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설득은 없다.
면포는 얼굴을 전부 가려주지 못한다.
이는 일반적인 외모의 여인은 물론이고 특출난 여인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공동을 기다리던 여인의 이목구비는 면포를 이미 뚫고 그 멋들어짐을 줄곧 자랑하는 중이다.
분명 색을 모두 가린 면포가 확실한데도 그녀의 입술이 앵두 같다는 것은 자리에 선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알아보는 진명과 명화, 묵환과 사풍.
“사형···, 저분은···?”
“응, 내 손님인 거 같네.”
가볍게 웃어준 정문이 사제들을 뚫고 앞으로 나선다.
“설매 단주?”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흑시창 감숙 단주 설매가 무정검 대협을 뵙습니다.”
설매가 앞섬을 여미며 고개를 숙인다.
분명 겸양하며 인사하는 모습이 확실한데, 몇몇 도인들의 눈에는 교태스럽기 그지없어 보였다.
“뭐···, 무정검은···.”
“이미 강호의 모두가 무정검의 이름을 안답니다.”
“그건 어떻게···, 못 지우겠소?”
“흑시창도 한계는 있답니다. 지금도 다른 한계를 맞은 중이구요.”
정문은 제법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털고는 설매를 바라봤다.
“해서, 여기서 뭘 하는 게요? 마중을 나온 건 아닐 테고.”
“마중 나왔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안 그래도 흑시창 지부에 들를까 했었는데.”
정문은 그간 화산에서 있었던 일과 개방과의 일 등을 정리하기 위해 한 번쯤은 다시 흑시창과 접선할 계획이 있었다.
산을 오르면 언제 또 내려올지 모를 일.
이번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설매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정문이다.
“이제 지부에는 들리시면 안 됩니다.”
“지부에 무슨 일이 있소?”
“개방이 평량에 들어왔습니다.”
!!
개방이란 말에 정문의 눈이 빠르게 반응한다. 개방과는 현재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닌 정문이다.
“개방이라면···, 설마 오봉학이?”
“정확하십니다. 화음에서 무정검께 바람맞은 날, 바로 발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 역시 개방은 빠르군.”
화음에서 평량까지는 일반인의 걸음으로는 열흘이 걸리는 거리다.
무림인의 보법으로 걸어도 이레는 걸리는 거리.
하지만.
개방의 거지들이라면, 사흘이면 주파하고도 남는 것이 화음과 평량의 거리다.
무림인도 일반인도 걸음을 걷다 밤이 되면 객잔을 찾거나 야영할 곳을 찾아 몸을 숨긴다.
하지만, 거지는.
그저 등을 누이면 침상이요, 하늘이 그저 이불이니, 그들의 행군 속도가 다른 이들보다 빠름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분타라는 것이 다른 문파가 세운다면 몇 달에서 반년은 걸릴 일이지만, 개방의 분타는 조금 다르다.
그저 땅 위에 천막이나 움막을 하나 세우고 거지가 들어가 쪽박을 내걸면. 그게 바로 개방의 분타인 것이다.
“대려에 머무시는 동안 이미 오봉학은 평량에 분타를 설치했습니다. 지금은 벌써 일을 시작한 모양이더군요.”
“흑시창이 고생이 많겠군.”
“예전처럼 편히 찾아달란 말씀을 못 드려 송구합니다.”
이제야, 설매가 평량 밖까지 나와 자신을 기다린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평량에서 흑시창과 공동의 제자가 만나게 된다면, 이는 이제 개방의 눈에 쉬이 잡히고 말 것이다.
“한동안은 뵙지 못할 겁니다. 부디, 무탈하시길.”
“그게 서로에게 좋겠군. 무탈하시오.”
정문은 돌아서는 설매를 향해 짧게 포권하고 그녀를 보냈다.
언제나 느끼지만.
일을 참 잘하는 인물이다.
정문은 사제들에게 별다른 말은 전하지 않았다. 그저 사제들이 알아봤자 별다른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행동이 어색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의 발이 평량의 입구에 닿는 순간.
공동의 제자들을 찾아온 다른 무림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방 총타 육결개(六結丐), 홍구라 합니다.”
허리에 여섯 개의 매듭을 묶은 거지가 죽봉(竹棒)을 눕히며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는.
개방의 방도들이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예의였다.
화음에서 만났던 사결개(四結丐) 보다는 훨씬. 공동을 대우해주는 처사였다고 정문은 그렇게 평가했다.
“공동의 이정문이오.”
정문은 완전 하대는 아닌 적당한 평대로 육결개를 맞았다. 육결개는 사결개 만큼 함부로 대할 거지는 아닐 것이다.
“무정검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해서, 어쩐 일로?”
“개방이 평량에 분타를 열었습니다. 이제 이틀이 지났지요. 미리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육결개 홍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딱 전해야 할 말만 전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뭐, 당장에 찾아와 인사하라는 그런 말은 아니시고?”
