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고상···한 승려분들께서 오셨군요.
익숙한 길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나 오간 지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길은 더더욱.
어떤 이는 익숙한 길을 늘 같은 방법으로 걸어가고, 어떤 이는 익숙한 길을 매번 다른 방법으로 걸어간다.
어디까지나.
옳고 그름이 없는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평량을 떠난 공동의 도인들은 익숙한 길을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걸어야만 했다.
늘 산을 타고 산적을 털며 북으로 향하던 이들의 걷는 방법이, 이제는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적들이 씨가 말랐습니다···”
“······.”
정도 무림인으로서 조금은 불손한 말이지만, 적당히 털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은 사막과 석림이 나타나는 난주 이북까지 관도를 타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미 이들이 한차례 쓸어버린 지역임에도 마적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마적은 산적과 다르다.
산이라는 제약적인 장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며 이들은 늘 말을 타고 터전을 옮겨 다닌다.
이미 한차례 마적이 소탕된 곳이라도.
새로운 마적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뜻이다.
늘 그렇듯이 정문과 공동의 도인들은 이런 마적들을 놓치지 않았다.
손수 찾아가 이들을 털어줬고 또 이들의 안내를 받아 다른 마적들을 소탕했다.
그렇게.
공동의 도인들은 마지막 마적을 모두 혼내주고는 그들의 말을 타고 무위를 향해 달려왔다.
“저, 저기가 무위입니다!”
“오, 드디어!”
“아···! 아···!”
“죽으란 법은 없구나!”
“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같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화와 함께 마적들이 관도 옆을 타고 모래바람을 일으킨다.
계속해서 떠드는 이들 덕분에 잠에서 깨는 정문.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관도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땡초?’
붉은색 법복에 흡사 무언가에 맞서 싸우듯 진까지 친 승려들이 관도에 비장하게 서 있었다.
그중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승려와 눈을 맞추는 정문.
저 승려의 얼굴이.
제법 낯이 익다.
서응사의 승려라는 건 알 수 있다.
만화와 만강이라는 이들도 저런 법복이 아니었나. 법화사는 서응사의 한 지파이기에 아마 같은 복색일 것이다.
‘어디서 봤더라?’
이럴 때는 꼭 아쉬운 그의 기억력.
절대 기억력이 비단 문자에만 한정되기에 가끔 이런 얼굴이나 장소 같은 게 헷갈릴 때는 마냥 아쉬움이 든다.
‘뭐, 오가다 스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정문은 다시 마적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고단한 모양이다.
공동의 도인들은 마적들을 무사히 관병에게 인도하고 무위에 있는 공동의 속가, 대공무관으로 향했다.
당연히 마적들의 단전은 박살이 나 있었다.
* * *
“······.”
고상의 두 눈이 좌우로 왕복한다.
어찌 저 도인이 지금 여기 있다는 말인가.
‘설마 대공무관까지?’
한 지역을 독점하는 무파는 쉬이 부패하는 법이다. 당장에 처음 든 생각은 대공무관도 마적들과 내통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중 대사가 아니십니까? 이게 얼마 만입니까!”
아무렇지 않게 자신들을 반기는 무관주 한수량의 모습을 보니 딱히 비위(非違)를 들킨 사람의 반응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미타불-. 한관주. 오랜만입니다.”
지나가던 도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한 만중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한수량과 인사를 나눈다.
고상의 시선만이.
경계심 가득하게 어리고 젊은, 표독스러운 그 도인을 향해 있다.
만중은 한수량을 향해 이들이 자신과 같은 서응사에서 온 만상과 그 제자들이라는 말을 전했다. 학승이기에 잘 모를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이며.
“허허, 서응사에서 고승들이 오셨군요. 대공무관주, 한수량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런 모두를 반기는 한수량.
그의 태도가 아무런 부끄럼이 없어 보여 더욱 헷갈리는 고상이었다.
손을 뻗어 안을 가리키는 한수량을 향해, 대문을 넘기 전에 고상이 먼저 말을 묻는다.
“아미타불-. 반갑습니다. 관주. 헌데, 뒤에 계신 분들께서는···?”
