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가슴 섶을 시작으로 소매까지 팽팽히 부풀어 오르는 경진해의 옷자락을 보며 연수가 비아냥거렸다.
“개구리 같네. 볼을 잔뜩 부풀리고 허세를 부리는.”
“오만하기가 끝이 없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출수하는 경진해.
덥석.
연수를 향해 끌어 올려놓았던 공력을 모두 담아 일장을 뻗어가던 경진해는 일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탁을 차올리며 장을 뻗었는데 어찌 발출되지도 않은 장력이 사라지는 것인지. 어째서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인지. 어째서 두려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허공에 장을 뻗던 자세 그대로 몸이 매달리는 감각이 느껴지고 나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무릇 고수란 하수와 고수를 가리는 눈을 가져야 해. 강호에서는 그 판단을 못 하여 죽어 나가는 고수들이 수두룩하거든. 비록 하수라도 눈이 좋아 오래 사는 무인들도 많아.”
연수에게 목덜미를 제압되어 허공에 그대로 매달려있는 경진해는 전신을 죄오는 압박감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도필호는 연수의 손에 뒷덜미가 붙잡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경진해를 보고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연수의 말이 이어졌다.
“권력이라는 것 말이야. 허상 같은 거야. 그것이 통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무거운 힘을 가하지만, 나같이 그런 게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나가는 개소리만큼 부질없지. 그렇다면 너와 나 사이에는 물리적인 힘밖엔 남질 않잖아? 그런데 그 알량한 무공으로 내게 덤비면 내가 이 가녀린 네 목을 똑 하고 분질러야 하잖아.”
“사, 살려···. 주시오···. 나는 제독···.”
힘을 쥐어짜며 목소리를 내는 경진해.
“쯧쯧 틀렸어. 네가 제독동창이아니라 황제라도 상관이 없다니까.”
연수의 말에 도필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엄하오! 감히 대명제국의 황제 폐하의···.”
“해볼까? 너희는 너희의 권력으로 나를 공격하는 거야. 내 주위 사람들이 매우 피곤해지겠지. 그리고 나는···. 황제를 노리는 거야. 물론 네놈들 가문의 인간들도 모조리. 누가 먼저 모두 죽일 수 있을까? 내가 황제를 죽이는 게 빠를까? 너희가 내 지인들을 죽이는 게 빠를까?”
“어, 어찌···.”
“다시. 과연 지금 황제를 위험에 빠트리는 건 누굴까? 황제를 죽인다고 협박하는 나일까? 가만히 있는 나를 자극한 너희일까?”
경진해의 입에서 피가 토해지며 쇠가 갈리는 소리가 쥐어짜이듯 흘러나왔다.
“자, 잘못했소. 용서해 주시오···.”
“그렇지. 그거야.”
-쿵!
“자 다시 시작해보지.”
말을 마치며 의자를 가져와 경진해의 앞에 앉는 연수.
떨리는 몸을 일으키며 연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경진해.
머리를 조아리는 그의 모습이 세상 겸손할 수가 없었다.
도필호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진해를 알고 지낸 세월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맹세코 저리 힘없고, 초라한 그의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황제가 아닌 이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경진해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제가 큰 결례를 끼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잘 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야. 네가 잘 몰랐다면 황제의 명이 줄어들 뻔했으니.”
“사죄드립니다.”
“그래. 사과는 잘 받았으니, 이제 묻지.”
“...”
“나를 수족으로 부려보자는 계획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일까?”
“그것은···. 오로지 저의 짧은 생각에서 나온 계획이었습니다.”
“그래? 뭐 일단은 믿어보지. 그럼 두 번째 질문. 황제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폐, 폐하께는 아직 아무런 보고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말도 일단은 믿어보지. 그럼 이제 마지막 경고. 무림을 흔들지도 관여하려 하지도 마. 지금처럼 서로 관여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황제가 무당을 아낀다는 건 잘 알아. 지금 무당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야. 황궁에 무당의 무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 잘 알아. 모두 누르는 것이 좋을 거야. 그렇게 너희가 무림에 관심을 끊는다면 나도 황제의 명줄에 관심을 끄지.”
“알겠습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답하는 경진해를 잠시 내려다보던 연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고개를 조아린 채 눈앞에 연수의 발만 보고 있던 경진해는 연수의 발끝이 흔들린다 싶은 순간 그의 기척이 사라져 버리자 머릿속에 남은 잔상이 눈앞을 아른거리는 듯했다.
