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034. 서하오창식(西夏五槍式).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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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西夏)인을 한 명도 남기지 말라.
초원의 기마 민족을 통일하고 중원까지 정복해 ‘원(元)’이라는 왕조까지 세웠던 남자치고는 소박한 유언이었다.
이후, 원이 멸하고 들어선 새 왕조의 태조 역시 서둘러 서하를 공격했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서하의 본거지, 흑수성(黑水城)이 멸한 것은 지금 왕조의 초기, 그러니까 태조 때의 일이었다.
중원을 호령했던 시대의 패자들이 그토록 서하 정벌에 열을 올린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몰라도 명확한 사실 하나는.
중원을 차지했던 패자들의 눈에도 그들이 충분히 위협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전 생애에서, 정문이 황궁에서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던 즈음.
금의위(錦衣衛)의 비밀 뇌옥으로 한 명의 이민족 죄인이 호송된 적이 있다.
사내는 자신을 당항강(黨項羌)이라는 민족이라 말했지만, 황궁의 모두는 그를 가리켜 서하인이라 칭했다.
그를 잡기 위해 금의위 위사대 세 개 대(隊)가 전멸했다는 말도 있었으며 독을 사용해 겨우 잡았다는 말 역시 함께 있었다.
당시 금의위를 손에 쥐고 있던 수보 조숭은, 그런 이민족 사내에게 흥미가 생겼다.
- 서하 무인은 얼마나 강한가.
권력의 정점에 선 한 노인의 작은 호기심은 금의위를 움직이게 했다.
황궁의 구석, 비밀 연무장에서 금의위의 최고 전력 중 하나인 호천대(護天隊)의 무사 다섯과 사내의 생사결(生死結)이 벌어졌으니까.
호천대 무사 일인의 무력은 금의위 위사대 하나와 동급.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서하에서도 제법 이름있는 장군 가문의 후계자라던 사내는 이기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눈을 고쳐 떴다.
그 말에서 민족의 부흥이라도 본 것일까.
사내는 창을 들고는 묵묵히 연무장으로 향했다.
결과는.
서하 사내의 죽음이었다.
물론, 호천대 무사 다섯도 함께.
당시 사내가 보여줬던 다섯 개의 창식(槍式)이 바로 서하오창식(西夏五槍式).
정문은 당시 조숭의 최측근으로 그 대결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인물 중 하나였다.
경악.
그 단어 말고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단어가 있을까.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대결을 관전한 모두가 모여들었고, 신분과 관직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머리를 맞대었다.
차근히 상황을 되짚어가며 서하오창식을 하나하나 복원해냈고, 결국, 이를 서책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당연하게도 그 비급은 정문을 거쳐 금의위 비밀 서고로 향했다.
***
“허허, 어떻습니까? 제 아들놈이 창식을 완벽히 구사하지 않았습니까?”
마충백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럽게 말했다.
정확히 대답하자면, 아니다.
완벽? 저건 흉내도 어설프게 겨우 낸 것이 전부다.
“가주도 이기셔야 합니다.”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공의 무공이 창식 앞에서 저리 무용지물이니! 하하하.”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한심한 작자다.
무공을 보는 눈은커녕, 재능도, 노력도, 근성도 없다.
고력강이 자신의 뒤에선 무인을 부른다.
“예, 단주.”
“차간(察罕). 네 눈에는 어떻게 보였지? 소가주의 창술이.”
잔뜩 신이나 앞으로 나선 마충백의 뒤로 두 사람이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쓰레기입니다.”
“훗. 역시 그런가.”
고력강도 저들이 서하오창식을 완벽히 익혔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자신의 수하이자 마지막 계승자인, 차간도 완벽히 구사하지 못하는 것이 서하오창식이 아닌가.
그저 필요한 정도만 알려줬고, 필요한 정도만 쓰면 끝인 관계인 것이다.
“마충백의 성취는?”
“마지막 창식을 제외하고 형(形)은 모두 익혔습니다.”
“믿어도 되겠지?”
“마충백은 몰라도, 서하오창식은 믿을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지만 듬직한 대답이다. 고력강의 마음이 조금 차분해진다.
대공무관 쪽이 무언가 분주하다.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표정도 조금 심각하다.
그래도, 고력강은 저들이 창식의 정체를 알아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훗. 깜짝 놀랐을 거다. 궁금도 하겠지. 네놈들의 상식으론 평생 모를 것이다. 후후후.’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사풍이 삐딱하게 반응한다.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반대로 올곧게 물어 오는 진명.
