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사람의 피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지하 동굴 끝에 열린 문에서 나온 이들은 아침에 헤어졌던 서응사의 승려로 속인 소림승들이었다.
“무정검···?”
그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
나한오승의 주먹에 서린 금빛 광채가 그들이 긴장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대사···, 여기서 뭐하십니까? 분명 천불사로 가신다고···?”
분명 이들은 천불사로 간다고 말했다. 왜 이들이 월아문의 지하 동굴 끝에서 나오는 지는 정문 역시 알 수가 없다.
“아미타불-.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천불사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
!!
“그게··· 무슨···? 여기는 분명 월아문의···”
“월아문 말씀입니까? 아미타불-. 무언가 착각하신 게지요. 여긴 천불사의 석굴 중 하나입니다.”
“······.”
이들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공동의 도인들은 아니다. 자신들은 분명 월아문의 도관에서, 그것도 삼청을 모신 삼청당에서 출발해 이곳에 닿았다.
설령 이곳이 실제로 천불사라 할지라도. 이는 놀라운 일이다. 도관과 절이 연결되어 있다니. 이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저흰 확실히 월아문에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뒤에 동굴이 보이십니까? 이곳으로 쭉 가면 월아문이 나옵니다.”
“···아미타불-. 어찌 이런 일이···”
고상 역시 이 문이 월아문과 연결된 문인 건 몰랐던 눈치다. 이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조금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은 그런 생각할 즈음.
“사숙···, 혹여 월아문과 천불사의 불화가 이번 혈사의···”
무각이 슬쩍 고상의 곁에 다가와 말을 흘린다. 고상은 서둘러 무각에게 눈빛으로 주의를 줬지만, 정문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대사···. 아무래도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천불사에도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아미타불···.”
고상은 그저 불호만 욀 뿐, 쉬이 답을 하지 못한다. 내심으로 그는 공동과 월아문을 살짝. 의심하는 중일 것이다.
정문은 그런 고상의 의심을 덜기 위해 조금은 강수를 둬본다.
“월아문이 증발했습니다.”
!!!!!!
커지는 고상의 눈.
이는. 몰랐음을 나타내는 가장 큰 증거일 것이다.
“그, 그게 무슨···?”
고상은 이 문이 월아문으로 통한다는 말을 듣자, 살짝 월아문을 의심하는 눈치도 있었다. 공동이 개입했을 리는 없겠지만, 같은 도관의 편을 들 것은 분명한 일. 해서 고상은 내심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정문의 저 말이 사실이라면, 계산은 조금 달라진다.
“또···, 월아문을 헤친 흉수로 추정되는 이와 조우하기도 했구요.”
“흉···수를 말입니까?”
“예, 돈황 저자에서 마주쳤지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미타불-. 아쉬운 일입니다···”
“경공으로 감히 쫓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
점점 안정을 찾아가던 고상의 얼굴이 정문의 말에 한 번더 놀라고 만다. 무정검의 실력이야 당금 강호에서 유명하지 않나. 이미 그를 후기지수나 신진 고수 쯤으로 취급하는 이는 적을 것이다.
“무··· 무정검께서 말입니까?”
“경공이 뛰어납니다. 저보다 배는 뛰더군요.”
“아미타불···, 도대체 누가···?”
고상은 슬쩍 무각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말을 물었다. 너는 그리 할 수 있냐는 물음이 고상의 눈에 맺혀있었다.
고개를 절레 젓는 무각. 그 역시 무정검보다 배가 넘는 거리를 뛸 자신은 없을 것이다.
정문은 상대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 때, 그 의심을 털어 버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가진 수를 모두 보여주는 것. 그게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정문은 소림승들을 자신들이 서 있던 동굴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들에게, 지하 동굴을 가득 채운 벽화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횃불이 하나 더 늘어나자, 이내 밝아지는 동굴의 안.
삼면을 가득 채운 벽화를 바라보는 고상의 눈빛이 깊어진다. 다른 학문은 몰라도, 불학 만큼은 중원 전역에서 고상이 가장 학식이 깊은 사람일 것이다.
