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잘못 걸렸다.
잘못 걸렸다.
그게 확실하다.
고상은 삐질 흐르는 자신의 땀을 닦으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난주에 다녀온 자신의 사형, 철견권승(鐵肩拳僧) 고암은 늘 말했다. 공동의 무정검, 그자의 무위와 책략이 예사롭지가 않다고.
뒤에 다른 말도 붙긴 했었으나, 무위와 책략이 뛰어나다는 말을 두고 그 뒷말에 귀를 기울인 이는 많지 않았다.
어쩌면, 일은.
거기서부터 꼬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 아미타불-. 고상. 감숙에 들거든, 어찌 되건 공동과 엮여서는 아니 되니라.
처음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감숙이 공동의 영역이기에 일을 은밀히 처리하라는 뜻으로 말을 전하는 것이라,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을 겪어보니.
어쩌면 사형은 공동보다는 무정검을 더 조심하란 뜻에서 그런 말은 한 것은 아닐까, 그런 확대 해석까지 나오는 고상이다.
‘폭두(爆豆)···’
폭두.
분명 사형은 무정검을 가리켜 폭두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사형의 조심스러운 성격이 말을 조금 유순하게 뱉은 것이라고.
고상의 생각은 다르다.
이건 가능성의 영역이 아니다.
무정검은 폭두 그 자체임이 분명하다.
“여시아문(如是我聞), 아난다(阿難陀)께서는 이리 들으셨습니다··· 사리자(舍利子)여···”
땀을 삐질 흘리며 장장 세 시진에 걸쳐 불학(佛學)을 풀어내던 고상의 머리에 스친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강론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
허나, 사해가 동도라도 도가와 불가 사이에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그런 알력도 있지 않나.
최소한 불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 담벼락 너머의 젊은 도인이 강론을 계속하는 한 자신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위진명이라 했던가···’
역시 젊음은 좋다.
똑같은 시간을 강론하는 데도, 저 젊은 위진명이라는 도장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고 얼굴에 미소까지 짓고 있지 않나.
어쩌면 이는 무공의 차이일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무공에 재능이 없다곤 해도, 공동의 학도(學道)보다 못하겠나.
고상은 저 멀리서 연신 태을무극과 원시천존을 외치는 진명을 당연히 학도라 생각했기에 그런 판단을 했다. 그의 방대한 도학 지식과 저 강론을 즐기는 태도는, 학도가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태도일 것이다.
점점 땀이 흐르고 어깨가 무거워진다.
이제는 체력적으로 힘이 드는 고상.
그렇게 고상은 옆 마당에서 젊은 도인이 강론을 끝낼 때까지 함께 머리를 짜내며 불학 강론을 이었다.
장장 세 시진.
밥을 한 끼 먹고 일상에 종사했다가 한 끼 더 먹을 그런 시간이 되어서야 고상은 겨우 강론을 마칠 수 있었다.
여전히 웃고 있는 공동의 위진명과 조금은 핼쑥해진 고상. 대비되는 두 수도자가 함께 대공무관으로 발을 옮긴다.
소림승과 만중은.
꼼짝없이 대공에 머물게 되었다.
전날 자신들의 목적지를 묻는 무정검에게 돈황이란 말을 남긴 것이 문제였다.
설마 이들 역시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니.
그저 강호행으로 무위에 온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던 고상이 크게 한 방 먹은 것이다.
거기에.
이들은 돈황까지 자신들과 동행하자는 말을 전했다.
당연히 거절했어야 하는 그런 말에.
고상은 감히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지 못했다.
구구절절 말을 늘리는 무정검의 근거들이. 고상이 거절할 말들을 사전에 모두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름길이 있습니다.”
“길만 알려주시면···”
“말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가는 길에 들를 곳이···”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는 동안 불공을···”
“도사는 기도 안 한답니까?”
“······.”
왜 이렇게 무정검은 자신들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베푸는 친절에 자신의 눈이 삐뚤어져 있는 것일까.
답을 알 수 없는 화두(話頭)에서 고상이 허우적거릴 즈음.
“오셨습니까?”
그의 발이 대공에 도착했다.
“아미타불-. 무정검 도장. 덕분에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무언가 감사를 전함에도 원망이 묻어나오는 그런 말이 고상의 입을 탄다.
“좋으셨다니, 저 또한 기쁩니다. 드시지요. 차라도 한 잔 어떠십니까?”
그저 얼굴에 철판을 두른 정문은 그런 고상의 말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길을 안내한다.
이번에도.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하는 고상이다.
정문이 안내한 전각 안에는 한수량과 만중이 이미 자리를 잡고 차를 우리고 있다.
만중은.
무정검과 동행할 생각에 조금은 들떠 보였다.
어쩌면 저런 태도가 맞을 것이다.
자신들의 신분만 철저히 가려져 있다면, 공동과 함께한들 무엇이 문제겠나.
