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무림맹의 후미를 교란하며 중봉으로의 진입을 방해하던 화령가주의 시선에 다섯 명의 화령가 정예가 가슴에 혈화를 피우며 쓰러지는 모습이 담겼다.
그와 동시에 화령가주의 일 검에 그를 에워싸려던 여덟 명의 무인들이 불길에 휘말리며 쓰러졌다.
사방에서 시체가 타는 냄새와 함께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와중에 물밀 듯 밀려오는 무인들은 불길 속을 파고들며 화령가주와 그 정예 무인들을 압박해 왔다.
벌써 같이 폭염진을 발동하며 내력을 소모하고 폭천뢰와 함께 산화한 무인만 스물이었고, 적들의 검에 쓰러져 간 무인 또한 스물이 되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산화한다!”
주염철의 말에 남은 스무 명의 정예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밀려오는 적들을 노려보았다.
그런 주염철의 옆으로 다가서며 검을 고쳐 잡은 한 무인이 입을 열었다.
“가주님은 여기까지입니다. 가주님께서는 더 죽여야 할 놈들이 많으십니다.”
주염철은 강물처럼 밀려오는 무사들을 바라보며 말하는 무인의 어깨를 짚었다.
“나 없이 괜찮겠는가?”
“저희 육십의 목숨으로 이미 수백 명도 넘는 놈들의 시체를 쌓았습니다. 우리보다 많은 적의 시체를!”
말을 마치고 뜨거운 검기를 흩뿌리며 적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사내의 등을 보는 화령가주.
사내는 몰려오는 적들의 한가운데 뛰어들어가기 무섭게 사방에서 날아드는 병장기에 제대로 반항 한 번 못하고 순식간에 온몸에 구멍이 났다.
입가로 한줄기 피를 흘리며 화령가주를 돌아보는 사내. 사내의 피가 흘러내리는 입가는 분명 미소짓듯 비틀려있었다.
-콰쾅!
폭발하는 사내의 몸.
그와 동시에 주변 수십 명의 무인이 폭발에 휘말리며 중상을 입고 나가 떨어져 내렸다.
순간의 적막과 함께 열아홉 명의 무인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며 무림맹의 무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우리보다 많은 적의 시체를!
-콰쾅! 콰쾅!
“물러서! 물러서라! 저 미친놈들에게서 떨어져 산개해라!”
-콰쾅!
무사들을 지휘하며 목이 터져라, 산개하란 명령을 내리던 무인에게 검을 휘두르며 동시에 폭사하는 화령가의 무인.
뒤로는 계속해서 무사들이 밀며 올라오는 통에 산개하란 명령은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달려드는 화령가의 정예들을 두렵게 바라보던 무사들은 등을 돌리며 도망가려 했지만 그들의 운신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화령가주는 그런 아수라장 속을 누비며 폭사하는 정예들을 두 눈에 담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목숨은 아직 이곳에서 다 할 수 없었다.
사내의 말처럼 아직은 더 많은 무림맹의 무사들을 죽여야만 했다.
철령가의 무사들과 함께 전선의 최전방에서 수적 열세에 있는 무림맹의 무사들을 학살하듯 찢어 죽이는 철가군.
그의 손에 잡히는 족족 신체가 찢겨 나가며 죽는 시체가 주변에 쌓이기 시작하자 어느새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적들.
그렇지않아도 무섭게 들이치는 사황성의 힘에 뒤로 밀리던 무림맹의 무사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더는 뒤로 물러설 때가 없게 된 무림맹의 무사들은 이를 악물며 앞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올라오란 말이야!
제갈휘는 후미를 향해 내력을 담아 외쳐댔다.
하지만 우거져 있던 숲 사방으로 불길이 거세지고 있었기에 중봉의 꼭대기로 합류하는 무인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인의 장막이 이미 봉우리의 끝까지 밀려 막혀있어 도무지 그 장막을 뚫고 올라서서 전선에 합류하기가 쉽지 않은 지형이었다.
