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035.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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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량이 휴회를 신청하고 한 시진이 흘렀다.
비무가 멈춘 뒤 웅성거리던 사람들마저 이제는 제법 잠잠하게 재개를 기다린다.
웅성거리던 모습보다 잠잠한 눈빛들이 오히려 재개를 재촉하는 것만 같아 부담스럽다.
금마세가에서는 의외로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저들이 서하오창식(西夏五槍式)이란 창술에 자신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진명의 표정이 점점 굳어간다.
“사형···, 곧 시작해야 할지도 몰라요.”
명화가 잔뜩 불안한 표정으로 진명에게 다가왔다.
“이, 이제 곧 있음 한 시진입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 주변에는 통 보이질 않던데···.”
“기다리자꾸나. 사형께서 올 때까지 시간을 벌라 하셨으니, 그리하면 되는 것이다.”
올곧다.
그렇기에 정문이 믿고 맡긴 것이겠지만, 진명 역시 흐르는 시간을 잡을 방법은 없다.
- 웅성웅성.
주변이 시끄럽다.
한수량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이다.
- 도망간 게 아닌가?
- 설마, 대공이 문을 닫으려고?
- 그럼 왜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가?
- 공동의 도사분들은 여전히 있는데?
- 관주가 도망가도 누가 공동을 욕해?
- 에헤이! 어디 한관주가 그럴 사람인가?
관중들이 나누는 모든 대화가 진명의 귀에 칼날처럼 박힌다.
여기서야 그저 대화겠지만, 저 대화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풍문이 될 것이다.
‘사형···, 빨리 오셔야 합니다.’
진명이 눈을 감는다.
“생각 보다 늦는군요. 무언갈 준비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죽립을 눌러 쓴 차간이 고력강의 뒤로 붙으며 말했다.
“흠, 준비해본들.”
기다릴 수는 있다.
기다린 후 가질 것이 너무도 달콤하니까.
다만,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이쯤에서 재촉한다 해서 금마세가를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가주.”
“예, 대인.”
“이제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시간이 제법 흘렀군요. 내려가서 말을 전하라 하겠습니다.”
이미 한 시진이 거의 다 흐른 시간.
“저어, 대공무관의 한관주께서는 어디 가셨습니까?”
머리를 슬쩍 긁는 한 무인이 다가와 진명에게 물었다.
이제 비무를 재개해야 한다는 일종의 압박이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저희야 언제까지든 기다리고 싶습니다···만. 금마세가 쪽에서 재촉해서요···.”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할 터이니, 돌아가 계시지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재촉하러 왔던 무인은 되려 허리를 연신 숙이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 후우우우.
진명이 한숨을 쉰다.
검을 내려놓는 진명.
공동은 항상 제자들에게 ‘수일(守一)’이란 말을 가르친다.
자신이 잘하고, 잘할 수 있는 것.
잘해야만 하는 것.
그 대상을 정해 한 가지에 몰두하라는 시조, 광성자(廣成子)의 가르침 때문이다.
‘잘할 수 있는 것이라···.’
진명이 눈에 힘을 준다.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스치며 자신이 잘하는 것이 떠올랐다.
“다녀오겠다.”
무덤덤한 한마디를 남기고,
- 탓!
진명이 비무대로 뛰어올랐다.
“사, 사형!”
“어쩌시려구요!”
진명은, 검도 내려놓은 채 그저 비무대로 올라섰다.
“이곳에 모여주신 강호의 형제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공동의 일대제자, ‘도사’ 위진명 입니다.”
진명이 목소리에 내력을 가득 실어 사방을 돌며 포권했다.
- 와아아아아!
- 공동의 무인이다!
- 잘 생겼어요오오오!
점차 기다리는 것을 지루해하던 중인들이 공동의 제자를 보자 크게 반긴다.
감숙에서 공동의 인기는 구파 중 한 손에 꼽을 것이다. 제일은 아니고.
“무얼 하려는 걸까요?”
차간이 고력강에게 물었다.
“글쎄.”
진명이 시간을 끌려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지금 저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
진명은 계속해서 내력을 담은 목소리를 뽐냈다.
“감숙에서도 가장 용맹한 무위는! 그 기운이 아주 강하며 정순한 도시입니다!”
자신들이 사는 도시, 무위를 칭찬하는 말을 하자 다들 귀를 기울이며 진명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수많은 도기(道氣) 역시 깃들어 있지요.”
- 맞습니다아아아!
- 무위 최고오오!
- 감숙이 최고다아아!
감숙을 대표하는 공동의 제자가, 감숙에서 감숙의 도시를 칭찬하는데 환호하지 않을 감숙인이 어디 있겠나.
“오늘 이 자리에서 펼쳐진 비무로 많은 피를 보았습니다. 저는 그 혈기(血氣)가 도기(道氣)를 탁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사실 피는 많이 흐르지 않았다.
마후와 한강이 상처를 입긴 했지만, 선혈이 낭자할 정도는 아니었다.
