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040. 우리 애들이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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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묘에서 나온 정문은 서둘러 한수량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자신들이 떠난 후 한묘(漢墓)를 널리 알리고 고인(故人)의 뜻대로 서량에 곡식을 베풀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묘의 사정을 모두 들은 한수량은 두말없이 그리하겠노라 대답했다.
자신 역시 서량에서 나고 자란 무인.
한족에 동화되고 싶었던 무인 글필상(契苾上)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떠나시고 한 달여가 지나면 한묘가 알려질 겁니다. 공동의 이름도, 서역인과 서하인의 이름도 없을 터이니 걱정 마시지요.”
깔끔한 일 처리다.
일러준 그 이상을 생각해내는 한수량의 일 처리에 정문이 감탄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을 해주셨습니다.”
본디 한묘는 한수량의 땅에서 나온 것.
모두 자신의 것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한다 해도 한수량을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한수량은 모든 것을 서량에 베풀겠노라 선언했다. 인자한 영웅의 풍모였다.
거기에.
한수량은 공동의 제자들이 제품에 쏘옥 끌어안고 나온 물품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가져도 좋다는 뜻일 거라 제자들은 생각했다.
“헤헤헤···”
“히히히···”
“오오오···”
저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무언가를 쓰다듬는다.
한 명은 술병이 담긴 상자를 인형처럼 끌어안고 있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연신 반짝이는 손을 흔들며 무희처럼 춤을 춘다.
다른 한 명은,
“수 백 년! 수 백 년!”
을 외치며 며칠째 칼만 벼리는 중이다.
“그래서, 사문으로는 언제 돌아갈 거요?”
그런 상황을 더는 보기 싫었는지, 사풍이 퉁명스레 말을 던졌다.
동시에 돌아가는 고개.
모두가 전각의 중앙으로 모여든다.
“흠, 속가의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속히 귀환하는 것이 답이겠지.”
“조금은 더 있었어도 되지 않나요?”
“아, 아쉽습니다!”
올곧은 진명과 아쉬워하는 사제들.
“사문을 너무 오래 비우는 것도 좋진 않지. 다른 사제들은 언제쯤 돌아오려나?”
“다들 지금쯤 귀환하려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공동의 속가는 대부분 감숙에 있고 일부만이 섬서에 있습니다. 다들 이른 시일에 복귀할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제일 늦을지도 모르겠네.”
“항주로 간 사제가 있으니, 제일은 아니지요.”
“음. 돌아가면 또 감금 생활이겠군.”
정문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사제들도 함께.
이런 분위기가 불편하기만 한 사풍.
모두의 저 씁쓸한 표정이 자신을 탓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쳇···! 다들 분위기는! 곧 검문첩(劍門牒)이 올 거 아니오! 그때 되면 저 사형이 또 무슨 수를 쓰겠지!”
“검문첩···?”
정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검문첩!”
“그러니까, 검문첩?”
“모르네. 이 사람 모르고 있었네.”
명화가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찬다.
“검문첩은 3년에 한 번 여러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정확히 말하면 검문(劍門)인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모이기 위해 보내는 초대장이지. 매번 다른 문파에서 열리고. 아냐?”
“?”
명화의 고개가 정문처럼 또 기울어진다.
“아시네요?”
“정확한 이름은 검문논검회(劍門論劍會)였나? 암튼 그런 거였지. 올해는 아마 화산(華山)에서 열릴 테고?”
“잘 아시네요. 왜 모른 척하셨어요?”
정문은 몰랐던 것이 아니다.
황궁에서 일할 때도 검문논검회가 열릴 때면 감시 등급을 특급으로 정해 시선을 고정하곤 했다.
늘 새로운 후기지수가 등장하고 그들이 이름을 알렸으며, 그렇게 이름을 알린 후기지수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강호를 대표하는 고수가 되곤 했다.
정문이 몰랐던 것은.
“그 초대장인 검문첩이 공동에도 온다고?”
공동이 그 검문첩을 받는 대상 중 하나인 것을 몰랐을 뿐이다.
“당연하죠! 구파일방인데요!”
명화가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근데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잖아?”
“이 사람은 가끔가다 이런다니까!”
소리 지르는 명화를 진정시키며 진명이 설명을 이었다.
“참석을 안 했을 뿐입니다. 늘 검문첩은 받고 있었지요.”
“아니, 받았으면 참석을 해야지! 왜 참석을 안 해?”
정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의 시선이 사풍에게 향한다.
차마 당사자의 면전에서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지만. 누군가의 조부가 철저히 막기 때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
애써 시선들을 외면하는 사풍.
“혹시 이번에도 복안이 있으십니까?”
진명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정문에게 말을 묻는다.
그래, 이렇게 그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가는 것이 사풍은 오히려 편할 것이라 진명은 판단했다.
“사태를 지켜봐야겠지.”
정문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논검회라···.”
참석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거짓일 것이다.
황궁에서 일하던 당시도 늘 구경하러 가고 싶었던 것이 검문논검회니까.
하지만.
검문논검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중원에 진출하겠다는 일종의 신호로 보일 수 있다.