그나마 고수들이 하나둘 불길을 뚫고 인의 장막을 뛰어넘어 합류하고 있었지만, 그조차 소수의 불과했다.
“젠장! 불이 옮겨붙지 않게 주변 나무를 베어라! 능력이 되는 고수들은 전열을 이탈해 먼저 뛰어 올라가라!”
무림맹의 후미는 후미대로 정신이 없었다. 몸을 던지며 전열 여기저기에 구멍을 내놓고 주변 사방을 화염으로 바꿔버린 화령가의 무인들 덕분에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결국 중봉의 봉우리에 올라있던 이천의 무인들이 학살을 당하다 못해 육천 대군의 힘에 뒤로 밀려나며 봉우리 밖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봉우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하는 무인들은 아직 가시지 않은 불길과 수많은 동료의 시체와 중상을 입고 신음을 흘리는 동료들을 보며 아비규환의 상황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하기 시작해 그리 오래지 않아 봉우리 밖으로 모두 밀려난 무림맹의 무인들.
아직 봉우리 위에 남아있는 무림맹의 무사들은 오로지 시체밖에는 없었다.
살화패성은 살화대를 이끌고 제일 먼저 중봉의 봉우리를 박차고 뛰어 내려갔다.
선두로 나서며 불길에 휩싸인 곳에 검기와 장풍을 난사하며 길을 열기 시작하는 살화대.
그 뒤를 철령가와 남은 화령가 그리고 남은 성주의 가신들이 뒤따랐고 그들과 함께 전 사황성의 무사들이 봉우리 밖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경사가 제법 가파른 지형에서 짓쳐 들어오는 사황성의 무사들을 상대로 무림맹의 무사들은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사기 자체가 무림맹의 무사들과 사황성의 무사들은 너무 달랐다.
-쾅! 파아앙!
일검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주변으로 경기의 폭풍이 일었고, 서로의 장력이 허공에서 부딪히면 공기를 찢는듯한 폭음이 사방으로 매섭게 울려 퍼졌다.
옥현인과 가볍게 수십 초식의 교환을 해본 연수는 무림맹주에게서 느껴지는 오행신공의 기운이 만만치 않음에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작 수십 초식을 나눈 것 만으로 두 사람은 이미 형산 중봉을 벗어나 사두봉위에 있었다.
뱀의 대가리를 닮았다는 형산의 시두봉의 험한 지형에 위태롭게 서 있는 두 무인.
한참을 서로를 노려보던 중 옥현인의 입이 열렸다.
“전극공합이 네놈에게 있었구나.”
“어. 덕분에 네놈 모가지를 잘라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인연 아닌가?”
“크크크, 네놈의 오만은 항상 역겹구나.”
“네놈의 위선만 하려고? 항상 궁금했었지. 그날 어째서 내 품을 뒤져 보지 않았을까? 네놈은 솔직히 전극공합을 후대에 전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그렇지?”
“그럴 리가 있나?”
“천령관에서 성격이 바뀌어서 나왔는지 알았더니 아직도 여전하구나. 이제 확실히 알았어. 네놈을 지탱하고 있던 것은 두려움이었어.”
“크크크, 무림맹의 맹주이자 중원 최고수인 내가 두려워한다? 무엇을?”
연수는 단애 밖으로 거칠게 침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네놈을 능가할 고수를. 반쪽짜리 신공을 가지고 전전긍긍했겠지. 언제고 튀어나와 네놈의 자리를 위협할 신진고수와 사황성의 패천후 성주를.”
“...”
“너 같은 놈도 꼴에 무인이랍시고···. 패천후 성주는 사람을 잘못 봤어. 너 같은 놈을 평생의 숙적으로 삶고 살아왔다니. 넌 그 남자의 숙적 따위 될 그릇이 아니야.”
“헛소리!”