“쿨럭!”
피를 토해내며 머리를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는 경진해.
놀란 도필호는 그런 경진해에게 다가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괘, 괜찮으십니까? 설마 놈이 공격을···.”
“혀, 현경이다.”
“!!!”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려놨다···. 창위들과 따르는 무장들을 모두 불러모아!”
“설마···. 저놈과···.”
“어리석은! 대책 없이 건드리고 무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일단은 모두를 모아야 한다. 대책을···. 마련해야 해. 혹여 폐하께 이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혈개문의 정문을 지키는 두 무사의 머리가 땅에 닿을 듯 숙였다.
“어, 수고가 많아.”
그런 두 무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서는 두보의 거처로 발길을 옮기는 연수.
“다녀왔습니다.”
늦은 밤임에도 초조하게 기다리던 무황과 두보가 연수를 반겼다.
“왔구나!”
“별일은 없던 게야?”
“숨 좀 돌리고요. 천천히 이야기 드릴게요. 그 전에···. 저기 오네요.”
돌쇠는 연수가 돌아왔다는 말에 바로 연수를 찾아오고 있었다.
“태상문주님···.”
“어. 가서 모두 불러와.”
“예? 아, 예.”
바로 다시 달려나가는 돌쇠.
두보는 툇마루에 걸터앉는 연수를 보며 따뜻한 차를 권했다.
“일단 좀 마시거라.”
차를 마시며 그간 별일이 없었는지 무황과 두보의 안부를 듣고 있는데 저 멀리 도화를 포함한 지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도화의 곁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인 연수.
“넘어지겠네. 천천히 와도 될 것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도화와 지인들을 보고는 미소지은 연수가 두보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 두보의 방이 꽉 차는 듯 좁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훈훈하니 좋구나.”
“예. 그러네요.”
“이제 어찌 된 것인지 이야기 좀 풀어 보아라.”
연수는 시비가 따라놓고 간 차로 목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천산을 찾아가는 길에 보았던 혈정취연공의 흔적을 만난 일부터 천산을 올라 마교를 찾아내던 과정과 암주와의 사투 그리고 원목과 만남을 천천히 소상히 이야기했다.
“그런! 그나마 소림의 무승을 만나 위험을 넘기었구나.”
“그런데 어찌 소림의 고승이 그곳에 갇히게 되었는지 비화가 있겠는데···.”
“큼큼! 그 부분은 저도 잘 알 수가 없네요.”
그리고 이어지는 연수의 이야기.
암주를 꺾고 그 생을 마감시킨 이야기와 교주와의 담판.
“역시 그 개자식이 그런 더러운 속을 감추고 있었구나!”
그런 와중에 정회는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그렇다면···. 지금 적영대장님의 경지는···.”
그런 정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연수에게 집중되었다.
꿀꺽.
침을 삼키며 다음 나올 말을 기다리는 일행들.
“너에게 존대를 들으니 참 어색하네. 바락바락 반말을 해대며 우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기다리는 말이 나오질 않고, 정회를 놀리는 연수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한숨을 몰아쉬며 허탈했다.
“이제는 사황성의 사람이 되었는데 적영대장님께 무례했다가는 살아남을 수가 없죠. 정말 그 경지에 오르신 게 맞습니까?”
“현묘한 경지? 글쎄. 굳이 나누자면 그렇겠지. 입신경의 고수가 나를 본다면 현경이라 말할 테니.”
무황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 게냐? 그 지고한 경지에 오르고서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느냐?”
무인으로서의 본능적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뱉어내는 무황.
무황 뿐만이 아닌 돌쇠와 도화를 제외한 장내의 무인들은 고금에 몇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수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며 손에 땀을 쥐었다.
“순리. 제가 깨닫고 느낀 것은 결국 순리였어요.”
“순리라···.”
짧은 두 글자에 담긴 의미들을 저마다 해석하고 떠올리며 곱씹을 때 두보의 입이 열렸다.
“순리란 조화지. 과년한 여인과 일가를 이룬 장성한 사내가 혼인하는 것도 순리. 약조한 바를 지키는 것도 순리.”
공숙은 상념에서 깨어나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너도 이제 혼인을 할 나이가 차고도 넘었어.”
“그래. 언제까지 도화 아가씨를 기다리게 할 거야?”
소개마저 거들고 나서자 연수는 정신이 없었다.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도화를 바라보니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도화.
그런 도화를 보니 연수는 절로 입이 열렸다.
