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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71화 (171/202)

# 171화

시장으로 들어서는 미여의 표정이 순간 너무나 밝아졌다. 마침 장이 서는 날인지 많은 구경거리가 있었고, 평소에는 보지 못한 먹거리들이 미여의 눈을 사로잡았다.

-후화아아아.

입에 기름을 머금고 불을 내뱉는 사람들부터 차력을 보여주고 약을 파는 사람, 비무초객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

평소보다 더 많은 인파에 시장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아저씨! 저기, 저기!”

미여의 말에 연수의 시선이 미여의 손끝을 따라갔다.

연수의 시선에 들어오는 줄을 타는 재주꾼들.

삼 장이나 되는 장대에 줄을 연결해 놓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재주를 넘기도 하는 재주꾼의 외줄 타기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설개와 호개 또한 그런 재주꾼의 묘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

“경공에 대단히 자신감이 있나 보네.”

줄타기의 절정은 세 사람이 한 줄 위에서 묘기를 선보이는 것이었다.

보통 외줄은 혼자 타는 것도 힘들지만 둘이 동시에 타는 것은 몇십 배나 더 힘이 든다. 중심을 잡기 위에 몸의 균형을 맞출 때마다 외줄이 심하게 흔들리는데 둘이 줄을 타게 되면 상대의 흔들림 때문에 방해를 받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세 명이 외줄 위에서 아찔한 묘기를 선보이는 것은 대단하다 못해, 절로 환호를 불러오는 묘기였다.

“대단하네.”

결국, 연수의 입이 열렸다.

“태상문주님. 저들은 고수인가요?”

연수의 고개가 천천히 저어졌다.

“전혀. 어떤 내공을 익힌 흔적도 기세도 느껴지지 않아. 오로지 재주를 갈고닦은 재주꾼이다.”

“허! 그럼 오로지 기술만으로 저리 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러니 대단하지. 기예 꾼들의 묘기는 때론 무인의 무공만큼이나 신기에 가까울 때가 있다. 저 균형을 잡는 모습은 거의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것 같구나. 저들의 허리와 등을 잘 보아라.”

연수의 말에 설개와 호개는 외줄 위에서 현란한 묘기를 보이는 재주꾼들의 허리와 등을 살펴보고는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에도 파도가 치듯 허리와 등을 유려하게 움직이며 최소한의 흔들림으로 중심을 잡아가는 그들은 연수의 말대로 동물에 가까운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너희들에게는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무인으로서 영약이라는 기연에 큰 내력을 공으로 몸에 쌓는 것은 물론 욕심나는 일이지. 또한, 내력이 무인의 실력과 비례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내가의 공부란 단순히 내력의 양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내공만큼이나 외공 역시 중요한 거야. 그 두 공부가 적절한 균형을 이뤄 갈 때 비로소 고수의 경지가 열리는 것이다.”

연수의 말에 두 사람은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구경하고 미여의 손을 잡아끌며 시장의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데 연수의 입이 열렸다.

“우연이라···. 나 우연 싫어하는데.”

“예?”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와중에 연수의 혼잣말을 얼핏 들은 설개가 물어왔다.

잠시 미여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연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연수는 미여의 손을 꽉 잡으며 걷기 시작했다.

강천호라 개명한 사내는 덕창에 자리를 잡고 총 다섯 번 목표를 마주쳤다.

첫 번째 보았을 때는 준비가 덜 되어있어 손을 쓰지 않았다.

두 번째 보았을 때는 더 시간을 들이며 목표에 관해 연구하기 위해 손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을 더 보았다.

목표물은 거의 정인으로 보이는 여자와 어린 계집아이와 함께 시장을 돌아다녔다.

소문으로 보아 딸은 아닌 것 같지만, 저 계집아이는 목표물에게 굉장히 중요한 인물인 것이 틀림이 없었다.

