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완결)
* * *
혈개문의 장원을 밝게 비추는 햇살이 떠오르자 외원의 공터에 쓰러져 죽은 수십 구가 넘는 시체들이 보였다.
그런 시체들의 중심에 서 있는 무인들.
다섯 백발의 괴인들과 흑발의 한 괴인을 둘러싸고 있는 무인들.
“이놈은 아직 혈정이 남아있는 것 같군요.”
당일수의 말에 강진후가 기절해 있는 흑발의 괴인을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놈이군요. 아직 쌓아놓은 기운이 반도 넘게 남았을 겁니다. 모조리 뽑아내도록 하죠.”
강진후의 좌장이 괴인에게 뻗어지는데 급히 당일수가 끼어들었다.
“잠깐! 혹 이놈을 우리 원곡에서 좀 살피면 어떻겠소? 엄청난 목숨을 빼앗아 쌓은 혈정을 그냥 허공에 날리는 것보다야···.”
“확실히 말하죠.”
연수는 당일수의 말을 끊고 장내의 무인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혈정취연공은 다신 세상에 나올 일이 없어야 할 마공입니다. 단 아홉 명이 수만의 목숨을 빼앗게 만든 이 마공은 결국 어떤 이유였건 화산이 마공의 비급을 파기하지 않아 생긴 일입니다. 그 이유가 어떠했던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연공 하는 이런 마공은 정사를 불문하고 절대 다시는 중원에 나와서는 안 될 겁니다.”
멋쩍은지 헛기침을 하며 변명하는 당일수.
“큼큼! 나는 그저 무인으로서의 호기심이 들어서.”
“예. 하지만 단순한 내력이 아닙니다. 사람의 목숨이 담긴 내력이니 모두 자연으로 돌려보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연수의 말에 장내의 모든 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강진후의 좌장으로 끌려와 잡히는 괴인의 머리.
“끄아아아아아! 끄어억···.”
역시나 듣기 힘든 비명과 함께 머리가 새하얗게 새며 다시 혼절하는 괴인.
괴인들의 신병을 둘씩 나눠 받은 소림과 당문 그리고 강진후.
강진후는 제일 먼저 두 괴인의 팔다리 근맥부터 절단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닭 잡듯 괴인들의 근맥을 자르는 모습에 많은 무인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누구도 그를 비난하거나 말리지 않았다.
장내에 쌓인 시체들은 모두 그들의 가족 같은 사형제들이었다.
사문의 동료들을 잃은 그들로서는 강진후의 손속이 전혀 과하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마치 사람을 가축처럼 다루는 강진후가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질 뿐.
근맥을 모두 잘린 괴인 둘을 대충 바닥에 팽개쳐 놓은 강진후가 뒤에 서 있는 무사에게 명령했다.
“비령곡으로 보낼 놈들이다. 비령곡주에게 전해. 사황성 형제들의 원수이니 특별히 신경 쓰라고.”
“옛!”
두 괴인을 어깨에 짊어지는 무사.
다른 무인들은 각자 동료들의 시체를 수습하며 지난 새벽의 폭풍같이 지나갔던 싸움의 흔적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화산의 괴인들과 싸움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혈개문은 평소와 같이 활력이 느껴지는 무사들의 수련이 이어졌고, 연수 역시 혈개문에서의 일상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지내고 있었다.
평소와 조금 다른 것이라면 이제는 항상 도화와 함께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런 와중에 익숙한 기운이 혈개문의 문턱을 넘는 것이 느껴지자 연수가 명상 중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세요?”
연수가 명상 중일 때는 항상 수를 놓으며 연수의 곁에서 자리하던 도화가 연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반가운 손님이 와서. 마중이라도 나가 보려고.”
“그래요? 같이 가요.”
부부는 안채를 벗어나며 정문을 향해 걸었다.
연수의 옆에 꼭 붙어 팔짱을 끼고 걷는 도화.
무인 몇몇을 곁에 두고 걸어오는 사내를 발견한 연수의 입이 열렸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내가 바쁘게 지낸 거야 잘 알잖아?”
“하하, 얼마 전에 혼례를 치르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때는 업무가 바빠 직접 오지 못했습니다.”
“됐어. 보내준 선물은 잘 받았어.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예.”
일행을 맞아 안채로 안내하며 걷는 연수의 시선이 사내의 곁을 지키는 몇몇 무인들을 훑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 보다 많이 좋아졌군.”
“영약과 체계적인 상승무공으로 수련한 보람이 있었지요. 명문이 어째서 명문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그깟 머리나 굴리는 놈들 무공이 보잘것없진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하하, 적영대장님이 보시기에야 어디의 무공인들 보잘것없지 않겠습니까?”
