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우리 전쟁 몇 번 더 할까?
한바탕 혈풍이 몰아친 서녕.
중인들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일상에 몸을 바삐 움직일 뿐이다.
그런 중인들의 일상 한가운데에서 유일하게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혈영문의 장원이었다.
“아오, 뻐근해.”
“거짓말 마요. 사형 대충 싸우는 거 내가 다 봤는데.”
“거, 칼침 한 방 안 맞은 사람들은 알아서 조용히들 합시다.”
“이야, 부족해서 맞은 칼침이 아주 훈장이네.”
“수일하지 못해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게 누가 저놈 살렸냐?”
대화는 평소와 같다.
그저 이들이 전날 거나한 전투를 치렀고 강호를 뒤흔들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화산과 소림, 당문과 남궁의 무인들은 그저 혀를 내두른다.
자신들이라면, 이처럼 큰 전투 다음 날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공동의 무인들 앞에서 조금 주눅 드는 그들이다.
공동의 무인들이 잔뜩 서로를 향해 장난치며 분위기를 풀어가고 있을 때.
혈영문 전각이 열리며 회의에 들어갔던 각 문파 중진들이 걸어 나온다. 회의에 들어간 지 정확히 두 시진이 지난 시점이었다.
저마다 다양한 표정의 문파 대표들이 각자 무인들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전각 안에서 나눈 말을 전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무인들의 뒤로.
조금은 넝마가 되어 버린 정문이 비틀거리며 전각을 빠져나온다.
“사, 사형!”
정문에게 다가서는 진명.
멀쩡히 걸어갔던 정문이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진명은 알 길이 없다.
“사, 살려다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 말이···”
“말이?”
“너무 많다···.”
- 툭.
정문의 몸이 진명의 어깨로 향했다.
아무래도 각 문파의 중진들이 모인 만큼 수많은 말이 오갔고, 그런 말들의 중심에는 정문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누워서 정양하는 정문.
옆에서는 명화와 진명, 사풍과 묵환이 정문의 수발을 든다.
“끄응···.”
“안에서 무슨 말이 오간 겁니까?”
“혼났어요, 사형? 어떡해···.”
“히, 힘내십시오.”
“전쟁에도 멀쩡하던 양반이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저마다 정문을 걱정하는 사제의 말들.
정문은 애써 기력을 차려 몸을 일으킨다.
“후우우.”
“좀 괜찮으십니까?”
“진명아.”
“예, 사형.”
“나도 장문인 되면 저렇게 되는 걸까?”
“······.”
분명 정문이 뱉는 말 중에는 자신들의 스승인 자정도 포함되어 있을 거기에 차마 진명이 답하지 못한다.
이건.
또, 기사멸조다.
“무슨 말들이···?”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드는 정문.
분명 전각의 안에서는 다들 정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다.
- 무정검. 있었던 일을 자세히 풀어주시겠소이까?
오봉학이라는 늙은 거지의 말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차분히 있었던 일을 풀어낸 정문. 다들 다양한 반응을 표하며 흥미롭게 정문의 말을 들었다.
중간중간 장응혈조는 누가 쓰러트렸냐는 둥, 혈영쌍살은 누구 작품인가 등을 물었으나, 정문은 밖의 일은 잘 모른다는 답으로 일관했다.
마지막으로 서영삼흉을 뚫고 혈수살검을 베었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모두가 손뼉을 치며 정문을 칭찬했다.
이후 한동안은 견딜 만 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들은 정문과 공동에 대한 찬사였으니까.
- 아미타불-.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 도기입니다. 도기.
- 과연, 공동의 도인들의 용기가 대단하오!
-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단하십니다.
쏟아지는 칭찬에 정문은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꺄륵 웃어 대었다.
하지만.
- 그래도.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부터
-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나, 신중할 필요는 있지요, 아미타불.
- 다혈질일세, 다혈질이야!
- 정문은 어찌 스승의 마음을 몰라주는가?
까지.
