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당진원의 배웅을 받으며 당가의 정문을 나오는 일행.
“그럼 살펴 가시십시오.”
포권을 하는 당진원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를 받은 연수는 그를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당진원은 왠지 그리운 사람을 떠오르게 하는 연수의 등을 한동안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세가로 들어갔다.
천영은 연수를 보며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내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소림에 가 달라고 부탁받았다.
연수의 말에 천영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도화를 바라보던 연수의 전성이 적영대와 천화대의 머릿속에 울렸다.
-소림으로 간다.
“도화야. 숭산 구경을 갈까 하는데. 어때?”
“숭산이요?”
“응. 소림사도 들러 보고. 어떨까?”
“좋아요.”
옆에 꼭 붙어 밝게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도화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연수.
도화와 눈을 맞추며 천영에게 전성을 보내는 연수였다.
-근처 하오문을 찾아서 덕창에 소식을 보내. 소림에 들렀다 가겠다고. 그동안 여차하면 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으라 해.
-예.
스르륵 사라지는 천영.
연수와 도화는 맡겨놓았던 말과 마차를 찾으러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적영대와 천화대가 뒤따랐다.
마차와 말을 찾고 나자 어느새 천영이 일행 속에 섞여들었다.
-소식을 전했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
마차에 올라타고 이동을 시작하자 도화가 연수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왔다.
적영대의 무인들은 슬쩍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고, 연수는 도화의 손을 붙잡고는 눈을 감았다.
한동안 편안한 여행길이 계속되었다.
사천을 넘어 섬서에 들어서자 음식의 맛도 사람들의 말투도 조금씩 달라지며 사천을 벗어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섬서의 분위기는 사천보다 활발하고 좋은 편이었다.
사천의 경우는 최근 잦은 혈겁과 명문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으로 인해 많이 위축된 분위기였는데 그에 비해 섬서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섬서의 성도 서안을 향해 관도를 따라 이동을 하는 중 작은 마을에 들른 일행.
순간 앞서던 천화대의 무인들의 인상이 굳으며 긴장감이 맴돌았다.
연수는 마차 안에서 그런 일행의 긴장을 읽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야?”
“마을에…. 인기척이 전혀 없습니다.”
연수가 옆으로 나서며 앞의 마을을 바라보자 아직 대낮임에도 마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천영의 말대로 사람의 온기와 인기척이 도무지 느껴지질 않았다.
인상을 굳힌 연수와 일행들은 그런 마을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마을을 살펴보던 연수와 일행의 걸음이 멈췄다.
작은 마을이라지만 가구 수가 그리 적은 마을은 아니었다.
현이나 도시 마을보다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농경 마을일 뿐.
그런데 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일행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당연했다.
-천영.
연수의 전성과 동시에 사라지는 천영.
그의 뒤를 연수의 눈짓을 받은 모도산과 두 적영대의 무인들이 따라나섰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걱정스러운 도화의 목소리에 마차로 가서는 창문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 도화를 안심시키는 연수.
“무슨 일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려고. 조금 이상해서. 걱정하지 마.”
“이상한 일이 있어요?”
“마을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질 않아서.”
도화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앞에 마을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조용해 위화감이 느껴지는 마을이 음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을의 입구에서 천영과 적영대를 기다리는데 난감한 표정의 천영이 다가왔다.
“왜 그래?”
그의 표정이 너무도 딱딱하게 굳어있어 물어보자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도화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마을에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한데 아이가 한 명 홀로 남아 있습니다.”
아이라는 말에 연수의 눈썹이 씰룩였다.
"안내해"
천영 또한 혈개문에서 어린아이가 죽은 후 연수가 한동안 사라졌다 피를 뒤집어쓰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앞장서며 연수를 안내하는 천영의 마음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 마을에는 분명 자연스럽지 못한 길하지 않은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하필 남겨진 사람이 계집아이다 보니 난감했다.
도화 역시 아이라는 말을 듣고는 마차에서 내려 연수의 뒤를 다급하게 따랐다.
마을의 제일 구석에 있는 집으로 가자 적영대의 무인 셋이 어색하게 작은 집의 방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나와봐.”
물러서는 무인들을 지나치며 방안을 들여다보니 가는 숨을 몰아쉬며 힘없는 눈길로 연수를 올려다보는 대 여섯 살 나 보이는 계집아이.
입 주변이 말라 있었고, 몸은 비쩍 말라 있는 데 비해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부어 있었다.
게다가 혈색마저 노랗게 뜬 것이 상세가 좋지 않게 보였다.
