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037.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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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액(张掖)으로 돌아간다.”
금마세가(錦馬世家)로 돌아온 고력강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다, 단주!”
- 쿵!
무릎을 꿇는 차간.
“속하가 부족하여 저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뒤로 돌아선 채 고개를 절레 젓는 고력강.
“네 잘못이 아님을 안다. 창을 잡은 이가 너였다면 결과가 달랐을 거란 것도 잘 알고.”
당장에라도 지옥문을 열어버릴 수라(修羅) 같던 고력강의 얼굴이 이제는 제법 평온해졌다.
“훗. 욕심이 과했음이야. 애초에 공동의 속가란 사실을 알았을 때, 손을 뗐어야 하는 것을.”
“단주. 맡겨만 주십시오. 대공과 공동의 제자들을 오늘 밤 안에 모두 치워버리겠습니다.”
가슴으로 주먹을 끌어당긴 차간의 말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 스윽.
돌아서는 고력강.
“대공도, 공동의 제자들도. 모두 치워버려 해결될 일이라면 내 어찌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겠느냐?”
“······.”
“본궁의 허락 없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거늘···. 욕심이 과했던 거야.”
말을 뱉는 고력강의 얼굴에 씁쓸함이 자리한다.
“공동의 도사가 물건에 대해 아는 것 같았습니다. 행여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애써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차간의 말에도 고력강의 결심은 굳건하다.
“지금 혈풍(血風)을 일으키면, 물건은 얻을 수 있겠지. 허나. 본궁에도 일이 알려질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
고력강의 물음에 차간이 감히 답하지 못한다.
자신들은 본궁의 허락 없이 움직인 몸.
만약 본궁이 허락 없이 움직인 일과 공동과 충돌한 일을 모두 알게 된다면, 그들의 목숨은 온전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얻게 되는 것과 잃게 되는 것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물건은···, 공동이 가져가겠지.”
“······,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후후후. 욕심은 여기까지다. 내일 장액으로 돌아간다.”
말을 마친 고력강이 의자에 몸을 던지듯 내려앉았다.
- 후우우우.
“마충백이 입을 열진 않겠습니까?”
“그들을 장액으로 데려간다.”
이미 모든 생각이 정리된 듯, 고력강의 입에선 즉답이 나왔다.
“데려가서는···?”
“네가 일을 좀 해야겠지. 다들 좋은 곳으로 모시거라.”
“예, 단주.”
아쉽다.
아쉽지 않다는 말은 무조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서는 잃어야 할 것이 너무도 큰 것이 사실이다.
자신들이 잃어야 하는 것은 목숨이니까.
물건 역시.
필요에 의한 물건이 아닌, 그저 궁에 공을 세우기 위해 찾았던 것. 지금은, 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벌을 두려워해야 하는 시점이다.
고력강의 턱이 위로 들린다.
“공···동···.”
분명 서하오창식(西夏五槍式)의 파훼도, 도관에 대한 내용도 마지막에 말을 걸어온 그 도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눈이 깊어지는 고력강.
이내 고개를 돌리고 차간을 향해 명을 내린다.
“준비하거라. 나는 다른 흔적들을 지울 것이니.”
“예, 단주.”
말을 남긴 고력강이 방문을 나선다.
달이 밝게 내려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은 밤이다.
***
비무에서 승리한 대공무관은 그야말로 잔치판이 열렸다. 다들 웃고 떠들며 입에는 술과 안주를 집어넣기 바쁘다.
“하하하하!”
“백 사범님! 한 잔 받으십시오!”
“아, 소관주! 어깨 펴세요!”
석 달 만에 찾아온 평화에 제자들의 얼굴이 펴진다. 그런 무관의 제자들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공동의 도인들.
“허허, 도장들께서는 드시지 않으십니까? 아, 혹여 곡차(穀茶)는 안 하시는···?”
잔뜩 신이 난 한수량이 이들에게 다가섰다가 이내, 아 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닙니다. 공동은 육식과 술을 금하지 않습니다. 그저···, 불안해서요.”
“불안하시다구요? 무엇이···?”
“금마세가 말입니다. 모든 걸 잃은 자들이 아닙니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그들이 야음을 틈타 일이라도 벌이면 어쩌나 싶어···”
“그러셨습니까? 허허. 사실 저도 그런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대답하는 한수량의 눈이 잔치판 한가운데로 향한다.
“우하하하하! 소관주! 더 드시오! 더 드셔!”