“나한테 아부해도 떨어질 건 없어.”
“그래도 해두는 게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죠.”
사내의 능청에 연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안채로 도착하자 도화는 시비가 내온 차를 손님과 연수에게 따라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말씀 나누세요. 저는 공 언니에게 다녀올게요.”
“응. 바람이 슬슬 차니까 단단히 입고.”
“네.”
미소지며 대답하는 도화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몇몇 무인들.
도화가 나가기 무섭게 쏘아지는 날카로운 살기.
오싹.
갑자기 허공에서 쏘아지는 살기에 깜짝 놀란 무인들이 사내의 곁으로 밀착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아아. 안사람의 호위들이 조금 유별난 편이라서.”
연수의 말에 사내가 밝게 웃으며 허공에 포권을 했다.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천화대의 호위분들이군요. 제 호위들이 실례를 범했습니다. 이해해 주시지요.”
“자네가 이해해. 저놈들은 나한테도 툭하면 살기를 쏘아 보내는 놈들이니까.”
연수의 말에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
“대단한 분들이시군요. 든든하시겠습니다.”
“뭐 그런 편이지. 그건 그렇고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직접 행차한 거야? 하오문의 문주가 직접 날 찾아올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닐 텐데?”
연수의 말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문주가 입을 열었다.
“어림군이 출병하여 사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직접 어림군을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잠시 손에 들었던 찻잔을 내려보던 연수가 찻잔을 탁자에 내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 내관 놈이 끝내 거짓말을 했구나. 황제라면···. 선덕제던가?”
“예? 선덕제라니요? 영락제시죠. 선덕제는 어떤···.”
“뭣?! 그, 그럼 지금이 몇 년이야?”
“영락 삼십삼 년입니다만···.”
벌떡 일어섰던 연수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어느덧 이십 년이 지났으니 영락 삼십삼 년이라는 문주의 말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어째서 영락제가 아직 살아 있냐는 것이었지만.
‘내가 알기론 그 늙은 노친네, 성질머리 못 고치고 나이 먹고 출병했다가 몽골에서 죽었다고 들었는데···.’
무언가 역사가 바뀌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전생에서 보았던 나비효과라는 영화를 보면 별 사소한 일로도 수많은 인과관계 때문에 큰 사건이 변하니 아마도 영락제가 살아 있는 것은 자신의 탓이 분명할 것이다.
‘하긴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구나. 영락제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수의 입이 열렸다.
“그놈···. 큼큼! 그러니까 황군은 지금 어디쯤 있지?”
“지, 직접 나서시려고요?”
“그러라고 친히 알려준 거 아니야?”
“저는 잠시 피해 있는 것이 어떠실까 해서 알려드리러 온 겁니다만.”
“피한다고 끝이 나겠어? 십만이나 끌고 온다며.”
“아무리 적영대장님이시지만 십만의 병사를 상대로 혼자서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게다가 상대는 황군입니다.”
“이미 동창을 잡아 죽일 때부터 황궁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
“그건···. 하아···. 아마도 이제 막 북경을 벗어났을 겁니다. 경로로 보자면 하북으로 가신다면···.”
“그래? 그럼 한번 만나 보고 와야지. 내 얼굴 한번 보겠다고 그 나이에 출병했다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연수.
“지금 가신다고요?”
따라 일어서며 묻는 하오문 문주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다릴 필요 있나. 쇠뿔은 단김에 빼는 거야.”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황제 한둘 죽는다고 명이 사라지는 것도 중원이 망하는 것도 아니야. 황제 못해 안달 난 황족들은 지천에 널렸어. 죽어보면 알겠지. 물리적인 무력 앞에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너무나 놀라운 말에 하오문의 문주는 입을 떡 벌린 채 말문이 막혔다.
황제를 죽인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것은 목숨이 백 개가 있어도 모자를 일이었다.
다만 지금 그 말을 입에 담는 사내는 뱉은 말을 지키고도 충분히 남을 남자라는 게 문제였다.
“그럼 알려줘서 고마워. 다음에 또 보지.”
말을 마치며 밖을 향하는 연수를 불러 세우는 문주.
“저, 적영대장님!”
돌아보는 연수의 무심한 얼굴을 본 문주는 더 연수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점의 귀찮음은 보여도 조금의 긴장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귀찮게 구는 파리를 잡으려고 몸을 일으키는 듯한 그를 보며 어떤 말로 그를 말려야 할지 왜 그를 말려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 문주였다.
