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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74화 (174/202)

# 174화

사황성의 총 전력에 구 할에 가까운 칠천의 무인들이 형산을 향해 이동하는 장관을 연수는 무덤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천하의 패신살성이 긴장이 될 리는 없을 테고, 뭐 그리 심각한 표정이야?”

옆으로 다가와 농을 건네는 비영의 말에 연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긴장돼 보였어요? 그냥 저 많은 사람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이동하는 모습이 별 감흥이 없어서 왜 그런가 생각해 보고 있었어요.”

“그래? 글쎄, 나는 보고 있으면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인데 말이야.”

“이미 몇 번 봤다고 저는 별 감흥이 없네요. 다만 그런 생각은 들어요. 저들 중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육천

무림맹의 무사들을 상대로.”

“···.”

대답을 않고 가만히 이동 중인 많은 대군을 같이 바라보는 비영.

그런 비영을 대신해 진벽가주가 대답했다.

“많이 죽고 많이 다치겠지요. 무림인이고. 전쟁이니까요.”

가라앉은 눈으로 두 무인과 시선을 함께 두며 대답하는 진벽가주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인이니까요.”

우중충한 분위기에 얼굴색이 조금은 검어진 사패일성이 특유의 술병을 손에 쥐고 설렁설렁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삶과 죽음이전에 고수와 하수. 무공의 경지가 더 중요한 게 무인 아니겠어?”

강진후의 말에 연수는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옮기다가 그의 변한 낯빛을 확인했다.

-괜찮습니까?

연수의 전성에 강진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영과 진벽가주는 그저 그런 강진후를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들 보지 마시오. 후회 없는 삶이었고, 훌륭한 마지막이 기다리고 있으니. 무인으로서는 최고의 삶이 아닙니까?”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강진후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가로 기울이며 비영과 진벽가주를 돌아보았다.

의문이 가득담긴 설명을 바라는 연수의 시선에 두 사람은 별 말없이 입을 닫고 있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자신들이 할 말은 아니었기에.

강진후는 그런 상황을 보고는 술병을 입에다 대고는 대차게 꺾어 올렸다.

“크으! 오늘따라 술맛이 쓰구나. 그리 볼 거 없어. 자네도 이미 예상하고 있을 거 아니야? 흡성신공. 반쪽짜리 이 신공의 치명적인 단점은.”

“설마···. 벌써···.”

“지난 삼년 대차게 싸워오다 보니 흡수한 내기가 어마어마하지. 수많은 고수들의 내기를 빨아들였고, 그들을 죽여 왔어. 그 많은 고수들의 일생을 바친 고련의 시간을 고스란히 빼앗아온 나에게 이정도 저주쯤은 당연한 것 아니겠나? 크크.”

“젠장! 왜 일찍 말하지 않은 겁니까?”

연수는 강진후의 손목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지만 강진후는 몸을 슬쩍 흔들어 손을 뺐다.

“그럴 것 없어. 아무리 자네라도 이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야.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녔어. 백이면 백. 이종의 진기를 쌓게 되면 단명할거라 장담들을 해댔지.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흡성신공을 익히고 타인의 내기를 흡수하는데 일절 망설이지 않았네. 내 선택이었고, 내가 걸어온 길에 후회 따위 남기고 싶지 않아.”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른 겁니다.”

“크크크, 새로운 성주에게 삶을 강요하고 전 성주님과 산화를 결심한 자네가 할 말은 아니군.”

“일단 좀 봅시다.”

“..아주 작은 기대도 하고 싶지가 않아.”

힘없이 대답하는 강진후의 낯선 모습에서 연수는 그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죽음을 받아들인 그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흡성신공의 진전을 이은자니까.

순간 연수의 신형이 잠시 흐려진다고 생각한 순간, 연수의 손이 강진후의 손목을 잡아가고 있었다.

호선을 그리며 비틀리는 강진후의 입술.

그와 동시에 미묘하게 꺾이며 빠져나가고는 반대로 연수의 손을 잡아채려는 강진후의 손.

두 사람은 갑작스레 금나수로 서로의 손을 낚아채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어느새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남은 손만 가지고 분주히 움직이는 두 사람.

그러던 중 강진후의 손에 청망사가 둘러지며 그 기세를 더했고, 연수의 손에는 기사가 풀려나오며 청망사로부터 손을 보호했다.

