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공동의 방식으로.
검강(劍剛)은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그런 무위가 아니다. 적어도 당금 강호에서 최고수라는 그런 수식이 붙는 몇 명에게만 허락되는 경지가 바로 강기(剛氣)일 것이다.
공동의 무인이 강기를 다루는 것까지는 고상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 역시 구파일방이 아닌가. 나름 도기도 좋다는 말이 있고.
그저 고상이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아미타불-. 어찌 저 나이에···’
강기를 뽑아내는 저 무인의 나이가 너무도 어리다는 이유일 것이다.
이립이 되기 전에 강기를 뽑는다라. 당금 강호에. 아니, 당금(當今)으로 생각하기에도 범위가 너무 좁다. 고금(古今) 강호에서 저 나이에 강기를 뽑은 무인이 몇이나 될지, 고상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상의 눈이 무각에게로 향한다. 이건 위로의 눈빛일까, 동정의 눈빛일까. 자신도 알 수 없는 그런 눈빛과 함께.
논검회에서 공동이 우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화산이나 무당, 종남을 비롯한 여러 도문이 큰 벽을 만났다, 남일 보듯 그런 생각을 가졌던 고상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정문의 검강까지 본 지금은.
‘아미타불-. 천년 소림의 앞에도 벽이 놓이는구나···’
자신의 사질들 역시 그 벽에 막힐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끄아아아악!”
신체의 일부를 잃은 라마승의 서러운 외침이 천불사를 울린다. 석굴이 많은 절벽이란 특징 때문인지, 소리가 더욱 크게 울리는 것만 같다.
전장에서 선봉과 장수의 목을 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인들의 교전 역시 마찬가지. 정문은 그저 이 라마승이 가장 강해서 자신이 맡은 것이 아니다.
선수(先手).
어떻게든 저들의 우두머리를 꺾어 선수를 쳐 놔야 다른 라마승들의 기세가 꺾임을 정문은 아는 것이다.
정문의 목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정문이 선두에 선 라마승의 손을 베어버리고 나자, 다른 라마승들의 얼굴에 동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찰나의 동요를.
중원의 무인들은 놓치지 않았다.
“아-미-타-불-!”
- 콰과광!
백보는 능히 날아갈 금빛 권기(拳氣)를 뿜는 무각을 시작으로,
- 서거어어억!
하는 천운검의 진명과
- 푹푹푹푹!
하는 칠살검의 사풍까지.
이들이 일시에 각자 상대하던 라마승들을 제압해버렸다. 잠깐의 동요도 무인들 간의 교전 중에는 큰 차이를 만드는 법이다.
“죽어어어엇!”
명화의 쾌검 역시 라마승의 팔을 그대로 난도질한다. 튀어 오르는 선혈 사이로 끝까지 라마승의 복부를 그어버리는 명화.
묵환도 어느새 칠상권을 라마승의 가슴팍에 박아 넣어 저 멀리 담벼락으로 그의 신형을 날린 지 오래였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는 나한오승 중 하나, 무주가 이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자신들이 넷이서 겨우 둘을 물리칠 동안, 저들은 각자가 하나를 물리친 것이 아닌가.
“아미타불-. 무주. 부족함을 받아들이거라.”
무각 역시 믿기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눈에 보이는 것을 부정할 만큼 불기가 적은 그런 나한오승이 아니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땅을 보며 말을 뱉는 무주의 어깨를 무각이 쓸어주며 지나쳤다.
천불사를 찾았던 라마승들은 중원의 도사와 승려들에게 모두 제압당했다. 이제는 이들이 천불사를 방문한 목적과 배후를 알아야 할 때.
만약 이들이 포달랍궁(布達拉宮)의 지시를 받아 체계적으로 움직인 거라면, 중원 무림 차원에서 대비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아휴, 힘들었어요, 정말! 무슨 몸이 저래요?”
“다, 단단합니다!”
공동의 도인들은 저마다 쓰러트린 라마승의 강함을 토로한다. 그런 이들을 쓰러트린 자신들의 강함은 모르는 눈치다.