진명이 눈을 밝힌다.
“이는 곧, 업(業)입니다!”
!!
“아.”
명화의 고개가 내려간다.
붉게 물든 뺨이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담은 것만 같다.
당황하는 중인들.
그런 중인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명이 눈을 부릅뜬다.
“해서! 제가···!”
진명이 말끝에 강조를 둔다.
눈은 최대한 초롱초롱하게 떴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
“저,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고력강이 깜짝 놀라 상체를 앞으로 기울고 마충백에게 평대로 물었다.
“어···, 그, 경전을 읊으려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여기서?”
한시도 몸 밖으로 감정을 표출하지 않던 고력강의 몸이 흐트러진다.
이게 뭐란 말인가.
갑자기 좋은 말씀이라니.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른 몸을 추스른 고력강이 마충백을 쏘아봤다.
“그···, 도사가 염불 외는 데 누가 뭐라고··· 그리고 또 공동의 도인이고···”
맞는 말이다.
한쪽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이기고 지라 도제를 지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중인들에게 좋은 말씀을 전하겠다는데 뭐라 하겠나.
거기에 중인들의 반응이.
처음에는 분명 벙쪘다.
하지만 이내 저 경전을 외는 도사가 누구인지 다들 상기하기 시작했다.
도원소재(道源所在) 서래제일(西来第一) 공동산(崆峒山)의 도사(道士).
도가사상을 믿는 이들에게는 제법 큰 인물일 것이다.
중원인 대부분은 토속신앙과 결합 된 도가사상을 신봉한다.
그렇기에 절에 가 불경을 듣는 것처럼, 도사들에게는 법문이나 강론을 청해 듣곤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토속신앙과 결합하며 도교는 많은 병폐가 생겼는데, 유명한 도사를 찾아 강론을 들으려면 큰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중원 도가(道家)의 가장 큰 병폐였다.
반대로, 지금 저 진명이라는 도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좋은 말을 중인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주변에서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태을무극···, 원시천존에 이어 무량수불까지 나온다.
이를 억지로 끌어 내린다면, 금마세가가 역풍을 맞고 말 것이다.
- 천지를 이루는 양(陽)과 음(陰)은 예로부터······, 해서 혼원(混元)이 이루어지면 이는 곧 현천(玄天)이 도래함을 의미합니다···············이를 진천(眞天)과 통천(通天)에 빗대어··················이게 광성자의 말씀이니···············니라. 태을무극!
- 태을무극!
- 통천은 곧 상천(上天)의··················해서 하늘의 구름을 뚫어·········이는 곧 태청(太淸)을······
어이가 나가버린 금마세가.
그런 반응에 아랑곳 않고 진명은 서둘러 도경을 외기 시작했다.
“고··· 곧 끝날 겁니다. 허허, 어디 경전이 무한하답니까? 거기에 저들은 무인이니 아는 경전도 적을 것입니다!”
마충백이 애써 고력강을 달래본다.
마충백은 몰랐다.
진명이 아는 경전을 다 외려면 적어도 이레는 넘게 필요하다는 것을.
진명은 ‘진짜’ 도사다.
진짜 도사가 어디 경전 외는 것을 힘들어하겠는가.
“저···, 사저. 이거 괜찮은 거겠지요?”
묵환이 당황한 표정으로 명화를 바라봤다.
“바, 방법이 없잖니. 기도하는 수밖에···.”
명화 역시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그저 확실한 것은 진명의 저 도학 강의에 누구도 딴지를 걸지 못하고 중인들 역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얼른 정문이 와주기만을 바라는 명화다.
“사형강림 급급여율령(師兄降臨 急急如律令)···.”
공동의 ‘수일’이란 가르침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
“이해하셨습니까?”
차가운 눈빛의 정문이 무릎을 꿇은 한수량을 내려다본다.
“아직입니다···!”
고개를 돌리는 정문.
“시간이 없습니다. 마지막입니다.”
“한 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수량의 뺨을 타고 땀이 흐른다.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조금만.’
***
- 이는 불가의 가르침과도 상통합니다. ············해서 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에도············ 한 것이니, 태을무극이로다!
- 아아! 태을무극!
진명은 벌써 한 시진이 넘는 시간을 도경을 외는 것에 쓰고 있다.
노장(老莊)을 한 번씩 건드리고는 이제 불가(佛家)의 이야기까지 거론한다.
중인들은 이미 진명의 거룩한 가르침에 고개를 숙이고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중이다.
시작하기 전에는 오히려 긴장했던 진명.
허나, 입을 한 번 열고 나니.
오히려 자신이 더욱 신이나 잊었던 내용까지 줄줄 나오는 중이다.
진명에게는 학도(學道)의 삶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가주! 한 시진을 더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그만 자르시지요!”
고력강이 처음으로 분노란 감정을 쏟아 낸다. 마충백을 경멸하는 감정에도 나오진 않았던 분노가 드디어 터진 것이다.