“평량은 공동의 영역입니다. 객이 주인을 집으로 부르는 일은 없는 법이지요. 혹여 개방이 필요하거든, 그때 찾아주십시오.”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태도였다.
“뭐, 필요하다면 한 번쯤은. 대신, 본산에도 인사는 하셔야 할 텐데?”
“분타가 자리를 잡는 대로 본산에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누가 말이오?”
약간은 이죽이는 표정으로 정문이 날카롭게 묻자, 처음으로 육결개가 미간을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알면서 묻는 말에 조금은 심기가 상한 것이다.
“···평량 분타주, 팔결개 오봉학 장로가 찾아뵐 것입니다.”
“뭐. 알겠소이다.”
“그럼.”
육결개는 다시금 죽봉을 눕히고 어깨에 손을 올리며 예를 표했다. 누군가 예를 지키라 확실히 일러둔 것이 분명했다.
“와. 개방의 분타가 평량에요?”
“확실히 공동의 명성이 올라가긴 했군요.”
“대, 대단합니다!”
“흥, 당연히 있었어야 하는 것을.”
사제들의 반응이 다채롭다.
가장 주목할만한 반응은 아무래도.
사풍일 것이다.
사풍의 말처럼, 본디 구파일방쯤 되는 문파가 있는 도시에는 당연히 개방의 분타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전까지는.
공동이 제대로 된 구파일방의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사풍이 말처럼 좋은 건 아니야. 의도도 좋지 않고, 우리 행동에도 제약이 많아질 거라고.”
“흠, 사제들에게 일러 행동에 조심을 기해라 명해두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이제 평량도 그렇게 편한 곳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겠네.”
정문이 씁쓸하게 입술을 핥는다.
오봉학을 대충 자극하면 평량에 무언가를 해주리라 예상은 했던 정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쪽박을 밀고 들어올 줄은 정문도 조금.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뭐, 그래도. 주인은 우리라고. 혹여라도 건방지게 나오면······”
정문의 눈매가 무겁게 변한다.
“쪽박 깨지는 거라고.”
섬뜩한 미소가 정문의 얼굴에 걸렸다.
* * *
“오랜만이네.”
공동의 도인들이 공동산의 산문을 바라본다.
“두 달 조금 지났죠? 속가행 때 내려왔으니까.”
“그, 그리웠습니다!”
“역시 집이 좋은 법이군요.”
저마다 그리운 고향에 닿은 소감을 전한다.
“가자, 집에 가야지.”
“예!”
공동의 도인들이 산문을 지난다.
수많은 계단으로 이루어진 공동산 오르는 길.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왜 이렇게 계단이 많냐며 불평을 늘어놓는 길임에도 공동의 제자들 얼굴엔 미소만이 가득하다.
아마도.
금의환향이라 그럴 것이다.
저 멀리.
커다란 관문의 형상을 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너무도 익숙한 건물.
건물에는 서래제일(西来第一) 도원소재(道源所在) 공동파(崆峒派) 라는 글자가 용사비등(龍蛇飛騰)하게 제자들을 맞이한다.
태청궁(太淸宮).
공동의 얼굴과도 같은 태청궁이 드디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오오오!”
“태청궁이다!”
“태청궁이군!”
분명 사풍의 파벌들은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문을 떠나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이 사문을 향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문이 선두로 태청궁에 든다.
향화객(香華客)과 정무를 보는 도인들로 가득해야 할 태청궁. 오늘은 그 태청궁이 한산하기만 하다.
“오셨습니까, 사형.”
태청궁에서 일하는 한 일대제자만이 이들을 맞이한다.
“태청궁이 왜 이렇게 한산해?”
“좋은 날이 아닙니까? 사형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다들 조천문 너머에서 기다리십니다.”
말을 전하는 사제의 얼굴에 깊은 미소가 걸린다. 아무래도 제법 시끄러운 행사가 열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르시지요. 장문인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래, 가자.”
정문을 비롯한 논검회에 참석했던 제자들이 조천문(早天門)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이천개의 계단을 모두 밟고 나자 나타나는 웅장한 조천문.
공동의 대문이자, 속세와 도관을 구분하는 유일한 경계가 묵직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댄다.
자신이 눈을 뜨기 전 원래의 이정문은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오로지 이 조천문을 향해 걸어왔다고 들었다.
‘그리웠겠지.’
그의 마음이 조금은 느껴지는 것만 같다.
이제는 자신도.
이 조천문을 보면 설레는 마음이 드는 지금의 정문이다.
- 뚝.
조천문의 바로 앞에서 정문이 발을 멈춘다.
뒤를 돌아보는 정문.
사제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다.
이제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큰 사건이 찾아올 것이다. 이를 모르지 않는 정문이다.
들어가기 전에 사제들을 바라보는 정문.
무언가 마지막 말을 남겨볼까 하는 고민이 스친다.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 먼저, 죽기 전 자신이 남겼던 유언이 떠오른다.
