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저자가 무정검인가.
“저들인가?”
묵룡자가 포위망을 펼쳐 놓은 백은산으로 접어드는 한 무리의 일행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맞는 것 같습니다.”
“흠. 젊은 도인 셋에 이민족 하나. 여도인에 승려들과 동자승, 그리고 비천의 가면을 쓴 인물까지. 모두 정보와 일치하는군.”
아쉽게도.
이들은 무정검은 물론이고 다른 공동의 무인들 역시 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그저 손에 쥐어진 정보와 지금 눈에 보이는 정보를 토대로 이를 대조하며 맞춰보는 게 전부이다.
“준비하겠습니다.”
공문삼검이 묵룡자에게 마지막 준비를 물어본다. 이들은 이미 이틀 전 백은산을 전부 점령한 뒤 난주로 향하는 포위망을 펼친 상태였다.
“난주나 평량의 움직임은?”
“난화무관이 조금 분주했지만, 그들은 별 위협이 되지 않을 겁니다. 평량은 잠잠합니다.”
“흠. 공동이나 되는 곳이 지원에 나선다면 말이 들려오지 않을 리가 없겠지.”
무인 한둘이 빠져나간 건 말이 전해져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공동이다. 단체로 몰려오면 조금 겁이 나는 구파일방이지만, 무인 한둘이 가세하는 건 별로 두렵지 않은 그런 어정쩡한 문파라 이들은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좋군. 준비들 하시게.”
모든 상황이 자신들에게 맞게 떨어져 간다. 묵룡자는 그런 생각에 최종 점검을 마치고 무인들을 대기시켰다. 달뢰라마를 모신 일행은 묵룡자의 예상에 맞게 백은산을 넘어 난주로 향하고 있었다.
무인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정상을 조금 넘겨 나오는 작은 평야에서 이들은 저들을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잊지들 마시게. 우선시 되야 할 목표는 달뢰라마라는 것을. 다른 이들과의 호승심이나 무정검에 대한 보복은 그 후로 미뤄야 하네.”
묵룡자는 특히 사파의 무인들을 보며 말에 강조를 두었다. 무정검의 검에 목이 달아난 자들은 대부분 사파의 무인이었기에 혹여나 있을지도 모를 복수심을 사전에 누르려는 것이다.
“설마요. 흑면금도가 약해서 당한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묵노. 이 풍운권장! 흑면금도 따위에 비할 무인이 아닙니다!”
사파인들의 표정은 전혀 어둡지도 결연하지도 않다. 그래, 무인이라는 수식어 덕에 저들의 앞에 붙은 사파란 말을 조금 과소평가했노라, 묵룡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달뢰라마와 함께하는 일행들이 점점 다가온다. 준비를 마치는 신궁의 무인들. 그들이 준비한 지점에 일행이 다가오자, 묵룡자를 비롯한 다른 무인들이 서서히 이들을 조이며 모습을 나타냈다.
- 스스슥.
“누구냐!”
- 챙! 챙! 챙!
일시에 뽑히는 도인들의 검과 기력을 끌어 올리는 승려들. 앞쪽은 도인들이 막아서고 뒤쪽은 승려들이 막아내는 그런 대열이 일시에 이들에게서 펼쳐졌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비천의 복장에 가면을 쓴 이와 달뢰라마를 둥글게 보호하는 그런 모양새였다.
“허허허. 도장들께서 방비가 좋으시구려.”
예기를 뽐내며 도인들을 막아서는 무인들 사이를 뚫고 뒷짐을 쥔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고약하게 생긴 얼굴이 정말 정도 무림의 인물이었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정체를 밝히시오!”
진명은 앞으로 나서 묵룡자와 대면한다. 여전히 날카롭게 뻗은 진명의 검이 언제든 절초로 변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대가 무정검이오?”
“답할 생각이 없다면 나 역시 답하지 않겠소!”
“듣던 대로 대쪽 같은 무인이구료.”
어디서 무슨 말을 잘못 들으면 저런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진명에게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진명은 아무런 표시를 내지 않았다.
“말이 자꾸 옆으로 새는 것 같소만.”
“허허허, 입심 역시 제법이고.”