다른 문파나 중원의 호사가들은 몰라도, 적어도 사문 내의 태상장로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중원의 ‘중’자만 나와도 거품 무는 양반들인데···’
이미 속가행을 준비하며 사문의 정치만큼은 제 뜻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지 않음을 여실히 느낀 정문이다.
‘사숙이나 스승님이 조금만 도와주면 될 것도 같은데···’
스승인 자정은 속을 알 수가 없다.
사숙이 자명은 너무도 단순하다.
그들에게 자발적인 도움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머리가 아닌 몸을 쓰며 살고 싶었던 정문. 아직도 머리를 움직여 정치적으로 계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골이 아프다.
“일단 돌아가자. 가서 사태를 지켜보자고.”
“옙!”
우렁찬 대답이 들려온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힘이 나는 것만 같다.
***
“조금 더 머물다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잔뜩 습기를 머금은 눈으로 한수량이 정문의 손을 부여잡는다.
“가야지요. 본산의 제자가 본산을 오래 비울 수가 있겠습니까. 허허.”
이럴 때는 잔뜩 진중함으로 대제자를 연기하는 정문이다.
“꼭, 꼭 다시 들려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수량이 공동의 도인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인사를 전한다.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고 다시 와서 좋은 말씀을 무위에 전할 것이니, 기다려 주십시오.”
“소관주! 알려드렸던 수련 게을리하시면 안 돼요! 아시죠?”
“꼬, 꼭! 다시 오겠습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본산에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저마다 자신의 마음을 담은 작별을 건네고 어렵사리 발을 뗀다.
거리 끝에서 도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무관의 식구들.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는 도사들이지만, 시선이 느껴져서일까, 무위를 나서는 발이 무겁다.
“아, 올 때는 말 타고 편하게 왔는데! 갈 때는 또 걸어서 가야 하네요?”
피곤하다는 듯 기지개를 피며 말하는 명화의 말에 모두의 동공이 떨린다.
“자, 잠깐! 그런 말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혹여라도 사형께서···”
놀란 진명이 서둘러 정문의 눈치를 살핀다.
혹여라도 다시 마적을 잡아 말을 타자는 말이 나올까 기겁을 한 것이다.
다행히.
정문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조금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사형을 바라보는 진명.
“저··· 사형?”
“응?”
“갈 때는 평범하게 가는 겁니까?”
“뭐 올 때는 특출나게 왔니?”
그게, 평범하진 않았죠.
라는 말이 목에 턱하고 걸리는 진명이다.
“갈 때는 관도를 타고 빠르게 내려간다. 얼른 본산에 가서 준비해야지!”
사태를 지켜보자며 짐짓 신중한 척을 했지만, 내심 정문은 검문첩이 기대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것 때문이겠죠?”
진명의 귀에 속삭이는 명화.
“음, 그런 것 같구나.”
“시, 실망이 클 텐데요?”
사제들이 보기에도 논검회에 참여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조심히 사풍에게 다가가는 명화.
요즘 공동에서 가장 담이 큰 사람은 명화다.
“진사형. 검문첩도 어떻게 안 될까요?”
“?”
고개를 살짝 돌리고 눈을 크게 뜨는 사풍.
“?”
똘망한 명화의 눈이 대답을 기다린다.
“뭐 하는 거냐?”
“질문하잖아요.”
“······.”
어이가 없는 사풍.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들과 나눈 대화는 본산에 든 후를 통틀어도 열 마디가 넘을까 말까였다. 그중, 절반은 서로 욕지거리나 비난하는 말이었고.
이제는 제법 가까운 척을 하며 말을 걸어오는 명화가 당황스럽기만 한 사풍이다.
“쳇.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주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군.”
“불편할 건 또 뭐 있어요?”
잔뜩 눈을 부라리며 멀리 가라는 의사표시를 해보지만, 명화에겐 통하지 않는다.
“아니, 이번 속가행도 사형이 손을 썼다면서요? 그럼 검문첩도 어떻게 안 될까요?”
끈질기다.
사풍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명화의 끈질김이 통한 걸까. 사풍이 살짝 입을 연다.
“검문첩은···, 무슨 수를 써도 안 될 거다. 그것만큼은 허락할 분들이 아니니까.”
말투는 딱딱하나 그래도 대답의 형식을 갖춘 답을 들려준다.
“피이. 안되는구나.”
잔뜩 실망하는 명화.
“그래도 좋네요.”
“안된다는 말이 뭐가 좋단 말이냐?”
“그거 말고요.”
“?”
“사형이랑 이렇게 편하게 대화하면서 걸으니까 좋다고요.”
- 씨익.
명화가 진하게 웃는다.
자신에게 한 번도 지어준 적이 없던 얼굴로 아주 진하게.
사풍의 걸음이 멎는다.
조금은 멀어지는 사형제들.
몇 걸음을 걷다 그들도 멈추어 선다.
뒤를 돌아보는 넷.
조금은 멀찍이 사풍이 서 있다.
“사형! 뭐해요? 빨리 와요. 같이 가야죠.”
멀리서 길게 손을 내미는 명화.
