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는 공동을 무시하지 마라-101화 (101/153)

101. 마치 오라는 신호처럼 보이니.

반선라마가 돌아가고 사흘이 흘렀다. 정문은 그간 돈황을 누비며 자신들이 떠나게 될 먼 여정을 준비했다.

‘남길 건 다 남겼고···, 지울 건 다 지웠네.’

평소라면 지우기만 했을 준비가 이번에는 무언가를 남김으로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정문은 자신의 흔적을 부러 남기는 중이었다.

사제들과 나한오승이 돌아가며 천불사를 지켰기에 별다른 걱정 없이 정문은 돈황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했지만, 다행히 그런 습격은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사흘이 지나고 옥문관에서 교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달뢰라마를 모시는 일행은 길을 나설 준비를 마친다.

일행들이 일시에 돈황을 벗어난다. 조금은 달라진 그의 일행들.

“모두가 함께 갈 수는 없습니다.”

정문의 으름장과 같은 선언 때문이었다.

정문은 천불사의 승려 모두를 데려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요공 역시 이를 알고 있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달뢰라마를 일 년이나 곁에서 모신 사람치고는, 대범한 결심이었다.

그는 이미 칠순에 가까운 노승이었고, 무공조차 익힌 것이 없기에 서장까지 향하는 긴 여정에 적절하지 않았다. 본인 역시 이를 인정했고.

천불사의 다른 승려들 역시 주지를 따라 돈황에 남기로 했다. 뿌리와 불법을 위해서 다들 노력했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무공도 모르는 그들이 도울 일은 적을 것이다.

대신 다른 한 명이 이들의 일행에 합류했는데, 월아문 문주, 화벽공의 딸, 화난설이 달뢰라마의 보호자를 자청했다.

“뭐···, 상관은 없으나 유사시에는 몸을 직접 지켜야 하오.”

정문은 그녀가 적을 상대하는 무공은 약함을 알기에 괜히 차가운 말로 경고를 건네본다.

“유사시에는 제일 먼저 라마를 안고 도망갈 거에요. 걱정 마세요.”

그래도, 그녀의 의지에 변함은 없다. 문주인 화벽공이 정문의 검기를 막느라 내상을 입었기에 그녀가 일부러 자청한 것을 정문도 알기에 다른 말로 그녀를 막지는 못했다.

“아미타불-. 빈승 역시 이곳에 더 머물겠습니다.”

만중 역시 이곳 돈황에 남아 사태가 진정된 후, 서응사로 귀환하기로 했다. 소림승의 정체가 공동에게 탄로 났고, 또 그들의 목적도 이뤘기에 더는 서응사의 안내는 필요 없을 것이다.

고상을 비롯한 나한오승은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 천불사는 소림이라는 이름을 믿고 우선하여 그들에게 장경동을 열어줬다. 고상은 철저히 입구를 지키게 한 후 홀로 들어가 경전을 품에 챙겼다.

여전히.

그 경전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신줏단지를 모시는군, 아주.’

정문이 슬쩍 눈을 흘기며 정체를 알아보려 했지만, 고상의 방어가 너무 드세 더는 접근하지 못했다. 그저 단순히 불경일까. 그런 생각이 정문을 스쳤다.

길을 나서며 요공과 작별하는 달뢰라마가 살짝 울먹거렸으나, 화난설이 손을 잡아 주니, 이내 울음을 그친다.

그런 달뢰라마를 바라보는 화난설과 명화의 눈이 따스하다. 여성만이 가지는 모성애와 비슷한 감정이 두 여인을 자극했다.

“어린 스님, 길이 힘들 텐데, 걱정되지 않으세요?”

명화는 집에 있는 어린 동생들이 생각나, 달뢰라마를 그저 경외심으로 바라보지는 못한다. 그녀에게 달뢰라마는 그저 어린 스님. 그 이상은 아닌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가야 할 길이니, 참아야지요. 이리 다 함께 길을 나서니, 청유 가는 기분도 듭니다.”

화난설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이 더욱 애처롭게만 보이는 명화였다.