묵룡자의 시선이 진명을 넘어 비천의 품에 안기듯 숨은 달뢰라마를 향한다. 아직 어려서일까. 부처라 불리는 저 작은 인외인(人外人) 역시 두려움이 가득해 보인다.
“라마, 처음 뵙겠소이다.”
묵룡자는 부러 크게 과장하며 포권을 보여준다. 슬쩍 고개까지 숙인 그의 모습이 까딱하면 예의 바른 모습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 휘익!
진명의 검이 가볍게 옆으로 펼쳐지며 그런 묵룡자의 시선을 베어버린다.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다시금 시선을 돌리는 묵룡자. 진명의 눈과 마주치며 묵룡자의 눈이 깊이를 더한다.
“무정검. 길게 말하지 않겠소. 달뢰라마를 넘기고 가던 길을 가시오. 그렇게만 한다면. 본노는 오늘 이곳에서 공동을 만난 사실을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겠소.”
“감히!”
묵룡자의 말에 진명이 발끈한다. 저 말은 그저 협상으로도 볼 수 있는 말이나, 속뜻은 공동이 부끄러운 짓을 한 걸 소문내지 않을 테니 그저 도망이나 가란 뜻이 아닌가.
“허허허, 반응이 과하오.”
애초에. 이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던 묵룡자다. 그저 도발이나 해보려 뱉은 말. 자신들은 아직 신궁이라는 곳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고 그런 자리를 잡으려면 무언가 큰 명성이 필요한 법이다.
묵룡자는 이번 일을 그 적기로 보았다. 달뢰라마를 잡아다 주어 누란성주라는 자의 환심을 사고, 구파일방이나 되는 공동 역시 잡아 궁 내부의 입지를 다지려는 복안을 품었던 묵룡자였다.
‘그게 저런 애송이들이라면 더 쉬운 일이고. 클클클.’
“아무래도···, 그저 입으로 넘길 수 있는 자리는 아니듯 하오만···.”
묵룡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가며 뒷짐이 풀린다. 그저 한 번의 까딱거리는 손짓으로 뒤에 선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묵룡자.
공문삼검은 묵룡자의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쳐라!”
- 스릉! 스릉!
그의 양어깨에서 쌍검과 함께 목소리까지 뿜어진다. 동시에 몸을 앞으로 쏘아버리는 신궁의 무인들. 그런 무인들을 보며 공동의 도인들과 승려들은 더욱 주춧발에 힘을 실을 뿐이다.
“잠시만 버티거라.”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진명은 그저 고개만을 끄덕인다. 끄덕이는 진명의 고개와 동시에 원형으로 둘러싼 이들의 중심에서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하나의 신형.
- 파팟!
부러 내는 듯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비천의 복장에 가면을 쓴 이가 달뢰라마를 안고 나무 위로 솟아오른다. 한 번에 도약하는 거리가 예사 거리가 아닌, 마치 흐르는 구름과 같은 신법이 펼쳐졌다.
- 탓! 탓! 탓!
뛰어오른 비천은 그대로 나뭇가지를 몇 번 더 밟더니 이내 자신이 걸어온 방향을 향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전 전투에서처럼 다른 이들이 적을 상대할 동안 달뢰라마를 피신시키려는 작전으로 보였다.
“잡아라!”
묵룡자는 그런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출정 전에도 그가 강조했듯이 이번 행동의 최종 목적은 달뢰라마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다. 공동의 무인들과 그들을 꺾었다는 명성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공문삼검이 수하들을 이끌고 땅을 박찬다. 당장에 날아가는 저 비천을 잡으려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제가 갈게요!”
라는 명랑한 말투와 함께 여도인의 몸이 뛰어오른다.
- 쉬익! 쉬익!
좌우로 가르며 펼쳐지는 여도인의 쾌검술. 몸을 반절이나 허공에 띄웠던 공문삼검은 섬전처럼 쏟아지는 쾌검에 그만 몸을 다시 내려 앉히고 말았다.
- 쾅! 쾅! 쾅!
공문삼검이 떨어진 자리로 연달아 다른 무인들 역시 몸을 누인다. 일시에 땅을 박찬 승려들이 명화와 함께 뒤로 향하는 길을 모두 막은 덕이다.
