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는 공동을 무시하지 마라-77화 (77/153)

77. 내가 말했잖아. 다 먹여 준다고.

난주에 무사히 닿은 정파의 무인들.

다들 무정검이 한 일에 대해 입을 모았고 이는 곧 강호에 풍문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자리에는 개방도 있었으며, 또 이들은 혈영문의 재산을 모두 중인들에게 풀어 버렸다.

이는 협행(俠行)이고, 선행(善行)이며, 또 정도(正道)에 맞는 행동이었다.

중인들이 떠들기 좋아하는 소재라는 뜻이다.

어쩌면, 이제 막 중원 대륙 끝에 닿았을 정문의 풍문이 잠시 떠돌 틈도 없이 새롭게 바뀔지도 모르겠다.

난주에 모인 정파 인물들이 하나둘 짐을 꾸리며 돌아갈 준비를 마친다.

누구는 무정검을 가늠하러 왔고, 누구는 공동을 가늠하려, 또 누구는 그저 흥미가 동해 찾았던 감숙이고, 난주였다.

생각보다 깊게 발을 담근 것이 되어버렸지만, 일이야 잘 마무리되었고 이들 역시 잃은 것은 없는 난주행이었다.

“사천에 꼭 와주시게. 자네랑 나눌 이야기가 많다네.”

“곧 다시 뵐 겁니다. 아미타불-. 부디 후처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무정검, 다음에는 꼭···”

아련하게 인사를 나누고 이들은 각자 사천과 숭산, 안휘로 발을 돌렸다.

다들 사문 내에서도 중추적인 일을 하는 이들이기에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들이 가는 동안 제법 풍문이 구체적으로 변할 것이다.

누구든 이들을 보면 풍문에 대해 사실을 물을 것이고 이들은 그저 사실을 답할 테니까.

그리고 이들이 답하는 그 사실은 강호를 놀라게 할 것이다.

정파 무인들이 길을 나서고 이레 뒤.

화산마저 난주에서 일을 정리하고 짐을 싼다.

운양 역시 화산이라는 거대 문파의 장문 대리. 오래도록 본산을 비울 수가 없는 몸이다.

“이제 언제든 볼 수 있으니···.”

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운양은 자정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보였다.

그렇게 화산이 떠나던 날.

주인이 없는 곳에 객도 더는 머물 수 없는 법.

공동 역시 평량으로 귀환하는 길을 나섰다.

물론 평량에 함께 머무는 개방의 거지들과 함께.

힘차게 굽이치는 연지하(胭脂河).

높게 솟은 취병봉이 이들에게 그리운 본산에 왔음을 알려준다.

큰일을 겪은 후 찾는 본산은 늘 그리움과 안정감을 동시에 주는 법이다.

“장문인. 고생 많으셨습니다.”

태청궁과 공동산을 지키던 자명이 버선발로 나와 자정을 맞이한다.

당장에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받았을 때는 누구보다 흥분하며 뛰쳐나갈 기세의 자명이었지만, 장로들은 본산에 남은 이대제자 역시 지켜야 했기에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정문도···, 큰일을 해냈다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숙.”

“잘했다. 공동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전 강호에 똑똑히 알려주었어.”

“부끄럽습니다. 사숙.”

“놈. 겸양 떨기는.”

자명은 가볍게 정문의 어깨를 툭 치고는 이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난주에서 이미 개선식에 비슷한 환대는 받았지만, 본산에서 받을 환대는 아직 남은 것이다.

“사, 사숙들이 온다!”

“장문인도 오신다!”

공동산은 일대제자들이 모두 달려나가며 이대제자와 장로 몇밖에 남지 않았었다.

이대제자들은 공동이 서녕으로 향한 이유를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사형인 무성이 독에 당했다는 것. 그리고 이걸 참지 못한 사숙들의 분노가 서녕에 닿았다는 것까지. 모두 말이다.

일대제자를 바라보는 이대제자들의 눈에 존경이 가득하다.

백 가지의 말과 지적보다는 한 번의 행동과 그 행동 속에 담긴 의미와 감정이 존경을 불러오는 법이다.

제자들이 공동에 입산한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출신이 감숙이라는 공통점은 다들 있을지 몰라도 하필이면 공동이란 곳에 오기까지는 다들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각양각색의 이유와 사연을 가진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소속감과 사문에 대한 자부심이 아마 답일 것이다.

이번 혈영문 사건을 통해 이들의 가슴에는 두 가지 모두가 남았음이 분명했다.

“다들 이번 일로 고생이 많았음을 안다. 가벼운 마음에 갔던 곳에서 무거운 일을 겪었구나.”

“스승님께서 가장 힘드셨음을 모두가 압니다.”

마지막으로 훈화를 전하는 자정과 그에 맞춰 대제자 다운 말을 뱉어내는 정문.

그저 자정을 제일 힘들게 만드는 이가 주로 정문이라는 게 문제지만, 자정은 지금 그걸 따지진 않을 것이다.

