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후회할 겁니다.
“뭐···뭐라···?”
정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용퇴(勇退)해주십시오.”
용퇴.
용기 있게 물러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용퇴의 진정한 뜻은 다른 곳에 있다.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 그것이 바로 용퇴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반대로 해석하자면, 용퇴의 대상은 당연히.
후진의 앞길을 막는 못난 자들일 것이다.
용퇴라.
그 말은.
지금 공동오로가 공동의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이란 뜻이 아닌가.
짧은 문장으로 어찌 저리 간단하게 자신들이 이룬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새삼 정문의 머릿속이 자신을 웃돔을 느끼는 공준이다.
공준의 놀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문의 말이 끝나자.
다른 움직임이 정문을 따르기 시작한다.
- 스으윽.
내려가는 일대제자들 몇의 고개.
정문과 같은 방향에 서 있는 것이 정문을 지지하는 세력임이 분명했다.
진명, 명화, 묵환 등등.
그래도 괜찮다. 적은 수가 아닌가.
하지만.
- 스으윽.
다른 변화가 공준의 눈을 놀라게 한다.
“용퇴해주십시오.”
그들과 함께.
조금 전 당당히 율법을 말하던, 노각이란 일대제자의 고개가 내려간 것이다.
노각의 뒤에선 중립 파벌의 제자들이 함께 고개를 숙이며 말을 뱉는다.
“용퇴해주십시오.”
“용퇴해주십시오.”
!!!!
이들은.
오랫동안 숨어왔던 중립이란 이름의 방패를 버리고 정문이란 검을 손에 쥔 것이다.
공동오로의 얼굴에 조금은 당황이 아린다.
이런 하극상은 중원 어느 문파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것임이 분명했다.
“네···, 네놈들이··· 미친 게로구나! 단체로 미친 게야!”
공준의 뒤에선 공산이 손을 뻗으며 현실을 부정한다. 비단 자신을 내쫓으려는 움직임이 아니어도. 이는 잘못된 행동들임이 분명했다.
만약.
이게, 이 모든 게 계책이고 책략이라면.
너무도 무모한 것이다.
저들이 책략으로 들고 온 건 원로들의 용퇴. 이는 오로지 공동오로와 사풍 파벌의 손에 달린 것이다.
공동오로의 기반은 오로지 존경.
그들을 존경하는 세력이 절반을 차지한다면, 저들의 책략은 실패하고 만다.
중립 파벌과 정문의 파벌을 합쳐도 사풍 파벌에는 미치지 못함이 분명했다.
또한,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용퇴’란 말은 분명 기사멸조이기 때문이다.
만약 공동오로가 여기서 물러나지 않게 된다면.
저들은 필히 내쳐질 것이다.
한 문파의 기강이란.
그런 것이니까.
고개를 절레 돌리는 공준.
‘무리했구나. 무리했어. 아둔한지고.’
나름 정문의 머리가 잘 돌아간다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을 웃돈다는 생각마저 조금 전 품었던 공준이다.
하지만.
공동오로의 기반은 저들이 아니다.
그래, 사풍.
사풍의 파벌이야말로 공동오로의 진정한 기반일 것이다.
또한, 사풍을 따르는 일대제자들은 이미 과반이 넘는 수일 것이다.
정문과 함께 논검회에 간 아이들 몇이 변심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사풍이라는 수장이 건재하게 있는 한.
그들은 감히 공동오로를 향해 고개를 숙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사풍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다. 지금도 망설임은 있겠지. 허나! 놈은 결국 나로 인해 존재할 뿐.’
오만이 공준의 미간을 채운다.
조금은 표정을 한 번 털어내고 시선을 전체에 뿌리는 공준.
“허허허, 불손한지고.”
짐짓 여유가 묻어 나오는 말투가 축하연 자리를 채운다.
공준의 여유는 곧.
공동오로 전체의 여유로 번진다.
“쯧.”
혀를 차는 짧은소리만이 이들의 입을 탄다.
공준의 시선이 사풍에게 닿는다.
무어라 반박이라도 해보라는 일종의 신호일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풍.
‘역시 망설임은 있는 것인가.’
하지만, 걱정은 없다.
사풍은.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할 것이다.
산화사괴와의 혈전이 있고 난 뒤에도 공준은 사풍을 가리켜 이리 말했다.
- 너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할 테지! 그렇기에!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분명 사풍은.
예. 라는 대답 밖에는 뱉지 못했다.
알고 있던 사실이다.
놈은 이런 놈이니까.
놈의 아비란 자도. 내 아들이란 놈도.
모두.
손에 쥐여주는 것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놈들이 아닌가.
공준이 혀를 차며 사풍을 압박한다.
“공동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 이를 누가 부정하겠느냐?”
모두를 보며 뱉는 말이지만 사풍의 귀에는 특히나 신경 쓰이는 말이다.
일전에 자신의 신념이 공동을 위한 것이라 사풍에게 말했던 공준이다.
