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불기겠군요.
눈을 뜬 정문이 입을 벌린다. 우선은 그것 말고는 보일 반응이 없었으니까. 분명 자신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에 사로잡혀 의식을 잃었었다.
그 중 전음으로 누군가 말을 걸고 자신의 몸을 움직인 걸 느꼈지만, 모두 허상이라 여겼던 정문이다. 하지만, 눈을 뜬 정문의 앞에는 그 모든 게 허상이 아니었음을 밝혀줄 증거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제 몸으로 뭘 하신 겁니까?”
쓰러진 묵룡자. 그의 몸, 전신의 뼈가 부러진 채 그는 절명한 상태, 그대로였다. 자신의 기억이 남은 거라면, 묵룡자는 양팔이 잘린 상태로 그저 의식이나 잃고 남아 있어야 했다.
“옴마니반메훔-. 제게 물으셔도···”
답할 수 없다. 달뢰라마는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정문의 시선을 피했다.
‘아직 완전하지 않다더니···’
완전하지 않다. 달뢰라마는 분명 전생의 기억을 가진 환생불이라 불린다. 기억을 가졌다라. 정문과는 비슷할 수도 있는 상황.
허나, 분명 다른 점도 존재했는데, 정문은 전생에 가졌던 기억력이나 경험 등을 그대로 이번 몸에 가지고 태어났다. 이게 빙의든 환생이든 전생이든 말이다.
달뢰라마는 다르다. 기억도 천천히 돌아오고 능력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느리다. 그저 그가 환생불로 불리는 이유는 가끔 찾아오는 불기(佛氣). 그게 전부일 것이다. 억겁의 세월을 환생한 탓이겠지만.
“라마께서도 모르게 몸이 움직인 겁니까?”
“옴마니반메훔-. 그저 그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을 뿐입니다.”
“무공은···요?”
“그 역시 그저 떠오른 것일 뿐···.”
말하기 싫은 건지, 말할 수 없는 건지 당장에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달뢰라마가 정문을 도왔고 덕분에 눈앞에 있는 묵룡자에게서 살아났으며 정문의 몸속에 자리한 살심과 저 까만 독충을 뱉어냈다는 것. 그게 전부일 것이다.
‘아, 하나 더 있군.’
정문은 자신의 단전 두 개 중 하나에 남은 이질적인 기운을 끌어올려 본다. 조금은 금색이 섞인 자줏빛 기운이 정문의 손에 아렸다.
“이것도···?”
모르냐. 정문은 그렇게 물으려 고개를 갸웃했다.
“제 몸에서 나간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모릅니다. 허나, 친숙하고 익숙한 기운입니다.”
“불기겠군요.”
“옴마니반메훔-.”
달뢰라마는 정문을 향해 그저 고개를 숙이며 합장한다. 묵룡자에게서 달뢰라마를 지킨 게 정문인지 정문을 지킨 게 달뢰라마인지 정문은 스스로 답을 내기 어려웠다.
“······.”
정문은 그저 입을 닫고 자신이 뱉어낸 곤충을 향해 걸어간다. 몸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존재를 마주한 정문의 눈빛이 어둡다.
‘이건···’
무엇인지 아는 눈치. 정문은 눈앞에 보이는 곤충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지 않았다.
‘황궁···?’
황궁. 자신이 그토록 끊어버리고 싶었던 전생의 연이 아직도 닿아있는 걸까. 도대체 원래 이 몸을 가졌던 이정문이라는 공동파의 대제자는 무얼 하고 다닌 것일까.
- 콰악! 퍽!
정문이 거칠게 발로 곤충을 밟아 명을 끊는다. 이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던 살기의 정체도 알 것 같은 느낌이 정문을 휘감았다.
‘사령충(使令蟲)···, 금의위에서도 아껴 쓰는 독충이 어쩌다···’
사령충. 정문은 황궁에서 일하던 당시 저 독충을 마주한 기억이 있다. 특정한 기운에 반응하며 먼저 사혈을 먹인 이의 말에 순응하게 만든다는 고독(蠱毒)의 일종인, 그 독충을 말이다.
어쩌면.
이전의 이정문 역시 황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악한 독충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는 확실합니다.”
“라마께 큰 빚을 졌군요.”
“나그네께서도 저를 지켜주지 않으셨습니까?”
달뢰라마는 아무런 생색도 없이 정문을 향해 고개 숙였다. 눈앞에 벌어진 일에 조금도.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생불은 생불이란 건가.’
정문이 돌아선다. 달뢰라마는 분명 자신의 속을 훑었다. 단전이 두 개인 것도, 엄청난 내력을 가진 것도. 달뢰라마는 모두 안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속을 훑은 달뢰라마는 정말 다른 존재였던 걸까. 그는 정문을 향해 이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정문이 주변을 정리한다. 아직 섭혼검이나 다른 고수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치지 않은 걸 보면 증원이 알맞게 도착한 모양이다.
주변을 정리한 정문과 달뢰라마가 원래 있던 곳을 향했다.