그저 동행하는 동안 감춘 신분이 들킬까, 그게 조금 걱정이지만.
‘기우인가···’
만중을 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평범하게 굴어보겠노라, 고상은 그렇게 다짐했다.
“만상 대사.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무위를 대표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아미타불-. 중생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야···, 좋은 기회를 주신 무정검과 관주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자리에 앉은 고상에게 한수량이 방금 우린 차를 대접한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응당 술로 했을 대접이지만, 승려들에게 곡차는 되려 실례일 것이다.
따스한 한잔의 차가 여유를 줘서일까, 고상은 조금 긴장을 풀고 아무렇지 않게 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아미타불-. 공동의 도장들께서는 어인 일로 돈황에 가시는지요?”
“그저 둘러보러 가는 길입니다. 돈황 역시 감숙의 일부가 아닙니까?”
감숙의 일부니까 둘러보러 간다라.
이상하지 않은 말이다.
소림 역시 하남(河南)을 자주 둘러보며 별 볼 일 없는 도시에도 가끔 발길을 주곤 한다. 하물며 돈황쯤 되는 도시야. 공동의 도인이 가보지 않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아미타불-. 공동의 웅비 이후로 감숙의 치안이 좋아졌다는 말이 자자합니다. 모두, 무정검의 덕입니다.”
“과찬이십니다, 대사.”
헌헌하게 겸양하며 고개를 숙이는 정문.
조금은 헌헌한 모습이 정문을 채우자, 고상의 눈빛이 변한다.
그래, 자신이 긴장해서 그런 거라, 공동에 너무 신경을 써서 무정검이 그렇게 보인 것이라, 고상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들과 동행하며 돈황으로 향해도 그리 나쁠 건 없겠다, 그런 생각이 고상에게 새롭게 떠올랐다.
- 호르르르륵.
- 호르르륵.
차를 들이켜는 소리만이 대공무관의 전각을 채운다. 침묵을 빙자한 어색함만이 이들을 감쌀 때.
“대사들께서는···, 천불사(千佛寺)로 가시는 길입니까?”
!!!!
가볍게 찻잔을 내리며 아무렇지 않게 뱉는 정문의 말에 만중과 고상이 동시에 놀라고 만다.
정확하게.
자신들이 향하는 곳을 알고 있는 무정검에 깜짝 놀란 것이다.
“아, 아미타불···, 그걸 어떻게···?”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돈황에는 천불사가 가장 유명한 사찰이 아닙니까? 도관은 월아문(月牙門), 사찰은 천불사(千佛寺). 저는 그리 알고 있습니다만, 허허허.”
아.
또 과민한 반응이었나.
고상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반성했다.
무정검의 말처럼, 돈황에는 도관하면 월아문, 사찰하면 천불사라는 두 개의 명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불심은 잡념을 줄이는 것에서 시작이거늘, 오랜만에 맡는 중임에 잡념을 떨치지 못하는 고상이다.
“허허, 맞습니다. 제가 잠시 깜빡했습니다.”
“아미타불-. 허면, 공동의 도인들께서는 월아문으로 가시는 길입니까?”
멋쩍게 말을 마무리하는 고상에 이어 만중이 치고 나온다. 조금은 주목이 고상에게 몰리지 않게 하려는 만중 나름의 배려였다.
“예, 월아문으로 갈 예정입니다. 딱히 연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 한관주께서 월아문주와 막역한 사이라 하시더군요. 소개를 받아 들려볼까, 합니다.”
“아미타불-. 월아문은 도문이기도 하지만, 북감숙에 얼마 없는 정도 문파가 아닙니까? 두 문파가 협력하여 감숙이 더욱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서응사도 함께 하셔야지요. 허허허.”
넉살 좋은 웃음이 만중과 정문 사이를 오간다.
만중은 자신이 감숙 무인이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월아문과 공동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이 밝게 펴진다.
- 호르르륵.
찻잔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조금은 그런 소리와 함께 퍼지는 웃음 소리들.
고상 역시 이제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이런 자리에 녹아들었다.
그저 의심.
그 작은 단어 하나에서 자신의 어색함이 모두 비롯됨을 이제야 인지한 것이다.
“하하, 무정검께서 성격이 좋으십니다. 과연 대협의 풍모이십니다.”
자신을 꿰어 강론을 시킨 것도, 부러 동행을 나서는 것도.
어쩌면 모두 선의(善意)일 수도 있지 않은가.
사형의 폭두란 말을 듣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런 결론에 닿자, 이내 고상은 농까지 건네며 정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든 게.
정문의 의도대로였다.
* * *
장장 세 시진에 걸친 강론.
그런 강론을 연달아 이틀이나 무위에 내리고 나서야 공동의 도인들과 서응사의 승려들이 길을 나설 수 있었다.
