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살아는 있네.
어른들은 늘 말한다.
요행을 바라지 말라고.
무엇이든 쉽게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쉽게 잃을 수도 있고 때론 그런 탐욕 덕에 본전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강호에도.
언제나 요행을 바라는 얌체들이 있기는 마련이다.
“정문 도장께 도전하겠소!”
이른 아침 공동의 객청을 울리는 소리에 명화가 고개를 빼꼼하고 내다본다.
나이는 딱 후기지수 정도.
도복이 아닌 일반 무복인 것을 보아 유명 문파의 자제는 아닌 것 같았다.
“누···구?”
“강검문(强劍門)의 강혁이라 하오!”
“갑자기 왜···?”
“공동에서 신진 고수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밤새 달려왔소! 정문 도장과 겨루게 해주시오!”
“······.”
명화의 입이 굳게 닫혔다.
논검회의 결승은 바로 어제.
이자의 말만 따르면, 자신은 논검회를 관전한 것도 아니고 그저 공동이 우승했다는 소식만 듣고 바로 달려왔다는 말이 아닌가.
‘이 새끼가?’
논검회의 우승자와 겨뤄 이름을 날리려는 얄팍한 수작이 분명했다.
‘화산이나 무당이 우승했을 때도 이런 놈들이 붙었을까?’
조금은 괘씸한 눈으로 강혁을 보는 명화.
그런 명화의 고개가 조금 가로 기운다.
강혁의 뒤로 대여섯의 무인이 더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분들은···?”
“일행이 아니오.”
“누구···?”
“논검회 우승자에게 도전하려 하오!”
“나도요!”
“내가 먼저 왔소!”
요행을 바라는 무인들이 참, 많았다.
“하아. 참.”
명화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이들은.
논검회를 직접 관전한 건 아닌 게 분명했다.
‘분명 공동이란 이름만 듣고 달려왔겠지.’
“알겠어요. 죽고 싶다는데 뭐. 들어가 봐요. 정문 사형! 손님!”
“감사하오!”
강혁이란 사내는 당당히 말을 뱉고는 객청으로 들어섰다. 저마다 차례를 아쉬워하며 공동의 객청 앞에 줄을 서는 무인들.
하지만.
- 빠악!
- 빡! 빡! 빡!
- 빠아아아아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 부웅!
하며 무언가 담벼락을 넘어 이들 쪽으로 날아온다.
- 콰아앙!
일제히 시선을 보내는 무인들.
“······?”
그들의 눈에 조금 전 객청으로 들어선 강혁이라던 무인과 비슷한 무언가가 들어온다.
“이건···?”
누워서 연신 팔딱거리는 무언가가 안쓰럽기 그지없다.
“부모도 못 알아보겠구먼···”
“살아는 있소···?”
얼른 다가서는 다른 무인들.
“불쌍하게도, 살아는 있네···. 쯧쯧.”
“······.”
무인들의 입이 동시에 닫힌다.
서로를 바라보는 무인들.
그리고.
“내···, 오늘 바쁜 일이 있는 걸 잊었네, 그려.”
“난 사파를 토벌하기로···”
“그, 그저 화산에 향화(香華)를 하러 온 것이기에···”
저마다 말을 뱉고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으아아암. 다음 도전자 없어요?”
하품하며 다음 도전자를 찾는 명화.
공동의 객청 앞은 이미 텅텅 빈 지 오래였다.
“어휴, 다들 근성이 없어, 근성이.”
명화가 막 몸을 돌려 돌아가려던 때.
“정문 도장, 안에 계십니까?”
다시 정문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근성 있는 무인들이 남았구나 싶은 명화가 뒤를 돈다.
뒤에는.
“백경 도장!”
화산의 이대제자 백경이 웃으며 포권하고 있었다.
“명화 도장. 푹 쉬셨습니까? 공동의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어휴, 화산 덕에 푹 쉬었죠. 축하 감사해요! 어쩐 일이세요? 설마, 복수전?”
농담 같은 명화의 말에 백경의 눈이 빛난다.
“어떻게,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까?”
전날 사강에서 정문에게 패한 백경.
그가 눈에 불을 켜며 진중하게 묻는다.
“그건··· 좀···”
“역시 그렇겠죠?”
“예, 뭐, 다 이기고 살 수 있나요. 호호호.”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하하!”
백경은 공동에서도 살아남을 넉살의 소유자였다.
“무슨 일이세요?”
“스승님의 명으로 왔습니다. 논검회 우승자에게 따로 전할 말이 있다 하셔서요.”
“음, 잠시만요.”
