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는 공동을 무시하지 마라-62화 (62/153)

62. 방자한 도인.

축하연이 끝나고 공동은 분주해졌다.

논검회 우승이라는 큰 성과를 두고도 잠시 쉬어갈 여유따위 공동에게는 없었다는 말이다.

“자료를 옮기거라! 태청궁(太淸宮)에 새로 배속된 제자들은 각자 맡은 일을 최대한 숙지하도록! 인수인계는 철저히!”

태청궁주 자명의 목소리가 태청궁 전체를 호령한다. 오늘 가장 바쁜 곳은 단언컨대, 태청궁일 것이다.

공동오로(崆峒五老)가 물러나며 일대제자들에 대한 인사권을 돌려받은 자명은 서둘러 태청궁의 구성원을 개편했다.

실제 일에 적합한 제자들.

수련보다는 사문의 사무를 돌보는 것에 특화된 그런 제자들을 서둘러 태청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분명, 이전부터 이들을 점찍어 놓은 것이라 정문은 그렇게 평가했다.

다른 궁(宮)과 각(閣)들 역시 바빠졌다.

복마각(伏魔閣)은 빠져나간 제자들과 태청궁에서 들어온 제자들의 명부를 새로이 작성해야 했고, 구천각(九天閣) 역시 일부 제자들이 변경되며 한바탕 난리를 겪어야 했다.

재정을 담당하는 성모각(聖母閣) 역시 새로이 개파하게 될 화산의 속가를 지원하기 위해 손놀림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비용과 모든 수고를 화산에서 덜어가기로 약속을 했으나, 위치와 규모 등 모든 사안을 공동의 속가에 피해가지 않게 꾸리려면 성모각의 도움은 필수였다.

논검회와 공동오로의 용퇴(勇退).

공동은 두 번의 승리에도 이를 만끽할 겨를도 없이 바빠진 것이다.

“우리만 빼고요.”

“응?”

“우리만 빼고 다들 바쁘다구요.”

명화가 연신 이곳저곳 고개를 돌리며 정문에게 말을 뱉었다.

“안 바쁘면 좋은 거지, 뭐.”

“부, 불안합니다!”

묵환 역시 다른 사형들이 모두 분주히 움직이는 걸 보며 가만히 있는 자신이 조금은 불안한 모양이었다.

“흠, 논검회 이야기는 어느새 쏙 들어가 버렸군요.”

“뭐, 사문 내의 일이 워낙에 여파가 커서 말이지.”

정문은 그런 사제들의 태도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는 그늘에 몸을 누인다.

“좋기만 하구만. 영감님들 안 보이니까 속도 다 시원하고.”

- 텁!

정문의 입을 향해 네 개의 손이 날아든다.

일시에 정문의 입을 눌러버리는 손들. 정문은 입이 막혀 아무런 말도 뱉어내지 못한다.

“아! 왜왜왜!?”

몸을 연신 흔들며 겨우 손을 뿌리친 정문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친다.

“그런 말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 맞습니다!”

“당장에 영감님들 쫓아낸 당사자는 더더욱요!”

“······.”

사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정문을 압박한다.

“야, 결정타는 쟤가 먹였거든?”

하지만.

그저 사풍만을 턱으로 가리키며 이죽거리는 정문.

“난 한게 없어. 쟤가 다 했지.”

정문은 연신 얄미운 표정을 지어대며 사풍을 향해 말을 뱉었다. 정문의 표정이 흡사 ‘이 패륜아!’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사풍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 스릉.

“감당한다···, 감당한다···.”

장문인에게 하사받은 번천검(藩天劍)이 예기를 뽐낸다.

넋이 나간 채 중얼거리며 정문에게 다가서는 사풍.

“자, 잡아요!”

- 꽈아악!

그런 사풍을 다른 사형제들이 겨우 붙잡아 나무에 묶어 버렸다.

오늘도.

사형제를 구한 공동의 제자들이다.

“그래도 조금 이상한걸요? 전 약왕당(藥王堂) 소속이었는데 명부에서 이름이 없어졌더라구요.”