이럴 때는 직접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아니라 잡아뗀다면 이는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고 만약 오해가 있다면 서둘러 푸는 것이 좋다.
한수량의 고개가 도인들을 향해 돌아간다.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 듯한 그의 표정.
도인들은 인자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도 좋다는 의사를 전했다.
한수량이 다시금 고상을 보며 몸을 돌린다.
조금은 긴장되는 고상의 표정.
얼버무리는 말이 나온다면, 상황은 복잡해질 것이다.
고상이 눈매를 조금 좁히던 그때.
“공동에서 오신 도인들입니다.”
!!!!!!!!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공동의 도인을 생각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여기는 공동의 속가가 아닌가.
그저 저 젊은 도인이 마적의 뒤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 덕에 고상은 그런 생각을 아예 배제해버렸다.
어느 구파일방의 도문이 마적의 말을 타고 달린다는 말인가.
‘공동이··· 마적과···?’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칠 즈음.
“고상···?”
!!!!!!!!!!!
다시금 고상의 간을 철컹하게 하는 말이 그 잘생기고 젊은 도인의 입에서 나온다.
“그··· 그게 무슨···? 난 만상이요!”
행여나 무언가 들키기라도 한 듯, 고상의 얼굴이 붉어지며 이내 큰 소리를 낸다.
“고상···한 승려분들께서 오셨군요.”
아.
도둑이 발을 저린 것인가.
그런 생각이 고상을 스칠 즈음.
“안으로 드시지요.”
한수량이 다시금 이들을 대문 안으로 초대한다.
조금은 망설이는 승려들.
공동이 있는 곳에 발을 들였다가 이들의 정체가 탄로 날까 하는 그런 걱정이 있는 것이다.
“사숙···”
“아미타불···”
고민하는 이들에게.
서응사의 승려 만중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오히려 여기서 돌아가는 모습이 수상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직접 찾아왔으니, 가볍게 오해를 풀고 그렇게 돌아가시지요.”
가볍게 오해를 풀자.
만중은 벌써 공동에 대한 오해가 모두 풀린 사람처럼 말했다.
그래, 오해는 분명할 것이다.
다만, 왜.
왜 저들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고상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흠···드시지요.”
우선은 부딪힌다.
그게 고상의 결론이다.
잘하면 대화를 통해 저들의 속을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그런 목적과 함께 이들이 안으로 들었다.
저들의 나이로 보아 고상을 알아볼 수 있는 세대가 아니며 나한승들 역시 공동과 부딪힌 적은 없다.
만중과 자신들이 입만 조심한다면, 소림승이라는 사실을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아미타불-. 한관주, 실례하겠습니다.”
“아미타불-.”
나지막한 진언과 함께 승려들이 대공무관으로 들었다.
* * *
오랜만이다.
대공무관의 문이 열리고 그 앞을 기다리던 승려를 처음 본 정문의 감상은 이러했다.
조금 전 관도 옆에서 스치듯 지날 때는 자세히 보지 못해 떠오르지 않았던 이름이지만, 이내 정면에서 제대로 보니 머릿속 어딘가에 있던 그 승려의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고상이라··· 장경각주였지.’
황궁에서 일할 때도 정문은 많은 무림의 인사를 만나보지는 못했다.
황궁 서고에 박혀 전해져오는 정보를 받으며 이를 토대로 지시를 내리는 일만 했었기에 따로 현장에 나갈 일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문도 가끔은 무림의 유명인사를 만날 수 있는 때가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 황궁을 찾았을 때였다.
‘5년 전이었나···’
천축으로 갔던 사신들이 돌아오며 가져온 한 권의 서책이 있었다.
불경.
서책은 내력과 저자를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된 불경이었다.
황궁은 천축에서 온 그 고서(古書)의 가치와 내용, 또 진위에 대해 알고 싶었다.
궁을 뒤져 불학에 밝은 자를 찾았지만, 어디 황궁에 승려 같은 전문가가 있었겠나.
그래서 황궁은 외부에서 다른 전문가를 불러오기로 했다.