양손으로 술병을 잡고 한강의 입에 쏟아붓는 정문. 한수량의 눈이 정문에게 향한다.
진명과 명화가 고개를 푹 숙이며 애써 그 광경을 외면했다.
“정문 도장께서 말씀하시길, 금마세가의 뒤에 선 자들은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 것 같다 하시더군요. 아마 습격은 없을 거라 하셨습니다.”
“음···, 사형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아마 그럴 것입니다. 허나···, 사람의 마음이란 또 모르는 일이라···.”
계속되는 진명의 걱정에 다른 제자들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그들은 궁지에 몰린 사파인이 구파일방의 앞마당까지 밀고 내려오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어떤 일이라도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도사들이다.
“추가로 금마세가 쪽에 사람을 보내뒀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있다면, 금세 보고가 올 것입니다.”
“음···. 그렇습니까?”
사람까지 보내두었다는 한수량의 말을 듣자, 진명과 명화, 묵환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다.
“그럼, 우리도 가서 놀아요!”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명화가 웃음이 돌아왔다.
“마, 맛있을 것 같습니다!”
묵환의 입에는 침이 조금 고여있다.
“가서 마음 편히 놀거라. 나는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다 갈 것이니. 부담 가지지 말고.”
진명이 잔뜩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명화와 묵환을 보내준다. 이전부터 마음은 저곳에 가 있었던 사제들임을 모르지 않는 진명이다.
“가요! 관주! 제 주량을 보여줄게요!”
명화가 한수량의 팔을 끌고 잔치판으로 들어갔다.
이제 남은 이는 진명과 사풍, 둘 뿐이었다.
“너도 가서 즐기거라. 내 상황을 지켜볼 것이니.”
“흥미 없소. 사형이나 가시오. 내가 지켜볼 테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힘드느냐?”
“뭐요?”
발끈하며 휙! 고개를 돌린 사풍이 당황한다. 진명의 표정이 잔뜩 웃음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농담이라곤 주고받지 않는 사이의 둘.
지금 진명은, 처음으로.
사풍에게 농담을 던진 것이다.
“무, 무슨 그런 표정이오? 그건? 내, 내가 편해진 것이오?”
“글쎄, 어려웠던 적도 없어서 말이지.”
또다시 웃으며 말하는 진명을 보며 사풍이 어찌할 바를 모른다.
“미, 미쳤군! 미쳤어! 다들 미쳐가는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실을 부정하는 사풍.
“난 가오! 간단 말이오! 찾지 마시오.”
당황한 사풍이 얼른 말을 뱉으며 담벼락을 넘는다.
그의 발이, 금마세가 쪽으로 향하는 것을 진명이 확인했다.
사형이 사풍을 보고 귀여운 놈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은 진명이었다.
밤이 깊도록 계속된 술자리는 새벽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자리를 파했다.
연무장에서 서로 엉켜 술을 마시던 이들은 각자 등이 닿는 곳에 대충 몸을 누이고 잠을 청했다.
뒤늦게 합류한 명화와 묵환도 이미 곯아떨어졌다. 사태를 지켜보던 진명과 사풍도 이제는 안심하고 눈을 붙였다.
모두가 잠든 새벽.
무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관주 집무실의 지붕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연무장을 내려다 본다.
“거기 계속 서있으면, 내가 잠을 못잘거 같은데?”
그런 그림자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스윽.
뒤를 돌아보는 그림자.
달빛이 얼굴에 내려 그의 얼굴을 밝힌다.
지붕에 우뚝 선 그림자는 붉은 머리의 사내, 고력강.
그리고 그의 앞에는.
공동의 대제자, 정문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그리 기도를 뿜어대니, 잘 수가 있어야지.”
“역시.”
정문의 말을 들은 고력강의 얼굴에 미소가 걸린다. 무언갈 알아냈다는 표정이 확실했다.
“아.”
정문이 짧은 신음을 토한다.
자신이 기도를 꽁꽁 숨겨가며 평범한 일대제자나 후기지수를 연기하던 것을 잊은 것이다.
지금 고력강이 뿜어대는 기도는 제법 기세가 강하지만 또 선은 얇은 기도. 웬만한 기감으로는 이를 잡아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뭐. 들킨 걸 어쩌겠어.”
어깨를 으쓱거리는 정문.
“근데, 부리나케 도망이나 가지, 여기서 뭐 하냐?”
정문이 턱으로 고력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러날 것도 아셨다는 뜻입니까?”
고력강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내가 ‘여기 서하놈이랑 서역놈이 일을 꾸미니까 다들 주목 좀 해주십시오!!!!!’하고 소리라도 쳐야 물러나려나?”