“마, 맞습니다! 저도 복마각에서 이름이···”

“저 역시 그렇습니다.”

명화와 묵환, 진명은 원래 소속된 곳에서 각자의 이름이 없어졌다.

한 각이나 궁에서 이름이 사라졌다면 곧바로 다른 각이나 궁으로 이름이 옮겨져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하지만 이들의 이름이 다른 곳에 올랐다는 말은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사풍 사형은요?”

명화가 나무에 묶인 사풍에게 말을 묻는다.

“···뭐, 나 역시 태청궁에서 쫓겨났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풍은 태청궁에 소속된 일대제자들 중 가장 일을 안 하는 제자였다.

“그거, 내가 부탁한 건데.”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정문의 입에서 말이 들려온다.

“대사형이요?”

“응.”

“왜요?”

“너희 소속 없는 거 아닌데.”

“···?”

“그게 무슨···?”

“서, 설마···?”

“싫···싫습니다. 그건···”

불안한 생각이 사제들을 스친다.

이제는 공식적인 후계자로 내정된 정문의 입김이면 가능할 무언가가 떠오른 것이다.

“응. 내 직속이야.”

!!!

사제들의 표정이 한방에 무너진다.

대제자는 같은 일대제자라도 다른 이들보다 배분이 높은 법이다.

즉.

장로에 준하는 실권이 대제자에겐 있다는 말이다.

주어진 사무는 그저 성장.

권한도 당연히 장로에 비해선 적을 것이다.

다만.

장로들이 각자 가지는 인편에 대한 권한 정도는 정문도 장문인에게 충분히 요구할 수 있었다.

특히나 지금은.

정문에 대한 장문인과 장로들의 애정이 각별할 때가 아닌가. 정문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 나는 왜!”

사풍이 절망하며 소리쳤다.

- 씨익.

사악하게 올라가는 정문의 입꼬리.

“어딜 도망가려고?”

정문이 흡사 노예들을 다루는 노예상과 같은 대사를 내뱉는다.

“뭐···, 뭐 하는 건데요? 사형 직속이면···?”

명화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겨우 말을 물었다.

“별거 없어. 그저 같이 다니면서 수련하고 이것저것 강호행도 좀 다니고.”

“강···호행 말씀이십니까?”

“뭐, 당장에는 아니어도 이제는 공동도 산을 자유로이 내려가게 할 생각이거든. 스승님도 그럴 생각이 있으시고.”

“고무적인 일이군요.”

“위 사형. 대사형의 말에 너무 넘어가지 마시오. 결국, 저 말은 강호를 돌며 저치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오?”

사풍은.

날카롭다.

“······그게···그런···?”

진명의 동공이 떨린다.

물론 사형과 함께 다니는 것은 즐겁다.

성장의 발판이 된다는 느낌도 들고.

하지만.

그걸 항상 자신이 독점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진명이다.

“다, 다른 사제들에게 이런 좋은 기회를···”

“스읍.”

“모두가 함께 강해지기 위해선···”

“쓰으으으읍!”

“······.”

망했다.

이제는 꼼짝없이 악덕 업주에게 잡혀 강호를 돌아다녀야 함이 분명했다.

“당장은 아니야. 지금은 사문 내에서 정리해야 할 일도 많고, 또··· 찾아올 사람도 많을 거란 말이지.”

“찾아온다구요?”

“공동에 말입니까?”

“어, 없습니다!”

“흥, 거지들이 평량에 찾아와 줬더니 너무 들뜬 거 아닙니까?”

아직은.

사제들의 식견이 정문에게 한참은 모자란 것 같다.

“뭐, 두고 보면 알거야.”

정문은 뜬구름 잡는 말만 남기고는 다시금 몸을 뉘였다.

아마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화산의 속가가 개파 하는 시기를 즈음하여 중원의 문파들이 공동을 찾아올 것이다.

연을 맺었던 무당과 화산은 물론이고 어쩌면 소림까지.