옥현인의 발이 딛고 있던 주먹만 한 암석을 박차는 순간 그의 신형이 연수에게 뻗어 나가며 무서운 기세를 피워올렸다.
옥현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오행에 따라 순환하며 짙은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한없이 정순한 신공의 기운이 아니었다.
연수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목기는 화기를 키워 더 순수한 화기를 일으키며 정화의 기운이 되고 그 정화의 기운이 모든 정화를 끝마치고 쇠하면 그에 잔재는 토기로 돌아가 토기를 키워 태동의 기운을 품어낸다. 그런 태동의 기운을 받아들여 금기는 새롭게 태어나며 더 단단하고 강해지며 홀로서 금강(金剛)의 기운으로 나아가게 되고 수기는 이 금기를 받아 더 차고 더 도도히 흐르는 대하의 기운을 품어내게 된다.
오행의 순환은 이처럼 한없어 정순하여 도무지 음험한 마기가 발을 붙일 수가 없을 진데, 옥현인의 기운은 정순함과는 전혀 다른 마기가 느껴졌다.
옥현인의 검이 공간을 가르며 연수의 목을 향해 들어왔다.
세상 모든 것을 태울 것 같은 화마의 기운을 머금은 강기가 뻗어 나오자 연수의 곡월에 목생화 정화의 기운을 머금은 강기가 뻗어 나와 옥현인의 강기를 막아갔다.
-콰앙!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경기들 때문에 사두봉의 거석들이 깨져 나갔다.
옥현인의 눈썹이 씰룩였다.
강렬한 화기를 끌어냈을 진데 막아낸 연수의 신형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심지어 연수의 발밑에 연약해 보이기 그지없는 작은 디딤돌은 전혀 부담이 없는 듯 금도 가지 않았으니, 그 충격을 모조리 흘려 버렸음이 분명했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
옥현인의 기세가 일변한다 싶은 순간 그의 검에 맺혀있던 검강의 성질이 수기로 변하며 쾌검을 통해 연수의 요혈을 노리며 뻗어져 나왔다.
무당의 물 흐르는 듯한 태극의 이치를 담고 있되 너무나 빠른 쾌검.
너무나 빨라 오히려 느려 보이는 맹주의 검에 연수는 양손에 쥔 곡월을 미친 듯이 휘둘러 댔다.
-카가가각가가가가강!
무당파 태극의 이치를 극 쾌로 풀어내는 옥현인의 검은 과연 무서웠다.
모든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그의 검공안에서 무당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오히려 그 정수를 한발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가는 것 같은 공격에 연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증거로 처음으로 연수의 곡월이 단 한 차례도 옥현인을 향해 휘둘러지지도 않았다.
‘경지에 오른 후 거리의 제약을 뛰어넘었다 생각했는데···.’
소나기 같던 옥현인의 검격을 막아낸 연수는 호흡을 들이마시며 검초가 끊기는 순간 옥현인에게 곡월을 휘두르며 반격을 시도했다.
허공에서 쾌검을 풀어내고 검격을 막아냄으로써 생기는 반발력에 자연스레 뒤로 물러서던 옥현인을 따라가며 달라붙는 연수.
-캉! 캉! 깡! 콰카카카카캉!
물러섬 없이 나아가며 기세를 키우고 그 위력을 더해가는 종남의 진수가 연수의 곡월에서 풀려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옥현인은 물러섬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기가 막히게 물러서는 순간을 포착해 달려들며 허공에 신형이 떠 있는 순간을 물고 들어와 삼격을 이미 성공시킨 연수였다.
허공에 발이 떠 있으니 무리하게 멈출 수가 없던 옥현인은 두 발이 괴석 위에 위태롭게 닿기 무섭게 신형을 물리지 않고 버티었고, 그와 동시에 연수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무서운 속도로 곡월을 휘둘러 왔다.
하체는 거석 위에 단단히 고정한 채 몸을 크게 쓰며 강력한 일격을 빠르게 풀어내는 연수.