바로, 소림의 장경각주(藏經閣主)를.
중원에서 명성이 드높으며 뿌리는 천축에 둔 소림이다. 그런 소림에서도 서책을 관리하는 장경각주는 이런 일에 적임자일 것이다.
아무리 깊은 산에서 수도하는 승려라 할 지라도 황제의 백성인 것은 부정할 수없다.
소림승 역시.
황실이 부르면 와야한다는 뜻이다.
무림에도 잘 발을 들이지 않는 장경각주의 무거운 발이 황궁으로 향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서책을 감정하던 소림의 장경각주 고상.
고상이 차분히 경전을 감정하던 그 자리에는 당시 금의위 학위사로 있던 정문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혹여나 그 불경이 무공서라도 된다면, 즉각 금의위가 이를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아쉽게도 불경은 무공서 같은 대단한 서책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불경이었으며 그리 가치는 높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황궁 서고 어딘가에 처박힌 것으로 정문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주 보기 힘든 강호인.
또 강호에서 명성이 높은 소림승.
그런 소림에서도 직책이 높은 장경각주를.
정문은 그날 유심히 살펴보았다.
평범한 인상.
높지 않은 태양혈.
가라앉은 눈매까지.
자신이 상상하던 야차와 같은 소림승에 비해 너무도 차분했던 얼굴의 노승, 소림의 장경각주 고상.
그런 고상이 대뜸 무위에 있는 공동의 속가를 찾아와 자신의 이름을 속인다.
‘만상? 만사아아앙?’
자신이 없었다면 모두가 속았을 것이 아닌가.
속인 건 고상뿐만이 아니다.
저 뒤에 있는 젊은 나한승들.
그들 역시 소림의 나한들이 분명했다.
기도는 잘 감췄지만, 외견만 보아도.
그들의 태양혈이 몹시 두드러져 보였기 때문이다.
불가 무공의 외공(外功)이 오성에 달하면 태양혈이 유독 두꺼워짐을 모르는 정문이 아니다.
‘대머리면 쉽게 숨길 줄 알았나···'
서응사에서 제법 무공을 익혔다는 만중과 일전에 산화사괴를 처리하며 만났던 만강의 태양혈도 저들만큼 솟지는 않았다.
사질보다 못한 사숙이라.
있을 수는 있다.
허나 서응사처럼 감숙에서나 유명한 사찰에 그런 숙질들이 다섯이나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땡초 놈들 일처리 하고는···’
소림은 이렇게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것에 늘 서툴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소림이 감숙에서 조용히 일을 꾸미고 있음은 분명히 알 수 있는 정문이었다.
“아미타불··· 공동의 도장들께서 마적을 토벌하고 관으로 가는 길이셨다니···큰 오해를 할 뻔 했습니다.”
한수량과 공동파 도인들의 설명을 들은 만중이 차분히 말했다.
마적을 소탕하고 그들이 모는 말을 타고 관아로 향한다니.
구파일방의 일처리라고 믿을 수 없을 말이었지만, 어쩌겠나. 저자가 무정검이라는데.
이미 서녕에서 혈사를 일으켰을 때부터 그는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무인일 것이다.
“아미타불-. 만중···, 일이 잘 풀렸구나.”
이미 만중과는 사형제로 관계를 설정하며 말까지 놓은 고상이다.
얼른 자리를 뜰 심산으로 고상이 일이 다 해결되었음을 알렸다.
언제든 이곳을 벗어나도 이상하지 않게 보이려는 목적이다.
하지만.
“서응사의 대사들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셨습니까?”
무정검이라는 도인은 말이 이들의 앞을 막아선다.
“아미타불-. 그저 감숙을 돌며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가르침을 전한다.
길을 떠도는 승려가 댈 수 있는 가장 좋은 핑계일 것이다.
수도승이 가르침을 전하겠다는데 누가 딴지를 걸겠나.
“그러셨군요. 대-단-하십니다!!”
정문은 그저 손을 내밀며 과장된 몸짓으로 만중과 고상을 치켜올렸다.