“······이건···”
“밀교(密敎)···군요, 사숙.”
나한오승의 첫째, 무각이 먼저 아는 체를 해본다. 하지만.
“밀교가 아니다, 무각.”
“사숙···?”
“서장 불교라 부르는 게 맞겠지요.”
“아미타불-. 무정검께서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이는 서장 불교···, 흔히들 말하는 서장 불교의 만다라가 분명합니다.”
만다라(曼茶羅).
정문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던 그 단어가 다시 나온다.
“흔히들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장 불교가 곧 밀교는 아닌 법입니다. 이 벽화들은 서장 불교···, 거기서도 현교(顯敎)에 가깝겠군요.”
“현교라 하면···?”
“포달랍궁(布達拉宮).”
!!!
경건하게 뱉는 고상의 말에 정문의 고개가 떨어진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자신이 쫓는 세력은 아니더라도 새외의 세력과는 깊게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대사, 비천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아미타불-. 모를 수가 없지요. 불가의 천인으로, 열반에 든 선인의 말씀을 인세에 전하는 보살의 하나입니다.”
“월아문 삼청당에 비천이 그려져 있더군요.”
“비천이 말입니까? 도가에서 비천을 따로 받아들였다는 말은···”
듣지 못한 고상이다.
“아미타불-. 어쩌면 월아문과 천불사 사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서장 불교···, 포달랍궁까지 말입니다.”
승려와 도사의 눈이 함께 깊어진다. 도불의 경계를 넘어 마주한 문제에 둘은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가진 패는 전부 열었습니다. 이제 대사들께서 가진 패를 보여주시지요. 의심할 건덕지가 더는 없을 듯합니다만.”
정문은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모두 넘겨주고 나서야 본론을 꺼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숨겨둔 패는 하나 더 있다. 허나, 이는. 조금 뒤에 꺼내도 될 것이다.
“아미타불-. 천불사 역시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다만, 월아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황은 조금 다르군요.”
“다르다구요?”
“예, 말로 하는 것보다, 보는 게 빠르겠군요. 가시지요. 만중 역시 밖에서 오래 기다릴 겁니다.”
고상은 이제는 공동에 대한 의심이 줄었는지 그들을 먼저 자신들이 넘어 온 문 건너로 안내한다. 천불사의 광경을 이들에게 보여줄 모양이다.
정문의 바라보는 공동의 도인들. 어떻게 하겠냐는 의중을 묻는 표정이다.
정문은.
담담히 고상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 * *
확실히 천불사의 상황은 월아문의 상황과는 달랐다.
월아문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마치 조금 전까지는 사람들이 머물던 상태인 그대로 말이다.
하지만, 천불사는 곳곳이 흐트러져 있었으며, 또 유혈까지 곳곳에 낭자한 상태였다.
누가 보아도.
천불사는 습격을 당해 일이 생긴 것이 확실한, 그런 상황이었다.
고상과 나한오승은 그런 천불사를 꼼꼼히 살폈다. 천불사라는 절 자체가 절벽에 무수한 석굴을 뚫어 만들어진 석굴 사원인 만큼 숨을 수 있는 공간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이 온종일을 사용해 석굴을 뒤지던 중 우연히 한 석굴에서 울리는 문소리가 들리게 되었고, 그 석굴을 살피던 중 불상의 뒤로 난 작은 문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만난 인물들이, 바로 공동의 도인들이었다.
고상의 간단한 설명을 들은 정문이 천불사의 입구부터 차분히 살펴보기로 한다. 고상 역시 자신의 사형 고암에게 무정검의 지략이 예사롭지 않다는 말을 들었었기에 무정검의 조사를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정문이 천불사 입객당 밖으로 나가, 대문을 열어본다.
제일 처음 보이는 건.
유혈이 낭자한 마당과 엎어진 향로, 그리고 깨진 석등들이다.