사풍은 분명 이를 기억하고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이라, 공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공준이 사풍을 바라본다.
이 정도면 망설일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는 판단일 것이다.
“사풍! 네놈이 말해 보거라. 내 평생을 공동을 위해 헌신했다. 아니더냐?”
“······맞습니다.”
역시.
역시 사풍은 자신을 떠나지 못하리라.
공준의 얼굴에 만용이 아린다.
“허면, 지금··· 이 광경을 내가 어찌 받아들여야 할꼬?”
“······.”
사풍의 눈이 감긴다.
자신이 각오했던 순간이 본격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 제 선택은 사형입니다. 선택의 결과 역시 제가 감당해야지요.
대려에서 청익과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는 사풍.
‘결과를 감당한다라.’
사풍은 무엇을 감당해야 할까.
더더욱 자신을 선택했던 사제들을 위해선 무엇을.
- 제가 이끌면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제가 공동을 이끌 것입니다.
정문의 말이 또 울리는 사풍.
-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는 남는 법이다. 결국에는 그런 후회를 줄이는 선택을 하는 게 최선인 법이지.
이번에는 그토록 밀어내던 자신의 아비가 떠오른다.
책임, 선택, 감당, 후회···
평생 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
평생 느끼지도 못할 것 같던 것들이 사풍을 옥죄여 온다.
“말해보거라. 내가 어찌 이 광경을 받아들여야 하냔 말이다!!!”
자신의 말에 입을 다무는 사풍을 보며 공준이 조금은 노성을 뿜는다.
이게.
사풍을 다루는 공준의 방식일 것이다.
“공동을 위해 살아오신 것을 압니다.”
무겁던 사풍의 입이 열린다.
“안다? 허면 어찌 이리도 인정해주는 이들이 적을꼬?”
적지 않다.
그런 말을 뱉으라고 공준이 대놓고 압박을 준다.
하지만.
“······틀렸기 때문입니다.”
!!!!!!!!
사풍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다.
고개를 숙였던 노각과 중립 파벌의 사제들도. 진명을 비롯한 정문 파벌의 사제들도, 모두.
아니.
단상 위에선 자정과 장로들까지 포함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문만이 평온한 자세로 멈춰있을 뿐이다.
“뭐···뭐라?”
“······위한다는 마음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내가 틀렸단 말을 하는 것인가!! 공동을 내가 모른다는 말이더냐!!!”
공준이 시뻘게진 얼굴로 내력을 뿜어댄다.
그런 기세에 주눅들 거란 예상과 달리 사풍의 얼굴은 더욱 평온해진다.
결심이 아린 것이다.
“제가 본 공동은 능히! 중원을 도모할 문파였습니다.”
!!!
“네 이노옴!!”
여기까지.
여기까지가 오늘의 최악이길 공준은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 스으윽.
사풍의 고개가 내려간다.
조금은 떨리는 어깨와 몸으로 사풍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평생을 고생하셨습니다···. 용퇴해주십시오···.”
!!!!!!!!!
사풍의 입에서 나오리라 누구도 믿지 않았던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사풍은 고심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저 순간적인 자신의 감정을 따라갔다면, 진작에 고개를 숙였을 자신이기에 조금은 스스로를 옭아매어 본 것이다.
산화사괴를 무찌른 일과 속가행.
그리고 논검회까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즐거웠다. 기뻤고.
하지만.
사풍은 이를 밀어내기로 했다.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면.
혈연 역시 무시할 것은 못 될 테니까.
그래서 사풍은 오로지 결과를 보기로 했다.
공동의 중원 도모는 가능한 것인가.
정문의 승승장구를 다른 사제들은 버틸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만을 보기로 말이다.
‘대사형이 이끈다면, 가능하다.’
사풍은 이번 결과에 대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자신 역시.
정문을 도와 이들을 중원으로 이끈다. 그것이 바로 사풍이 감당해야 할 책임일 것이다.
사풍의 움직임을 본 모두에게 혼란이 찾아온다. 그런 혼란은 공동오로보다, 뒤에서 먼저 나왔다.
“이, 이거···?”
“뭐, 뭡니까?”
“상황이 어떻게···”
사풍의 파벌 중 논검회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 속가행을 멀리 떠났거나, 늦게 떠난 이들, 떠나지 않았던 이들은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선택의 순간일 뿐이다. 사형을 택했거든 따르거라. 사형의 뒤를 택했거든.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다.”
청익.
사풍의 오른팔도 같은 청익이 준비한 듯 말을 뱉고는 고개를 숙였다.
“용퇴해주십시오!”
이어.
“용퇴해주십시오!”
“용퇴해주십시오!”
“용퇴를 바랍니다!”
“용퇴를 숙고 해주십시오!”
논검회에 참석했던 사풍 파벌의 일대제자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사풍과 같이 머릿속에 한 가지 말이 떠오른 것이다.
‘대사형이 이끈다면, 가능하다!’
빛과 같은 말이 그들의 머리를 일시에 관통했다.
그리고.