* * *
“모두 포박하라!”
제일 처음, 정문이 원래 있던 곳에 도착해서 들은 말은 한 중년인의 우렁찬 외침이었다.
노란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분주하다. 이미 병기를 버리고 투항한 중원의 배신자들을 포박하는 이들. 그들의 가슴에 ‘화(花)’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난화무관의 무인들이군.’
수풀을 거칠게 헤치며 정문이 모습을 나타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묵룡자인가, 무정검인가. 모두가 그 생각을 안고 이곳을 바라본 것이다.
“휴.”
“하.”
안도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모습을 나타낸 이가 노인이 아닌 젊은 도사이기에 다들 한시름을 놓는 것이다.
“진짜! 빨리 온다 했잖아요! 잠시만 버티라며!”
명화는 멀쩡한 사형의 모습에 울상을 지으며 어리광을 부려본다. 다친 팔로 앙탈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문이 따스하게 미소로 답했다.
“스승님.”
사제들의 안심 어린 인사를 받은 정문이 스승에게 다가간다. 자신의 부름에 당장 달려온 스승이자 장문인. 아무리 대제자의 요청이라도 구파일방이나 되는 곳의 장문인이 암행하며 달려오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제자 덕에 가만히 사문에서 여생을 보내나 했더니···, 기어이 네놈이 날 부려 먹는구나.”
“제자가 못나서 그렇습니다.”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
자정은 그다지 노기가 서리지 않은 눈으로 정문을 훑는다. 사지는 멀쩡하다. 크게 외상을 입은 곳도 없고.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은 참아보는 자정이다.
“아미타불···, 무정검. 묵룡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신, 그런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이는 다른 곳에서 튀어나온다. 소림의 장경각주 고상. 풍운권장의 일격에 내상을 입은 고상이 다친 몸을 끌고 정문에게 말을 묻는다.
“······.”
닫히는 정문의 입.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달뢰라마는 어디까지 이들에게 이를 말할까. 정문이 잠시 고민하던 그때.
정문의 시선이 달뢰라마와 마주친다.
그저 맑게 웃는 동자승. 정문은 저 청아한 미소를 믿어보기로 한다.
“죽었습니다.”
“아미타불···, 결국 무정검께서···?”
“예···, 불살(不殺)로 제압하기에는 버거운 상대였습니다.”
정문은 고상에게 말하며 가볍게 고개를 떨군다. 마치 살생에 대한 죄책감이 가득한 무인, 그 자체를 연기하는 정문이다.
뭐라 반응해야 할까. 고상은 결과를 알면서도 정문의 말을 직접 듣자 이내 반응이 굳어 버린다.
사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무정검이라면. 어쩌면. 묵룡자를 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상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셨겠지요···. 이해합니다.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시길···”
고상은 그저 정문의 말을 믿고 위로하는 길을 택했다. 이제 정문이 무얼 해도 믿지 않을 수 없는 고상이다.
“흠, 인사들은 나누셨습니까?”
정문은 묵룡자와 관련된 주제를 얼른 환기한다. 자정과 고상을 번갈아 보며 말을 묻는 정문. 무언가 더 말하고 싶지 않음을 정문이 미세하게 뿜어댔다.
“아미타불-. 간단히 소개를 나눴습니다.”
“음, 이미 인사를 드렸느니라.”
자정과 고상은 이미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고상은 난데없이 나타난 공동의 장문인에 당황했지만, 자정이 먼저 소림이 함께하는 이유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이내 안심했다.
이 역시. 무정검의 배려일 것이다. 말을 전해뒀으리라. 물론, 그저 베푸는 배려는 아님을 고상은 알고 있었다.
자정은 고상을 지나 달뢰라마, 그리고 화난설과도 인사를 나눈다. 조금은 신기한 존재지만, 자정은 편견 없이 그를 극진하게 대우했다.
“사형! 여기 보세요. 소가주도 오셨어요!”
장문인이 일행들과 인사를 마치자, 명화가 다른 반가운 얼굴을 정문에게 소개한다. 일전에 서녕과 난주에서 함께했던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수룡이 정문을 향해 포권하며 다가왔다.
“신뇌검(新雷劍)···?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무정검, 오랜만입니다. 그저 돈황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장문인을 뵙게 되어 동행했습니다.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였구요.”
“돈황으로 말씀입니까?”
“···예, 돈황으로···”
막상 출발할 때는 패기롭게 무정검에게 한 수를 배우겠다 다짐했던 수룡이다. 허나,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고 감히 그런 말을 꺼낼 분위기가 맞는지, 수룡은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소가주가 절 살려주셨어요. 어휴,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뭐예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예요! 사형만 믿고 버텼는데!”
명화는 귀여움이 가득 묻은 말투로 정문에게 따지듯 물었다. 오로지 명화만이 할 수 있는 애교에 정문이 당황할 무렵. 옆에서 이를 보는 수룡의 얼굴이 붉어진다.