모여든 중인들과 고력강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마충백이 침을 꼴깍 삼킨다.
‘그래, 한 시진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 일곱 개의 기운이 만들어내는 천지를······ 해서 그를 죽이는 것은·········칠살(七殺)············
“좋은 말씀은 감사합니다, 위도장!”
내력을 실은 마충백의 목소리가 진명의 강론을 자르고 들어간다.
슬쩍 눈을 돌려 마충백을 보는 진명.
“허나! 지금 여기 모이신 분들은 도장의 강론을 들으러 오신 분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미뤄둔 일을 먼저 처리한 후! 강론을 다시 여시지요!”
마충백이 정론을 들어 진명의 강론을 저지하려 한다. 그냥 두면, 저게 언제까지 계속될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허허, 마가주께 사죄드립니다. 이렇게 모이신 분들이 잘 들어주시니 제가 너무 신이 나서 그만······, 어찌 한 말씀만 더 드리면 안 되겠는지요?”
진명은 최대한 완곡하게 시간을 더 끌려 노력했다.
하지만.
“혹! 한관주께서 도망가신 게 아니외까?”
마충백의 도발이 조금 거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했던 휴회시간이 지나고도 한 시진이 더 지났습니다! 헌데 아까부터 한관주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군요! 이거 제가 괜한 의심을 하는 것입니까?”
마충백의 말이 술술 풀린다.
이는, 마충백의 생각이 아니란 말이다.
뒤에 선 고력강이 마충백에게 일러준 말임이 분명했다.
“저는 그저 좋은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진명이 물러서질 않는다.
어떻게든 사형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도장께서 버티시니 더욱 수상합니다! 여기 모여주신 여러분께서도 대공무관 쪽을 한 번 보십시오! 한관주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마충백은 잔뜩 과장된 손짓으로 대공무관의 무인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당연하게도.
그곳에 한수량은 없었다.
- 진짜 없구먼!
- 아까 도망갔다던 말이 사실인감?
- 한관주가 설마?
- 에이, 아들이 지니 겁이 난 거지.
좋지 않다.
흐림이 바뀌었다.
이제 이 흐름을 돌리려 한다면 역풍이 진명을 향할 것이다.
‘시비를 걸어볼까···?’
진명의 눈이 차갑게 고력강을 스친다.
지금 판을 뒤집는 방법은 금마세가의 배후에 선 자. 고력강이 유일할 것이다.
- 빨간 머리 근처는 가지 말거라. 크게 다친다.
사형이 당부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도, 지금은.
저 말보다는 시간을 끄는 게 우선이다.
진명의 안광이 고력강을 응시한다.
결심이 선 것이다.
“그 뒤에···”
“지랄하네.”
진명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아주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 누가 감히!”
마충백이 노성을 뿜었다.
“아, 제 사제에게 한다는 말을. 죄송합니다. 헤헤.”
비무장의 입구에 선 정문이 머리를 연신 긁으며 사과했다.
진명에게 다가와 귀를 잡는 정문.
“이놈아! 좋은 말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라 하지 않았느냐! 잘못된 전파는 지랄이라 내 가르치지 않았더냐!”
얼른 진명을 혼내는 척을 하며 끌고 가는 정문.
- 수고했다.
정문이 입으로만 살짝 말했다.
그리고 정문의 뒤로.
“나를 찾으셨소이까!”
한수량이 모습을 나타냈다.
!
“한관주! 도망이라도 가신 줄 알았습니다! 허허허!”
“내 위도장의 말씀이 좋아 함께 나눌 생각에 자리를 부러 비웠더니, 마가주께서 끊으셨구료.”
내력이 실린 한수량의 말에 관중들의 눈이 일제히 마충백에게 향한다.
그가 주장하던 도망도 아니었다.
자신들을 위해 자리를 비웠던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마충백이 그 좋은 말씀을 끊은 나쁜 놈이 되는 것이다.
얼굴에 당황이 역력한 마충백.
“그, 그게 아니라!”
마충백이 서둘러 고력강을 바라본다.
입을 다물고 고개만 흔드는 고력강.
더는 말을 섞지 말란 뜻이다.
“흠, 뭐. 도장의 좋은 말씀을 자른 것은 사죄드리겠소. 허나! 지금은 비무를 위해 모인 것! 본분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 타앙!
마충백이 말과 함께 창으로 비무대의 바닥을 찍는다.
“그 또한! 좋은 말씀이오. 이 한모. 피하지 않겠소이다!”
- 채앵.
한수량이 비무대로 올라서며 검을 뽑는다.
석 달간 이어진 분쟁의 주체.
두 문파의 수장이 드디어 무기를 섞는 순간이다.
차가운 눈빛을 주고받는 둘.
몸에서 뿜어지는 날카로운 기도가 서로를 노려본다.
“세 번째 시합을 속행하겠습니다.”
진행자의 안내가 이어진다.
이내.
“시작!”
이라는 소리와 함께 두 무인의 몸이 앞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