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이래야 풀어 둘 맛이 나지.
“우선 장원을 최대한 많이 준비해야 할 겁니다.”
“성모각의 제자들을 평량에 보내마.”
“개방을 통해서 서신을 보내긴 할 겁니다만···, 화산에는 따로 먼저 기별을 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태청궁에서 오늘 중으로 화산에 기별을 넣을 것이다.”
사문으로 돌아온 정문은 잠시간의 휴식도 갖지 못하고 앞으로 있을 정도 대회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거 처음으로 이런 일을 준비하려니, 영 체계가 잡히지 않는구나.”
“사형 역시 그렇습니까? 저는 뭐가 뭔지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소소한 금전만 관리하던 몸이 참···”
“정문이 이놈아. 넌 자산에게 조금 더 혼나야 될 놈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태청궁에 이리 산더미 같은 일을 던져주다니!”
그간 조용히 살았다.
이는 여느 구파일방에 비교해도 공동이 자부(?)할 수 있는 점일 것이다.
정도 대회 같은 게 열렸어도 참석을 했을까 말까 했던 문파에서 이를 주최라니. 말은 저리들 해도, 속으로 기대감이 가득한 장로들이다.
“그저 차분히 준비하면 될 일입니다. 너무 긴장들 마세요.”
“누, 누가 긴장을 했다고···!”
“아, 자경 사숙.”
“왜 그러느냐?”
정문은 사숙들과 가볍게 말을 주고받는 와중에 성모각의 각주이자 공동의 재경을 담당하는 자경을 부른다.
“장원을 꾸미고 기타 대회에 사용되는 물류는 사문과 관계가 깊은 상단들에게 일을 주는 게 어떻습니까? 다른 문파들은 그렇게 하는 것 같더군요.”
“흠, 좋은 말이다. 보자···, 평량에 지부도 있는 감평상단 정도면 괜찮으려나?”
“한 곳으로는 힘들 겁니다. 한 곳에 중심을 맡기되, 여러 곳에 나눠서 주는 게 나중에 말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옳다, 옳아. 역시 바깥 물을 먹어야 뭐를 좀 아는구나. 허허허.”
한 문파에서 외부의 물류가 필요한 행사를 열면, 이는 그들을 지원하던 상단에 맡기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그간 기부한 향화금에 대한 보상의 개념도 있고, 또 외부적으로 상단과 문파간의 관계를 과시하는 효과도 있으니까.
별다른 큰 행사를 주최한 경험이 없는 공동의 성모각주는 정문이 일러주지 않았다면, 이를 깜빡할 뻔했다.
‘행정에도 제법이군···.’
정문이 돌아온 후에도 공동의 이름을 걸고 이렇게 계획적인 일을 함께 주도한 적은 없다. 처음으로 보는 정문의 행정 능력에 자경은 한 번 더 놀라고 있다.
“음. 이쯤 하면, 나눌 이야기는 다 나눈 거 같구나.”
“예, 장문인. 발안문만 이번 주 안으로 발송되면, 일차적으로 할 일은 끝납니다.”
“태청궁주께서 잘 처리해주시게.”
“예, 장문인.”
말을 끝으로 길었던 회의가 자리를 파한다.
정문은 그대로 상천제를 내려가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갔고, 자경과 자명만이 황성각의 앞에서 도관의 전경을 감상하는 중이다.
“넓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 참. 새삼스럽게.”
“해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모일 정도로 클 줄은 몰랐습니다, 그려.”
“···오늘 제법 감상적이군, 자경.”
“뭐 어떻습니까? 좋은 날이 아닙니까?”
“좋은 날?”
“예, 사형. 처음 정도 대회란 말을 들었을 때는 실감도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맡을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없었고요.”
“헌데, 지금은 다르다?”
“암요, 다르지요. 허허, 그 일에 대한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 아닙니까?”
“그게 그리도 좋은가?”
“꿈이라도 꿔봤다면. 상상이라도 해봤다면···. 이런 감상이 나오진 않았겠지요.”
공동은 오래도록 외부와 교류를 끊고 홀로 살아가던 문파였다. 구파일방이라는 허울만은 유지하되, 실질적으로는 구파일방의 중추에서 활동하지 못하던 문파.