“크흡. 다들 한동안은 평량 외에는 출입을 자제하거라. 그간 너무 큰 일들이 많아 사문 내의 일도 밀렸고 또······.”

자정의 시선이 정문에게 향한다.

“······, 혹여 모르니 아무튼 한동안은 수일에만 힘들 쓰도록.”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하지만, 사문에 모인 모두의 귀에 풀어두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말이 분명하게 들렸다.

“예, 장문인.”

“다들 오늘은 푹 쉬고, 사무에 복귀하도록. 이상.”

어디 한 문파의 장문인이라고 고단함이 없겠나. 자정 역시 큰일을 겪은 것과 계속되는 이동으로 고단함이 몰려온다.

집이란 그런 고단함을 풀어주는 곳.

도인에게는 도관이 집이고 공동의 도인에겐 공동산이 집인 법이다.

장문인의 해산령이 떨어지자 다들 흩어져 자신의 처소로 향하려 할 때.

“거, 가기들 전에.”

정문이 사제들의 앞을 막아선다.

“예?”

“또 뭡니까?”

“몸 한 번 풀고 쉽니까?”

“몇 명이요?”

다양한 반응의 사제들.

응당 사형이 부르거든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읍해도 모자란 것이 강호거늘···.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는 예술가의 표정이 정문을 감쌌다.

“······, 등에 멘 것들 두고들 가라···.”

어쩌겠나.

자신이 키운 사제들인데.

정문은 그저 목적만 빠르게 말하고 사제들을 보내주려 한다.

“약재들 말입니까? 약왕당이 아니라요?”

공동의 모든 약재는 약왕당에서 관리한다.

영약도 양약도, 또 그저 보약까지도 말이다.

“아니. 이번에 얻은 약재는 내가 관리하기로 했다. 뭘 좀 만들 거니까, 그렇게들 알고 내 처소에 다들 두고 가라고.”

“사형이요···?”

“······부, 불안합니다···?”

“약왕당으로 보내시지요.”

“뭐, 알고는 그러는 겁니까?”

정문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정문이 무언가를 맡았을 때는 늘 결과가 상상 이상이기에 사제들이 불안한 것도 이해를 해줘야 한다.

“쓰읍. 알면 다친다. 사숙께는 다 말씀드린 것들이니 알아서 옮겨두거라.”

공동에서 쓰이는 약재들은 모두 대량으로 구매된다. 약왕당은 이미 올 한 해 쓰일 약재들이 충분하다는 말.

물론 자령삼(字逞蔘)부터 단유(斷油),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 및 동방삼(東方蔘)과 설삼(雪蔘)까지.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여러 신비한 자재들은 약왕당도 탐낼 것이 분명하나, 한 가지 또 다른 사실은.

약왕당은 어디까지나 무공을 배우는 도관에 속한 하나의 기관. 그들이 약재를 활용하고 단약을 만드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뭐, 사숙께는 확실히 말씀해두신 거겠죠?”

“나중에 다른 말 나오면 곤란합니다?”

얘들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 걸까.

분명 우직하게 믿고 따르는 것은 맞는데.

묘하게 고개가 갸웃거리는 정문이다.

어쨌건, 공동은 본산에 귀환했다.

처음 발을 나섰을 때와 같이 모두가 함께.

* * *

공동이 귀환하고 이레가 지났다.

다들 일상으로 돌아갔으며, 여느 때와 같은 분위기만이 공동에 가득했다.

물론, 강호는 다를지도 모른다.

혈영문이라는 제법 큰 사파를 공동이 그들의 지역까지 쳐들어가 지우고 왔다.

누구는 이럴 때 강호에 나가 더욱 명성을 즐기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일을 주도했던 한 도인은 조금 생각이 다르다.

지금은 명성을 즐길 때도, 이런 명성을 더욱 높일 때도 아니라는 것이 그의 평가였다.

‘이럴 때일수록···.’

이럴 때일수록 더욱 내실을 다지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게 정문의 방침이었다.

수련을 더 늘려야 할까?

아니면 사제들에게 새로운 무공을 가르쳐 볼까? 새로운 검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여러 가지다.

정문의 머리가 기억하는 한도 안에서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논검회가 끝난 후부터 계속해서 정문의 머리에 남았던 것들이다. 한창 그런 생각들로 고민하던 정문.

그런 정문에게 어쩌면 선택을 조금 쉽게 만들어줄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혈영문의 약재 창고였다.

수많은 약재와 상태 좋은 영약들.

이런 재료들만 있다면.

정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진다.

“흠···.”

커다란 솥을 뒷마당에 두고 차례대로 약재를 넣는 정문. 그의 표정과 손놀림이 사뭇 진지하다.

재료를 연신 더듬는 그의 손 반대편에는 아직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새로 쓴 서책이 한 권 들려있다.

아무런 제목도 없이.

그저 머릿속에 저장한 문자를 옮겨쓴 하나의 서책.