“이 꼴을 보고 뭘 멍하니 서 있는 거야? 빨리 물을 떠 와!”
“옛.”
모도산은 서둘러 마을의 우물을 찾아 몸을 날렸다.
도화는 그런 계집아이를 보며 놀란 눈으로 방으로 들어서 아이를 안아 들었다.
“얘! 얘야! 괜찮니?”
도화의 품에서 힘겹게 시선을 돌려 도화를 바라보는 아이.
이미 시선을 돌리는 것이 힘들 정도로 아이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연수는 빠르게 방으로 들어서며 아이의 맥을 짚어보았다.
“어때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불안하게 연수를 바라보며 묻는 도화.
“오래도록 먹질 못했어. 그리고 이 아이….”
“뭔데요? 왜 그래요?”
연수의 시선은 아이의 마른 신체 중 더 도드라지게 앙상한 다리에 머물렀다.
“다리가 불편한 아이야. 아마도 걷질 못하는 것 같아. 아마 어떤 이유로 아이의 부모가 사라졌고, 그동안 방치된 것 같아.”
도화는 글썽이는 눈으로 자신의 품에서 힘겨운 숨을 이어가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작은 바가지에 물을 받아 온 모도산이 안으로 바가지를 내밀었다.
도화는 조심히 받아 아이의 입에 대어 주었지만 아이는 물을 삼킬 힘조차 없어 보였다.
‘이대로는 살리기 힘들어.’
맥이 너무나 미약했다. 이제 와 음식을 먹인다 해도 아이의 기력이 돌아오기 전에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무엇보다 황달이 심한 것으로 보아 아이의 지병 또한 악화된 거로 보였다.
순간 아이의 탁하고 힘없는 눈과 죽은 호설의 눈이 겹쳐 보였다.
이를 악문 연수는 도화에게서 아이를 받아 바닥에 조심스레 눕혀놓고 아이의 단전에 손을 올렸다.
자신의 단전 속 목의 기운을 최대한 끌어올려 아이의 단전으로 몰아넣으며 아이의 몸을 휘돌리는 연수.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목의 기운이 아이의 몸을 휘돌기를 반 시진 아이의 혈색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에게 물을 먹이고 부엌에 있던 곡식을 빻아 죽을 끓여 먹이는 도화.
하지만 아이는 좀처럼 제대로 먹질 못하고 있었다.
혈색은 제법 돌아왔지만 부은 얼굴과 앙상한 몸이 내기를 조금 불어넣는다고 건강하게 돌아오진 않았다.
“의원에게 데려 가야 한다.”
“다음 마을까지는 하루는 더 가야 합니다.”
“빨리 움직이지.”
일행은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연수는 기이하게 사람들이 사라진 마을을 돌아보며 애써 머릿속을 채우는 의문을 지웠다.
지금은 진상의 규명보다는 이 아이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다급했다.
일행은 다음 마을에 도착하여 다급하게 의원을 찾았다.
혜원서 라는 작은 의가를 찾아 들어가자 나이가 제법 많은 늙은 의원은 약초를 정리하다가 연수의 품에 안겨 오는 아이를 보고는 놀라서 뛰쳐나왔다.
아이를 한번 훑어보고는 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한 의원은 의방으로 안내하며 아이를 안에 눕혔다.
밖에 의원의 자식으로 보이는 중년인에게 소리치는 의원.
"기력을 복돋는 탕을 준비해!"
"예."
중년인은 노인의 말에 서둘러 탕약을 준비했다.
침을 꺼내든 의원은 아이의 작은 몸에 수십 개의 침을 꽂아 넣었다.
반 시진 가까이 시침을 마치자 의방 밖으로 어둑어둑한 어둠이 자리를 잡았다.
그제야 키가 작은 중년인은 탕약을 가지고 의방으로 들어왔다.
탕약을 내려놓으며 아이를 본 중년인의 인상이 굳었다.
“아버님, 이거…. 황달이 너무 심한데요?”
“알고 있다. 너는 가서 영기탕이나 다려와.”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다가 아이를 한번 돌아보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중년인의 뒤통수에 노인의 불호령이 떨어져 내렸다.
“환자를 앞에 두고 이놈이 재수 없게!”
“죄, 죄송해요.”
후다닥 사라지는 중년인.
“상세가 많이 안 좋습니까?”
연수의 물음에 노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럴 수밖엔 없었다.
성인이라면 몰라도 아이의 나이가 너무도 어렸다.
“혹시 무림인이요?”
천화대와 적영대의 무인들을 보고 물어오는 노인의 물음이었다.