덕창에서 인맥을 넓혀 가며 혈개문의 가솔들과도 면을 익히고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아마도 살야림이 망한 것은 저 목표물의 주변인들을 건드렸기 때문이 분명하다고 판단이 되었다.

특히나 호설이란 어린 계집의 죽음 후 저 목표물은 이성을 잃고 혈개문을 나섰다고 했으니.

이성을 한번 잃고 화가 난 무인이 그길로 살야림과 제갈세가를 멸문시켰으니 저 목표물이 아끼는 아이를 이용하면 분명 목표물의 심기를 뒤흔들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천살호는 사실 혼자서 하는 살행을 좋아했다.

합동작전보다는 혼자서 하나하나 계획을 짜고 전체적인 그림을 하나하나 완성하여 목표물의 마지막 숨을 끊음으로 그림을 완성할 때의 그 순간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으니.

해서 이 덕창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그는 많은 준비를 맞췄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이 그 큰 그림을 완성하는 날이 될 것이라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삼점안.

천살호가 기본적으로 익히고 있는 안법으로 눈동자를 어디로 향하게 하던 자신이 보고 싶은 곳을 보는 기술이었다.

살야림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안법이지만 기본이기에 쓸 곳이 많았다.

지금도 포목점의 정리해야 하는 물건들을 훑어보며 저 멀리 걸어오는 목표물의 일행을 집중해서 살필 수 있었다.

살행을 할 때는 함부로 목표물에게 시선을 주는 것은 금물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감각으로도 누군가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하물며 무인이고 중원 최고수의 자리를 다투는 입신경의 고수가 사람이 많은 시장이라 하여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여 지금도 삼전안으로 목표의 근처를 살필 뿐이었다.

‘목표와의 거리 열두 장. 앞으로 다섯 장.’

강천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무명을 받쳐놓는 여섯 치가 못 되는 얇고 긴 모양의 나무 들을 놓으며 무명을 정리했다.

그의 동작이 이제는 제법 포목점의 주인 태가 나고 있었다.

‘역시 당과를 사 먹는군.’

항상 저 아이는 시장에 오면 당과를 먹었다.

당과를 손에 쥐고 반대 손은 목표물의 손에 붙들린 아이를 살핀 강천호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경계를 하고 있군.’

평소와 조금 달랐다.

목표물은 시장에 들어오면 아이의 손을 저리 잡고 다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저리 꼭 손을 붙들고 있다.

‘역시 감이 남달라.’

상관은 없었다. 이미 계획은 완성되었고, 하늘이 도왔는지 오늘같이 사람이 많은 시끌벅적한 날에 목표물이 나타나 주었으니.

연수의 손에 붙들린 미여는 연수를 이끌듯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연수를 보챘다.

“아저씨 빨리! 볼 게 많단 말이야.”

“그럼 천천히 보면 되지?”

“안돼. 너무 늦으면 사부님한테 혼나.”

“그리 사부를 무서워하는 녀석이 어찌 땡땡이를 칠까?”

“그러니까 빨리 구경하고 가야지.”

미여의 말에 미소를 짓는 연수.

그와 동시에 설개와 호개의 머릿속에 울리는 전성

-살수다.

설개와 호개의 표정이 굳고 움직임이 멈칫하는 순간 일행의 양옆에서 일곱 명의 노점상인이 날아들었다.

-푸하악!

연수의 주변 삼 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힘없이 늘어지며 허물어지는 살수들.

순간 미여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 아저씨?”

“나쁜 사람들이다. 신경 쓰지 말아라.”

연수의 몸에서 한 줄기 바람이 일어난다고 느끼는 순간 달려들던 상인들이 바닥으로 허물어지자 미여는 고개를 가로 기울였다.

포목점의 주인은 주변의 다른 상인들과 같이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떨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의 가게 앞을 지나가는 순간.

-암기다.

-따따따땅!

하늘에서 쏟아지는 암기들.

대부분이 바늘과 표창들이었다.