말을 마친 명화가 얼른 객청으로 뛰어들었다. 이내 조금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산발한 정문이 모습을 나타낸다.
“배···백경···도장···!”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하는 정문.
“괜찮으십니까? 혹여 내상이라도···?”
논검회 결승이 바로 어제였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에 당했다면, 하루가 지나서 심각한 내상이 올라오는 경우도 더러 있는 법이다.
“우욱!”
정문이 얼른 자신의 입을 부여잡는다.
하지만, 무리였다.
“우웨에에엑!”
정문의 입에서 토사물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모두 어제. 축하연에 나왔던 음식들이 분명했다.
얼른 달려오는 명화.
그녀가 정문의 입에 작은 단약을 집어넣고 등을 때린다.
- 짜악!
‘단···약?’
- 꿀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운기에 들어가는 정문.
“요상단입니까?”
“······ 숙취용으로 써서 죄송합니다.”
명화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분명 저 요상단은 화산에서 부상자들 치료에 쓰라며 건넨 것이 분명했다.
“후우우우.”
정문이 주독을 모두 몰아낸다.
진한 주향이 뿜어지는 것이 전날 마신 술의 양을 알려주는 것 같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괜찮으십니까?”
“아, 백경 도장! 이거 아침부터 실례가 많았습니다.”
얼른 밝아진 표정의 정문이 백경의 손을 부여잡으려 한다.
- 스윽.
손을 뒤로 빼는 백경.
“······?”
“우선, 씻으시고···”
“아.”
“태청전(太淸殿)으로 가시죠.”
태청전이란 말에 정문의 얼굴이 더욱 밝아진다. 얼른 씻고 오겠다는 말을 남긴 정문이 객청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정문이 언제 산발이었냐는 듯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로 객청을 나선다. 옷까지 새로 갈아입은 것이 헌헌한 논검회 우승자의 풍모였다.
“가시죠!”
기쁜 표정으로 앞장서 나가는 정문.
정문은 태청전에 간 뒤의 일을 이미 아는 듯했다.
정문과 백경이 나란히 태청전으로 향한다.
“도장께서는 무엇을 달라 하실 생각입니까?”
“흐음···, 글쎄요. 무엇을 달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승은 처음이라. 허허허.”
본디 논검회의 우승자는 주최한 문파에 무엇이든 한 가지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보통은 3대 도문이 우승을 차지하기에 서로 받은 것을 돌려받고 다시 찾아오는 그런 과정이 연속되곤 했다.
“흠···, 작은 조언을 드리자면, 무공이나 영단은 달라고 하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어째서요?”
“무공은 그저 기본 입문공을 줄 것이고 영단 역시 그저 매약단(梅藥丹)이 전부일 겁니다.”
“······그걸 왜 미리 알려주시는 겁니까?”
정문 역시 몰랐던 사실은 아니다.
논검회에 우승이 만능은 아니며, 이들이 주는 보상 역시 그저 겉치레라는 것을.
그저 정문이 당황한 것은 그런 사실을 화산의 제자인 백경의 입을 통해 들었다는 것이다.
“분명 좋은 관행은 아닙니다만. 늘 그래왔기에 아마 이번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르고 가시면 속는 것이 아닙니까? 화산의 제자로서 그런 것은 막고 싶었습니다.”
백경이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마친다.
그래, 정파의 무인이란 이런 것이다.
물론, 정문은 영단이나 무공을 달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면, 딱 정해서 자하신공(紫霞神功)이랑 자소단(紫霄丹)을 달라 해야겠군요.”
정문 역시 웃으며 농담을 건넨다.
“하하, 그건 제가 말리고 싶군요. 주시지도 않겠지만요.”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둘.
어느새 둘의 걸음이 태청전에 닿는다.
“스승님과 대화가 끝나면, 백매관(白梅館)에 한 번 들러주십시오.”
“또 다른 일정이라도···?”
“아닙니다. 그저 이번 논검회에 참석한 후기지수들끼리 자리를 한 번 만들까 합니다. 위도장과 진도장도 함께 오시지요.”
“꼭 그리하겠습니다.”
백경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발을 돌렸다.
* * *
“먼저,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태청전에서 정문을 맞은 운양이 차를 따르며 말을 시작했다.
“다른 분들께서 양보해주신 덕입니다.”
“허허허, 정말 다르군요.”
“예?”
겸양하며 말하는 정문의 태도를 보며 운양이 크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오랜만에 조카를 보는 듯한 눈빛이 정문의 얼굴을 스친다.
