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는 공동을 무시하지 마라-81화 (81/153)

81. 공동의 상징.

강호행은 속가행과 다르다.

그저 속가에 찾아가 그곳의 사무를 봐주고 근심을 덜어주는 속가행과 달리, 강호행은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일종의 자유 수행과 같은 것이다.

산중에서 도를 수양하는 이들은 민초(民草)의 삶을 알지 못한다.

민중과 멀어진 신앙은 공허한 법.

이상적인 삶에 대한 답을 구하는 종교들은 그런 현실과 신앙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 강호에 제자를 보내 민초의 삶을 배우는 수행을 만들었다.

그런 수행이 무공을 배우는 문파까지 내려와 민초의 삶을 돌아보고 또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주며 협(俠)을 쌓는 것으로 바뀐 것이 지금 무림의 강호행.

강호행은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원칙이기에 그간 감숙에서만 활동하던 공동의 제자들은 강호행에 나선 적이 없다.

그간 사문을 꽉 잡고 있던 누군가가 절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은.

공동이 바뀌었다.

사문을 꽉 잡고 흔들던 누군가도 이제는 물러났고 공동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물론 이전 속가행 중에서도 몇몇은 감숙 밖으로 나간 경험도 있다.

허나,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이들은 정해진 기간 안에 정해진 곳만 들린 뒤 바로 사문에 복귀해야만 했다.

이제 곧 이들이 나설 강호행처럼 자유로운 수행과 배움의 기회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노각이 있는 곳까지 밀고 온 사제들이 방을 살핀다.

방에는.

一. 맡은 사무가 있는 자, 일정을 조율하라.

二. 강호행은 3인이 1조로 함께 떠난다.

三. 강호행의 기간은 최장 1년으로 한다.

四. 동시에 강호행에 나가는 제자는 열 개 조 이하로 둔다.

五. 이레에 한 번은 사문에 전서를 보낸다. (개방 분타 무료 이용 가능.)

六. 귀환령이 떨어질 시, 즉각 귀환한다.

七. 사문의 임무가 하달될 시, 임무를 강호행보다 우선한다.

八. 사고가 발생했을 시 지원을 요청한다.

九. 청해와 강남 등 사파의 영역은 관도를 이용하되, 가능한 접근하지 않는다.

十. 사문의 명예가 각자의 행실에 달렸음을 잊지 않는다.

十一. 도망과 합공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十二. 당하면 갚아 준다.

十三. 속가를 개파할 도시를 물색한다.

十四. 황군과 충돌하지 않는다.

十五. 죽지 않는다.

열다섯 개의 조항이 빼곡히 적혀있다.

대충 봐도 작성자가 누구인지 쉬이 알 수 있는 방이었다.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참 공동 다운 방입니다.”

“그래, 대사형의 손길이 물씬 느껴지는구나.”

어제는 정문과 넉 달 만에 대련을 가졌다.

그런 다음 날 이런 방이 붙었으니, 모두들 정문이 일을 꾸몄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흠···, 사형이 우리를 인정하신 건지도 모르겠구나.”

“그렇습니까? 영 성에 안 차 보이시더니···”

“워낙 내색이 없는 분이시지 않으냐.”

사람을 어떻게 보는지, 그건 자유다.

허나, 노각의 말에 크게 공감은 가지 않는 청익이었다.

“사문이 나날이 변화하는구나.”

“맞습니다. 체계도 바뀌고 또, 분위기 역시 달라지고 있습니다.”

변화하고 있다.

최근 공동의 모두가 느끼는 그 생각이 다시금 두 도인을 스친다.

공동은 변했다.

강호에서 위상 역시 말할 것도 없고 사문의 분위기도 변했다.

또 이렇게 강호행을 공식적으로 보낸다는 것은 사문의 제정 역시 안정적이란 뜻일 것이다.

원래 금전적으로야 힘들 게 없는 구파일방이지만, 얼마 전부터 들어오는 후원이며 선물은 이미 이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중이다.

모두.

공동의 위상이 달라진 덕이다.

사문 내의 일반적인 사무 역시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인사를 개편해 수련에 몰두할 제자와 도관의 사무에 몰두할 제자를 구분해두었기에 사무와 수련이 서로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조화로운 체계가 잡힌 것이다.