“조, 조심하십시오.”
“걱정하지 마. 그럼.”
말을 마치며 신형이 사라지는 연수.
“하아···. 이게 무슨 난리인지.”
빈방에 허무하게 울리는 문주의 한 마디.
북경을 빠져나온 십만의 대군이 수많은 막사를 접으며 다시금 행군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작은 점.
그 조그만 검은 점을 처음 발견했던 한 장수는 호기심에 하늘을 가르는 점을 살폈다.
점점 크기가 커지며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점을 보며 장수의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공이라면 자신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성취를 이뤘다.
지금은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당하여 봉문중이지만 무당의 속가제자로 명문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작은 점이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했을 때의 그의 심장은 멎을 듯 내려앉았다.
-콰아앙!
지척으로 떨어져 내린 인영.
굉음과 함께 적잖은 반발력을 일으키며 땅에 떨어진 인영으로 인해 사방으로 먼지구름이 올랐다.
뒤로 주저앉으며 꿈쩍도 하지 않고 굳어버린 장수.
그런 장수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몸을 일으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사내.
“드디어 찾았네. 십만이나 된다길래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말끝을 흐린 사내는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가장 화려한 막사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굉음과 함께 일어난 기사에 장내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상황파악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금장으로 치장된 커다란 막사로 연수가 접근하자 연수를 막아서는 수십의 금의위 위사들.
“멈춰라!”
“비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막사로 향하는 연수.
그런 연수를 향해 수십의 위사들이 도를 뽑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변하며 위사들은 무겁게 짓누르는 중력에 의해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꿈쩍도 하질 못했다.
그런 위사들을 지나치며 막사로 들어가는 연수.
막사 안에는 눈빛이 부리부리한 노인이 연수를 노려보며 앉아있었고, 그의 곁에는 시비들과 검을 뽑아 든 창위 둘이 같이 연수를 노려보았다.
그런 노인의 앞으로 다가가 의자를 빼내 앉는 연수.
“이놈! 감히 예가 어디라고!”
“밑의 것들은 좀 빠져라. 여기 이 노친네랑 할 말이 좀 있으니.”
연수의 말에 노인은 두 눈을 감고는 발작하려는 창위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고연수라 하는 역적이 네놈이로구나.”
“뭐 역적이라고 하면 역적이 될 수도 있겠지. 맞아. 나야.”
“지금 네놈이 무슨 짓을 하는 줄 알겠느냐?”
“잘 알지. 나를 죽인다고 난리를 치며 오는 적을 친히 맞이하러 왔지.”
“내가 누군지 알고도 그리 말을 하느냐?”
“잘 알지. 연적찬위. 같은 역적 아니었던가?”
연수의 입에서 연적찬위라는 말이 나오자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지며 분노로 가득 차는 황제.
처음 자신에게 저 말을 했던 방효유는 입을 찢어 죽였고, 중화의 역사상 처음 십 족을 멸하는 벌을 내렸다.
“감히!”
“감히는 개뿔. 조카를 죽여 황위를 찬탈한 역적. 당신 맞잖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발작하려던 영락제는 갑자기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기운에 일어나기 무섭게 자리에 앉았다.
이미 검을 뽑아 든 창위들은 바닥에 오체투지를 한 채 미동도 못 하고 있었다.
“어이 폐하. 당신 뭔가 착각하나 본데···. 이 자리가 과연 황제의 권위가 먹히는 자리일까?”
어이 폐하라니. 들어보지도 못했던 망발이었다.
“과연 이러고도 이 자리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
이런 상황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고 호통을 치는 황제를 보며 연수의 손이 빈 허공을 가볍게 때렸다.
-화아아악! 콰차장!
그와 동시에 찢어 발겨지며 날아가 버린 막사.
막사가 사라지자 주변을 감싸고 창을 겨눈 병사들.
그 대열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새카맣게 채워져 있는 병사들.
“십만이 많긴 많구나.”
“흥! 지금이라도···.”
“근데. 어차피 나 죽인다고 오던 길이잖아?”
“...”
순간 말문이 막힌 황제.
“어차피 나 죽인다는 사람한테 못할 게 뭐 있겠어. 안 그래? 폐하?”
“이놈!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림군이 보이질 않는다는 말이냐? 지금이라도 네놈의 죄를 빈다면 고통 없이···.”
“죽여준다? 흥!”
말을 마치며 천천히 허공을 가르는 연수의 손.
천천히 허공을 가르는 연수의 손을 보며 황제는 한 줄기 바람이 분다고 느꼈다.
그 순간.