그런 곳이 공동이 아니었나.
“당금의 공동은 다르네, 자경.”
“알고 있습니다. 허니···, 이 자리에서 이런 감상은 털고 다시 사무에 집중해야지요.”
왜 이해하지 못하겠나. 자명은 그런 생각에 자경을 향한 시선을 살짝 거둬버린다. 마치 지금의 감상을 즐기라는 배려처럼.
자명은 일대제자들이 강호행에 나선 뒤 계속해서 그들의 보고서를 보며 외부와 소통했다. 거칠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공동의 일대제자들.
그런 사질들이 벌이는 수많은 사건을 보며 가장 먼저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건 늘, 자명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자명만큼 외부와 소통하며 공동이 이뤄낸 성과를 몸으로 체감했던 장로들은 없다는 말이다.
공동의 장로들은 공동이 무언가를 준비하는 이제야.
달라진 공동의 위상을 몸소 느끼고 있다.
말없이 눈을 빛내는 자경이 슬쩍 무언가를 털어낸다. 나쁘지 않은 감정이 담긴 무언가를.
묵묵히 뒤를 돌아 기다리던 자명이 자경과 함께, 상천제를 내려갔다.
* * *
“다 왔어?”
“예, 사형. 오늘 아침 노각과 청익, 건오가 조천문을 넘으며 일대제자들이 모두 귀환했습니다.”
한 문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이들은 언제나 일대제자인 법이다. 젊음과 활력의 상징을 담당하는 세대 역시 마찬가지.
그런 일대제자들이 사문을 비웠던 한동안은 공동이.
매우 조용했다는 뜻이다.
“야야야, 북경에 다녀왔다며? 어떻더냐?”
“말도 마십시오, 별천집니다. 별천지.”
“에이, 과장하기는!”
“허, 사형. 북경 가보셨습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이놈이?”
허나, 귀환령이 발하고 석 달이 지나가는 지금 공동의 도관은. 마치 조용한 적이 없었다는 듯, 다시금 활기가 넘치는 중이다.
“사형들은 건강해 보이네요.”
“그렇구나. 혹여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늘.”
오랜만에 사형들을 봐서 좋은 명화와 사제들이 무사해 다행임을 느끼는 진명이다.
“흥. 다치기는. 놈들이 누굴 다치게 하진 않았을지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오?”
“흠··· 뭐···”
진명도 알고는 있다.
정문 덕분에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사제들이기에, 강호에서 어떤 풍란을 일으켰을지, 그런 걱정을 진명도 한 적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묵룡자를 죽이고 달뢰라마를 모셨던 것만 할까.’
그런 생각까지 닿자, 덤덤히 사제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진명이다.
“자, 자. 주목.”
사제들이 모두 모였음을 확인한 정문이 단상 위로 올라선다. 오늘 사제들을 이 자리에 모두 모은 것은, 정문이다.
단상 위로 올라선 정문에게 사제들의 시선이 쏠린다.
“다들 오랜만이다.”
- 씨익.
별다른 권위도 없이.
그저 진한 웃음과 함께 사제들을 마주하는 정문.
사제들 역시 비슷한 웃음을 지어주는 모습이, 정파의 무인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형도 오랜만입니다.”
“거, 사고를 또 치셨드만.”
“묵룡자? 토룡자?”
“묵룡자, 인마!”
“뭐, 인마?”
“내가 사형인데?”
“크흡, 어디서 환청이···”
사제들은 여전히 낙천적이고 활기가 넘치며 성격마저 정문과 닮아가고 있다. 이를 뿌듯하게 감상하는 정문이다.
“노각. 남경 근처의 사파를 삭 쓸어버렸다던데?”
“다섯 정도가 전부입니다. 전부 군소 문파였구요.”
“금모. 북경에는 뭐 하러 갔어? 거기 도적놈들이 공동파라면 치를 떤다는군.”
“뭐, 건방진 놈들이 있다길래, 더 건방진 놈이 있음을 보여주러 다녀왔죠. 헤헤!”
“치성. 녹림칠십이채 중 하나를 쓸었다지?”
“우리끼리 한 건 아니고, 근처에 중소 정파랑 같이 움직였습니다. 뭐, 채주는 제가 베었지만.”