“흠···, 이상하긴 하오. 이 정도 무승이라면, 포달랍궁에서도 낮은 무위는 아니지 않겠소?”
사풍은 동시에 라마승을 쓰러트린 진명에게 차분히 자신의 추론을 들려준다. 천선단에 사형의 특훈까지 더해 겨우 올라온 경지다.
그런 경지로도 우두머리가 당해 잠시 동요했던 틈이 없었다면, 필시 장기전으로 갔을 것이기에 이들의 무공을 얕보지 않는 사풍이다.
“확실히 강하긴 하더구나. 저들의 출수(出手) 역시 악랄하고.”
“아미타불-. 확실히 중원의 무공과는 다른 무공이었습니다. 불가의 무공이라 할 수나 있을지···”
무각 역시 진명과 사풍 사이에 끼어들어 함께 말을 나눈다. 일검에 베어버린 무정검과는 아마, 이런 말이 통하진 않을 것이다.
“묵환 도장. 멋진 일권이었습니다. 아미타불-.”
무각을 제외한 다른 나한오승은 묵환과 해후를 푼다. 일전에 함께 수련하며 쌓은 정이 적지는 않은 모양이다.
“고, 고생들 하셨습니다! 스, 스님들의 궈,권장도! 멋졌습니다!”
쑥스러워하며 인자한 미소를 주고받는 도사와 승려들이다.
“야야. 다했으면, 대충 정리들하자.”
정문은 그런 사제들의 잡담을 잠시도 용납할 생각이 없다. 당장에 배후를 캐고 이유를 물어야 할 시간에 잡담은 사치일 것이다.
“옙, 사형. 어떻게 처리할까요?”
“뭐, 늘 똑같지 뭐. 공동의 방식으로.”
정문의 말이 떨어지자, 사제들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인다. 한 곳으로 쓰러진 라마승들을 모으고, 차분히 그들의 혈도를 제압하는 공동의 도인들.
이들의 움직임이 매우, 전문적이다.
“아미타불-. 무정검 도장···, 혹여 또···”
혹여 또 ‘그걸’ 할 거냐는 물음이 고상의 목에 걸린다. 일전에 무위에서 주천까지 동행하며 공동의 방식이 무엇인지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마적에게 다른 마적단의 위치를 묻고, 또 그들이 답하지 않으면···, 아니지. 이들은 답을 묻지도 않고 ‘그걸’ 먼저 한다. 일단 부서지고 나면 술술 분다나 뭐라나.
“아미타불-. 이들은 마적도 아니고···, 또 수행하는 자들이니, 우선은 이유를 듣고···”
같은 불자라서일까. 고상은 정문에게 라마승들에 대한 자비를 살짝 베풀어 달라는 말을 전해본다.
당장에 이들은.
무엇을 묻지도 않고 단전부터 부숨을 고상은 알고 있다.
“대사가 죽이신 겁니다.”
“예?”
“살생을 방조하신 거란 말입니다.”
!!
또.
또 저 말이 나온다.
일전에 말단까지 가리지 않고 마적의 단전을 부수는 걸 막았을 때, 정문이 고상에게 펼쳤던 그 논리가 말이다.
“······그, 이들이 살생을···”
“대력지(大力指)의 악랄함을 보셨지 않습니까? 인골(人骨)을 부수지 않고는 저런 대력지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 해도···”
“대사가 죽이신 겁니다. 예, 이들이 풀려나서 또 다른 중인을 헤친다면 말입니다.”
무적의 논리다.
고상은 평생 자비를 베푸는 무인에게 저런 책임을 전가하는 도사를 본 적이 없다.
헌데.
또 말은 된다.
실제로 그렇게 풀려나 다시 악행을 저지른 악적이 어디 한둘인가.
매번 같지만, 이 언쟁은.
고상이 늘 지는 언쟁이다.
“아미타불-. 과하지··· 않게만, 예···, 부탁드립니다···”
어쩔 수 없다. 그저 명복이나 빌어주는 수밖에.
정문은 사제들이 모아둔 라마승들의 주변으로 다가간다. 천불사의 입구를 바라보며 절벽을 등지고 서는 정문.