-투투투투툭.
작은 소리가 쌓여 마치 우레가 떨어지는 듯 큰 소리가 주변에서 몰려왔다.
그 소리에 주변을 돌아보는 황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창을 겨누고 있던 병사들의 창끝이 모조리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추 일만. 이렇게 열 번이면 십만. 백번이면 백만. 창이 아니라 머리를 떨어트려 볼까?”
일순간 장내에 모습을 드러내며 호통을 치는 무인.
“이놈! 황제 폐하의 앞···.”
금의위 남진무사 처도곽은 황궁의 제일 고수로 꼽히는 자였다.
과연 그 명성에 맞게 연수의 압력 속으로 순식간에 파고들고 연수를 호령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연수의 무심한 눈에 시선이 닿는 순간 알 수 없는 현기증이 일어나며 핏물이 가슴을 때리며 올라왔다.
“커헉! 쿨럭!”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피를 토해내는 처도곽.
“입신경의 고수가 또 있었네? 황궁에서 용케 이런 고수를 둘이나 키웠군. 죽이기 아까운 인재야.”
연수의 말에 황제는 이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거인. 사람의 손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인이었다.
무위가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처도곽을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 제압하다니 믿을 수가 없는 신인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처도곽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신위를 보이는 무의 달인이었다.
하늘 위로 한번 솟구치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라갔고, 그가 일 검을 내려치면 수백 적군의 목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 그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는 상대라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라 보기 어려웠다.
“어이 황제. 나이도 들 만큼 들었는데, 곱게 죽어야지. 왜 험하게 죽겠다고 그 나이에 이래?”
“나는 천자다! 하늘이···.”
아직 황제의 자존심을 꺾지 못한 노인의 말을 단숨에 끊는 연수.
“천자는 하늘이 내린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란 건 당신이나 나나 잘 알잖아? 진짜 그리 생각해?”
그럴 리가 없었다. 천자를 하늘이 내린다면 자신은 황제가 되지 못했을 테니.
“당신이나 나나 잘 알지. 황제는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킨 자가 오르는 자리야. 싸움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이기고 그 자리를 쟁취한 자가 황제가 된다는 건 당신이나 나나 잘 알잖아.”
“...그렇다 해도 네놈의 알량한 힘으로···.”
“알량하지 않아. 지금 이 자리에서 십만 어림군을 잡아 죽이고 당신의 목을 잘라 자금성문에 걸고 위정을 바로 하지 못한 당신을 하늘을 대신해 벌했다 말하며 내가 황제에 오른다면 과연 나를 명은 막을 수 있을까? 십만대군 아니라 백만대군도 하루아침이면 쓸어버릴 수 있어. 과연 내가 황제가 되고자 하면 나를 막을 자가 있을까?”
“...”
황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사내는 아주 잠시 보인 신위만으로 충분히 그 능력을 입증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황제의 입이 열렸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제 대화가 되겠군. 나와 중원 무림을 가만 놔둬. 나를 자극해서 당신에게 명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당신의 폭정 덕에 그럴듯한 명분과 힘을 보여주면 돌아설 신하들이 많을걸? 괜한 적을 들지 마. 그 넓은 황궁에서 편히 황제로 살다 죽어. 괜히 밖에서 험하게 객사하지 말고.”
연수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젓는 황제.
“불가능하다. 이미 나는 출정했고, 명분을 갖춘 결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갈 순 없다.”
“그 결과를 얻어보려다가 죽어서 돌아가게 될 텐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두 눈에 미련을 모두 버린 초탈한 황제의 말에서 연수는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난 이래서 정치가 싫어.”
“그런 자가 황제를 하겠다고?”
“못할 것도 없다는 말이지. 하고 싶다고 한 적은 없어.”
“나는 너를 죽일 힘이 없다. 하지만 나는 너를 죽이는 과정을 멈출 수 없다.”
“...”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는 연수에게 의연하게 묻는 황제.
“하나만 묻지. 너는 인간인 것이냐? 신선인 것이냐?”
“그 중간쯤으로 해 두지.”
“허···.”
“마지막 기회야. 선택해 여기서 명왕조를 끝낼 거야? 아니면 명분을 줄 테니 돌아가서 중원 무림에 신경을 쓰지 말고 살 것이야?”
연수의 말에 황제의 눈에 희망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어떤 명분을 줄 것이지?”
“내 목숨. 나를 죽였다고 해. 나는 가족과 깊은 산에 처박혀 은거할 테니.”
“그리 해 줄 수 있겠는가?”
“다시는 무림에 관여하지 않는다 약속하면 해 주지.”