이어지는 정문의 폭두(爆豆)짓에 대한 지탄이 한 시진을 넘도록 정문의 머리를 울렸다.
물론.
이들은 혈영문이 닷새 만에 서녕을 떠나려 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저리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억울한 것은.
오봉학은 분명 이를 확인했으면서도 입을 닫았다는 사실이다.
- 노···노개?
- 크흡. 나중에 이야기하지.
아무래도 평량에 돌아가면.
거지촌을 한 번 순방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 정문이다.
“괜찮으십니까?”
“응? 응. 뭐···. 이제 좀 괜찮네.”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명은 혈영문의 후처분에 대해서 말을 묻는다. 자신들의 손으로 멸문시킨 곳이니 후에 어찌 될지 궁금한 것도 당연하다.
“뭐···, 우선 재산은 서녕에 풀기로 했다. 장원도 적당히 처분해 서녕에 베풀 거고.”
!!
“우리가 가지는 거 아니었어요···?”
조금은 기대한 듯한 상가의 여식, 명화였다.
“어허. 명화야. 우리가 이득을 보자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지 않으냐?”
올곧은 진명은 잔뜩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명화를 꾸짖는다.
“혈영문이라는 악적 놈들이 가진 것은 모두 서녕에서 수탈한 것들이다. 응당 돌려주는 것이 맞느니라.”
여전히.
도기가 가득한 진명이다.
“그게 아니라···, 다친 사형들도 많은데···”
무언가 보상이라도 줘야 하지 않나, 명화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당연히 혈영문을 멸문시킨 것 자체로도 큰 보상이긴 하다. 사질이 죽을 뻔한 값을 받으러 온 것이 이번 원정의 의의가 아닌가.
그럼에도 명화는 다친 이들에게 무언가 주고 싶은 마음이 커 보였다.
“받은 것도 있으니, 걱정 말거라.”
정문의 말이 잔뜩 풀이 죽은 명화를 위로한다.
“정말요?”
“약재 창고를 우리가 가지기로 했다. 사제들이 많이 다쳤으니, 그곳에 있는 것들로 치료를 하자.”
사실 공동은 약재 창고를 통째로 받을 정도로 다친 제자는 없었다.
이를 알면서도 정문은 끝까지 치료를 핑계로 약재 창고에 대한 처분권을 가져왔다. 이는 모두. 노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정문 역시 혈영문의 넘쳐나는 재산이 탐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무려 혈영문이 아닌가.
사파는 정파에 비해 규모가 작아도 재산은 많은 법이다. 정직하게 모아 돈을 버는 정파와 달리 사파는 돈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서녕이나 되는 큰 도시를 차지한 혈영문이라면. 웬만한 상단보다 큰돈을 굴릴 것이란 게 정문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정문은 대놓고 이를 내놓으라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만약 공동이 이들의 재산에 손을 대는 순간, 그들이 뿜었던 검들은 모두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정문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정문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공동이 가져도 이상하지 않으며 적당한 선 안에 있고, 또 제법 가치가 나가는 것. 그런 것을 가져가기로 말이다.
‘분명 약재 창고는 아직 처분하지 않은 걸 확인해뒀지.’
눈이 번뜩이는 정문.
혈영문 정도 재산의 문파라면, 응당 약재 창고에 영약 같은 걸 쌓아 뒀을 것이 분명했다.
‘이참에 우리 애들 내력 좀 채워줘야지.’
“약재 창고 정도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군요.”
올곧다는 진명도 이 정도는 넘어가는 모양이다.
“뭐, 또···, 생포한 무인들은 다들 관아에 넘기기로 했다.”
“관아요? 서녕의 관아에 넘겨도 될까요?”
한 지역을 사파가 장악하면 그들은 관에 줄부터 서고 보는 법이다. 혹여 그들과 연이 있을까 걱정하는 명화.
“어차피 문주도 죽고 돈도 다 잃었잖아? 관이 쟤들 편들어 줄 이유는 없다고.”
“아.”
정문의 설명이 끝나자 사제들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명문 정파의 중진들답게 일은 깔끔히 처리된 것 같았다.