그 뒤로 소심히 웃어 보이는 묵환과 묵묵히 기다리는 진명이 보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당연하게 멈춰 서 있는 정문.
사풍의 고개가 내려간다.
여전히 기다리는 사형제들.
아주 잠깐 망설이던, 사풍의 발이 다시금 움직였다.
***
아무도.
그러니까 진명, 사풍, 명화, 묵환을 통틀어 이 중 그 누구도.
평범하게 평량으로 향할 것이란 정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은 없었다.
사형이 하루 이틀이면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산을 올라 ‘선량한’ 산채를 괴롭힐 것이란 그런 믿음이 이들에겐 있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을 애써 박살이라도 내듯, 평량과 딱 하루 거리에 있는 육반촌(六盤村)까지 정문은 아무런 기행을 벌이지 않고 내려왔다.
“오, 오히려 이게 힘듭니다!”
잔뜩 긴장한 몸의 묵환이 힘을 주어 말했다. 언제 사형이 산채로 발을 돌릴지 모르기에 온몸에 긴장을 가득 품은 상태였다.
“아오, 그냥 몸 쓰는 게 낫죠! 이건 마음이 고생이라고요!”
“저치가 아픈 게 아니요? 진짜 미쳤거나!”
사제들은 저마다 지금의 상황이 어색하고 낯설기만 하다.
“아직은. 긴장을 풀지 말거라. 하루가 남지 않았느냐?”
온몸에 기를 날카롭게 두른 진명이 사제들에게 경고를 해준다.
공동산에 닿기 전까지는.
정문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육반촌에서는 조금 편하게 쉬자구요. 여긴 그래도 우리 동네 같은 느낌이잖아요?”
명화의 말처럼, 육반촌은 공동과 이웃하는 육반산(六盤山) 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로 그저 몇 개의 음식점과 작은 시장, 객잔, 그리고 민가가 전부인 곳이었다.
“어?”
가장 선두에 서서 앞을 살피던 정문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왜 그러십니까?”
빠르게 튀어나오는 진명.
긴장을 몸에 두르고 있었던 덕이다.
“야, 요즘엔 칼 찬 놈들이 관도도 넘보네?”
미간을 마구 꾸기며 인상을 쓰는 정문.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제법 건장한 덩치의 무인들이 저마다 칼을 차고 무리를 지어 있었다.
대략 스무 명에 가까운 무인들.
보통 칼 차고 이렇게 모여 다니는 이들은 마적이거나 산적인 법이다.
진명이 서둘러 그들의 면면을 살핀다.
“음···.”
산적과 마적의 차림새는 아니다.
저마다 회색빛이 도는 제법 품질 좋은 도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잠깐, 도복?
진명이 서둘러 눈을 한 번 비비고 다시 그들을 살핀다.
눈에 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저···, 저건 우리 사제들인 것 같습니다?”
서둘러 튀어나와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명화와 묵환.
“사형들이네요.”
“사, 사형들이 확실합니다.”
사제들의 시선이 동시에 정문에게 꽂힌다.
어떤 생각을 하고 살면 칼 찬 사람이 다 산적이나 도적으로 보이나 하는 그런 생각과 함께.
“아, 우리 애들이야?”
“정확히 말하면, 쟤네 애들입니다.”
진명이 턱으로 사풍을 가리킨다.
저쪽에 모인 제자들은 모두.
사풍의 파벌들이니까.
“뭐, 우리 애들이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정문이 그들에게 다가선다. 잔뜩 불편한 표정과 함께 그저 묵례만 건네는 사제들.
평소 이들과 정문이 친근한 관계가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이렇게 정문을 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곳에 정문보다 항렬이 높은 사람이 와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항렬이 높은 사람 앞에서는 간단하게만 인사하는 것이 예법이기 때문이다.
“누가 왔나?”
어느새 그들이 서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닿은 정문과 사제들.
모여있던 사제들 사이에서 한 명의 도인이 앞으로 나선다.
“노각 사형?”
나선 이를 처음 알아본 사람은 명화였다.
일대제자 노각(盧慤).
항렬은 사풍의 바로 아래이며 율법을 담당하는 구천각(九天閣)에 소속된 제자다.
별다른 특징이나 뛰어남이 없는 특징을 가진 제자이지만, 그중 가장 특이한 사항은.
정문을 지지하지도, 사풍을 지지하지도 않는 중립 파벌의 대표가 바로 노각이란 점이다.
감은 것만 같은 작은 눈에 크지 않은 키.
조금은 색이 바랜 머리칼을 위로 올려 묶은 노각이 정문을 바라본다.
노각의 손에는 작은 서찰 뭉치가 하나 들려있다. 제법 좋은 천으로 둘러싼 서찰임이 분명했다.
“노각?”
정문의 부름에도 노각이 대답이 없다.
- 후우.
하며 숨을 한번 고르더니, 노각이 서찰과 작은 석패(石牌)를 앞으로 내밀며 목소리에 힘을 실어 소리쳤다.
“공동의 일대제자, 이정문은! 대(大)공동의 지엄한 율법에 따라 통천패(通天牌)의 명을 받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