황제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검을 빼 들고 옆에 엎드려 있는 창위의 목을 쳤다.
그 목을 높이 들고는 외치는 황제.
“역적의 목을 베었다!”
일각이 지난 후 어림군에게서 큰 환성이 터져 나왔다.
“오늘의 약속 잊지 마. 나는 황제놀음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황제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은 많으니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사라지는 연수의 신형.
“신선이라···.”
몸을 빼낸 연수는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피를 게워내며 혈색이 점차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자연경의 경지가 이리도 멀었다니···. 흉내 한번 내다가 죽을 뻔했네.”
일만에 가까운 병사들의 창을 일순간 베어낸 검기 바람을 한 수 펼친 것만으로 모든 기혈이 꼬이며 백회의 상단전이 크게 상해 버렸다.
열려있는 백회의 상단전을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의 기를 의지 아래 두는 것이 아직은 연수에게는 생각보다 먼 경지였다.
그대로 땅을 파고 들어가 운기를 하는 연수.
한 달 후 패신살성 고연수가 황제의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중원에 넓게 퍼졌다.
십만의 어림군과 맞서 홀로 싸우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사파인들이 혈개문으로 애도의 발길을 향했고,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구룡산 깊은 곳.
예전 연수와 그의 사부 두보가 긴 세월 함께 지냈던 초옥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꼭 이래야만 해?”
소개의 말에 연수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황제의 목을 정말 꺾기라도 하라고?”
“그래도···. 은거라니. 네 나이 아직 불혹도 안되었다.”
“됐어. 애초에 하산한 목적은 고수가 되는 것이었어. 목표는 이뤘고, 예쁜 색시도 얻었어. 무림에 더는 미련 따위 없어.”
그 말을 듣고는 연수를 말리려던 수많은 지인이 고개를 떨궜다.
강진후는 그런 연수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붙들며 이별의 말을 전했다.
“자네와 닿은 연이 내게는 기연이었네.”
“뭘 그리 어울리지 않는 말을 다 하십니까? 종종 놀러 오세요.”
의족을 달고 다가와 연수를 와락 끌어안으며 그의 등을 두드리는 사황성주 비영.
“사황성은 언제까지고 자네의 공을 잊지 않겠네.”
“그건 잊으면 조금 서운할 것도 같네요.”
피식 웃으며 연수를 놓아주는 성주.
“나랑 상공도 여기서 살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공숙의 말에 연수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소개는 이제 홑몸이 아니잖아요. 이끌어야 할 가문이 있는 몸이에요.”
“그래도···.”
“누이. 자주 찾아오세요.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저는 항상 이 구룡산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끝내 눈물을 흘리는 공숙. 사부가 죽고 난 후 친남매처럼 의지하며 함께 지내던 연수와의 이별이 그녀에게는 큰 슬픔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황성의 고수들과 인연이 있던 고수들이 연수와 작별인사를 했다.
그렇게 무인들이 떠난 구룡산에는 하오문의 문주와 그가 데려온 인부들만이 남았다.
“더 크게 장원으로 지어도 되는데요.”
“됐어. 달랑 네 식구 살 집이 그리 커서 뭐해.”
연수의 말에 빈 허공 곳곳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열네 식구 살 집! 됐냐?”
천화대 무인들은 만족한 듯 모습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글쎄, 이제는 무림에 그다지 미련이 남질 않아.”
“하긴. 모든 걸 이루셨으니까요. 다만 그 많은 걸 이뤄놓으셨는데 아무것도 누리질 못하시니···.”
“글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한 지붕 밑에서 따뜻한 밥 먹으며 별걱정 없이 사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호사는 다 누리는 거지. 옥현인을 봐. 권력 맛에 미치니 똥오줌 못 가리고 할 짓 못 할 짓 다 하다가 객사하잖아. 문주도 불필요한 야망을 크게 갖기보다 무인으로서의 꿈을 크게 갖는 게 어때?”
문주는 연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마음에 새겨놓고 기억하겠습니다.”
“그래. 어차피 이제 나는 은거에 들어간 무림과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뭐 어찌 돌아가든 상관없지만.”
“그래도 지인분들에게 화가 다가오면 출사하시지 않겠습니까?”
“글쎄.”
“혹은 새로운 절세의 무공이 나타난다면···.”
말끝을 흐리는 문주.
“그렇다면야···. 한번 무투행을 나갈지도.”
미묘하게 미소지으며 완성되어 가는 큰 집을 바라보는 연수.
그런 연수를 보며 따라 웃는 하오문의 문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