“아닙니다. 그저. 허허. 비무대 위에서는 그리 패도적인 검을 뻗으시더니 아래에서는 또 이리 헌헌하시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또···, 제가 아는 공동의 무인과는 많이 다르군요.”
!!!!
“그게 무슨···?”
“처음 만난 날 제가 드린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공동이 논검회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라 하셨지요.”
“정확히 기억하시는군요. 허허허.”
운양이 잠시 숨을 돌리려는 듯 찻잔을 집어 들었다. 가볍게 침묵을 즐기며 차를 마시는 운양.
“자세한 것은 말씀하실 수 없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그랬지요.”
“헌데, 어찌 지금은 이리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까?”
“저는··· 그저. 제가 아는 공동의 무인에 대해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공동의 논검회 참석과는 관련이 없지요. 허허허.”
정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여기 운양이라는 도인도 그저 사람 좋은 도인은 아니란 것을 차츰 깨닫는 정문이다.
다른 문파의 장문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 운양 역시 뱃속에는 구렁이가 스무 마리는 들어찬 것이 분명했다.
“혹여 아는 공동의 무인이 제 스승님이십니까?”
정문이 슬쩍 떠보는 말에 운양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정···, 사문의 장문이신 자정자께서는 제 친우입니다.”
!!
예상은 했다.
아니, 조금은 다르게 예상했지만.
정문은 그저 자정과 운양이 단순히 아는 사이일 거란 예상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구파의 수장들끼리 맺는 형식적인 관계 정도를 예측한 것이다.
애초에 논검회가 열리기 전, 검문첩이 공동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일이 있었다.
정문은 그저 자정이 구파 장문인의 입장에서 서신이나 한 장 썼겠거니 했던 것이 전부였다.
헌데, 친우라니.
서로가 언제 서로에게 칼침을 놓을지 모르는 곳이 무림이다. 그런 무림에서 친우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일반적인 친우의 개념보다는 훨씬 무거운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친우···라 하셨습니까?”
정문의 반응에 운양이 재밌다는 미소를 띤다. 정문을 귀엽게 보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빠르고 당당한 대답에 정문이 또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럼 검문첩도···?”
“총명하시군요.”
질문에 맞는 대답은 아니다. 하나, 충분히 정문에겐 대답이 되었다.
얼이 빠진 정문을 대신해 운양이 대화를 끌고 간다.
“본지는 오래되었습니다만···, 여전히 그리운 이름입니다. 허허허.”
“어찌 그간은 왕래가 없으셨는지요···?”
“도장의 총기를 보니 이미 답을 아실 듯합니다.”
태상장로 때문이다.
정문은 바로 그렇게 생각이 떠올랐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생각이 떠올랐다곤 해도 여기서 주저리 말을 풀어 선 안됨을 정문은 잘 알고 있었다. 팔은 부러져도 소매 안에 있어야 하는 법이다.
“역시 총명하십니다.”
그저 무재만 가득한 무인은 아니라 다행이라는 표정이 운양의 얼굴에 가득했다.
“도장께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운양이 정문을 보며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하문하십시오.”
정문은 아랫사람의 예를 다해 질문을 받을 준비를 한다. 화산과 공동이 아닌, 스승의 친우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정문이다.
“이른 시일에 제가 공동산을 방문할 수 있겠습니까?”
!!
운양의 너무도 직설적인 물음에 정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이번 논검회를 계기로 태상장로를 물러나게 할 수 있겠냐는 질문임을 정문은 모르지 않았다. 운양은 아무래도 생각보다 공동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노골적인 질문이십니다.”
“공동의 제자에겐 그렇지요. 허나, 제 친우의 제자에겐 묻지 못할 것이 아닙니다.”
운양의 표정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이번 질문을 통해 정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정은 몰라도 운양 만큼은 확실히 자정을 친우라 생각한다는 것을.
“······, 두 달 뒤에 사문을 방문해주십시오. 스승님께서 직접 맞으실 겁니다.”
정문의 답에 운양의 입꼬리가 기쁘게 올라간다.
‘과연 도기로다.’
정문을 바라보는 운양의 표정이 한없이 따뜻했다.
“좋습니다. 사담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싫지 않은 사담입니다만. 다음을 기약하시지요. 공동산에서 제가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허허, 듣기만 해도 좋은 말입니다. 술로 하십시다. 매약주를 좋은 놈으로 골라 찾아뵙겠습니다.”
마주 보는 두 도인의 눈에 따스함이 가득하다.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전혀 없는 것이다.
“해서, 이제는 논검회를 주최한 화산파 장문 대리로 묻겠습니다.”
운양의 눈빛이 바뀐다.
이제는 사담이 아닌 공식적인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무엇을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