하지만 모든 암기가 연수의 강기를 뚫을 수 없었다.

설개와 호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정신없이 쏟아지던 암기를 바라봤다.

-늦어. 미리 경고해 주는데도. 오감에 집중하고. 몸이 너무 굳었어. 긴장하는 건 좋지만 육체적인 긴장은 풀고.

두 사람은 연수의 전성에 어깨와 허리에 잔뜩 들어간 힘을 덜어내려 몸을 풀었다.

암기의 비가 그치자 주변 장내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연수에게서 멀어지려 발버둥을 쳤다.

평소 같으면 벌써 사람들이 모두 도망을 가고도 남았을 텐데 유독 사람이 많다 보니 길이 막혀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가 않아 아직 도망을 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인파의 속에서 퍼져나오는 연기.

“콜록! 콜록! 뭐, 뭐야! 이 연기는?”

“누, 누구야?”

인파의 곳곳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퍼져 나오는 순간 포목점의 주인 강천호는 덜덜 떨면서 무명을 받치던 나무 하나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 순간.

인파 쪽에서 서서히 바람이 불어오며 주변을 가득 채우는 연기가 연수 일행 쪽으로 밀려 왔다.

‘진세? 많이도 준비했네.’

연수의 입매가 비틀렸다.

-눈을 쓸 수 없을 때는 그만큼 다른 감각에 의존하는 수밖엔 없다. 청각과 기감에 최대한 의지해 봐.

설개와 호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예 눈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적응이 잘 안 되었지만, 눈앞에 저 남자가 버티고 서 있는 한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호개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획 돌아가며 팔을 올려 머리를 막는 순간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던 검이 반으로 쪼개지며 호개의 얼굴로 뜨거운 피가 튀었다.

-아직도 늦다.

-푸슛!

-투투툭.

-털썩.

한 치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연기 속에서 두 사람은 아예 눈을 감으며 주변을 느끼려 애를 썼다. 그런 두 사람의 귀에 살벌한 소리와 함께 사람의 숨이 끊어지며 시체가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소리만 가득 들려왔다.

주변을 가득 채우던 연기가 가시며 시야가 밝아질 때쯤 일행의 주변에는 삼십 구가 넘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호개와 설개는 뒤로 돌아서며 일 권을 날렸다.

-퍼퍽!

강렬한 소리와 함께 일 권을 박아넣고는 동시에 뒤로 물러서는 둘.

-적아를 구분하는 것은 기본이야.

연수의 전성과 동시에 두 사람의 얼굴에 당황한 감정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두 사람의 권격을 가슴으로 받아낸 이는 다름 아닌 모도산이었다.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

당황한 두 사람에게 말을 마치며 그들을 지나치는 도산은 연수의 옆에 섰다.

“근처에서 구경하다가 소란을 보고 합류했습니다.”

“일부러 부르지 않았는데.”

“...”

살벌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며 검을 뽑는 도산.

그 순간 연수의 주변에서 불길이 솟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쳇! 산공연 인가?”

연수의 말에 도산, 설개 호개의 표정이 굳었다.

세 사람의 단전에 내력이 빠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눈을 가리던 연기의 진정한 목표는 이 산공연을 섞어 내력을 금제하는 데 있는 것 같았다.

‘산공연을 연막에 섞고, 삼십 명의 목숨으로 그 속내를 가린다?’

연수의 표정이 차갑게 비틀렸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이리 머리를 굴리는 것을 보아 보통의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이 같은 방법은 하수 시절 자신이 주로 써먹던 방법이었다.

주변의 산공연을 태우며 몸 안에 들어와 내력을 흩어놓는 산공의 기운을 불태우는 연수.

“너희 셋은 뭉쳐있어.”

연수의 말에 서로의 등을 맞대고 뭉치는 세 사람.

미여는 연수의 옆에서 연수의 옷자락을 꽉 붙들고 있었다.

“우리 미여 장하네. 울지도 않고.”