표정까지 잔뜩 과장해가며 이들에게 말을 잇는 정문.
정문은 무언가 이들을 붙잡을 계획을 세워둔 것만 같았다.
“흠··· 사실 제 사제 중에도 그런 가르침을 좋아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좋은 일이지요. 부디 공동의 가르침이 중인들에게 퍼지기를 바랍니다.”
“예, 대사. 하하, 이놈이 얼마나 가르침을 좋아하는지, 무위에서도 장장 두 시진 동안 도학을 설파한 적이 있지 뭡니까? 하하하.”
“아미타불-. 중인을 위한 가르침에는 도가(道家)와 불가(佛家)가 다르지가 않지요.”
적당히 장단만 맞춰주자.
그런 생각에 고상은 최대한 꼬리가 잡히지 않을 말들을 골라 장단만 맞췄다.
“해서 말입니다만. 빈도가 작은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 하심은···?”
“제 사제놈이 이번에도 무위에서 좋은 말씀을 전하겠다지 뭡니까? 좋은 일입니다. 허나, 저는 그런 걱정도 있습니다.”
“어떤 걱정을···?”
“도가의 가르침을 받는 분들이야 사제의 말을 듣는다지만···, 불가를 신봉하는 분들은 어디서 좋은 말씀을 듣는단 말입니까?”
그걸.
그걸 왜 도사가 걱정하냐는 말을 당장에 뱉고 싶었던 고상이지만, 겨우 목을 막아 말을 삼켰다.
“아미타불···, 따스한 도장의 마음이 무위에 닿을 것입니다.”
고상은 점점 정문이 해올 것 같은 부탁이 부담되자, 슬쩍 발을 빼는 모양새를 갖추려 했다.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로 고상이 거리를 두려 함에도.
“제 사제가 도학을 강론할 때, 대사들께서 불학을 함께 강론해주심이 어떻습니까?”
“······.”
정문이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한다.
눈치가 없는 걸까.
이 무정검이라는 무인은.
고상은 그저 직접적으로 거절하는 것이 답이겠노라, 그리 생각하며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아미타불-. 좋은 말씀입니다, 무정검. 빈승 역시 그럴 수만 있다면 간곡히 그러고 싶습니다.”
“해주시겠습니까?”
“허나, 빈승이 가야 할 곳이 있고, 또 감숙은 초행인지라···, 서둘러 무위를 나섰으면 합니다.”
시간이 없다.
가장 좋은 말이 아닌가.
당장에 무위가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알린다면, 이들 역시 자신들을 잡지 못할 것이다.
“허어. 무위가 목적지가 아니셨군요.”
“그렇습니다. 빈승 역시 아쉽습니다.”
“혹여 어디로 가시는지?”
이것도.
예상은 했다.
처음에야 말을 할까 말까 고민도 했던 고상이지만, 이내 말해도 되겠다는 결론이 섰다.
제아무리 무정검이라도, 자신들의 신분은 모를 터. 그저 서응사의 승려가 돈황으로 갔다는 것으로 알리면 그만인 일이다.
“돈황으로···”
“돈황!!!!”
무정검의 반응이 크다.
앞에 놓인 탁상을 짚고 몸을 반쯤 일으킨 그의 눈이 누가 보아도 먼길을 나섬에 놀란 것이다.
돈황은 무위에서도 보름은 걸리는 길이다. 이를 잘 아는 이들은 감히 자신들을 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잘됐습니다! 대사!”
“예?”
예상 외의 반응이 무정검에게서 터져 나온다.
“그게 무슨···?”
정문이 이리 반색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 의문을 표하는 고상에게, 정문은 잔뜩 벌린 양팔과 치켜뜬 큰 눈으로 말했다.
“저희 역시 돈황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강론을 펼친 후 함께 가시지요! 숙식도 이곳에서 해결 하시구요! 길은 저희가 아주 잘 압니다! 가는 길에 말도 얻어 탈 수 있을 것이니 시간도 충분하군요! 하하하!”
아.
엿됐다.
우선은 그런 파계(破戒)적인 말이 떠오른 소림승 고상이었다.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