다른 석굴들에 비해 유난히 작은 입객당의 암자로 정문이 들어간다. 암자의 안은, 생각보다 단출했고 별다른 피해가 없어 보였다.
“입객당은 주로 어떤 용도로 쓰던 곳입니까?”
진짜 서응사의 승려, 만중에게 정문이 말을 묻는다. 정문은 고상과 다른 승려들이 아닌, 만중을 콕 찝어서 말을 물었다.
“입객당은 그저 들어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용무를 확인하던 그런 곳입니다. 아미타불-.”
“입객당의 승려들은 무승입니까?”
“아닙니다. 천불사에는 무승이 몇 없습니다. 천불사 자체적으로 무공을 수련하는 곳도 아닙니다.”
“흠···.”
무승이 아니다라.
복잡한 것이 또 늘어간다.
정문이 입객당을 지나 석굴들이 자리한 절벽의 아래로 다가간다. 입객당에서 봤던 것들보다 더한 유혈이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사체는 치우신 겁니까?”
피는 있는데, 그 피를 흘렸을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정문이 이번에는 고상을 향해 묻는다.
“아미타불-. 무정검···, 내 이걸 말하는 걸 잊었습니다. 시체는 원래 없었습니다.”
!!
“시체가··· 없었다구요?”
“그렇습니다. 피와 흐트러진 집기들, 부서진 석굴 몇 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따로 수소문은 해보셨습니까?”
“아직입니다. 보시다시피 석굴의 수가 너무도 많아···”
“잘하셨습니다. 저자는 조용하더군요. 아마, 나서셨어도 헛걸음이었을 겁니다. 이 정도 습격이 있었다면 필시 들은 자가 있었어야 하는 건데···”
“아미타불-.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군요.”
난감해하는 고상과 다른 이들을 뒤로 정문이 이번에는 핏자국에 주목한다. 돈황 주변 직역의 토질은 모두 모래가 주된 토질이기에 핏물이 오래도록 모래와 모래 사이에 남아 아직 굳지 않은 곳도 있었다.
- 첨벙.
정문이 검지와 중지를 붙여 피 웅덩이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이내 손끝에 묻은 피를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는다.
살짝 표정을 찡그리더니 한 번 더 냄새를 확인하는 정문.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굳어져 갔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무정검.”
고상은 정문의 표정이 너무 굳어지자, 먼저 말을 한 번 물어본다. 자신들이 조사했을 때는 피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사···, 이 피. 말입니다.”
“예. 혈흔에 무슨 문제라도···?”
“사람의 피가 아닙니다···.”
!!!
“아미타불···, 사람의 피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닭···, 닭 피입니다.”
“······.”
고상의 입이 다물어진다. 정문이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정문이 손을 들어 진명을 부른다. 서둘러 달려오는 진명. 진명 역시 피를 찍어 자신의 코로 가져다 대더니 이내 동공을 크게 하며 정문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닭 피가 확실합니다.”
“아미타불···, 색이 진한 갈색으로 굳어졌습니다. 빈승이 모든 걸 알지는 못하나 인혈(人血)을 본 적이 없겠습니까?”
고상은 학승에 가까운 승려이긴 했으나, 나름 소림의 제자이다. 그 역시 사람을 향해 무공을 휘둘러봤고, 그 역시 사람이 흘리는 피를 직접 본 적이 있는 무인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피는 동물의 피와 다르다. 굳으면서 색이 검게 변하는 동물의 피와 달리 사람의 피는 진한 갈색을 내며 그 형체를 굳혀간다.
지금 천불사에 흩뿌려진 이 피들은. 분명 진한 갈색으로 굳은, 아직 굳지 않은 웅덩이조차 진한 갈색의 그런 사람의 피가 분명했다.
“대사, 닭 피는 굳어도 사람의 피처럼 진한 갈색으로 변합니다.”
“······어찌 그를 아신다는 말씀입니까?”
“어찌 모르겠습니까?”