‘최소한의 작전은 세워두었다는 건가.’
묵룡자의 고개가 계속해서 비천이 날아간 곳을 향한다. 여기 있는 모두를 물리친들, 달뢰라마를 놓친다면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다.
“섭혼검!”
“예, 묵노.”
“무정검을 상대할 수 있겠소?”
묵룡자는 군더더기 없는 말투로 단호하게 물었다. 최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들려달라는 그런 어투였다.
“가능합니다.”
조금은 자존심이 상해서였을까. 섭혼검은 빠르게 답하며 표정을 굳힌다. 혈수살검과 서영삼흉을 죽였다고는 해도 아직 이립도 넘지 않은 무인. 그런 무인을 상대할 수 있냐니.
묵룡자가 아니었다면, 섭혼검의 검이 우선은 저 말을 물은 이의 목으로 향했을 것이다.
“믿겠소. 그럼.”
묵룡자는 말을 남기고는 조금 전 공문삼검이 떨어졌던 그곳을 향해 몸을 날린다. 조금은 겸손을 보태서 말해도 여기 모인 무인들 중 가장 강한 이는 묵룡자일 것이다.
경공 역시 마찬가지. 특히나 타인을 추적하며 경공을 펼치는 건 노련한 경험이 가득한 묵룡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딜 가려구!”
명화는 이번에도 날아오르는 묵룡자를 향해 검을 뻗는다. 쾌검으로 공문삼검을 잠시 밀어낸 틈을 노려 몸을 돌리고 검기를 뿌리는 명화다.
묵룡자는 자신을 향해 거친 검기를 뿌리는 명화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나뭇가지 위로 올라선다. 마치. 누군가 대신해서 저 검기를 막아 내리라, 그리 판단한 이의 얼굴이다.
- 솨악! 솨악!
거칠게 날아오는 검기를 등으로 반기며 묵룡자가 다시금 나뭇가지를 박찬다. 검기를 그저 맞으려는 것일까.
- 솨아아악!
아쉽게도 명화의 검기는 공중에서 좌우로 흩어지고 만다. 그녀의 검기가 겹쳐지는 정중앙을 다른 방향으로 교차하는 검기들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흥, 건방진 년. 선배를 향해 검기를 날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한눈을 팔다니?”
명화의 앞에는 검기를 상쇄시킨 무인이 쌍검을 빛내며 자세를 잡는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두 남녀가 서로의 검을 바라보며 자세를 잡고 견제한다.
“삼검 형이 재미나 좀 볼 생각인가 봅니다.”
- 척. 척. 척.
뒤엉키는 승려들과 무인들, 공문삼검과 여도인까지. 부딪히는 전황을 살피는 섭혼검의 옆에서 소매를 걷으며 풍운권장이 가볍게 말했다.
“권장 형도 나서실 속셈이오?”
“암요, 한번 놀아는 봐야지요. 저기 서응사의 승려들의 권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치 뭐랄까···, 소림의 권법 같달까.”
- 처억.
풍운권장이 마지막 소매를 접으며 눈빛을 빛낸다. 풍채 좋은 뱃살과 어울리지 않는 굵직한 전완근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그의 팔심이 약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정검은 섭혼 형에게 맡깁니다. 그럼.”
“······.”
풍운권장은 한마디만을 남기고 승려들을 향해 진각을 밟았다. 권사 특유의 웅장한 진각 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 꽈과앙!
육중한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의 풍운권장이 진각으로 받은 탄력과 함께 그대로 자신의 주먹을 내뻗는다. 그의 주먹이 향한 곳에는.
소림의 장경각주, 고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푸, 풍운권장!’
고상은 자신을 향해 좋은 기세로 달려드는 풍운권장을 보며 슬쩍 몸을 기울인다. 풍운권장 역시 사도 무림에서 권장술 하나로 이름 날린 인물로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아미타불-!”
- 쩌어어엉!
고상의 쌍장이 풍운권장의 일권과 부딪힌다. 강한 기파를 내뿜으며 밀려나는 고상의 몸. 급습에 가까운 공격이었지만 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저 고상이 밀린 것은.