“사부님이 무인은 겁을 먹는 게 아니라고 했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공숙의 말을 빌리는 미여를 향해 미소지어 준 연수의 손이 미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미여. 눈 꼭 감고 백만 세어 볼까?”

“응. 하나···. 둘···.”

설개와 호개의 단전에 내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때쯤 주변을 날아오르는 무인들.

일곱 명의 무인들은 일행을 향해 검기와 장풍을 난사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절대 연수의 근처로 다가오지 않으며 원거리에서 공격을 해대는 그들을 보는데 연수의 입에서 한숨이 세어 나왔다.

“같잖은···.”

한참을 주변을 맴돌던 무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하나씩 절명하기 시작했다.

-털썩.

“도, 독···.”

무음의 독침에 당해 하나 남았던 무인이 마지막 말과 함께 쓰러지는 순간 연수를 향해 달려드는 새로운 세 명의 무인들.

그들의 양손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민초들이 잡혀 있었다.

순간적으로 연수를 향해 던져지는 여섯 명의 무공을 모르는 민초.

처음으로 연수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푸화악!

공포로 가득한 중년인의 눈빛 속에서 일렁이는 살기를 엿보는 순간 그의 육신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로 날아오던 다섯 사람은 반으로 갈라져 죽은 중년인의 피를 뒤집어썼다.

-둥실.

뜨거운 피를 뒤집어쓰기 무섭게 허공에 멈추며 떠오른 다섯 명의 사람들.

허공섭물로 날아오는 사람들을 받아낸 연수였다.

그런 사람들을 지나치며 검을 찔러오는 세 사람.

-까라랑!

연수의 손에 어느새 들려 있던 곡월이 큰 동작과 함께 휘둘러지는 순간 세 개의 검은 그대로 깨지고 잘려나갔다.

연수의 파병초는 이제 검기로 쌓인 하수의 검쯤은 일수에 박살을 낼 정도로 위력이 더해져 있었다.

“커억!”

외마디 신음을 남기고 뒤로 넘어가는 가운데에서 달려들던 무인.

그나마 그의 실력이 가장 강했기에 목이 갈라지는 정도로 신체 보전하고 죽을 수 있었지, 그의 양옆에 있던 두 무인은 검이 갈라지는 순간 이미 목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허공에 떠 있던 백성들을 조심히 내려놓는 연수.

“가시오.”

피를 뒤집어쓴 백성들이 벌벌 떨며 다리가 풀려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너무도 무서운 상황에 기듯이 움직이는 백성들.

그 중 겨우 몸을 일으켜 연수에게 허리를 숙이는 한 남성.

겨울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피를 뒤집어쓴 남자의 허리가 숙여지는 순간 일행의 양옆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

-콰아앙! 화아아!

어마어마한 양의 화약이 터져 나오며 화기가 일행을 덮쳐왔다.

이를 악문 연수는 최대한 호신강기를 펼쳐내며 주위를 보호했다.

화약의 엄청난 화기가 수기를 끌어올려 만든 호신강기를 덮치는 순간 허리를 숙였던 남자의 입매가 비틀렸다.

강천호는 지금의 이 순간이 저 목표물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연수를 향해 폭발적으로 뻗어 나가는 강천호.

그 순간만큼은 연수도 눈이 튀어나오게 놀랐다.

설마 날아오던 백성 중 또 하나의 살수가 섞여 있을 줄은 그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이미 섞여 있던 하나의 살수를 베어내는 순간 의심의 끈을 놓아버렸다.

거기에는 강천호의 놀라운 연기력도 단단히 한몫했다.

‘젠장!’

이를 악문 연수의 몸 밖으로 흐릿한 호신 강기가 생겼다.

주변을 가득 메우는 화기로부터 일행을 보호하며 또 하나의 호신 강기를 발현시키는 연수.

그런 연수의 신기에 강천호는 혀를 내둘렀다.

‘이중 호신강기라니.’