정문은 사제들보다 조금 빨리 사문에 도착해 태청궁으로 날아온 사제들의 보고를 전부 읽어뒀다. 온종일 웃으며 뒤로 자지러지길 몇 번.
강호에 풀어둔 사제들이 정문의 생각보다 제법.
더 큰 풍란을 만들고 온 모양이다.
‘그래, 이래야 풀어 둘 맛이 나지.’
반년이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시간이다. 허나, 정문의 옆에서 정문이 하는 것을 보고 들었던 이들에게는. 날뛰기에, 충분한. 그런 시간이었다.
“자, 다들 아쉬운 건 안다. 반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겠지. 아쉬워도 잠시만 참거라.”
처음으로 나선 강호행.
사제들은 저마다 사문의 기대를 등에 지고 남부럽지 않은 성과를 내며 강호에 공동이라는 이름을 다시 새겼다.
일 년이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었던 만큼 아쉬움을 표할 이도 적지 않을 터인데, 이른 귀환령에 대해서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 모두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강호행이라는 선물이.
지금 단상에 올라선 인물이 준 선물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호행도 좋지만, 당장에 사문에 큰 행사가 있을 예정이니 어쩔 수 없었다. 다들 원망하지들 말고.”
“큰 행사 말입니까?”
“응. 아주 큰.”
“아주···, 큰···?”
정문은 일을 크게 부풀리며 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면 몰라도 말이다.
혈영문을 멸문시킨 일조차 그저 복수한 일로 치부하는 무인에게 무얼 바라겠나.
그렇기에 사제들은.
정문의 입에서 나온 저 큰일이라는 말에 살짝 긴장하며 몸에 힘을 주는 중이다.
“석달 뒤. 공동에서는 정도 대회가 열린다.”
“정도 대회··· 말씀입니까?”
“그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모두에 발안을 보낼 것이고 그들 중 참석할 이들은 모두 공동으로 몰려올 것이다.”
!!
수많은 동공이 허공을 오간다.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려 무던히도 애쓰는 모습들.
정문은 그를 이해하며, 잠시간 이들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준다.
‘그래, 다들 놀랐겠지. 공동이 어디 그런 적이나 있나.’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정도 대회가 끝나면, 또 놀랄 소식이 이들을 반길 터. 정문은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제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군요.”
“아, 난 또 뭐라고.”
“무공 대회는 아니지?”
“에헤이. 사형. 요즘 시국에 누가 공동에게 덤빕니까?”
“그건 그렇지. 삼존이면 몰라도.”
“그럼 뭐야? 입 터는 대회야?”
“이 새끼가. 어르신들 대화하는 자리! 입 털기는!”
“그거나 그거 아닙니까?”
제법 가벼운 반응들이 사제들의 입을 탄다.
“······?”
오히려 정신은.
정문이 아득해져 버리고 만다.
“저···, 사형. 괜찮으십니까?”
“지, 진명아···, 쟤들 반응이···?”
원래라면 놀라야 하지 않나.
정도 대회가 그리 작은 일은 아니지 않냐는 말을 정문은 진명에게 묻고 싶었다.
“······, 다들 많은 일을 겪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공동이 처음으로 이런 자리를···”
“논검회도, 혈영문도. 모두 전방에서 겪었던 사제들입니다. 기준치가···, 조금은 높아지는 것도 당연하지요.”
“······.”
잔뜩 분위기를 잡으며 표정에 힘을 주고 단상에 올라섰던 정문. 지금은 그런 분위기도 표정에 잔뜩 주었던 힘도 모두 풀린 채 허탈한 모습이다.
어쩌면 이런 반응이 옳을지도 모른다.
장로들이야 사문에서 전해지는 소식만을 귀와 눈으로 그간 있었던 일을 겪었던 사람들이다.
허나, 일대제자들은.
전방에서 정문과 함께 구르며 몸으로 이를 겪었던 이들.
장로 배분과 일대제자 배분이 느끼는 이번 일에 대한 차이가 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해서, 대사형! 결국, 일하라고 불렀다는 말씀 아닙니까?”
맞다. 사실 그게 요지다.
“뭐···, 겨, 결론은 맞지···.”