- 유언은 없소. 그저 살아온 내 방식이 유언이지. 덧붙일 말도 없고.
다시 생각해도 명문이다.
정문의 입이 닫힌다.
설득은 없다.
그저 보여준 모습이 내 설득이다.
덧붙일 말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하며 정문이 조천문을 당긴다.
- 끼이이익.
둔탁한 소리를 내며 조천문이 열린다.
그리고 문 너머에는.
따스한 표정을 잔뜩 품은 장문인 자정과 장로들이 공동의 제자들을 맞았다.
* * *
공동의 환영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중대 연무장에 특별히 단상을 마련했고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고생했다.”
자정은 따스하게 제자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격려의 말을 건넨다.
제법 자세한 소식이 공동에 전해졌는지 예선에서 탈락한 제자들의 비무까지 자정은 모두 알고 한마디씩 말을 남겼다.
그리고.
자정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정문에게 닿는다.
“우승했다지?”
“예, 스승님.”
“무정검이라는 별호도 얻었고?”
“······그건···.”
“잘했다. 해내리라 믿었느니라.”
“감사합니다.”
사실 우승은.
자정도 기대한 성과는 아니었다.
그저 중원에서 사제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마음이나마 돌려보라는 것이 자정의 의도였다.
아무래도.
정문은 자신이 기대하는 것 이상을 해내는 제자라 그렇게 자정은 생각했다.
“하하하! 정문아! 이 귀여운 놈아!”
호탕한 복마각(伏魔閣)의 각주 자공이 정문의 볼을 꼬집는다.
“내 네놈의 무공이 큰 성취를 이룬 것을 진작에 알았다!”
“하하···, 사숙. 감사합니다.”
몰랐을 것이 분명했지만, 괜찮다. 이는 자공의 입버릇이니까.
“진명, 사풍! 네놈들은 혼쭐이 나야 해!”
자공의 시선이 진명과 사풍에게 향한다.
“······.”
“······.”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둘이다.
“하하하하! 논검회에서 양패구상한 멍청이들이 내 사질들이라니!”
구천각주(九天閣主) 자산이 머리를 탁! 치며 웃는 소리를 낸다.
공동의 분위기는 제법 좋았다.
그때.
“공동의 제자들은 듣거라.”
단상에 올라선 자정이 내력을 실어 도인들의 시선을 모은다.
“예, 장문인.”
일시에 터져 나오는 우렁찬 대답들.
“정문이 논검회에서 우승해, 사문의 명예를 드높였음을 모두가 알 것이다.”
“맞습니다.”
“이에 정문과 함께 본선에 오른 진명, 사풍에게 내 작은 보상을 내리고자 한다.”
!!
정문과 진명, 사풍의 눈이 번뜩인다.
일전에 산화사괴를 물리쳤을 때도 주어지지 않았던 보상이 드디어 이들을 찾는 것이다.
“사풍은 듣거라.”
“일대제자 진사풍, 장문인의 명을 받습니다.”
“검을 잃었다지?”
“······예, 장문인.”
“사풍에게는 번천검(翻天劍)을 하사하겠다.”
!!!!
장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간다.
번천검은 일대제자가 장로의 직에 들어섰을 때나 받을 수 있는 검으로 아직 어린 사풍에게는 이른 포상이었다.
“번천검은 사문을 지키는 검. 사풍에게는 능히 이를 해낼 능력이 있느니라.”
자정은 혹여나 나올 다른 말을 일시에 자르며 선언하듯 말했다.
내심에는.
장로가 되어 사문을 지켜달라는 그런 뜻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진명에게는 소원단(少元丹)을 하사하겠다.”
!!
장문인이 오늘 큰마음을 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장로들을 스친다.
소원단은 공동이 자랑하는 영단 중 하나로 천뢰단(天雷丹) 바로 다음가는 제법 효능 있는 영단이었다.
“내력은 곧 검을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은 것이다. 진명은 이를 발판 삼아 더욱 수일(守一)하거라.”
“예! 장문인!”
사문에서 보상으로 내리는 것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병이요, 하나는 영약이니, 마지막 남은 것은 바로 무공이었다.
“정문에게는···, 통천신공(通天神功)을 하사하겠다.”
!!!!!!!!!!!!!!!!!!!!!!!!!
자정의 선언에 공동파 제자들 모두가 술렁인다.
통천신공은 공동파 장문인과 후계자에게만 허락되는 무공으로 공동의 제자란 이유만으로 익힐 수 있는 무공은 아니었다.
즉, 자정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후계자가 정문임을 공인하겠다는 말이었다.
정적이 흐르는 공동파 도관.
서로의 계산이 눈빛으로만 오간다
자정이 침묵을 깨고 무언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장문인!”
늘 이럴 때 등장하는 다섯 노인의 신형이 일시에 침묵을 깨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