청망사를 보는 연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처음 저 무공을 보았을 때만 해도 정신이 없었는데···. 그런 하수였었지 나는.’

그랬을 진데, 어느 덧 그런 고수를 따라잡아 한참이나 앞서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뿌듯하기도 반대로 씁쓸한 면도 있었다.

-파팟!

순간 연수의 기사가 점점 얇게 연수의 손을 감싼다 싶은 순간 연수의 기사가 흐릿해 질 정도로 얇아졌다.

점차 얇아져 끝내는 연수의 손이 희끗희끗 하게 빛날 뿐 전혀 육안으로 기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크그그그.

쇠를 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결국 강진후의 손이 연수에게 잡혔다.

“크크크 괜히 장수무투의 제자가 아니군. 그새 내 밑천을 털어가는군.”

“그저 흉내나 내본 거죠, 뭐.”

“흉내치고는 글쎄, 어째 내 청망 사에 밀리지 않는군.”

“저이기에 그런 거죠. 동수였다면 진즉에 깨졌을 거예요.”

그 말에는 강진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엔 없었다.

“어쨌건 졌으니 마음대로 해.”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의 손에 희끗한 빛과 푸른빛이 거둬들여 졌다.

말을 끝내고 자신의 손목을 잡고 맥을 살피는 연수를 잠시 바라보던 강진후는 거칠게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대고 술을 털어 넣었다.

이미 각오는 굳혔을 진데, 사람의 간사함이, 몹쓸 기대감이 또 고개를 쳐들자 가슴한쪽이 아려오는 그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강진후의 기맥과 혈을 살피던 연수는 절로 흔들리려는 고개를 의식적으로 막았다.

솔직히 지금까지 강진후가 살아 있다는 것이 놀라운 연수였다.

수많은 이종의 진기들이 곳곳의 혈도와 기맥에서 서로 반발하고 정리가 되지 않아 혈과 기맥을 수시로 상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연수로서도 놀랄 정도의 엄청난 내력이 강진후의 단전을 가득 채우고 그의 기맥을 충만히 채우며 주천하고 있었다.

분명 저리 움직이는 것은 강진후의 의지아래에 있는 기운이 분명했거늘 왜 쉼 없이 반발이 일어나며 기맥과 혈을 엉망으로 만드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연수였다.

한참을 진맥을 한 연수가 강진후의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얼마나 오래도록 그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던지 제일 앞에서 대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일행은 그 행렬의 끝으로 밀려버렸다.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술병을 입에 대는 강진후와 다르게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연수를 바라보는 비영과 진벽가주.

그 두 시선과 강진후의 체념의 눈빛을 본 연수는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쨍그랑.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며 휘청거리는 강진후. 그 충격으로 절대 손에서 놓지 않을것 같던 술병을 떨어트린 그였다.

“사, 살수 있다고? 이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하는 강진후를 보며 연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그간 쌓아온 내력 중 상당부분을 제가 몸 밖으로 뽑아내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럼 지금껏 쌓아온 그 대단한 내력을 대부분 잃게 되실 거고요.”

잠시잠깐 강진후의 눈에 갈등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고개를 젓는 강진후였다.

그런 그를 보며 연수는 말을 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수련을 기맥과 혈의 단련을 하셨을 겁니다. 내력을 쌓는 수련보다는···.”

강진후는 연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내력이야 타인이 쌓아 놓은 것을 흡수하면 그만이었으니.

무인에게 삶과 그간 쌓아온 내력을 잃는 것 중 선택하라는 것은 굉장히 잔인한 강요이다. 연수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두 번째 방법은 뭐지?”

“두 번째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저도 완벽히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익히고 있는 신공을 완성하면···. 그리만 된다면 몸 안에 쌓으신 그 이종의 진기들의 균형을 잡아 성질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겁니다.”

“!!!”

“그, 그게 가능한 겁니까? 타인의 몸 안에 쌓여있는 내력의 성질을 바꿔 놓다니요?”

진벽가주는 너무나 상식 밖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나서야 강진후의 눈치를 보는 진벽가주.

하지만 강진후 역시 진벽가주의 의문을 그대로 떠올리고 있었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불가능 하죠. 하지만 너무나 많은 서로 다른 기운들을 몸 안에 품고 있는 강 형의 경우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 진기들을 성질별로 구분하고 서로 반발하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정리하여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 놓는 겁니다. 현재 서로 상극의 기운들이 마구잡이로 충돌하고 있다면 그 기운들의 배치를 상생의 길로 배치해 주는 거죠.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더는 흡성신공을 통해 내력을 흡수하지 못하겠지.”

