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화 낭자
“난주겠지.”
정문이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이제 곧 난주를 향하는 마지막 산, 백은산을 눈앞에 둔 일행들이 잠시 발을 쉬어가는 중이었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분명 우리를 앞서갈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고상은 일전에 저들이 자신들을 앞지를 거라 말했던 정문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석림을 타고 사막을 건너는 동안, 저들은 관도를 타고 편안히 내려갈 거란 게 정문의 예상이었다.
“딱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한 번은 부딪혀야겠지요.”
“흠···.”
고상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무정검이 말해줬던 신궁으로 돌아선 무인 중에는 자신도 익히 들어 아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묵룡자에··· 섭혼검이라. 공문삼검과 풍운권장 역시 만만히 볼 자들이 아니지.’
흑면금도만 해도 깜짝 놀랐던 고상이다. 그런 고상의 귀에 들려온 이들의 이름이 저마다 한 가닥 이상은 하는 이들이기에 마음을 편히 먹지 못하는 고상이다.
“아미타불-. 사숙. 소질이 아둔하여 아직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무각은 그런 고상의 표정을 읽었는지 고상이 늘 걱정하던 그 중원의 무인들에 대해 물어본다.
“그래, 그렇겠지···”
무각을 비롯한 나한오승은 소림에서도 발을 잘 빼지 않는 이들이다. 협행과 선행보다는 개인의 수련에 매진하는 그런 무승들이 나한오승이었다.
사질들은 아직.
무정검이 말한 그 무인들의 무위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무정검도 모르고 있을지도···’
무정검의 무공과 책략은 인정하는 고상이다. 허나, 그는 아직 어리다. 섭혼검이나 묵룡자의 위명을 들어는 보았어도 체감하지 못할 수는 있다는 생각이 고상을 스쳤다.
“묵룡자··· 선배는···”
고상은 부러 정문과 공동의 도인들까지 들릴 정도를 목소리를 높여본다. 충돌하지 않는 다른 방법을 떠올려 보라는 무언의 압박인 셈이다.
“독행하는 강호인으로 유명하셨지. 구파일방의 명성을 조금이나마 대중들에게 가깝게 만든 분이 묵노 선배셨다.”
“구파일방의 명성을 말씀입니까?”
“흠···, 말하기 부끄러운 사실이나···”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죄다 묵룡자한테 깨졌다는 말이죠, 뭐.”
말끝을 조심스레 흐리는 고상을 대신해 다른 곳에서 말이 터진다. 말을 꺼낸 사람은. 고상이 잘 모를 거라 단정했던, 그 무정검이었다.
“아미타불···, 묵룡자 선배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뭐, 워낙에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저 충돌하겠다는 게 전부인가. 고상은 그런 말을 면전에 뱉고 싶었다.
“······, 섭혼검 역시 만만히 볼 인물은 아니다. 온갖 배신과 술수가 난무하는 사도 무림에서 이름을 유지한 인물이니, 만만히 볼 수는 없는 법이지.”
고상은 정문의 말에 괘념치 않고 무각을 향해 말을 뱉었다. 큰 목소리는 여전히, 정문을 향해 무언가 요구하는 그런 어투였다.
“아미타불···, 사숙, 감히 말씀을 하나 여쭐까 합니다.”
무각은 그런 고상에게 무언가 입을 우물거리며 말을 묻길 청한다. 고상은 무각의 입에서 토해질 말이 무엇인지 예상이라도 되는 듯 깊은 눈을 보낼 뿐이다.
“무각아. 혹여 궁금하더냐? 너의 무위가 그들에게 닿는지가 말이다.”
“예, 사숙···.”
무각의 눈이 부끄러움에 살짝 적셔진다. 일전에 천불사에서 일도 그렇고, 흑면금도의 습격 때도 그랬다. 모든 일은 무정검의 손에서 시작되어 무정검의 손에서 끝이 났다.
무각은 무언가. 자신이, 소림이, 그리고 불자가. 더욱 의미를 가지는 그런 일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미타불-. 너도 알겠지만, 나는 학승에 더 가까운 몸이다. 내 정확히 상대의 무위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일은 퍽 힘들구나.”
고상은 답을 회피한다. 그런 모습이 조금씩 무각에게 노출되어 더욱 비참해지는 무각의 심정이다.
“허면···, 무정검은 어떻습니까?”
무각의 질문이 바뀐다. 이건. 이번 일의 성공 여부 자체를 묻는 그런 질문으로도 볼 수 있는 물음이다.
“아미타불-. 어찌···, 어찌 벌써 그런단 말이냐?”
하지만, 고상의 눈에는 슬픔이 자리하고 만다. 고상은 일전에 정문의 무위를 보며 소림 역시 거대한 벽에 가로막힐 것이라, 그렇게 예상한 적이 있었다.
조금은.
그 벽이 자신의 사질에게 빨리 찾아온 모양이다.
“사숙, 그저 일의 성패가 궁금할 뿐입니다···”
불자는 거짓을 뱉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 수도승이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무각의 내심에서 감출 수 없는 무언가가 치솟아 이번 말만큼은 꼭 대답을 듣고 싶었다.