“허면, 난주로 바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 한동안은 서녕에 머문다. 정비도 조금 하고. 여기 일도 처리하고.”
한 문파가 지역에서 맡는 일은 다양한 법이다. 비단 정파뿐 아니라 사파 역시 불법적인 사업 외에 합법적으로 해오던 사업도 있을 것이고.
정파란 이름을 내건 이상, 그런 문파를 지우고 나 몰라라 하며 자리를 뜨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처리할 일이 많겠군요.”
“뒷일은 다른 문파들이 해결해 준다더구나.”
“맡겨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얻을 건 다 얻었어. 작은 수저 정도는 더하게 두자고.”
정문은 뒷머리에 손을 올리며 몸을 누인다.
“눈들 좀 붙여. 다들 곤하겠다. 나중에 따로 장원을 잡아 준다니까, 거기서 제대로 쉬자고. 한숨 자고···. 약재 창고나 보러 가자.”
말을 끝으로 계속해서 참아오던 잠을 정문이 청해본다. 스승도, 다른 문파의 무인들도 모두 이곳에 닿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 것이다.
정문의 코 고는 소리가 경쾌했다.
* * *
- 끼깅.
- 덜컹.
“안 되는데요?”
“다시 해봐.”
- 끼긱, 끽긱.
- 덜그럭.
“쓰읍···. 이거 제법 복잡합니다.”
공동에서도 손재주가 좋기로 유명한 치성이 연신 자물쇠와 시름한다.
“확실히 안 됩니다.”
“에휴, 걍 부숴야겠다.”
- 스릉.
검을 뽑아 드는 정문.
이전에 철문을 자르던 때와 같이 적당한 기력을 검에 싣는다.
“비켜들 서.”
“옙!”
서둘러 주변을 벗어나는 사제들.
정문의 검이 한 번 위잉 하고 울더니 이내 작은 검로를 그린다.
- 까앙!
- 툭.
“진작에 이럴걸.”
혹여나 안에 든 약재들이 상할까 조심히 문을 열려던 정문이지만, 답답한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 덜커억!
육중한 문이 소리를 내며 열린다.
안에는 기척은 당연하고 다녀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재산을 다 팔면서 약재는 왜 그대로 뒀을까요?”
“마지막에 챙기려 했겠지. 서역에 가면, 중원의 약재를 구하기 힘들 테니 챙겨 가려 했을 거고.”
역시.
그런 단어가 진명을 스친다.
사형은 약재 창고를 그냥 가져온 것이 아니다. 진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방금 정문이 뱉은 것까지 모두 계산해 정문은 이를 선택한 것이다.
“들어가자.”
조심히 걸음을 옮기는 정문.
사제들이 조심히 정문의 뒤를 따른다.
“흐음.”
창고의 안은 어두웠다.
야명주 정도야 벽을 도배하고도 남을 혈영문이지만, 야명주는 미세하게 열을 뿜는 법. 이는 약재에 좋을 리가 없었다.
“다들 신선해요. 당장에 본산 약왕당 보다 좋은걸요?”
약왕당의 제자였던 명화가 그럴듯한 증언을 해준다. 정문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 이건···!”
다들 흩어져 주변을 보던 중.
사풍의 목소리가 창고를 울린다.
“왜? 왜? 뭔데?”
얼른 달려오는 정문.
무언가 좋은 거라도 발견했나 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자령삼(字逞蔘)입니다···!”
자령삼은 각종 영단을 만들 때 쓰이는 재료로 웃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약재임이 분명했다. 당장에 엄청난 효능을 보는 영약은 아니지만, 쉬이 구할 수 있는 약재 역시 아니었다.
“넌··· 그걸 어떻게 아냐?”
의아한 정문이 사풍을 빤히 보며 묻는다.
“······할아버님이···”
“에라이, 복 받은 놈.”
사풍을 밀어내며 자령삼을 챙기는 정문. 어차피 복용한 전력이 있는 사풍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일 것이다.