움직임은 점점 거대해지기 시작한다.
“용퇴해주십시오.”
“용퇴를 바랍니다.”
다른 사풍의 파벌들 역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고개를 숙인 이유가 계산일지 선택일지 누구도 알 수는 없었다.
“······.”
“이······!”
“다, 단체로 미친 것들이···?”
“후우.”
“하.”
공동의 오로의 입에서 다채로운 반응이 터져 나온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서둘러 자정에게 시선을 던지는 공명.
그의 눈에 노기가 충천했다.
“자정···!”
이 사태를 지켜볼 거냐.
이게 사문이 올바르게 가는 거라 생각하느냐! 온갖 말을 뱉어대려던 공명의 눈에 당혹이 찾아온다.
자정이.
너무도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제자들을 내려보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정의 얼굴에 맺힌 미소는.
승리의 미소가 확실했다.
결정타는 사문 어른들의 몫일 것이다.
일대제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인 와중에 어른들 역시 무언가를 보여는 주어야 하니까.
시작은 자명이 나선다.
“태청궁주(太淸宮主) 자명. 감히 말씀드립니다. 사숙! 용퇴하십시오.”
자명의 고개가 거침없이 땅으로 향한다.
연이어.
“고생하셨습니다.”
자준.
“감사했습니다.”
자산.
“이제는 맡겨주십시오.”
자공까지.
장로들이 제자들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제자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 역시.
이들은 함께 나눌 것이다.
수많은 무인이 모인 공동의 연무장에 오로지 고개를 들고 선 이들은 여섯 뿐이다.
공동오로와 공동의 장문인 자정.
종장에는 그들만이 서로를 바라보고 서있다.
“자정······, 이 모든 게 계산된··· 일이렷다?”
공준의 억울함이 가득한 물음에 자정이 고개를 절레 젓는다.
“아닙니다. 사숙.”
“검문첩을 빼돌릴 때부터! 논검회에 제자들을 보낼 때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냔 말이다!”
마지막 독기가 공준의 입에서 뿜어진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앎에도 노인의 독기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시작은···, 그 전일 겁니다.”
“그 전이라?”
“정문의 변화···, 예. 전 돌아온 정문이 조금 변했을 때. 그때가 시작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
공준의 입이 닫힌다.
더는 말을 뱉을 기운도, 자리를 보전할 기회도 그들에겐 없는 것이다.
만약 정말 시작이 정문의 변화로부터 였다면.
이건 완패인 것이다.
태상장로란 직위는 명예직이다.
명예직이란 존경을 먹고 사는 자들.
실권이 없는 그들이 존경마저 잃었을 때는.
아무런 방도가 없다.
정문은 이를 모르지 않았다.
궁에도, 거지굴에도, 흑도굴에도, 도관에도.
어디에나 명예직은 있는 법이다.
존경을 먹고 사는 괴물들이 말이다.
그래서 정문은.
그들을 키우는 존경을 없애기로 했다.
존경은 다른 존경으로 덮는다.
그게 정문의 책략이었다.
자신의 말을 받아치는 정문을 보며 공준은 오늘이 결전의 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문은.
이미 논검회에 참석해 무당의 검막을 찢었을 때, 화산의 매화를 찔렀을 때, 점창의 검을 쳐냈을 때. 이미 그때.
공동오로와의 결전을 끝낸 것이다.
공준의 턱이 들린다.
존경을 잃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정마저.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고개를 숙였다.
“······.”
“······.”
“······.”“······.”
공산, 공명, 공환, 공군의 입이 꾸욱 닫힌다. 화는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그들도 아는 것이다.
“후회할 겁니다. 장문인.”
공준의 입은 간단한 말만 뱉었다.
악에 찬 저주도, 떼를 쓰며 못 간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예전처럼 높아진 말투가 왜인지 그의 진심을 잘 전달하는 것만 같았다.
“···그 후회 역시. 제자들과 함께 감당하려 합니다.”
“······.”
공준이 사제들을 돌아본다.
악에 찬 공명과 이를 꽉 깨문 공산.
그리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공환과 낙담한 공군까지.
조금은 비참해 보이는 자신들의 최후를 공준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가자.”
마침내.
공준의 입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말이 나온다.
“···예, 사형.”
공동오로의 발이 돌아선다.
적어도 이들과 대립하던 이들의 대승인 것이 분명했다.
몇 걸음을 걷더니 이내 멈추는 공준.
딱. 사풍의 앞을 지날 무렵이었다.
“들르거라."
날카로운 눈빛과 함께 공준의 말이 사풍의 위를 떠돈다.
“······.”
“들르거라.”
이 말은, 태상장로 공준의 말일까, 자신의 조부 진낙준의 말일까.
조금의 고민이 스치지만, 사풍의 입은 열렸다.
“예.”
여전히 고개 숙인 사풍의 대답을 듣고서야 공준의 발이 앞으로 나아간다.
지나간 길에 선명히 남은 발자국이 조금은 서글펐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