옥현인 또한 폭풍처럼 몰아치는 연수의 공격을 태극의 검세로 막아서며 물러서질 않고 있었다.
연격을 몰아치는데 금기를 담아 연수의 연격을 끊어내기 시작하는 옥현인.
그의 검에 금기가 서리자 재빨리 연수 또한 금기를 뿜어내며 그의 단단한 수세를 뚫으려 했지만, 금기의 충돌로 생기는 반발력이 만만치 않아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두 장을 물러선 후 서로를 노려보는 두 무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 전초전 결과 서로가 만만치 않음을 되새기는 결과가 되었다.
옥현인의 검공은 연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했다. 그의 초식에 담겨 있는 그의 무리는 검을 맞부딪히는 것만으로 연수에게 상당한 깨달음을 줄 정도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패천후의 절망감이 느껴지는 연수였다.
저런 무인과의 일전을 꿈꾸며 평생을 기다려 왔을 패천후의 절절한 심정이 느껴졌다.
어째서 패천후가 그리 고집을 부리며 함정일지 모를 위험한 옥현인의 초대에 응했을지 어째서 서로의 입장을 잊고 그를 신뢰했을지.
또한, 그 신뢰에 배신당했을 때의 패천후의 실망과 절망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느껴져 왔다.
마지막까지 독을 통한 암습으로 패천후의 생을 끊었던 옥현인이었다.
연수의 몸에서 강렬한 화기가 끓어 오르며 그의 눈빛에서 짙은 살기가 넘실거리자 옥현인이 고개를 가로 기울였다.
“지금에 와서 그리 본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이냐!”
연수의 눈빛 속 비난을 읽어낸 옥현인은 발끈했다.
“역시 너는 무인이 아니야. 긍지도, 자존심도 버린 소인배일 뿐. 너의 경지는 네겐 너무나 과분하구나. 원공대사는 역시나 실수를 하신 거야.”
“흥!”
-파삭!
맹주의 손에서 뻗어 나온 장력을 곡월로 소멸시켜 버리는 연수.
그와 동시에 미친 듯 달려드는 옥현인을 상대로 뒤로 물러서며 맞서가는 연수였다.
깎아지른듯한 사두봉의 벽을 타며 공수를 주고받는 두 사람.
-카카캉!
강기의 불꽃이 튀어나며 사두봉의 벽에 경기의 흔적이 무섭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 형산의 험한 지형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른 무인들 같으면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릴 것 같은 신위를 보이며 수많은 석봉을 옮겨 다니며 공수를 주고받는 두 사람.
연수는 보았다. 무인으로서 부정당하는 순간 옥현인의 얼굴에 떠오르는 분노를.
또 그 속에 일말의 작디작은 부끄럼을.
이는 어쩌면 평생을 정파인으로서 무당파의 일원으로서 살아온 그의 양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양심은 너무나 초라하고 인내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작았다.
-콰아앙!
승룡봉이라는 석봉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두 사람의 절초와 강기공이 하필 같은 방향으로 향하며 부딪힌 곳이 승룡봉의 가운데였다.
승천하는 용을 닮았다고 해서 승룡봉이란 이름이 붙은 석봉의 목쯤 위치하는 곳에 너무나 큰 구멍이 뚫리며 그 구멍을 사이에 놓고 서로를 마주 노려보는 두 무인.
연수는 미약하게 몸체를 유지하고 있는 절벽 사이로 자란 나무를 밟고 서 있었고 맞은편의 옥현인은 금이 가서 떨어져 나가기 직전의 절벽 밖으로 튀어나온 돌 위에 서 있었다.
먼지구름 사이로 서로의 그림자를 뚫어지게 노려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먼지구름을 뚫고 부딪히는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동수.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만 무인에게는 흔히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때론 백번의 패배가 새로운 경지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단초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생의 단 한 번의 패배로 목숨을 잃는 수도 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순간 연수와 옥현인은 무인으로서 전혀 다른 생각과 판단 그리고 행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