그런 정문의 앞으로 진명과 사풍이 손가락이 날아가버린 라마승의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양팔을 잡고 때리기 좋게 복부를 내미는 모양이 딱. 악적들이 누군가를 고문하는 그런 모습이다.
“주, 죽여라···! 퉷!”
최후의 객기일까. 손가락을 잃고 혈도까지 제압당한 라마승이 마지막으로 목구멍을 짜내어본다. 비장함이 잔뜩 묻어 나오는 그의 어눌한 중원 말이 더욱 처량하다.
“그래, 아직은 그럴 때지.”
정문은 이런 라마승의 심정도 이해하는 대자대비한 그런 도사였다. 이들은 늘 이런 식이다. 당장에 단전이 박살 나기 전에는 있는 객기 없는 객기를 다 부린다.
허나, 단전이 일단 박살 나고 나면, 누구든지 고분고분해지며 말을 잘 듣는 걸 모르는 정문이 아니다.
정문이 주먹을 쥐며 내기를 주먹에 끌어 올린다. 공동의 절기인 칠상권으로 단전을 치려는 것이다. 한쪽 손을 주먹에 올리고 슬쩍 호흡을 뱉으며 손을 뻗으려던 그때.
“사, 사형!”
라마승의 한쪽 팔을 붙잡고 있던 사풍이 팔을 놓으며 손을 들고 절벽 위를 가리킨다.
- 휘익.
정문이 고개를 돌려 절벽 위를 바라본다.
!!!!
정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너무도 익숙한. 그래서 보고 싶지 않았던 그런 신형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비천.
낮에 저자에서 마주쳤던 그 비천의 가면을 쓴 무인이 다시금 절벽에서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천···?”
정문 역시 그를 보며 반응하자, 소림승들 역시 고개를 돌려 절벽을 바라본다. 말로만 듣던 비천의 실체도 함께.
“아미타불-. 도대체 누가···, 또 어떻게 저곳을···?”
“저, 저곳은?”
소림승들은 비천의 실체만큼, 저자가 서 있는 위치에도 놀란 모양이다.
이미 길이 닳아 없어져 이제는 갈 수가 없다고 만중이 설명했던, 천불사의 가장 높은 석굴 바로 위에 비천이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거리는 복장에 하얀 가면을 쓴 무인의 신형이 달빛에 포개진다. 점점 선명해지는 그의 모습.
낮에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지금, 저 비천의 손에는 낮과 달리 검갑에 들어간 협봉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대비하십시오!”
정문은 주먹에 맺힌 내기를 풀고 서둘러 검을 뽑았다. 사제들 역시 라마승을 내려놓고 한쪽으로 모여 대열을 맞춘다.
낮에 봤던 그 경공을 가진 고수가 검까지 든다면, 어떤 심오한 검술을 펼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조용히 아래를 내려보던 비천의 시선이 라마승에게 닿는다. 혈도를 제압당해 꿈틀거리는 라마승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비천.
그의 몸이 높디높은 천불사의 절벽에서 아래로 그대로 낙하한다.
!!
“저런 미친-!”
천불사 절벽의 최상층은 아래로 천 길 낭떠러지에 가까운 높이다. 당장에 경공으로 저곳을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뛰어내리기까지 한다니!
고상은 그저 저 비천이라는 자가 미친거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 탓! 탓! 탓!
절벽을 따라 수직으로 낙하하던 비천의 발이 연달아 절벽을 몇 번 걷어찬다.
절벽을 수직으로 달려오는 그런 모습으로.
“제가 갑니다!”
정문은 뽑아 든 검을 눕힌 채 달려오는 비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적의 경공이 신출귀몰하기에 땅에 닿기 전, 절벽에서 맞부딪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 콰광! 콰광! 콰광!
정문은 경공이 아닌 진각으로 신형을 날린다. 경공으로 쫓기에는 저자의 속력이 너무도 빠르기 때문이다.
효과는 좋았다. 진각을 통해 튀어 나간 정문의 신형이 비천이 땅에 닿는 것보다 먼저 절벽에 닿았으니까.