듣도 보도 못한 신기였다.

하지만 강천호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강천호의 손에 들린 시커먼 단도의 방향이 눈을 감고 숫자를 세는 미여에게 향했다.

부릅떠지는 연수의 눈.

미여를 뒤로 내던지듯 밀어낸 연수의 몸의 균형이 아주 잠시 무너지고 흐릿한 호신강기가 출렁이는 순간 강천호의 단도가 연수의 호신강기를 찢고 들어왔다.

살비도.

강호에 수많은 보물들 중 호신강기를 뚫는다는 단검.

과거 유명한 살수였던 대살객 흑무사자의 독문 병기로 살야림의 최고의 보물이었다.

자신의 호신강기를 그 어떤 저항도 없이 두부 자르듯 자르고 들어오는 강천호의 단검을 보는 순간은 연수로서도 위기감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핏! 파팟 퍼퍽! 철그랑.

바닥에 떨어지는 살비도.

그리고 입가에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 있는 강천호.

연수의 호신강기가 걷히자 여전히 후끈한 주변의 공기가 일행에게 밀려왔다.

“당신은 내 살행의 첫 번째 실패군.”

어깨와 허벅지가 짓이겨진 강천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 누구냐?”

“천살호라 부르더군. 날 그렇게 부르던 사람들은 당신이 전부 죽였지만.”

“살야림에 살아남은 놈이 있었군.”

“운이 좋게 살행에 나갔었거든.”

“정말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놈이구나. 이 경지에 오르고 이런 위기에 몰린 적은 처음이야.”

“영광이군. 당신의 목을 땄다면 더 좋았을 것을···.”

“천살호. 기억하지.”

-툭.

연수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던 천살호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다.

“큭!”

그와 동시에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연수.

땅바닥에 떨어진 살비도를 주워드는데 그 살비도에는 한 방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 몸을 흔들어 살초를 피해 내었지만, 완벽히 피할 수는 없었고, 천살호의 살초는 연수의 복부를 스쳤다.

하필 단전과 대맥을 스친 살비도의 예기는 너무도 대단해서 어마어마한 내상을 입은 연수였다.

‘시간이 없다.’

“설개! 호개!”

-옛!

“미여를 데리고 본문으로 빨리 돌아가. 도평과 고수들을 이끌고 나를 찾아라.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창백한 안색의 연수를 보는 순간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몸을 날렸다.

호개의 옆구리에 들려 가는 미여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오십을 세고 있었다.

주저앉아 있는 연수를 부축하는 도산.

주변은 이미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폭발로 인해 엄청난 시체가 뒹굴고 있었지만 연수 같은 인물이 이런 대로변에 내상을 입은 채 있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다.

서둘러 주변 구석으로 이동하며 몸을 숨길 곳을 찾는데 막다른 골목이었다.

“우웩!”

선홍빛 붉은 피를 토해내는 연수.

도산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도 저 피의 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도산···. 시간이 없다.”

모도산은 하는 수 없이 연수를 막다른 골목 끝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시작하는 연수.

종남파의 제자이자 한때 장문 제자의 자리를 노리던 종남신권 부곡은 혈개문에 가서 사죄하고 오라는 장문인의 추상같은 명령에 등 떠밀려 덕창에 와 있었다.

덕창에 도착한 지 꽤 되었지만 차마 죽이고 싶은 그놈에게 고개를 숙여 사죄할 용기가 나지 않아 덕창의 주루와 기루를 오가며 술로 세월을 보내던 그.

오늘도 기루에서 대낮부터 질펀하게 술을 퍼먹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난리가 나서 무슨 일인가 술김에 확인하러 나온 부곡이었다.

고기 타는 냄새와 함께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커먼 시체들을 보니 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부곡.

“뭐야? 이게 웬 난리···.”

그런 부곡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간 순간 외진 골목의 끝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무인과 인상을 잔뜩 구긴 도산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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