논검회에 참석하지 않는 문파들도 새롭게 논검회에 우승한 문파를 살펴보려할 것은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사제들이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계속 짓고 있을 때.

“대사형! 정문 사형!”

멀리서 다른 제자가 정문을 찾아온다.

“장문인께서 찾으십니다!”

* * *

자정의 부름에 상천제(上天梯)를 오른 정문은 다시금 조천문(早天門)까지 내려와야만 했다.

누군가를 마중하라는 자정의 명 때문이었다.

“아니, 스승님은 무슨 거지를 조천문까지 나와서 마중하고 그러십니까?”

“어허. 중원의 법도가 그러하다. 정문은 손님의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공동의 장문인이자 정문의 스승인 자정이 단박에 정문의 말을 밀어낸다.

“아무리 그래도···”

“쓰으읍!”

“끄응···.”

정문은 지금의 상황이 여간 불편하기 그지없다.

스승 자정이 조천문에 나가 마중하자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개방의 장로, 철면노개(鐵面老丐) 오봉학이었으니까.

‘어찌저찌 안 마주치나 했더니···’

평량에 분타를 열고 어느덧 자리를 잡은 개방이 공동산에 인사를 오겠다며 연통을 넣은 탓이었다.

조천문에서 한참 아래.

공동산의 산문에 한 무리의 거지들이 닿는다.

“여기서 기다리거라.”

“노개. 함께 가시지 않는겁니까?”

“거지들이 떼로 몰린들 좋아할 곳이 어디 있겠느냐? 여기서 기다리거라.”

“하지만···.”

“괜찮다.”

조금은 걱정이 섞인 육결개(六結丐) 홍구의 말을 물리친 오봉학이 홀로 산문을 넘는다.

허리에 매어진 여덟 개의 매듭과 오래된 죽봉만이 그와 함께였다.

“공동산이라···”

높이 솟은 취병봉이 오봉학을 내려다본다.

강호에서 거지로 50년간 동냥밥을 먹은 오봉학이다.

중원 대륙 전역에 안 가본 곳이 어딨겠냐만은 공동파의 도관은 그도 처음이다.

‘관심도 없었지.’

오봉학은 평량에 분타를 연 후, 공동에 대한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살폈다.

그리고.

자신의 관점이 바뀌어야 함을 오봉학은 깨달았다.

‘문파 내부의 일만 정리되면 능히 중원에 나올 곳이었다.’

그저 무정검 이정문이라는 걸출한 무인 하나로 이룬 모든 것이라 여겼던 처음이다.

지금은.

그런 걸출한 무인을 키워낸 공동에 시선이 옮겨진 오봉학이었다.

오봉학이 태청궁을 넘는다.

새롭게 배속받은 일대제자들이 절차에 맞게 그를 안내한다.

죽봉이 무기냐 아니냐에 대해 논쟁이 조금 오갔지만, 오봉학이 자진해서 이를 맡겼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오봉학의 발이 이천개의 계단을 오른다.

마침내.

웅장한 모습의 조천문과 함께 공동의 무인들이 오봉학의 시선에 들어온다.

홀로 장포를 걸친 중년의 도인과 회색 무복의 젊은 도인들.

장포는 장문인의 상징.

분명 저 도인이 자정일 것이다.

‘무정검(無情劍)은··· 무정검은 누구지···?’

오봉학이 조금은 멀리서 눈매를 좁힌다.

분명 예사 비범한 이는 아닐 것이다.

한 명.

굳건히 선 제자 중 홀로 균형이 맞지 않는 무인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저자가 무정검···’

그런 생각이 들 즈음.

오봉학은 자정의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개방 총타의 장로이자, 평량 분타의 분타주 오봉학이 공동의 도관에 들기를 청합니다.”

가볍게 포권하며 고개를 숙이는 오봉학.

한 문파에 공식적으로 찾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예를 다해야 함이 분명했다.

“찾아주셔 감사합니다. 공동파 장문인 자정입니다.”

자정 역시 예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드시지요.”

웃으면서 안으로 안내하는 자정.