강진후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기운에 익숙해지면 호흡을 통하여 기운을 쌓을 수 있으시겠죠. 그리고 흡성신공으로 타인의 기운을 흡수하여 단전에만 쌓지 않으면 그만이니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미 쌓으신 내력은···. 저로서도 상상하기 힘든 바다와 같은 양이에요.”

고개를 끄덕이는 강진후.

“그래서.. 얼마나 걸려야 자네가 신공을 완성할까?”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장담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일단 급한 대로 내력을 덜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갈등어린 표정의 강진후를 보며 비영이 그의 손을 잡았다.

“이리 빨리 갈 필요 무엇인가? 일단은 살고 봐야지. 나는 자네가 꼭 필요하네.”

무인에게 내력을 버리라 말하는 비영의 심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살 길이 있다면 살아야 했다.

강진후는 한참을 고민했다.

이미 사황성의 대군의 행렬이 저 멀리 멀어지고 있었다.

고민을 끝낸 강진후의 무겁던 입이 열렸다.

“부탁하지.”

연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주저앉는 강진후.

그런 강진후의 뒤로 앉으며 그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대는 연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연수가 강진후의 등에 장심을 대는 순간.

비영과 진벽가주의 표정이 일변하며 주위를 사납게 바라보고는 둘의 호법을 섰고, 주변에 삼십여 명의 인영이 떨어져 내리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새로운 성주의 암영들이었다.

멀어질 대로 멀어진 대군의 행렬을 따라 허공을 날 듯 경공을 펼치는 네 무인.

그 중 사패일성 강진후의 혈색은 제법 좋아 보였다.

그의 표정에는 후련함과 일말의 허탈함이 공존하며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     *     *

청해성의 곤륜산에 비하면 그 높이가 그리 대단치도, 산세가 대단치도 않은 많은 산과 숲에는 많은 화전민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여러 이유로 명의 울타리를 벗어나 화전을 이루고 살아가는 그들.

그런 화전민들은 북경과 먼 중원의 각지 곳곳에 수없이도 많이 존재했고, 그런 화전민들이 살아가는 위치와 규모에 대한 정보는 상인들이라면 줄줄이 꿰고 있었다.

특히나 그리 크지 않은 혹은 홀로 움직이는 보부상들에게는 그 화전민과의 거래는 수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기에 중요한 정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힘없고, 약한 상인을 수없이 잡아 죽여 화전민들의 터를 알아낸 괴인들.

여섯 명의 이 괴인들은 검붉은 무복을 입고 복면을 한 채,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는 삿갓까지 쓰고 있었다.

“이 곳이 맞습니다.”

“화전의 규모가 얼마나 된다고?”

“삼십 가구 쯤 된다고 합니다.”

“서두르자.”

그날 저녁 그들이 들른 청해의 다섯 군데의 화전마을은 모든 사람들이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그저 마을을 채우던 온기만이 얼마 전까지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또 다른 화전마을을 찾아 바삐 움직이는 괴인들.

그들의 무복에 튀어있는 몇 방울의 피들은 그들의 무복의 색과 어우러지며 잘 티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달리던 괴인 중 제일 앞서 달리던 괴인의 입이 열렸다.

“사제들을 보낸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군.”

이미 그 결정을 내린지 한참이나 지났거늘 이제와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괴인을 다른 괴인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한 번 내린 결정입니다. 그리고 제갈휘와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으니 그가 절대 우리를 잊지 않고 챙길 것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꽉 깨무는 괴인이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 결심을 했다. 그 결심의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지만.

모든 걸 잃은 그들에게 선택의 폭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들은 그중 최선이라 생각되는 선택을 했다.

정파의 정기와 기치. 협의. 그리고 명분. 이 모든 걸 버리고 내려놓은 그들은 한없이 자유로웠으며 행동에 제약이 없었다.

마음 한 구석의 양심과 남아있던 마지막 인간의 도리마저 버리자 그들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강해졌다.

아니, 지금도 강해지고 있었다.

‘머지않았다. 우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 그만.’

이를 악물며 각오를 다시 한 번 그 각오를 다지는 동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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