“딱히 힘든 일은 없을 겁니다. 감숙을 지나, 사천으로 가는 게 아닙니까? 청유란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뭐, 청해를 가는 거도 아니지 않소.”

진명과 사풍 역시 그저 먼 길을 간다. 그렇게만 알고 있다. 아직 저들의 습격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에 정문이 따로 말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문은 이번 일로 신궁이라는 자들의 의도를 파악하려 하고 있다. 그들이 달뢰라마를 쫓아, 감숙까지 들어온다면. 이들은 언제든 중원과 부딪힐 의향이 있다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정문은 이를 달뢰라마라는 생불을 이용해 확인하려 하고 있다.

‘조금 불손은 하지만···’

부처란 중생을 위해 지옥도(地獄道)를 스스로 걸어가는 자라는 말도 있지 않나. 어차피 걸을 거, 우릴 위해 좀 걷게 하자는 게 정문의 생각이다.

‘습격만 막아주면 되는 거지.’

정문은 약속만큼은 지킬 생각이다.

서장으로 향하는 일행들이 떠나자, 남은 이들 역시 짐을 정리해 천불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정문이 이들에게 그리할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돈황을 잠시 떠나 계십시오. 최대한 군문 근처로요.”

반선라마가 모두 막아준다면 고맙겠지만, 이번에 흘러온 밀승들처럼 모두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이를 대비해 이들은, 천불사와 월아문을 다시 비우게 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모여 떠들썩했던 천불사가 비워지고, 그곳을 성스럽게 감싸던 불기마저 저 아래, 남감숙을 향했다.

* * *

옥문관 부근에서 있었던 고창신궁과 포달랍궁의 충돌. 중원 황실의 군부는 이에 대해 당연히 눈을 감았다. 무인들의 충돌이니 관무불침(官武不侵)이란 핑계도 있었고, 이들이 모두 새외인(塞外人)이란 이유도 있었다.

고창신궁과 포달랍궁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이번 교전에 참전했다. 포달랍궁은 달뢰라마가 무사히 돈황을 빠져나갈 틈을 벌기 위해, 고창신궁은 돈황에 누군가 들어갈 틈을 벌기 위해, 서로를 공격한 것이다.

본디 동상이몽(同床異夢)은 한쪽의 꿈만이 실현되는 경우가 다수이나, 이번만큼은 예외적으로 둘 모두 만족할 결과를 얻었다.

서로의 꿈을 서로가 모른 채, 서로가 그 꿈을 이뤄준 것이다.

포달랍궁의 바람대로 달뢰라마는 공동과 소림의 비호를 받으며 돈황을 빠져나갔다. 적당한 동자승으로 꾸며 그대로 남감숙을 향해 달렸을 것이다.

교전을 적당히 마무리한 반선라마가 동남쪽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창신궁 역시 바람대로 중원 무인들을 돈황에 들여보냈다. 교전이라는 사태 속에 옥문관은 중원인에 한해 자유로이 관문을 열었고, 그 틈에 섞여 신궁으로 돌아선 중원 무인들이 돈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돈황에 도착한 신궁 소속 중원 무인들은 서둘러 천불사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천불사에 있는 달뢰라마. 그를 잡아 신궁으로 데려만 간다면, 이들이 신궁 내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정검···?”

천불사로 향했던 신궁의 중원 무인들이 모두 고개를 갸웃한다. 이곳으로 오며 월아문과 돈황 시내에 보냈던 수하들이 뜬금없는 소식을 전한 덕분이다.

천불사는 당연히.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공동의 대제자가 아닙니까? 공동이 돈황에서 뭘···”

풍채 좋은 뱃살을 가진 사내가 이유를 모르겠다며 말을 뱉는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런 병기도 없고 그저 굳은살이 가득한 주먹이 있을 뿐이다.

“권장, 여긴 감숙이요. 공동이 감숙 어디에 있든 이상할 일은 아니란 뜻이오.”