“흠, 그럼, 감사히 들겠습니다.”

자정의 말을 들은 오봉학이 걸음을 조금 움직이더니 이내 일대제자 중 한 명의 앞에서 발을 멈춘다.

아래에서 위로 가볍게 그를 훑어보고는 말을 꺼내는 오봉학.

“무정검 이정문 도장이십니까?”

제법.

그러니까 오봉학의 위치와 나이를 생각하면 제법 높은 어투가 그의 입에서 나온다.

“노개, 말씀 낮추십시오. 까마득한 후배입니다.”

자정이 기겁하며 오봉학에게 달려온다.

지금은 자정의 말이 옳을 것이다.

밖에서 통천패를 차고 공동의 일대제자를 호령할 때는 몰라도, 지금은.

오봉학이 정문에게 굳이 말을 높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허허허, 제가 듣기로는 반말을 아주 싫어하신다고···”

‘이 거지 새끼가?’

정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다.

일전에 개방의 오봉학이 불렀던 일과 정문이 대차게 깠던 일은 아직. 장문인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정문이다.

‘무슨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하···하. 공···동의 일대제자 이정문이 노 선배를 뵙습···니다···.”

정문은 이를 최대한 꽉 깨물고 억지웃음으로 말을 받았다. 하지 말라는 간곡한 부탁이 그의 동공에 가득했다.

“흐음···, 듣던 것보다는 거지를 싫어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

잔뜩 이죽거리는 웃음이 가득한 오봉학이 정문에게 말을 더한다. 상황과 분위기를 읽은 것이다.

적어도.

적어도 이 자리에서 만큼은.

자정이라는 정문의 스승이 보는 앞에서는 정문이 오봉학에게 막 대하지 못할 것이란 계산이 선 것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 아닙니다. 어떤 도인이 거지를 매우 싫어한다기에. 허허허. 늙으니 기억이 섞이는군요.”

50년 동냥 인생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눈칫밥과 혓바닥으로 살아온 50년이 헛된 것은 아니란 뜻이다.

“···허허, 그런 ‘방자한 도인’이 있습니까? 걸사(乞士)와 도사(道士)는 한 글자 차이가 아닙니까? 노개께서는 부디 노여워 마십시오.”

자정이 최대한 오봉학을 달래본다.

그런 모습을 보며, ‘방자한 도인’은 옆에서 불안한 눈빛을 보낼 뿐이다.

“노하지 않았습니다. 허허, 맞는 말이 아닙니까? 도사는 바쁘니, 거지가 찾아가야지요.”

“······.”

정문은 그저 입을 닫고 눈에 잔뜩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얼른 지나가라, 지나가라 마음속으로 주문만 외울 뿐이다.

“도사가 무에 바쁩니까? 허허, 말씀이 심오합니다. 노개께서 본도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겁니까?”

자정은 나름.

분위기를 순화하는 의미에서 농을 던져 본다.

“허허, 장문인께서 재미난 말씀을 하십니다. 어디, 제가 그랬다가는 평량 거지들의 쪽박이 남아 나겠습니까?”

“······?”

오봉학이 크게 웃으며 하는 말에도 자정은 이해하지 못한다.

“허허허. 아닙니다. 입이 잘 풀렸으니, 오늘 공동에 올라온 것이 퍽 신이 납니다.”

조금은 갸웃했던 자정이지만 이내 오봉학이 대소하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짓자 자정도 더는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그저.

정문만 죽을 상이다.

‘거지 새끼들···, 쪽박 깬다!’

정문이 입술에 힘을 주며 잔뜩 복수를 다짐할 때.

“장문인. 청이 하나 있습니다.”

걸음을 멈추며 자정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오봉학.

“말씀하시지요. 가능한 것이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거창한 건 아닙니다만.”

“허허, 그리 말씀하시니 더 무섭습니다.”

오봉학의 입에 미소가 걸린다.

아무래도 오늘은.

자신이 저 젊은 도인의 속을 뒤집는 날인 것 같다.

“무정검 정문 도장도 함께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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