공동파라는 문파가.

이제는 제자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문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대제자들이 웅성거린다.

저마다 조항을 뜯어보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다.

당장에 나서려는 자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누구도 해보지 못한 일이기에 먼저 나서기가 힘들 것이다.

그간 이들은 많은 일을 해냈다.

논검회에 참석해 큰 결과를 얻었고, 혈영문과 싸워 이겼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결과는.

정문이 옆에 있을 때 만들어졌던 것들이다.

지금 막상 이들이 떠나야 할 강호행은.

자신들의 대사형, 정문이 함께 떠나지 않는 공동의 일대제자 개개인의 여정이 될 것이다.

“다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나.”

“고기도 먹어 본 자들이 아는 거 아니겠습니까.”

“흠···.”

조금은.

조금은 이들에게 시간이 필요할 거라 노각과 청익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대사형.”

“오냐.”

“방을 보셨습니까?”

“당연히 봤지. 내가 썼는데.”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누워 버드나무 가지를 입에 문 정문이 노래하듯 대답했다.

눈 부신 햇살.

잘게 불어오는 산바람까지.

자연 만물이 흡사 정문의 한량짓을 위한 것만 같은 오후였다.

“사형이 쓰셨다구요? 어쩐지!”

그런 정문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지금 자신을 둘러싼 잘생긴 놈과 이쁜 애, 큰 놈과 퉁명한 놈 정도일 것이다.

“저런 문체야 공동에 한 명밖에 더 있겠느냐?”

“마, 맞습니다!”

“사제들이 아직 망설이는 거 같습니다. 조금은 조급했던 게 아닌지···”

진명은 당장에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에 혹여 정문이 기분이라도 상했을까 얼른 선수를 친다.

정문이 야심 차게 꾸민 일치고는 진행이 더뎠기 때문이다.

“시간을 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가끔 대사형은 너무 서두르십니다.”

눈이 연신 오르락내리락하는 사풍이 조금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정문에게 말한다.

슬쩍 고개를 드는 정문.

사풍의 저런 말이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또, 사풍이 자신보다 사제들을 잘 알던 것도 사실이고.

허나, 이번 일은.

어쩌면 사풍이 자신보다 사제들을 더 편협하게 보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조금 드는 정문이다.

“사형이 먼저 나서 강호행을 신청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선발자가 있다면 사제들이 용기를 낼 겁니다.”

방이 붙은 지 사흘이 지나도 아무런 신청자가 없었기에 진명은 정문이 먼저 나서길 청해본다.

언제나 정문이 나서고 뒤를 따르는 것이 편한 진명이다.

“응? 싫은데?”

“예, 싫으시군요···가 아니라. 왜요?”

“난 좀 천천히 나가려고. 누구 좀 만나기로 해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왜요? 그리고 누구? 라는 말이 진명의 목까지 차올랐으나, 정문은 말해 주지 않을 것을 진명은 알고 있었다.

“······.”

“우리는 또 기다리는 거죠? 어차피 사형이랑 나갈 거니까.”

“응. 너흰 나랑 가야지. 어딜 도망가려고?”

“······.”

“······.”

이제는 확연히 묶여버린 자신들의 처지에 사제들의 고개가 숙여진다.

유유히 불어오는 바람마저 조금은 원망스럽던 그때.

“사, 사저 그저 신청하면···, 율법상 가능한 거 아닐까요?”

소심하기만 하던 막내 묵환이 웬일로 잔꾀를 다 내어본다.

혹여나 정문이 들을까 자신의 큰 손으로 입까지 가려가며 명화의 귀에 속삭이는 묵환.

묵환의 발전이야 기쁜 명화지만, 틀린 말은 고쳐주기로 한다.

“묵환아. 다녀오면 더한 지옥이란다. 지옥도 평범한 지옥이 낫지 않니?”

정문의 곁에서 혜안이 생긴 것은 명화도 마찬가지였다.

허허허.

보살의, 아니 서왕모(西王母)의 미소가 명화의 얼굴에 아렸다.

“해서, 어딜 생각 중이십니까?”

“응?”