공동파라는 이름에 비한다면 서응사라는 이름이 조금은 작게 느껴졌겠지만, 아마 실제로 강론한 자가 누구인지 안다면, 무위의 중인들은 까무러칠 것이다.
정문의 사제들 역시 아직 저들이 소림의 장경각주와 나한당의 나한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저들이 돈황에 가서 무얼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약 감숙에 크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정문도 눈을 감아줄 의향은 다분했다.
만약 일이 그렇게 풀린다면, 굳이 사제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사제들이 알고 있다면, 괜히 이를 의식하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위험도 있고.
무위를 벗어난 이들이 장액(張掖)에 들렸다.
고상이야 그저 들릴 곳이 있다는 핑계를 댔던 덕에 어쩔 수 없이 들린 곳이었지만, 정문은 실제로 장액에서 확인할 일이 있었다.
고력강.
일전에 무위에서 부딪혔고 또, 난주에서 만났던 그 붉은 머리의 서역 상인.
당연히 위장한 신분이었겠지만, 그가 실제로 장액의 상인들과 다니던 모습을 정문이 봤었기 때문이다.
장액에 들리면, 어쩌면 그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 정문은 그렇게 여겼다.
장액에 도착하고 하루를 묵어가기 위해 짐을 푼 후, 정문은 서둘러 상가를 돌며 고력강이라는 이름의 서역 상인에 대해 수소문했다.
하지만.
“고력강 대인은 이미 석 달 전에 장액을 떠났소.”
“암, 집이랑 다 팔고 떠났지.”
“서역으로 간다던데?”
이미 떠났다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서역으로 갔다라···’
중원 땅에서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며 계속해서 활동하던 놈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난주에서 정문에게 이실직고하고 오해를 풀었기에 별다른 추궁을 두려워한 도망도 아니다.
그렇다면.
‘혈영문처럼 누군가 불러들이고 있는 건가?’
라는 추론이 제일 타당할 것이다.
다시금.
돈황으로 가 서역 세력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겠다는 판단이 또렷해졌다.
그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장액에서 짧은 하루를 보내고 이들은 날이 밝자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는 관병 주둔지와 소소한 도시들만이 펼쳐진 사막.
물론 흙으로 닦은 관도가 있긴 했지만, 이전보다는 더욱 힘든 길이 이어질 게 분명했다.
“아미타불-. 무정검 도장···, 일전에 말씀하시기로는 빠르게 갈 방도가 있다고···?”
조금은 길이 험해서일까.
고상은 슬쩍 정문이 했던 말을 흘려본다.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한 이상, 공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대로 받으려는 것이다.
“뭐···, 있긴 합니다만···. 전적으로 저희에게 맞춰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미타불-. 예로부터 득도(得道)에는 정해진 방도가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빈승이 오늘은 도가의 방식을 한 번 배워보고자 합니다.”
대략 몇 시진 후, 고상은 자신이 이렇게 말한 걸 크게 후회하지만, 지금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시다면야.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 씨이익.
살짝 비릿한 웃음과 함께 정문이 관도 밖으로 벗어났다.
* * *
- 다다다다다다다!
- 다다다다다다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사막을 울린다.
연신 땅을 차는 말발굽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자욱한 모래바람. 누가 보아도 서량(西凉)에 어울리는 그런 풍경이 계속해서 이들 앞에 펼쳐졌다.
일전에 무위로 향하며 보았던.
그런 풍경의 일종이라고 고상은 그렇게 평가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보았던 풍경과 일치하는 장면이 많다.
말을 거칠게 모는 이들의 옆으로는 대도(大刀)가 자리하고 있고, 또 기수들의 복색은 가죽으로 된 마적의 복색이다.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도사들만이 아닌, 승려들 역시 마적의 뒤에 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아미타불-.’
처음 정문이 관도를 벗어나 마적이 자주 출몰하는 곳으로 이동하던 그때. 그때 말렸어야 했노라, 고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 마적을 소탕한 것까지는 좋다.
자신 역시 정도 무림에 속한 반쯤은 무인이며, 승려이기에 이런 협행을 하는 것에는 적극 찬성하는 바이다.
다만, 아무리 관병에게 넘기기 위해서라곤 해도, 그런 마적들을 기수로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이 자꾸 고상을 괴롭힐 뿐이다.
하지만 고상은 쉬이 이를 그만두자는 말을 뱉지 못했다.
돈황을 향한 속도도 빠르지만, 점점 험해지는 주변 사막의 풍경과 길목을 보니 감히 걸어서 향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아미타불-. 이는 옳은 일이다.’
이는 옳은 일이다.
협행이고 꼭 필요한 일이다. 마적을 풀어주면 또 마적질을 할 수 있지 않나. 불자로서 그런 일은 막아야 한다.
고상은 그저 그런 생각만을 머리로 되뇄다.
달리던 말이, 주천에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