“아미타불···, 무정검···. 그래. 무정검 정도라면 섭혼검은 물론이고 묵룡자 선배도 상대가 가능할 테지···.”
조금은 진심이 담겨있어서였을까. 무각의 표정이 그래도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차차 변하려 했다. 어쨌든 지금 맡은 일은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물론, 그들을 하나씩 상대한다면 말이지···”
“아, 아미타불··· 허면?”
“음···, 무정검이 그들 중 하나를 상대할 동안, 우리가 나머지를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분명 사질에게만 뱉고 있는 말이다. 이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의 시선이 고상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런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묵룡자와 섭혼검이··· 그렇게 강합니까?”
이번 말은 도사들 쪽에서 나왔다. 사숙질 간의 대화에 끼어드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었으나, 모두가 대화에 집중하고 있음을 몰랐던 승려들이 아니다.
“강합니다.”
“······.”
“공문삼검이나 풍운권장 역시. 강합니다.”
사형은 이런 말이 없었다. 모두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이 고상의 눈에 훤히 보였다.
‘무정검은 어찌 아무런 말도 없이···’
조금은 무책임해 보일 수 있는 정문의 행태에 고상이 혀를 찼다. 다들 누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싸워야 할 것이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정문을 향한다. 고상의 눈에는 조금의 책망과 보챔이 함께 담겨있다.
“뭐?”
“아니, 그렇게 강한 사람들 상대로 너무 태평한 거 아니에요?”
그나마.
그나마 정문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명화가 유일했다. 진명과 사풍, 묵환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명화의 말에 힘을 실어준다. 조금은 부끄럽지만. 이게 이들, 최강의 합공이다.
“책략! 주세요!”
명화는 쉬지 않고 손을 내밀며 정문을 압박한다. 말은 안 해도 내심에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정문인 걸 모르는 사제들이 아니다.
“허, 참.”
정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책략으로 저들을 따돌릴까. 그런 생각을 사제들이 품던 무렵.
“풉.”
어디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돌아가는 도사와 승려들의 고개. 그들의 고개가 잠든 달뢰라마에게 무릎을 내어준 여인, 화난설의 얼굴에 닿는다.
빠르게 붉어지는 난설의 얼굴. 얼른 고개를 돌리며 자신이 아니라는 듯 부정하는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붉은 지금이다.
“그냥···. 사형제 간에 참 가깝구나 싶어서···.”
홍조가 붉게 오른 화난설이 고개를 픽 돌리며 수줍게 말을 꺼냈다. 붙임성이 적은 그녀의 입에서 말이 나온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다.
- 스윽.
명화가 난설의 옆으로 다가간다. 얼굴에는 아차! 했다는 그런 표정이 가득하다.
소림승들과 공동의 도사들은 무위에서 돈황까지 향하며 제법 가까워진 이들이다. 그런 이들 사이에 달뢰라마를 빼면 유일한 이방인은 화난설이 될 것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조금은 배려가 부족했나, 그런 생각이 명화를 스쳤다.
“화 낭자. 낭자도 사형께서 책략이 있으실 거 같죠오? 어때요오?”
명화는 최대한 친근한 말투로 난설의 옆에 붙어 붙임성 좋게 말을 꺼낸다. 나이는 명화가 셋에서 넷 정도 더 위이나, 외관만 봤을 때는 성숙한 난설 덕에 어린 여인이 나이 많은 여인에게 교태를 부리는 그런 모습이 펼쳐졌다.
“저···야, 뭐. 있을 거···같긴 해요. 워낙···”
“교활하니까?”
되받아 주는 명화의 말에 난설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뻔하다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본능적으로 고개가 움직였던 난설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정문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가진 이 역시 난설이다.
누구도 연관 짓지 못했던 비천과 자신들의 관계를 알아챈 인물이 정문이 아닌가. 자신의 아비 역시 몸을 날려 구해줬으며 라마승들을 무찌르는 무위도 두 눈으로 지켜봤다.
달뢰라마를 모시기 위한 새로운 길도 정문이 제시했고, 그 과정에서 추격한 이들 역시 정문이 무찔렀다.
처음에야 날 선 감정으로 대했던 정문이지만, 내심 속에는 작은 믿음이 정문을 향하고 있는 그런, 난설이다.
“농담이에요, 화 낭자! 히히히.”
명화는 가볍게 난설을 건드리며 밝게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명화의 말.
“화 낭자네 사형제들은 어때요? 조금 딱딱한 사이인가 봐요?”
명화는 말문이 트인 난설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연달아 말을 붙인다. 앞으로 한 달에서 두 달은 함께 여정을 해야 하는 사이에 조금은 가까워질 필요도 있는 것이다.
“······.”
사형제들을 묻는 명화의 말에도 난설은 조용하다.
“돈황에서 보니, 월아문의 다른 문도들은 보이지 않더군. 다들 당한 거요?”
정문 역시 명화와 난설의 옆에 다가가 말을 던진다. 아무렇지 않게 모닥불을 살피며 건네는 말이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은 어투였다.
“다들···, 떠났어요.”
“떠났다구요? 어디로···?”