정문은 그대로 절벽을 타고 비천을 향해 날아갔다.
- 위이잉-!
정문의 검이 울어댄다. 이전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일 것이다.
- 촤아아아악!
강맹한 기세와 함께 앞으로 뿜어지는 정문의 검. 분명 상대는 검 끝의 정면이다. 피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비천은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정문의 검을 향해 뛰어든다. 그의 검은 아직 검갑에서 발하지도 않은 상태다.
‘어째서···?’
영문을 모르는 정문이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
- 휘리리리리릭!
비천의 몸이 또.
공중에서 한 바퀴 옆으로 회전하고 만다.
!!!
일전에 자신이 날렸던 검기를 피했던 그 움직임. 아무런 디딜 곳이 없는 공중에서 오로지 허리의 응용만으로 몸을 뒤집는 그 움직임이 다시금 비천의 몸을 타고 나왔다.
- 슈우우우욱!
정문의 검은 또 공허하게 허공만을 가른다. 그리고 비천은 정문의 팔과 옆구리 사이의 작은 공간으로 유유히 몸을 빠져나간다.
- 쾅!
정문의 몸이 그대로 날아가 절벽에 박아버린다. 진각을 이용해 튕겨 나온 것은 좋았으나, 자신도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 휘익!
뒤를 돌아보니, 이미 저 멀리 땅에 발을 닿은 비천. 그 앞을 막아서는 건, 나한오승과 공동의 도인들뿐이다.
“버티거라! 내가 간다!”
정문은 자신이 박은 절벽에 매달려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정문의 몸이 왔던 곳을 향해 다시금 뛰어내린다.
“아미타불-! 정체는 모르나, 감히 불가의 천인으로 위장하다니! 용서할 수 없소이다!”
- 탓! 탓!
무각이 금빛 권광을 두른 채 빠르게 비천을 향해 달려든다. 무정검이 없는 지금, 자신이 유일한 대적자일 것이다.
- 후우웅!
바람을 가르며 펼쳐지는 무각의 주먹. 스치기만 해도 권풍에 통증을 느낄 정도의 기세였다.
허나, 비천은.
그런 무각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저 옆으로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 쾅!
무각의 주먹이 비천이 서 있던 자리를 때린다.
비천은 어느새 무각을 한참이나 지나쳐 공동의 도인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실로 표표한 신법이 그의 발에서 펼쳐졌다.
“막아라!”
진명의 외침과 함께 공동의 도인 넷이 동시에 비천의 사방을 점한다. 세 자루의 검과 한 명의 주먹이 일시에 비천을 덮친다.
- 콰아앙!
굉음과 함께 일어나는 모래바람. 이들의 시야가 가려져 비천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 쉬익.
들리는 건 소리. 나풀거리는 천이 이들의 귀를 스친 것을 보아, 이번에도 비천은 놓친 것 같다.
- 탓!
비천은 이들이 몇 번을 도약질 해서 닿은 거리를 한 번의 디딤만으로 뛰어버린다.
어느새.
위치가 바뀌어 버린 공동의 도인들과 비천이다.
“잡아!”
절벽에서 내려와 땅에 닿은 정문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비천이 라마승들의 바로 앞에 도착했기에 무엇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 스릉!
비천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얇은 협봉검(狹鋒劍)을 날카롭게 뽑아 든다. 그리고 이내.
-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비천의 검은 재빠르게 라마승들의 숨통만을 골라 날카롭게 찔러 버린다.
!!!
절명(絶命).
혈도가 제압당해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라마승들은 그대로 절명에 이르렀다.
어찌보면 대자대비한 죽음이다. 이들은 죽는 것도 모르고 그대로 명을 잃었을 것이다.
- 턱.
정문이 사제들의 곁에 닿는다. 비천을 매섭게 노려보는 정문. 두 번이나 놓친 것이 정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 스윽.
조용히 협봉검을 등 뒤로 말아 쥔 비천이 정문을 바라본다.
언제라도.
언제라도 여기 모인 이들을 따돌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그런 오만이 비천의 몸 곳곳에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