“해야죠. 사부님이 좋은 날 잡아주세요.”
일사천리였다. 사천의 주변 문파부터 사황성과 정협맹까지 연수의 혼인 소식이 전해졌다.
* * *
긴 탁자가 들어차 있는 밀실.
그 안에 삼십 명도 넘는 인물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제일 상석에 앉은 젊은 미남자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수염이 없는 하얀 얼굴에 선이 얇은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결코,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기대를 걸어볼 만큼의 능력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그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야. 자칫 파국을 불러올 수도 있음이야. 역시 백만의 어림군을 움직이지 않고는···.”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페하의 명 없이 수도에서 어림군을 빼 올 수는 없습니다.”
한 무장의 말에 젊은 미남자의 시름이 깊어졌다.
“일단 한번 보시고 판단하시죠.”
“들라 해.”
미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으로 들어서는 붉은 야행복에 복면을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 사내를 보는 순간 미남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미남자뿐 아니라 장내에 있는 사람들의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흉흉하다 못해 소름 돋는 기운을 뿜어내는 괴인이 젊은 미남자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을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매영이라 부르십시오.”
마치 쇠를 긁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절로 듣는 이들은 얼굴을 구겼다.
“그래도 거사를 맡길 자인데 얼굴은 봐야지?”
복면을 벗는 매영의 얼굴을 보는 미남자의 눈에 흥미가 담기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사람 같군.”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빈 곳 없이 불로 지진 그 모습이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입을 벌리니 눌어붙은 얼굴 가죽으로 인해 눈이 당겨지는 매영.
그의 듣기 힘든 목소리가 나왔다.
“사람이기를 포기했으니까요.”
그의 대답에 미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몇 명이냐? 너와 같은 자가 몇이 있는 거야?”
“저를 포함하여 아홉입니다.”
눈앞에 있는 자가 셋만 되어도 자신으로서도 승부를 장담하기 쉽지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자가 아홉이라면 그 괴물 또한 어찌해볼 도리가 생길 것도 같았다.
“진정 그를 상대로 자신이 있느냐?”
“저는 일행 중 가장 약합니다. 겨우 오천의 혈정밖에 쌓질 못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일만의 혈정을 채우고 마공을 완성한 인물들입니다.”
“호오. 악귀가 따로 없구나. 좋다. 너희들에게 일을 맡기지.”
“약조는···.”
“걱정하지 마라. 그 괴물을 치우기만 해 준다면 명 조정은 너희 화산파의 부흥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무뢰배 같은 무림인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몰아줄 것이야. 너희 화산파가 이 중원 무림의 정점에서 황궁을 위해 그 힘을 쓸 수 있도록.”
“그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충심이 없는 사도 무리는 모두 죽을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신강의 천산에 악독한 무리를 쓸어버리는 데 모든 힘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좋아! 그래 그거면 되었지. 가거라. 가서 그놈의 목을 가져와 멸문한 너희 화산을 다시 살려. 명 조정은 너희의 화산의 앞길을 밝게 비춰줄 것이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아보기 힘든 표정을 지은 매영이 복면을 다시 하며 밖으로 나갔다.
도필호는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떠십니까? 저들이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당두 백과 장형천호 그리고 자네 마지막으로 내가 모두 손을 거든다면 가능하다. 제아무리 그놈이라 할지라도 사람인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야.”
젊은 미남자의 얼굴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 * *
다가오는 혼인날을 기다리는 연수의 나날은 평온했다.
여전히 수련을 등한시하고 놀러 다니기 바쁜 미여와 놀아주었고, 도화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간혹 수하들의 무공을 봐 주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 대부분을 명상으로 보내는 연수.
연수의 혼인 날짜가 열흘 밖으로 다가오자 사천의 덕창으로 모여드는 중원 무림의 인사들.
소림의 방장과 정협맹의 소속된 문파의 문주들이 모두 사천으로 몰려들었고, 사황성의 성주역시 성의 가주들을 데리고 정예와 함께 사천으로 모였다.
중원 무림의 핵심이 덕창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자 덕창현에 활기가 차올랐다.
수많은 무인이 모여 좁은 덕창에서 마주치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어떤 마찰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서로의 목숨을 빼앗으려 병장기를 손에 쥐고 이를 악물던 정사의 무인들이었지만 사황성의 성주와 정협맹의 맹주가 있는 덕창현이었기에 무인들은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중원 최고수가 있는 덕창현에서 소란을 일으킬 담력을 가진 무림인은 덕창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