갑작스러운 사풍의 질문에 정문이 다시금 고개를 든다.

“강호행 말입니다. 나중에라도 나가실 게 아닙니까?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이제는 자연스레 이곳에 녹아든 사풍이다.

정문은 그렇게 평가했다.

사풍이 별다른 말도 없이 정문과 함께 강호행에 나가는 걸 받아들이는 모습은 확실히 낯설고 기특한 모습이다.

“글쎄···,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들 해보든가.”

“항주! 전 항주요!”

명화가 잔뜩 신이나 방방 뛰며 말했다.

상가의 여식답게 모든 상행의 중심이 되는 항주를 보고 싶은 모양이다.

“흠···, 사실 무당산이나 남궁세가를 가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들의 검과 수련은 어떤지···. 아, 하북의 수창산도 도기가 좋다던데···”

진명은 가고 싶은 곳이 많아 보였다.

다만, 전부 고지식하고 재미없어 보였던 게 문제지만.

“뭐, 북경 정도면··· 좋을 것도 같은데.”

그나마 많이 다녀봐 희망이 소박한 사풍과

“···새, 새외(塞外)는 안 되는 거죠?”

뿌리를 찾고 싶어 하는 묵환.

저마다 부푼 꿈을 말하는 사제들을 보며 정문이 인자한 미소를 보낸다.

아마, 저 미소는.

정문이 계획 중인 곳이 사제들이 말한 곳과 하나도 겹치지 않기에 나오는 미소일 것이다.

‘갈 때까지 입 닫아야겠다···.’

사제들의 후폭풍은 정문도 조금 무섭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아직 강호행을 신청한 제자는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없기에 이러다 유야무야되는 건 아닐까 하던 즈음.

생각 외의 인물이 처음으로 강호행을 신청하러 나섰다.

“고민은 충분히 했겠지?”

“예, 사숙.”

처음으로 받아보는 강호행 신청 서류에 자명은 기쁨과 어색함이 반반 공존하는 표정이다.

앞에 선 사질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흠, 좋다. 일정도 잘 조율되었고, 계획 역시 나쁘지 않다. 태청궁은 허(許)하마. 상천제(上天梯)에 올라, 장문인을 뵙거라. 최종 재가(裁可)는 장문인께서 하시니.”

- 꾸욱.

자명은 태청궁의 직인을 깊게 누르며 서찰을 건넸다.

일전에 산문을 나섰던 자정의 걸음이 장문인으로서 새로운 첫걸음이었다면, 이번 직인은 태청궁주 자명의 새로운 첫걸음일 것이다.

“많이 배워오거라. 그거면 되니.”

“예, 사숙. 감사합니다.”

인사를 남긴 사질이 돌아선다.

감은 것만 같은 작은 눈에 크지 않은 키.

조금은 색이 바랜 머리칼을 위로 올려 묶은 턱이 다부진 제자, 노각이 문을 나선다.

율법의 집행을 담당하던 구천각의 상징과도 같던 그가 제일 먼저 나선 것이다.

태청궁을 나온 노각이 조천문을 지나 상천제를 오른다. 선선한 저녁 바람 역시 노각의 걸음을 축복하듯 함께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노각의 곁에는.

같은 일대제자인 청익과 건오가 나란히 상천제를 오르고 있다.

굳이 이전의 파벌을 따지자면 중립의 상징인 노각과 사풍의 오른팔인 청익, 그리고 아무런 활동에도 나서지 못했던 정문의 군소 파벌 중 하나가 건오였다.

공동 내 지진하던 파벌 싸움의 중심에 있던 이들이 의기투합해 강호행에 나서는 것이다.

결연한 표정의 세 도인이 황성각 장문인의 집무실에 닿는다.

그들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들거라.”

기다렸다는 듯 말이 들려온다.

- 드르륵.

문이 열리고, 이내 제자들의 무릎이 땅에 닿는다.

“일대제자 노각, 장문인을 뵙습니다.”

“일대제자 청익, 장문인을 뵙습니다.”

“일대제자 건오, 장문인을 뵙습니다.”

강호행을 알리는 방이 붙고 처음 이곳에 들어오는 제자들을 보며 자정이 깊은 미소를 지었다.

“큰 결심을 했구나.”