그곳에는 지금 정문이 만들어갈 신단의 제조법이 차례에 맞게, 정량 별로 차분히 나열되어 있었다.

“우선 간단한 당귀(當歸)랑 감초(甘草)에 천문동(天門冬)과 맥문동(麥門冬)을 비율에 맞게···”

몇 번씩 확인하며 재료와 비율을 대조하는 정문. 여기까지는 쉬이 구할 수 있는 재료기에 아직 손이 떨리는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내 쉬운 재료의 배합이 끝나고 찾아온 결정적인 순간.

이제는 정문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자···자령삼에··· 동방삼? 이걸 한방에?”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한 적은 없는 정문이다. 다만, 의심되는 것은 자신이 이전에 읽었던 서책, 그리고 관리했던 자료의 진위일 것이다.

‘맞겠지···. 황실 서고가 어떤 곳인데···, 또 쓴 사람도···’

실패하면 값비싼 재료를 잃고 만다.

자령삼과 동방삼이야 부르는 게 값인 재료가 아닌가.

거기에 더 중요한 것은.

아직 이들이 제일 중요하고 비싼 재료가 아니란 점일 것이다.

“다···단유를 다섯 방울이나···? 이 양반이 미쳤나?”

단유는 속단유가 되기 직전에 놓인 석유의 일종으로, 속단유가 된다면 공청석유 못지않은 효력을 뿜는 것이 단유였다.

“······에라이!”

어차피 그저 얻은 것들이다.

안 되면 또 강호에 나가 칼춤 한 번 추면 되는 것 아닌가.

이제 공동도 제법 명성을 얻었으니, 어쩌면 선물로 좋은 재료가 들어올지 누가 아는가.

정문은 눈을 딱 감고 혈영문에서 얻은 모든 단유를 쏟아부었다.

단유 외에도 사향(麝香)과 천패모(川貝母), 용연향(龍涎香) 등의 귀한 약재가 계속해서 솥으로 들어갔다.

사제들의 수에 맞게 적정한 양을 배합한 정문.

이제는 그 많던 약재들도 줄어들고 오로지 천년하수오와 설삼, 뇌균 정도가 그의 눈앞에 있을 뿐이다.

“······.”

정문이 서둘러 오행을 역산하며 약재를 배합하는 법을 계산해 본다. 약재 역시 오행과 주역의 원리에 맞게 배합되는 것이 이치.

만약 양의 기운을 가진 하수오가 ‘과(過)’하지만 않다면, 기존의 배합에 이를 더 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헛, 둘, 셋에 다시, 음, 양, 양, 음···’

제법 복잡한 식이 머리를 스친 후.

‘되겠다.’

그런 결론이 나오자, 정문은 지체 없이 굵디굵은 하수오 뿌리를 솥에 집어넣었다.

이건, 효능을 더 하면 더 했지, 조화를 깨트리진 않을 거라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모든 재료가 들어간 솥이 뜨겁게 연기를 뿜어 댄다.

조금은 자욱한 연기가 정문의 마당을 채울 무렵.

이제는 연단자의 노력이 조금 필요한 시간이다.

- 쿠오오오오오.

- 쿠오오오오오.

정문의 단전에서 내력이 뿜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력을 손에 담아 솥으로 쏟아부으려는 것이다.

- 착!

하고 솥에 정문의 양손이 달라붙는다. 그리고 이내 정문의 손에서 내력이 발산되니, 솥 안이 정순한 기운으로 가득찬다.

‘신의, 그 양반도 한 무공 하셨으니···’

정문의 기력이 솥 안에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약재는 배합되고 또 적절히 조화를 이룰 것이다.

어쩌면.

정말 이상적인 예측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만들어진 신단에는 연단한 사람의 기운 역시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정문을 스쳤다.

‘사제들에게 내 기운이라···’

이미 닮아 가고 있는데 조금 들어간들 어떤가. 저들은 반쯤 정문화가 끝난 이들이다.

‘더 먹어라! 더!’

그래, 이렇게 된 거 이정문이 수십인 문파가 되어보자, 그런 결심을 마친 정문이 연단에 더욱 힘을 준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적어도 사흘은 이런 상태를 유지해야 할 터.

누구에게도 찾지 말라 말을 전해 두었고, 또 한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벽곡단도 준비되어 있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다.

이제는.

자신만 버텨주면 되는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조금만.’

이번 혈영문 사태에서 죽은 이는 없다.

물론 중상을 입은 이도.

하지만, 사제들 몸에 조금씩 검상이 새겨진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더 큰 위험에 대비해 이쯤에서 아이들의 내력을 늘려 놓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내가 말했잖아. 다 먹여 준다고. 기연, 무공, 영약까지.’

처음, 이몸에서 눈을 뜨며 자신이 아는 것을 이용해 사형제를 강하게 만들겠다 결심했던 정문이다.

‘천선단(天仙丹)이면, 충분하겠지.’

- 씨익.

이제야.

이제야 그중 제대로 된 것 한 가지를 주게 된 정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