풍운권장(風雲拳將)이라 불리는 풍채 좋은 사내의 말을 쌍검을 등에 멘 무인이 받아준다. 그의 눈썹이 진하고 눈이 짝 찢어진 게 흔히 말하는 못생긴 인상이다.

“삼검의 말이 옳소이다. 돈황 곳곳에 무정검을 봤다는 말이 잔뜩이오. 서응사라고는 하나, 승려들 무리와 돈황을 빠져나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까만 얼굴에 금도를 찬 사내가 자신이 들은 정보를 더 나열해본다. 무정검이란 무인이 너무도 유명해서인지, 돈황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말이 무성했다.

이들은 교전이 일어난 틈을 타 돈황에 들어 일정 수속을 마친 뒤 바로 천불사로 향했다. 하지만 천불사는 이미 비워진 지 오래. 월아문 역시 흔적이 없었고, 이들이 얻은 건 돈황 시내의 정보가 유일했다.

“공동이 개입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회색빛이 도는 머리에 신형이 깡마른 무인이 추측을 들려준다. 그의 기도가 예사롭지 않고 사파인들이 모두 그의 주변에 모인 모습이, 흡사 그가 사파의 우두머리로 보이게 했다.

“섭혼검(攝魂劍). 그대도 그리 생각하시오?”

키가 작고 고약하게 생긴 노인이 뒷짐을 지며 그 무인에게 말을 건다. 노인의 허리에는 묵룡(墨龍)이라 각인된 까만 철편이 하나 걸려있다.

“묵노, 본검은 그리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 그들이 개입했다면···”

“서역이 아닌 다른 방향을 선택했겠지.”

묵노라 불리는 노인과 섭혼검의 생각이 일치한다. 하지만, 아직 이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른 길을 말입니까? 청해?”

“그럼, 잘된 일이 아니외까? 청해는 사파의 영역이니, 자유롭게 처리하면 되겠구료.”

당연한 생각이다. 누구나 더 가까운 길을 먼저 생각하고, 이들에게는 청해가 더 익숙하니까. 성을 두 개나 가로지르는 그런 길은, 쉬이 떠오르는 그런 길이 아니다.

“쯧쯧쯧. 저런 이들을 데리고···. 섭혼검께서도 고생이 많으셨겠소이다.”

“묵룡자(墨龍子) 선배께서 이끌어 주시니, 한결 편합니다.”

묵룡자와 섭혼검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중원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임이 분명했다.

섭혼검이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사파인들을 돌아본다.

“공동이 미쳤다고 청해로 향했겠나? 그들이 얼마 전 청해를 뒤집어 놓은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네.”

“그, 그럼?”

“후우. 아마 감숙을 돌아 사천으로 향할 테지.”

“성을 두 개나 건너서 말입니까? 섭혼형!?”

좀처럼 믿기진 않는다. 성 하나를 지나는 것도 힘든 일인데, 두 개라니. 일반 무인이 떠올릴 그런 생각은 확실히 아니었다.

묵룡자가 말을 잇는다. 섭혼검은 그저 조금 부끄러운 중이다.

“저자에서 전해진 정보가 제법 뚜렷하네. 승려와 도사, 아이와 여인까지. 승려는 천불사의 승려겠고, 아이는 달뢰라마, 여인은 월아문인가?”

“마치 보라고 남긴 것 같은 행적입니다.”

묵룡자가 읽어주는 정보에 섭혼검이 날카로운 의심을 더해본다. 묵룡자 역시 같은 생각. 하지만.

“해도, 말은 되는 정보라 생각하오만.”

말이 되는 정보다. 섭혼검 역시 그건 알고 있다. 다만, 그가 걸리는 것은.

“중원에서 행동···에 나서도 되는 겁니까?”

중원에서 궁의 일을 처리해도 되는지. 그걸 확인하고 싶은 섭혼검이다.

신궁을 나서며 권한을 위임받은 건 묵룡자였다. 그가 섬혼검을 인정해 존중은 해주고 있지만, 결국 권한이나 결정 같은 건 묵룡자의 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알기에 섭혼검이 우선은 묵룡자에게 말을 물었던 것이고.