처음 그녀를 구할 때는 몰랐다. 아, 물론 난주와 서녕에서도. 허나 전투가 끝나고 가까이서 마주한 저 여도인의 미모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수룡이다.
“어허. 좀 비켜보거라. 좀!”
정문은 달려드는 명화를 겨우 밀어내고 수룡과 마주한다. 진심을 담아 내려가는 정문의 고개.
“사매를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정도면 훈훈했을까. 수룡은 그런 생각에 슬쩍 기대하는 눈빛을 명화 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명화는 무심하게도 수룡에게서 멀어져 사형들과 정답게 대화를 나눌 뿐이다. 어쩌면. 수룡이 공동을 쫓아다닐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상황을 정리한 무인들이 자리를 뜬다. 다친 이들도 많기에 우선은 난화무관에서 몸을 쉬려는 이들.
“배신자들의 단전은 철저히···”
진명은 난화무관의 무인들에게 신신당부하고 나서야 몸을 들것에 누인다. 자신의 상태보다도 저들의 단죄에 관심이 많은 진명이다.
중원을 배신했던 무인들은 모두 단전과 근맥이 박살 난 상태로 난주로 이송됐다. 난주에서 하겠다는 말에 공동의 도인들이 극구 반대한 덕이다.
“한 놈 정도는 부수고 누워도···”
- 퍽!
살짝 몸을 일으키는 진명을 명화가 얼른 눕힌다. 명화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자리했다.
* * *
난주에 도착한 이들은 병상에 몸을 눕히며 상처를 치료했다. 자정은 고작 하루. 딱 하루만을 쉬고 난주를 떠났다. 장문인이 사문을, 그것도 아무런 언질도 없이 오래 비우는 건 좋지 않기에 서둘렀던 자정이다.
떠나기 전날 밤. 정문과 독대하며 긴 시간을 대화한 자정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이내 자정은 정문의 말에 수긍하며 무언가를 준비하는 표정으로 길을 나섰다.
“귀환령을 내려놓으마.”
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아마 공동의 일대제자들이 조금은 바빠질 모양이다.
정문은 일행들에게 여유롭게 쉬어갈 시간은 주지 않았다. 그저 거동이 가능한 상태. 딱 거기까지 회복을 마친 무인들은 서둘러 난주를 나와 다시금 사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딱 하나. 바뀐 점이 있다면, 남궁수룡이라는 걸출한 무인이 이들에게 합류했다는 점일 것이다.
“굳이···?”
“다들 몸이 상하지 않았습니까? 멀쩡한 무인이 하나 더 있으면 좋지요.”
아직 정문에게 도전하지 못해서일까. 수룡은 애써 정문에게 간청해 이번 여정에 동참한다. 무언가. 정문 외에 다른 목적이 있어 보였지만, 아직은 이를 눈치챈 이가 없었다.
“흠, 다들··· 괜찮은 거 맞나요?”
화난설은 몸이 상한 무인들을 보며 조금의 우려를 표한다. 남궁수룡이라는 걸출한 무인이 합류했지만, 나머지는. 제구실이 가능할지 의문이 드는 몸 상태임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사천까지만 고생들 합시다. 거기부터는 조금 편해질 테니.”
정문은 무심하게 일행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말을 뱉는다. 무정검. 저 칭호가 유독 잘 어울리는 지금이다.
닷새. 정확히 난주를 떠나 닷새를 더 걷고야 이들이 탕창(宕昌)이라는 도시에 닿는다. 감숙과 사천의 경계. 그리고 이를 책임지는 문파가 바뀌는 그 지점에.
작은 강을 지나면 이제는 공동의 영역이 끝난다. 그래도 안심이 되는 점은, 사천은 명문 정파가 세 곳이나 있는 확고한 정파의 영역이라는 점. 그게 이들을 조금 안심하게 했다.
물결을 헤치며 이들을 태운 배가 강을 나아간다. 반절. 딱 반절 정도 강을 지나는 작은 배. 이제는 강 건너편이 훤히 보이는 그 배의 선두에 정문이 무심히 서서 강 건너를 바라본다.
- 씨익.
올라가는 정문의 입꼬리. 정문은 무엇을 본 것일까. 옆에서 정문을 지켜보던 화난설은 서둘러 정문이 서 있는 선두로 향해본다.
!!!!!!
“저, 저건···?”
“말했지 않소. 사천부터는 편히 갈 거라고. 치료도 가면서 하면 되고.”
깜짝 놀라며 자신을 바라보는 난설을 향해 정문이 밝게 웃어 보인다. 잔뜩 올라간 어깨가 이 모든 걸 자신이 준비했음을 당당히 말하고 있다.
- 스윽.
입을 벌리고 다시금 저곳을 바라보는 난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녹색 무복을 입은 무인 백여 명이 포구에 진을 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중년인이 한 명, 홀로 말을 타고 이곳을 바라본다. 그의 옆에 높게 올린 깃발에는.
‘사천제일문(四川第一門).’
이란 글자가 용사비등(龍蛇飛騰)하게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