정문이 잔뜩 과장하며 우스꽝스럽게 소리치는 모습을 흉내 냈다. 조금은 목소리가 컸지만, 지붕 아래까지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정문의 말처럼.
고력강이 물러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개입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정문은 저들이 몸을 사리며 정면에 나서기를 꺼리는 것을 보고 오늘 밤 물러날 것이라 예상한 것이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도 아시는 것 같고.”
“모를 것도 없지.”
“허면, 왜 왔는 지도 아시겠습니까?”
“대충? 흔적들을 지워야 할 테니까··· 죽이려고?”
“가능하겠습니까?”
“너 정도면, 될 것도 같은데?”
“저와는 생각이 다르시군요. 후훗.”
“뭐, 생각은 자유지.”
긴장감이 감도는 둘.
긴장감과 함께, 침묵도 둘 사이에 내려앉는다. 말없이 시선만이 서로를 교차한다.
이런 침묵은.
정문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가, 가라고. 서역놈도 서하놈도 본 적이 없으니까, 가.”
정문이 손을 연신 흔들며 말했다.
얼굴에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 씨익.
고력강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새겨진다.
저 도사는 참.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다.
처음부터.
공동의 도사들을 건드릴 생각 따윈 없던 고력강이다.
공동을 건드리는 순간, 감숙은 시끄러워질 것이고 이는 곳 본궁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아무런 충돌 없이, 그저.
공동의 도사들이 자신들을 모른 척해주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럼, 공동은 저희와 만난 적이 없는 거로 알겠습니다.”
“이번 일은 금마세가와 대공무관의 다툼이었다. 그뿐. 금마세가는 장액이나 서역으로 떠난다. 그뿐. 그 뒤 그들이 죽든 말든 우린 모른다. 그뿐. 도관에 뭐가 있든지, 우리가 먹는다. 그뿐. 됐냐?”
정문이 깔끔하게 정리를 해준다.
고력강이 원하던 것들을 전부.
공동이 저렇게만 일을 처리해준다면, 자신들의 행적은 전혀 본궁에 들킬 위험이 없을 것이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훗. 또 뵙게 될 겁니다.”
“뒤끝 남기기는. 가. 얼른. 정들라.”
정문이 마지막으로 손짓하자, 고력강이 지붕 아래로 몸을 던진다. 중간까지 내려가던 신형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춰버렸다.
정문이 슬쩍 자신의 손을 들어 올린다.
꽉 쥐었던 주먹이 펴지자, 손바닥에 땀이 조금 맺혔다.
‘그냥 가는 걸 알면서도···’
손바닥을 숨기려는 듯, 정문이 얼른 다시 주먹을 쥔다.
저놈들과 정면으로 맞부딪히지 않는 것은 다시 생각해도 다행이다.
당장 붉은 머리 놈은 정문이 막아설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패하는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문이 붉은 머리 놈을 상대하는 동안이 문제일 것이다. 다른 놈들처럼 한방으로 끝낼 자신은 정문도 없었으니까.
그동안 사제들이 막아야 할 죽립을 눌러 쓴 그놈은, 사제들에게 아직 역부족일 것이다.
저들이 혹시나 감정에 눈이 멀어 은밀함을 깨고 전면으로 나서면 어쩌나 걱정도 있었던 정문.
처음에는 조심을 기해도.
일이 틀어지면 갑작스레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이 아닌가.
다행히도 저들은.
감정에 눈이 멀어 이성을 멀리하는 머저리들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저들의 실체가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산화사괴와의 일 때도 고창 지역에 새로 생긴 세력에 관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고창(高昌)은 서역의 입구와도 같은 곳.
분명 저들과 모종의 연관이 있으리라, 정문은 의심했다.
하지만.
굳이 물러나겠다는 저들을 잡아다 정체를 밝히라며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속가행을 하러 이곳에 온 것일 뿐. 속가의 근심은 오늘로 이미 해결이 되었다. 일은 여기서 마무리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일 것이다.
거기에.
뭔지는 몰라도 저들이 노리던 ‘무언가’가 뇌공도관(雷崆道觀)에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분명, 좋은 것일테지.
정문의 입이 찢어진다.
앞에 몰려왔던 걱정들을 날려버릴 정도의 밝은 미소다.
달빛이 조금은 기울어 정문의 뒤로 넘어갔다.
유난히도 큰, 그리고 넓은 그림자가 대공무관의 연무장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