“···사문에서 기회를 만들어주니, 제자 된 도리로 살려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이전에는 분명 기회가 있었어도 망설였을 아이들이다.

이제는 기회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는 아이들이 되었다는 생각에 자정의 눈이 조금 붉어진다.

“기쁘구나, 이제야 이런 기회를 주어 또 미안하고.”

보통 다른 문파들은 더 이른 시기에 제자들을 강호에 내보낸다.

확실히 다른 문파에 비해서는 늦은 감이 많은 공동이다.

“스승님, 그런 말씀마십시오.”

“절대 아닙니다.”

제자에게 스승은 늘 태산과도 같아야 하는 법. 조금은 감정이 올라오지만 애써 이를 억누르는 자정이다.

“협에 집착하지 말거라. 그저 경험을 쌓는 것이니 눈으로만 보아도 좋다. 또, 괜한 시비에 발검하지 말거라. 도인은 듣는 것이 아닌 하는 것으로 증명하는 자이니. 황군을 조심해야 한다. 이는······”

처음으로 강호에 제자들을 보내기에 그런 것일까. 자정의 말이 길어진다.

늘 정해진 길을 오가던 속가행과 달리 새로운 길로 새로운 여정을 가는 제자들에게 한없이 걱정스러운 눈빛만이 닿는 것이다.

“허허, 내 말이 너무 길어지는구나.”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이런 모습도.

한동안은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길을 가는 이들에게 내 하사할 것이 있다.”

자정이 옆에 놓인 상자에서 고이 접어진 천들을 꺼내온다.

회색빛이 도는 천.

이음새가 모두 이어진 것이 의복의 형상을 갖춘 상태다.

이건.

공동의 도복과 도포가 분명했다.

평소와 같은 모양의 도복이며 도포다.

허나, 그저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새로운 문양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원.

그리고 둥근 원 안에 그려진 七이라는 글자.

다른 이들은 몰라도 공동의 제자라면 저것이 사문을 나타내는 것임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상징···입니까?”

조금은 멍한 노각의 질문에 자정은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공동의 모든 사상에는 ‘칠’이 담겨 있다.

우선은 수많은 공동산의 동혈들.

그 동혈에 머물던 도인들 일곱이 만나 만든 곳이 바로 공동파였다.

또, 공동산을 지키는 검술은 어떠한가.

소양(少陽), 혼원(混元), 천운(天雲), 현천(玄天), 칠살(七殺), 광진(光眞), 통천(通天).

총 일곱 검술이 공동을 지키고 있다.

그런 七을 감싸는 하나의 원.

이는 곧 하늘을 뜻하며 우주, 즉 혼원을 나타낸다.

이를 모두 꿰뚫을 때는 비로소 도(道)를 얻게 되니, 공동파에서는 그런 경지를 통천(通天)이라 불렀다.

“아아.”

“이게···, 공동의 상징···!”

“드디어, 우리도!”

“마음에들 드느냐?”

“예, 스승님. 그야말로 공동의 정신이 아닙니까?”

“좋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공동을 알아볼 겁니다.”

“상징이라···”

기뻐하는 제자들의 표정을 보며 자정도 기뻐한다.

공동은 원래 상징이 없던 곳이다.

그저 깃대를 내걸 때면 복마(伏魔)란 글자가 이를 대신하기 일쑤였고.

이제는 그들에게도 상징이 생겼다.

도포의 가슴 자락에 새겨진 원안에 든 칠이란 글자가 중원 어디에 있어도 이제는 이들이 공동의 제자임을 나타낼 것이다.

가슴팍에 꼬옥 새 도복을 안은 도인들이 상천제를 내려온다.

내일이면.

이들은 사문을 떠나 강호를 자유로이 떠돌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그런 와중에 목숨을 잃을지 누가 알겠나.

정도(正道) 무림인이라는 이름 앞에서 검을 쥔 이상 불의를 넘어가진 못할 것이다.

비단 ‘협’에 집착하진 않더라도 ‘양심’이라는 것이 남지 않는가.

그래도.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에, 이들은 그런 상황이 닥쳐도 웃으며 죽겠노라, 그런 낭만(浪漫)을 가슴에 새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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