“예.”
담담하게 대답하는 연수.
“아이에게 내기를 주입하셨소?”
“예. 병세가 심상치 않아 그리 했습니다.”
“얼마나 더 그래 줄 수 있소?”
“...”
말없이 잠시 아이와 도화를 번갈아 보는 연수.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노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지금은 어떤 상태입니까?”
“간이 너무 심하게 상했소.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체 간이 좋지 못하게 타고난 것 같소. 그런 상태에서 오래 굶으면서 병세가 악화되었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거요?”
“그게…. 저 밑에 작은 마을에 들렀는데, 이 아이만 남겨져 있고, 마을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연수의 말에 노인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
“기화인귀….”
“기화인귀? 그게 뭡니까? 이런 일이 자주 있었습니까?”
“아, 아니요!”
연수는 잠시 노인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전에도 있었습니까? 자세히 이야기 좀 해 주시죠.”
노인은 잠시 연수와 일행을 둘러 보고는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가끔 천양과 보계의 화전마을이나 작은 마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적이 있소. 백 가구가 못 되는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작은 마을의 사람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이…. 그런데 그런 일이 잦아지자 한참 소문이 돈 적이 있소. 사람을 증발시키는 백두의 귀신이 섬서에 존재한다고…. 당시 소문이 커지자 화산에서 내려온 도사들이 한동안 조사를 했고, 당시 자현군검이라는 도사님께서 기화인귀를 베었다며 앞으로는 걱정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이런 일이 또 반복되는 걸 보니 화산파가 망해서 기화인귀가 풀려난 것이 아닌가…. 당신들은 정파인이오?”
노인의 물음에 연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흠흠! 다 헛소문인 게지. 그런 요괴가 지금 같은 세상에 존재하기나 하겠소? 다 그 화산파의 도사가 우리 민초를 혹세무민한 것이지.”
노인은 연수의 일행이 사파의 인물들이라 하자 얼른 말을 바꾸며 화산파의 도사를 욕했다. 만약 정파인이 맞다 했다면 화산파를 멸망시킨 사파를 한바탕 욕했을 것이다.
그런 기색을 읽은 연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 자현군검이 분명 기화인귀를 베었다 했습니까?”
“그랬소. 당시 섬서의 정기를 해치는 기화인귀라는 요괴를 베었다며 화산에서 공표한 이후로는 그런 사건이 일절 일어나질 않았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연수는 고개를 흔들며 천영을 바라보았다.
-어떤 살겁의 흔적도 발견하질 못했습니다.
-정말 요괴라도 나타났다는 거야?
-그럴 리가요. 분명 비화가 있을 겁니다.
아이를 치료하는 틈틈이 아이의 몸에 목의 기운을 한껏 불어 넣어주며 아이의 치료를 도운 지 삼일.
아이는 제법 기력을 되찾아 몸을 일으키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얘야, 이름이 뭐니?”
“...”
열심히 수저를 놀리며 입에 밥을 가득 문 아이는 눈만 동그랗게 뜰 뿐 도무지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연수는 그런 아이를 살피고는 전성을 이용하여 아이의 뒤통수에서 소리를 내었다.
-얘야.
“!”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아이.
“귀머거리는 아닌데….”
다리를 쓸 수 없는 고아가 말까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살아갈 길이 없었다.
연수는 잠시 도화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아이, 거뒀으면 하는데. 혈개문이 입하나 는다고 휘청일 정도로 궁하지도 않고.”
“당연히 그래야죠. 아이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말을 찾아 갈 수 있을 거예요.”
다음 날이 되자 마지막으로 아이의 몸에 내기를 불어넣던 연수의 인상이 굳었다.
그간 내기를 불어 넣기만 하느라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마지막으로 여유를 가지고 아이의 몸 구석구석 내력을 실어 살피다 보니 기해혈이 심하게 막혀 있고 대장유과 관원유로는 아예 기맥이 끊어지며 기가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래서 걷질 못하는구나.’
하지만 연수로서도 무공도 익히지 않은 어린아이의 막힌 혈도와 끊어진 기맥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자칫 무리하게 혈을 뚫으려다 약한 아이의 혈이 그대로 망가져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목의 기운이 더 강했다면…. 아쉽구나.’
생기를 띄는 목의 기운이 조금 더 강했다면 아이의 기혈을 보호하며 치유를 시도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만 한 연수였다.
그때 정심한 수의 기운이 단전에서 일어나며 꿈틀거렸다.
그 순간 연수의 머릿속을 가득 차는 오행의 이치.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