“···뭐, 각자의 길로···”
난설은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 말을 줄인다. 허나, 그녀의 표정이나 줄이는 끝말이 너무도 여운이 남아 다른 이들은 대충, 그녀의 말을 이해한 것만 같았다.
“도망갔다는 말이군.”
“사형!”
정문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부러 그러는 건지 굳이 그런 점을 한 번 되짚어 말을 뱉고는 만다.
“서장의 뿌리라곤 해도 백 년도 훨씬 전의 일. 문주가 믿는 뿌리야 둘째 쳐도, 문도들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긴 힘들겠지.”
괜히 모닥불만 들쑤시며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정문의 말이 괜스레 차갑게만 들려 모닥불이 씁쓸한 순간이다.
“···변방의 정도 문파란 그런 거겠죠.”
난설은 가볍게 웃으며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허공에 모닥불이 타오르며 이내 조금은 눈가가 쓰려지는 그녀였다.
“···정파의 무인이란 사람들이 어떻게···”
명화는 자신이 꺼냈던 말이 가져온 무거운 주제에 침울한 표정을 지어본다. 마치 이 분위기와 난설의 촉촉한 눈가가 모두 자신의 잘못 같이 느껴지는 명화였다.
“정파란 것도 다 실리가 있어야 유지가 가능한 법이지. 부정(不正)에 맞서보지 못한 정파인에게 사명감이 어디 있다고.”
정문은 정파란 이름 뒤에 가려진 다른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잘 알고 있다. ‘무인(武人)’. 무인은 실전을 통해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깨닫게 된다.
그저 칼을 잡는다고. 그저 무공을 익힌다고. 그저 정파란 이유만으로 정의롭게 살아가는 이들은 현저히 작은 것이 바로 무림임을 정문은 모르지 않았다.
“아미타불···.”
고상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분노일까, 부끄러움일까.
그저 타고난 위치가 중원이었고, 우연찮게 입산한 곳이 중원 내에서 손꼽히는 곳에 있었을 뿐이다.
반대로.
저들은 그저 타고난 위치가 변방이었고, 입문할 수 있는 정도 문파가 월아문이었을 뿐이다.
소림이라는 잘난 허울도. 공동이라는 이제 막 빛나는 이름도. 월아문이 마주한 처절한 정도 문파의 현실 앞에서는 부끄러움으로 변질될 뿐이다.
- 틱.
정문이 손에 든 불쏘시개를 모닥불에 밀어 넣는다. 일어서는 정문의 몸.
“떠난 무인들도 비천종···, 그 경공을 익혔었소?”
“아니요. 비천종은 익히기 제법 까다로운 무공이에요. 곧 도망···갈 사람들이 그만큼 무공에 정성을 쏟지는 않았었죠.”
난설의 얼굴에는 여전히 허탈한 웃음이 가득하다. 자조적인 웃음의 끝에는 무언가 슬픔. 그런 비슷한 감정이 조금 묻어있다.
“다행이군. 그렇다면···, 비천종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들 역시 적다는 말이겠고?”
“네, 돈황에서야 따로 무공을 자랑할 일이 있나요. 그저 빠른 신법. 그 정도로 알려진 게 전부일 거예요.”
- 씨익.
정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건. 조금씩 불온한 광채가 정문의 머리를 스칠 때면 나오는 그런 웃음이다.
“나왔다!”
명화는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띄워 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저거! 저거! 대사형이 맨날 감 잡았을 때 짓는 그런 비열한 웃음이거든요! 저게!”
명화는 연신 손가락으로 정문을 가리키며 말을 뱉었다. 애써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는 그녀의 노력이 가상하게만 보였다.
“아미타불-. 빈승 역시 이제는 알겠습니다. 무정검. 무언가 나온 것이군요.”
고상 역시 정문의 미소를 알아본 건 마찬가지. 막혀만 있던 정문의 계책이 드디어 뚫린 것이라, 고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정문은 이미 계책을 써두었었다. 다만, 그게 제때 맞아떨어질지가 조금 문제일 뿐. 일이야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니, 시기가 조금 어긋날 때를 노려 정문은 차선책 역시 마련할 생각이다.
“화 낭자.”
“예, 무정···검?”
정문이 난설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적당히 큰 키. 작은 명화에 비하면 남자와도 같게 볼 정도로 쭉 뻗은 키였다.
볼록한 허리도 과하지는 않다. 적당히 들어간 곡선이 과하지 않아 오히려 중성적인 매력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정문의 눈이 난설의 가슴에 닿는다.
크지 않다.
물론 이를 입 밖으로 내면 큰일이 나겠지만, 정문의 평가는 그랬다. 크지 않다고. 그래서.
‘오히려 좋군.’
그런 생각이 정문을 스친다. 제법 크기가 큰 명화의 가슴에 비하면, 지금은 난설의 가슴이 더 필요한 정문이다.
정문의 눈이 난설의 눈과 마주친다. 슬쩍 몸을 돌리며 무언가를 가리려는 난설. 그런 난설을 보며 여전히 비릿하게 웃던 정문의 입이 열렸다.
“옷 좀 벗어보시오.”
- 짝!
정문의 얼굴에 일장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