‘성취가 다르다···!’
그의 무공이 풍운권장보다 약하다는 이유가 전부일 것이다.
“쿨럭!”
- 푸왁!
뒤로 밀려난 고상의 입에서 선혈이 올라온다. 풍운권장의 일권을 모두 막아내진 못한 모양이다. 외상없이 그저 내부가 진탕되는, 내가중수법의 일권이 고상의 몸을 흔들었다.
“사숙!”
고상은 분명 무승보다는 학승에 가까운 승려. 그런 고상이 사도 무림에서 이름을 날린 풍운권장이나 되는 이의 일권을 쉬이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얼른 사숙에게 다가선 무각이 노기가 가득한 눈으로 풍운권장을 노려본다. 뒤에서는 사제들이 무인들을 막아주고 있기에 잠시간의 틈에 사숙을 지키러 달려온 무각이다.
“흠···, 아무리 봐도 말이지. 서응사의 승려로 보이지는 않는단 말이지.”
그런, 사숙질을 향해. 풍운권장은 그저 턱을 이죽거리며 자신의 흥미가 동하는 말만을 지껄일 뿐이다.
“노승을 향해 어찌 이리 악독한 출수를 한다는 말이오!”
무각은 이가 갈리는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들어 올린다. 마치 당장에라도 복수하겠다는 결심이 젊은 승려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리고 무각의 양 주먹에는.
금빛 권광이 성스럽게 아려있었다.
“거, 젊은 스님의 말씀이 참 재밌소. 당장에 어린 부처를 죽이려 검을 뽑은 이들에게 노승 좀 때려눕혔다고 그리 화를 내니. 쯧.”
풍운권장은 그런 무각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이죽거리는 말만 뱉어댄다. 원래. 사파인들을 입심으로 잘 이기지 못하는 곳이 바로, 소림이다.
“네 이노옴!”
무각은 더 말을 섞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함을 잘 알고 있다. 서둘러 권광을 밝게 빛내며 몸을 날리는 무각. 무인은 말보다는 무공이 그의 사상을 대변하는 법이다.
- 후우우웅!
무각의 주먹이 풍운권장을 스쳐 허공을 가른다. 그저 스친 주먹에도 살갗이 저리는 풍운권장. 젊은 승려의 권장이 제법이다.
- 팟! 팟! 팟!
이후로 풍운권장과 무각은 몇 수를 더 주고받는다. 확실히 노승에 학승이었던 고상에 비해서는 훨씬 쓸만한 무인이 나선 것 같았다.
“흠.”
삼검과 명화, 권장과 무각의 치열한 격돌에도 섭혼검의 시선은 오로지 한 곳만을 향하고 있다. 묵룡자가 무정검이라 착각했던 진명이 아닌, 그들의 뒤에서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는 한 무인에게 시선을 던지는 섭혼검이다.
‘저자가 무정검인가.’
섭혼검은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는 평범한 도인을 보며 무정검이라 생각했다. 치열한 격돌 속에서 검을 휘두르기는 쉬워도 저리 침착하기는 쉽지 않음을 아는 섭혼검이다.
섭혼검의 시선이 차분히 무정검을 훑는다. 평범한 외관이다. 크지 않은 신형에, 아니. 조금은 작다고 봐도 좋을 그런 신형에 곱상한 몸선까지.
어쩌면 여인으로 보일 정도의 몸선이었으나, 무정검 역시 미남이라는 말을 들은 터라, 섭혼검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조금 전 나섰던 그의 사제 역시 아녀자에 비해도 빛나는 미모가 아니었나.
섭혼검의 시선이 무정검의 허리에 닿는다. 그의 허리에는 얄따란 협봉검이 하나 걸려 있었고 별다른 장식은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노리는 건 없나, 그런 생각을 섭혼검이 떠올릴 즈음.
!!!!
짧은 단어 하나가 섭혼검의 머리를 매섭게 치고 지나간다. 떨리며 일그러지는 섭혼검의 얼굴. 그의 시선이 다급하게 자신이 지났던 곳으로 다시 향한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협봉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검이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