사풍의 눈이 빠르게 진명과 정문의 얼굴을 오간다. 사풍도 눈치라는 게 있는 인물.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일시에 몰려왔다.
“잘 생각해라, 사풍아. 이거 잘못되면 속가행이고 나발이고 다 실패야.”
정문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는 사풍.
“어쩐지 일이 너무 쉽더라니···, 쳇! 말이나 해보시오!”
그래도 많이 유해졌다.
정문은 그렇게 사풍을 평가했다.
“그 전에.”
정문의 고개가 돌아가자, 명화와 묵환이 백오 그리고 한강을 데리고 온다.
“백 사범부터. 검이 창에 붙었던 것이 사실입니까?”
정문이 서둘러 백오에게 말을 묻는다.
아까 흘러가듯 말하는 것을 놓치지 않은 정문이다.
“······, 정확히 말하면 그런 ‘느낌’이 있긴 했습니다.”
“다음은 소관주. 검이 튕겨 나갈 때. 창 대를 쳤습니까, 창끝을 쳤습니까?”
상체에 붕대를 감은 한강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창 대를 쳤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정문이 다시 고갯짓하자, 명화와 묵환이 그들을 데리고 간다.
“이제 확실하다. 한관주는 절대 마충백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냔 거 아니오!”
발끈하는 사풍.
한수량을 직접 가르치고 수련시킨 사풍의 입장에서 정문의 단언은 제법 불편하다.
“저 창술, 금마세가의 창술이 아니다. 아주 위험한 창술이지.”
!!
“사형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정문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진명이 서둘러 연유를 물어본다.
“···, 그건. 나중에. 우선은 비무부터 멈추자.”
“그게 쉽겠습니까? 당장에 저 분위기를 어찌···?”
비무장을 둘러싼 관중들은 언제 세 번째 시합이 열리나 다들 목을 빼고 기다리는 중이다.
정당한 사유나 이유가 없다면, 이는 곧 대공과 공동의 명성에 큰 누가 될 것이다.
“잠시라면, 멈출 수 있습니다.”
뒤에서 낮고도 진중한 목소리가 깔린다.
한수량.
공동의 속가, 대공무관의 관주 한수량이 이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무언가 긴박해 보이는 도사들의 표정에,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것이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잠시라면 가능합니다.”
믿음직한 표정으로 단언하는 한수량.
말투 속에 비무는 끝까지 해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아예 물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멈춰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수량이 비무대 옆 진행 석 쪽으로 향했다.
무어라 잠시 속닥이더니 한수량이 웃으며 돌아왔다.
잠시 후, 비무대의 옆으로 휴(休)라고 적힌 깃발이 걸리며 한 시진 후에 비무가 다시 개시됨을 알리는 방이 붙었다.
“정식으로 휴회를 요청하면 그만인 것을요.”
때로는 정공법이 답인 경우도 있다.
“이제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제가 마충백을 이길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한수량이 담담히 묻는다.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무인이었다.
비록 무위라는 변방 도시에서 무관을 운영하는 중이지만, 한때는 검술 사범으로 군부에도 몸을 담았던 그가 아닌가.
정황이 맞물리는 상황에서 자신은 이길 수 있다며 객기를 부리는 인물은 아니란 뜻이다.
자신이 질 거란 말에 흥분할 수도 있으나, 한수량의 성정은 그런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는 정문.
정문의 시선이 사풍에게 닿는다.
“관주의 성취는? 또 재능은?”
“기재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관주! 본도와 같이 갑시다. 배우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말입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서두르시지요.”
“음···, 알겠습니다.”
망설이지 않는 한수량.
본산의 제자들에 대한 의심은 전혀 없다.
“사풍! 따라와라. 진명! 애들을 데리고 시간을 최대한 끌 거라. 내가 올 때까지!”
“나 말입니까···? 나는 왜···?”
“옙! 다녀오십시오!”
의문을 표하는 사풍의 멱살을 정문이 휘어잡는다. 끌고 가는 모양새로 사풍과 한수량을 데리고 사라지는 정문.
“휴회를 요청했다고요?”
“그렇습니다. 대인. 아무래도 아들놈이 진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허허허. 못난 자 같으니라고.”
마충백이 잔뜩 한수량을 깔보며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원래 합의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한쪽이 요청하면 한 시진은 쉬게 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마충백이 자리로 돌아가자 호위무사 차간이 고력강에게 다가온다.
“괜찮겠습니까?”