“사형···, 이것도 조금 수상합니다.”
다시금 정문의 발이 날아든다.
이번에는 진명에게 다가서는 정문.
!!
진명의 손에 들린 찬합을 보자 이내 정문이 눈을 크게 뜨고 만다.
“하, 하수오?”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까진 아니더라도··· 충분히 기력에 좋은 하수오로 보입니다.”
그래, 진명의 말처럼 만년은 무리다.
하지만 못해도 천년. 천년이란 말은 능히 붙고도 남을 하수오가 정문을 향해 손짓했다.
- 꿀꺽.
- 꿀꺽.
-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창고를 가득 채운다.
미친 척하고 먼저 삼켜볼까 하는 생각들이 도인들을 스치는 것이다.
“죽어. 진짜 죽어. 다들 지워라, 생각.”
차게 깔리는 정문의 말이 울리고 나서야, 이내 사제들이 고개를 턴다.
슬쩍 찬합을 챙긴 정문이 서둘러 안을 둘러 본다. 초입이 이 정도면, 안쪽에는 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약재 창고의 내부는 말 그대로 보물창고와 같았다. 사파의 인물들이야 칼 맞을 일이 많기에 언제든 치료 가능한 영약들을 쌓아 두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정문이 계속해서 창고를 살펴본다.
사향(麝香)에 용연향(龍涎香), 설삼(雪蔘)에 동방삼(東方蔘). 단유(斷油)에 뇌균(磊菌)까지. 각종 신단의 재료로 쓰이는 약재들이 가득 정문의 시선을 채웠다.
‘이···, 이 정도면···.’
자신이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것을 만들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정문을 스쳤다. 아주 영롱하고, 둥글며, 탐스러운 신단이 정문의 눈앞에 아른 거렸다.
사제들 역시 눈을 둥글게 뜨며 정문의 곁에 다가선다. 그야말로 공동이 대박을 친 것이다.
여기 모인 약재들은 강호에 아무리 돈을 풀어도 전부 모으긴 힘들 것이 분명했다.
분명 혈영문이라는 자들이 무력으로 쟁취하거나 훔친 것, 그리고 사들인 게, 한데 모인 것이라 그렇게 다들 생각했다.
“이 정도 재료를 가지고 무공은 왜···”
그 따위였을까.
그런 말을 명화가 뱉으려 했다.
“굳게 잠긴 자물쇠. 끝까지 처분하지 않았던 상황. 이 모든 게 말해주는 거 아니겠냐.”
“예?”
“사파란 놈들이 그래. 이건··· 혈영문의 창고라기 보다···”
“문주 놈··· 혼자 쓰는 약재 창고였겠군요.”
정문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문을 위한다는 목적하에 수하들이 구한 것도 뺏어다, 이곳에 처박아 놓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야···, 우리 전쟁 몇 번 더 할까?”
정문의 눈이 반짝인다.
이건 진심이다.
사제들은 그렇게 느꼈다.
정문의 눈이 너무도 욕망으로 가득 찼기에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사파 두어 개만 더 털면···!”
“정신 차리십시오! 정신!”
진명이 서둘러 흐르는 정문의 침을 닦으며 사형을 흔든다.
나갔던 혼이 돌아오는 정문.
“여, 여기. 우리가 떠날 때까지 여기를 지켜야 한다! 특히 그 당문의 독물 놈들! 걔들도 약재 보면 눈 돌아가니까, 특히 조심하고!”
아무도.
아무도 공동이 소유권을 주장한 약재 창고를 탐낼 일은 없을 것이다.
허나, 가진 자는 노상의 모두가 강도로 보이는 법. 정문의 눈에 다른 정파인들 역시 자신의 약재를 털려는 강도로 보일 뿐이었다.
“옙! 사형!”
우렁차게 답하는 사제들.
그리고.
“묵환을 부르거라! 다른 사제들도! 돌아가며 번을 선다!”
진명은 더 나아가 구체적인 계획까지 밝힌다.
아마 그런 시선은.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