“서장과 있었던 교전 역시 중원 군부로 흘렀을 거요. 두 달이면 중원의 모두가 궁의 존재를 알게 될 거요. 누란성주는 딱히 신분을 숨기란 말이 없었소. 아마 괜찮을 거외다.”

“흠···.”

“더 나아가. 일만 생각합시다. 섭혼검. 이번 일을 처리해야, 궁 내에서 우리의 입지가 나아지지 않겠소? 아직 성이란 칭호도, 단이란 칭호도 받지 못한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니오?”

“······.”

묵룡자의 직설적인 말에 섭혼검의 눈이 감긴다. 청운의 꿈을 안고 들어간 궁 내에서 알력 다툼에 밀리고 있음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옳습니다. 묵노 선배.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섭혼검은 장고 끝에 묵룡자를 따르기로 한다. 포권까지 올리며 고개 숙이는 그를 묵룡자가 수염을 만지며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칠순이 넘은 노련한 고수이니, 그의 지휘가 나을 거란 섭혼검의 판단이었다.

“좋소. 무정검의 발자취가 선명하오. 그대로 따릅시다. 마치 오라는 신호처럼 보이니.”

“예, 묵노.”

체계가 잡힌, 한 무리의 무인들이 공동의 발자욱을 따라나섰다.

* * *

“급서(急書)입니다.”

“급서?”

“예, 창두.”

앵두 같은 입술을 지닌 설매가 부드러운 어투로 답한다. 설매의 손에는 작은 서신이 들려있다.

“일이 급한 듯하여, 우선 처리한 후 보고하는 점을 용서해주시어요.”

“흠, 네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게 옳은 일이겠지.”

흑시창의 창두 조륜이 웃으며 서신을 받아 든다. 눈은 백태가 가득해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손끝의 감각만은 살아 있는 그였다.

그가 손으로 서신을 더듬어 내용을 읽어본다.

“호오.”

미소가 번지는 그의 얼굴.

‘그분의 소식이면 늘 밝아지시는구나.’

자신의 상관마저 상관으로 모시는 그분의 존재에 대해 설매는 아직도 완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 오늘 찾던 사람은 아니구나.

란 말과 함께 창두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잊지 못하는 설매다. 그 말은, 분명 원래 찾던 황궁의 그분을 찾았음을 설매는 모르지 않았다.

‘무정검이 그분이라···’

이전 날 그를 박대하지 않았던 자신의 선택이 더욱 자랑스러운 설매였다.

“또 크게 일을 벌이시는구나.”

“새외의 세력이 두 개나 얽혔더군요.”

“그래, 그 궁이라는 곳이.”

조륜은 일전에 신궁에 대한 정보를 정문에게 직접 넘겨줬다. 정확한 이름을 알아내진 못했었으나, 이번에 직접 가서 알아내신 모양이다.

역시.

그런 생각이 가득하며 또 미소가 절로 나오는 조륜의 얼굴이다.

“명령은 그대로 이행했겠지?”

“적힌 곳에 모두 연락을 넣었답니다. 늦지 않을 겁니다.”

“아이들을 조금 풀어 길목마다 배치하거라. 그분께 소식이 전해지는 게 절대 늦지 않도록.”

“예, 창두.”

“또, 한참을 기다려야겠구나. 서장이라니···, 다녀오신 후에는 한 번 들려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냐?”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그래, 그럼 되겠구나. 개방도 아니고 나 조륜을! 찾으신 이유가 있으실 게야. 암. 거지 놈들보다야.”

조륜은 설매의 말이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잔뜩 웃는 그의 모습이 조금 기괴하기까지 하다. 자신 앞에서 정체를 숨김에도 그리 기쁠까. 그런 생각이 설매를 스쳤다.

“잘 처리하고. 모든 보고는 내게 직접하거라.”

“예, 창두.”

설매의 대답이 들리자, 조륜은 가볍게 소매를 털어 그녀를 물린다. 창밖으로 몸을 돌린 조륜이 그저 공동산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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