둘러싼 무인들과 이제 막 마당으로 나온 세 정파의 수뇌들 또한 기세를 끌어올렸다.
“저는 싸우고자 찾아온 게 아닙니다.”
아미파의 진여덕은 연수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찾아온 이상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역시나 그 성격이 소문과 다르지 않은 진여덕을 보며 연수의 입매가 뒤틀렸다.
“보내지 않으시면 어찌하려고요?”
연수의 새카만 눈과 진여덕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진여덕은 손에 쥔 검을 중단세로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신검합일을 이루고 언젠가 지고한 초절정의 경지를 이루어 무인의 완성이 머지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진여덕이었지만 입신경 고수의 벽은 과연 높고도 험했다.
우공은 연수의 기색이 정말 싸우고자 찾아온 것이 아닌 듯하여 보이자 재빨리 둘 사이로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다면 들어보는 게 순서겠지요. 그럼 일단 대화를 해 보죠.”
당일수 역시 눈앞에 튀어나온 패신살성의 이름에 굳이 손해 보는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우공의 의견에 동조했다.
“피를 보는 것은 모든 말을 듣고 나서 해도 좋겠지.”
두 사람이 이리 나오자 진여덕도 하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
“두 분 의견이 그러시다면.”
납검을 하는 순간까지 연수를 노려보던 진여덕은 무사들을 물리고 방으로 연수를 이끌었다.
물론 등을 돌린 채 방으로 들어서며 만발의 준비를 전음으로 명하는 세 무인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시비가 차를 내왔다.
당일수를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차를 마시는 연수.
그런 연수를 보는 당일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금 강호에 자신의 앞에서 이리 편안하게 차를 마시는 무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예까지 찾아온 겁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우리 사이에 할 말이 그리 많을 것 같진 않은데.”
우공의 점잖은 물음에 연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여러분이 무림맹을 탈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입니다.”
진여덕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그녀의 손바닥이 탁자를 내려쳤다.
-쾅!
“그렇다고 우리가 자네와 손을 잡을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설마요. 그랬다면 애초에 정사가 이리 피튀기는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겠지요.”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가!”
“일단 오해를 풀고 저희의 입장표명을 하려 합니다.”
당일수는 연수의 입에서 나오는 오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오해? 무슨 오해를 말하는 것인가? 자네가 마교와 연이 닿은 것 말인가? 아니면 사천을 도모하기 위하여 덕창에 자리를 잡은 것을 말하는 것인가?”
연수는 잠시 당일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마교와 연이 닿았다는 그 부분입니다.”
“하면 마교와는 생판 남이다?”
“남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적이지요. 마교와는 간접적이나마 은원을 쌓았으니까요?”
“은원?”
“이제부터 하는 말은 여러분이 믿든 믿지 않던 사실입니다. 그 판단은 여러분이 하시면 됩니다.”
거창하게 말하는 연수에게 세 무인은 집중했다. 과연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경계하면서도 귀가 기울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시 그런 세 무인을 둘러보고는 연수는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수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당일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노성을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거짓말을 하려면 적당히 해야지!”
연수는 말없이 차만 마셨다.
진여덕 또한 당일수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우리가 설령 무림맹을 이탈했다고 해서 그런 허무맹랑한 말에 흔들릴 것으로 생각되던가!”
하지만 청성의 우공만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열리는 우공의 입.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사천으로 온 거요?”
“제가 사천에 자리를 잡은 것은 숨어든 사황성과 연락을 트고 여러분의 문파와 가문을 봉문시켜 사천을 사황성의 영역으로 두기 위함이었습니다.”
“!!!”
너무나 노골적으로 그 계획을 풀어놓는 연수에 의해 세 무인은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차를 한 모금 더 들이킨 연수는 그런 무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딱히 여러분에게 거짓을 말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황성과 연락이 닿은 이상 그들과 전 성주님의 혈채를 받아내고 사황성을 다시 부흥시켜 사파를 일통하는 것. 그리고 맹주의 모가지를 자르는 것 외에는 그리 큰 관심도 없습니다.”
“지, 지금 그 말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인가? 그 말이 중원 무림을 일통하겠다는 것 아니냐 이 말일세!”
당일수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다른 정파에 대해 큰 은원 따위 없고, 무림일통따위 생각지도 않습니다. 다만 은원의 고리를 풀기 위해 움직일 뿐.”
“그렇다면 제갈세가의 일은 어찌 된 것이지?”
진여덕의 물음에 연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사패련과 함께 살야림을 움직여 제 사람을 해쳤기에, 그 혈채를 받은 것뿐입니다.”
우공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 치지요. 그런데 이제 와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저는 여전히 사천은 중요한 요충지이고 이 사천을 사황성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황성의 군사는 그리 생각지 않더군요. 이번 기회를 살려 정파에 무림맹주의 악행을 알리고 협의를 지키려는 문파들을 결속시켜 무림맹주의 폭정에 대항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황성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우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사파와 마찬가지로 정파를 둘로 쪼개겠다 그 말이오?”
“예.”
너무나 허심탄회하게 모든 걸 말해버리는 연수 탓에 세 무인들은 그 진위를 가릴 것도 없이 어이가 없었다.
“하! 그런 꿈이 이뤄질 것 같은가?”
“글쎄요. 어차피 모든 판단과 행동은 여러분의 몫이니까요. 저는 정파가 쪼개지든 어찌하든 사실 별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사천을 차지하고 여러분들의 문파를 봉문시켜 버리는 것이 더 편하니까요. 그리고 사패련의 노망난 늙은이의 모가지만 자를 수 있다면 뒤는 그때 가서 수습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리 쉽게 무너질 것 같이 우습게 보인다?”
진여덕이 살기를 뿜어내며 입을 열자 연수는 지루한 표정으로 답했다.
“여러분은 본진을 움직일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의 본진을 기습하면···.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아직 피지 못한 여러분들의 희망인 어린 제자들, 살려둘 생각은 없습니다만.”
“!!!”
연수의 말에 세 무인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패신살성의 말 그대로였다. 지금은 혈개문을 걱정하여 감락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만약 패신살성이 혼자서 자신들의 안방으로 들어온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미 홀로 제갈세가를 멸문시킨 위인이었다.
“협박하는 거냐!”
-챙!
진여덕은 검을 뽑으며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연수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협박을 한들 내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저는 협박 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저 행동으로 보여주는 걸 더 선호합니다. 다만 저희 군사가 시키니 일단은 그의 말에 따라 여러분과 대화를 하러 온 것뿐입니다.”
우공은 진여덕을 진정시켰다.
“진 사태. 일단은 진정하세요.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백 년 이어온 정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일. 후대에 두고두고 이번 사건에 대한 원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안은 그 사실관계를 철저히 따져 본 후에 결론을 내려야 할 일입니다.”
우공의 말대로였다.
정파의 역사상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정파인은 단연코 없었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닌 무림맹의 맹주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림맹을 이끌어가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우공은 진여덕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맹주의 말밖에는 들은 것이 없습니다. 죽은 성주의 말은 무엇하나 남지 않았어요. 그의 제자들과 귀형신살의 증언 역시 말뿐이었죠. 어떤 증거도 없었습니다. 지금 그때의 생존자인 이자의 말 또한 믿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태는 보통의 사안이 아닙니다.”
당일수는 우공의 말을 듣고는 눈매를 좁히며 연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리가 자네의 말을 믿어 준다면 우리는 자네의 우환을 하나 줄여주는 것인데.”
“뭐 그렇죠.”
연수는 당일수의 말에서 그가 뭔가를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