“크흡! 다들 듣거라! 곧 있을 대회를 대비해 사문이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강호행을 나서기 전에 속했던 곳에서 사무를 내릴 것이니, 다들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를 돕도록! 또, 대회가 열리거든 절대 분란을 만들어선 안 된다. 몸가짐 역시 신경 쓰고, 손님을 때려선 안 된다. 특히, 단전! 이 역시 명심하거라!”
진명은 살짝 비틀거리는 정문을 보고는 빠르게 말을 이어가며 개입한다. 정신이 아득해진 사형이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할 거란 계산에서다.
“옙!”
“옙!”
“옙!”
“그럼, 해산하도록!”
진명은 아찔해지는 정문의 정신을 배려해 서둘러 사제들을 해산시킨다. 전할 말은 다 전했다. 사제들에게 맞춤으로. 원래라면 조금 더 웅장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다.
“저···, 저놈들이···!”
“어휴, 사형. 그러게 왜 분위기를 잡고 그래요?”
“저, 저희도! 아, 안 놀랬습니다!”
정문은 사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진명을 비롯한 사제들에게 정도 대회에 대한 말을 미리 전했었다. 이들의 반응 역시 다른 사제들과 마찬가지.
정문은 그저 이들이 자신과 늘 함께하는 사제들이기에 그런 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 아닌 모양이지만.
“쯧. 애들 성격 다 버려 놓았군.”
사풍은 그런 정문을 보며 이런 반응이 다 누구 탓인지를 알려준다.
정문이 활발히 활동하기 전에는.
그저 평범했던 공동파였다.
“그래···, 내가···, 내가 죄인이구나···”
사제들은 자리에 앉으며 홀로 뱉어대는 정문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는 그런 생각에.
요즘 들어 죄가 자꾸 늘어나는, 정문이다.
* * *
해가 이제야 모습을 나타낸 이른 새벽.
태청궁의 도인 하나가 빠르게 산을 타고 내려간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평량.
사문에서 내린 서신을 개방에게 전하러 가는 길이다.
태청궁 역시 전서를 주고받는 체계는 잡혀있다.
허나, 서신이라는 건.
안에 든 내용뿐 아니라 이를 전하는 방식 역시 중요한 법.
전서구를 통해 전해지는 평범한 방식보다는, 개방이라는 한 문파의 공식적인 전달이 이를 받는 이에게 더욱 진중한 무게감을 줄 것이다.
도인의 발이 개방 평량 분타에 닿는다.
당연하게도.
이 시간에 일어났을 리가 없는 거지들.
도인은 조금 무리해서 그들을 깨워본다.
그들이, 아주. 싫어할 그런 말로.
“무정검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
- 척!
- 척!
- 턱!
일시에 소리를 내며 열리는 판잣집의 문들.
무정검이라는 소리에 칼같이 반응한 거지들의 표정이 무척 당황스럽다.
당황한 거지들 사이로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거지가 하나 나선다. 그의 허리에 여섯 자루의 포대가 걸려있다.
“흠···, 공동에서 오셨소이까?”
근엄하게 말을 뱉는 거지.
그의 눈이 도인의 면면을 살핀다.
“무정검께서 제 사형되십니다. 일전에 태청궁에서 뵈었던 기억이···, 호연신개, 맞으십니까?”
“크흡! 그때 일은···! 허허.”
홍구는 슬쩍 도인에게 다가서며 입을 다물 것을 종용한다. 그날 보여줬던 모습이 어떠한지, 자신도 아는 모양이다.
“급보가 있어, 이리 찾았습니다.”
“급보···?”
“여기.”
도인은 급보란 말과 함께 자신이 챙겨온 서신 뭉치를 홍구에게 전한다. 그리고.
“이건 호연신개와 철면노개께 직접 전하라 하셨습니다. 사형께서요.”
홍구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무정검의 서신을 읽어간다. 일시에 굳어가는 그의 표정. 잠시 눈알을 굴리던 홍구가 서둘러 철면노개 오봉학을 깨우러 간다.
그리고 그날 오후.
평량 분타에서도 가장 발이 빠르다는 거지들이 강호 전역을 향해 빠져나갔다. 중원 무림의 큰 흐름이 될 그런 소식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