“뭐, 문제야 있겠는가? 왜? 불안한가?”
“아닙니다. 그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그래봤자 다. 저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없으니 말이다.”
“······.”
맞는 말이다.
한 시진 만에 무엇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저들은 저 창식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조금은 불안한 차간이었다.
***
처음에는 무서웠다.
그날 마주했던 서하 무인의 공포가 다시금 정문을 덮쳐오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안심하기로 했다.
저자들이 보여준 창법은 그 서하 사내에 비할 것이 못 되니까.
그리고.
서하오창식의 무서움은 창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하오창식의 가장 무서운 점은 처음 접했을 때. 오로지 창식을 처음 만나는 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점이다.
이는 초식의 변형과 활용에 중점을 둔 창식이라는 특징 때문일 것이다.
바꿔말하면.
서하오창식을 겪고도 살아남았거나, 이미 서하오창식의 창을 견식한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그 창의 파훼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문은 이미 서하오창식을 눈으로 본 경험이 있다.
파훼법.
지금 정문의 무위와 무공지식이라면 충분히 서하오창식의 파훼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잘 들으십시오, 관주. 저들이 쓰는 창법은 중원의 창법이 아닙니다.”
!!
“그렇다면···?”
“이민족, 그것도 서하의 창법입니다.”
“서하라면 이미 멸하거나 다른 민족에 흡수된 이들이 아닙니까?”
무위라는 지역 출신답게 한수량 역시 서하에 대해 모르진 않았다.
“그들은 조용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살아남았습니다. 흑수성이 무너진 뒤에도 살아남아 중원 및 서역으로 숨어들었지요.”
“허어, 그렇다면 마가는 자신들의 무공을 버렸다는 말인 겁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쳇, 배알도 없는 놈들이군.”
사풍이 이죽거린다.
자존심만으로 몸의 반절을 채우는 사풍이 아닌가.
가문의 무공을 믿지 못해 다른 무공을 끌어들이는 무림 세가라니.
인정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사풍이다.
“정문 도장께서는 이길 방법을 아시는 겁니까?”
“다행스럽게도 알고 있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정문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풍. 의심의 눈빛이 계속해서 정문을 찌른다.
정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한 번 지어주고는 마지못해 말한다는 식의 말투로 다다다 변명을 쏟아냈다.
“산에 들기 전, 고아로 자랐습니다. 제가 머물던 마을에 서하의 잔당들이 침입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 알게 된 창식이 바로 저 서하오창식입니다. 평생 잊을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평생. 파훼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괜찮다.
급조한 내용치고는 잘 만든 내용이라 정문은 생각했다.
“과연···, 그랬군요.”
적어도 한수량에게는 통했으니까.
사풍은.
“뭐···, 그, 그런 이야기까지 알려 한 건 아니오! 아, 못 들은 걸로 하겠소!”
통한 것 같다.
동문끼리도 산에 들기 전 이야기는 쉽사리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정문과 사풍처럼 사이가 좋지 않던 이들끼리는 더더욱.
“그러니, 제가 계속 검을 수련하며 찾아낸 파훼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얼른 익히셔야 합니다.”
- 꾸욱.
한수량이 검을 움켜쥔다.
“좋습니다. 무관과 본산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분골쇄신하여 익히겠습니다.”
아마 그것보다는 더한 것이 달려있을지도 모릅니다. 라는 말이 정문의 목에 걸렸으나, 아직은 이르기에 삼키기로 한다.
“헌데, 나는 왜 끌고 온 겁니까?”
“너도 익혀야 한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쓸 곳이 반드시 있을 테니, 배워두거라.”
언제부터였을까.
정문이 저런 말투로 무언갈 명해오면 쉬이 거부하지 못하게 된 사풍이다.
“쳇, 시간이 없으니 빨리합시다!”
그래, 무공도 아니고 그저 파훼법이다.
그 정도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라 스스로 위안 삼는 사풍이다.
“우선 익혀야 할 파훼법은 총 네 가지입니다.”
“창식은 총 다섯 가지라 하지 않았습니까?”
정문이 고개를 천천히 돌린다.
“다섯 번째 창식은 마충백이 감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창식.
그것만큼은 마충백이 익히지 못했으리라 확신하는 정문이다.
그래, 다행이다.
그자가 그걸 익힐 정도의 무재였다면, 정문은 비무 자체를 취소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창식의 파훼는 큰 희생이 따르는 것이니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미 반 시진이 흐른 이제야 정문의 파훼법 전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