정문은 반문만 한 번 한 후, 대답을 진명에게 넘겼다. 빤히 진명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신 답을 들려 달라는 뜻을 건넸다.
“······도가에서 만드는 부적은 때때로 닭 피를 씁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도사 만큼은··· 닭 피의 냄새를 절대 모를 수 없습니다.”
!!!
“아미타불···, 어찌 닭 피가···”
도학에 정통한 모습을 보여줬던 진명까지 저리 말을 하자, 고상은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실제로 피를 이용한 부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도 살짝 떠오른 고상이다.
“어쩌면. 천불사와 월아문. 두 곳의 제자들이 모두 살아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 곳곳에 뿌려진 피가 닭 피라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은 다친 사람이 없을 거란 사실이며, 또 어쩌면. 정말 어쩌면이지만, 저 피를 뿌린 이들이 이곳 천불사의 승려들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마치.
자신들이 습격 받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말이다.
“아미타불-. 천불사의 승려들이 직접, 습격당한 것처럼 꾸몄다는 말씀이시군요···”
정문은 다시 한 번 고상을 향해 고개를 저어준다. 고상이 생각하는 것보다 한 발짝 더 나간 일이 정문의 머리에 있는 것이다.
텅 빈 월아문의 모습과 찍혀있던 발자국, 그리고 만났던 비천이라는 자, 또 삼청당의 뒤로 난 천불사로 향하는 지하 통로까지.
정문은 자신이 계속해서 의심하던 작은 한 가지 가설을 말해보기로 한다.
“아마··· 월아문과 천불사가 함께 일을 꾸민 것 같습니다.”
“······, 닭 피 때문입니까?”
“이 정도의 닭 피라면, 도관에서 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정문은 천불사의 곳곳을 더럽힌 유혈이 닭의 피라는 것을 알기 전부터 월아문이 스스로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비천이라는 자가 무공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월아문의 제자 모두를 아무 흔적 없이 처치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저 무게를 더 두었던 것은 피난설 쪽. 어쩌면 월아문의 제자들이 지하 동굴을 통해 피난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 쪽이 더 타당해 보였기에 처음에는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허나, 지하 동굴의 끝은 천불사를 향했다. 그런 천불사는 사람 피로 꾸민 닭 피가 가득했으며 천불사의 승려들 역시 사라졌다.
이는.
두 곳의 승려와 도사들이 합심한 것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미타불-. 어찌 이런 일이···”
고상은 대비보다는 일의 원인에 집중하는 중이다. 왜. 도대체 왜, 두 곳이 함께 일을 꾸며야만 했을까.
“대사, 계속해서 천불사의 승려들을 찾으실 겁니까?”
침전하는 고상에게 정문이 사뭇 진중한 얼굴로 말을 던진다. 무언가 무거운 이야기가 정문의 입을 탈 것만 같다.
“아미타불···”
고상은 쉬이 답하지 못한다. 이들이 직접 몸을 숨긴 것이라면, 굳이 찾아야 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무정검···, 솔직하게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어찌해야 할지. 그런 말을 고상이 막 뱉으려던 그때.
- 슥!
정문의 손이 고상의 앞을 가로막는다. 슬쩍 검지를 들어 입으로 가져다 대는 정문. 그의 시선이 입객당 앞에 놓인 대문을 향한다. 고상은 숨을 죽인 채 동공만을 움직여 주변을 살핀다.
정문이 손을 들어 사제들에게 대비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고상 역시 정문의 반응을 보고 무언가 심상치 않아 사질들에게 신호를 보내려 했지만, 이미 무각이 무언가를 느끼고 준비를 마친 상태다.
그들의 손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대문을 향한다.
- 저벅. 저벅. 저벅.
몇 개의 발소리. 둔탁한 발소리가 대열을 맞춘 것처럼 들려온다.
- 터억.
대문 앞에서 멈추는 발소리들.
그리고 이내.
정문이 듣고 싶지 않던 그런 소리가 하나 대문을 넘었다.
“옴-마니 반-메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