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는 공동을 무시하지 마라-120화 (120/153)

120. 수일하거라.

좋은 밤이다.

달빛이 나려 장원 사이의 길만을 비춰 마치 길을 새로 내놓은 듯한 그런 기분이 드는 밤.

근간에 있었던 정도 대회인가 하는 큰 행사 덕분에 발 디딜 틈이 없던 평량의 시내도, 지금 이 시각만큼은.

한적함을 자랑하고 있다.

싫지 않은 한적함이다.

정문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적어도 지금 자신이 향하는 곳에 갈 때는, 이렇게 한적한 기운이 도는 것이 좋을 테니까.

정문의 발이 평량 시내의 한 주루에 닿는다. 외관이 화려한 주루. 적당한 밤이라면 옆문을 통해 조용히 들어가야 할 테지만, 지금처럼 한적한 새벽이라면, 정문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주루의 일층에서 쪽잠을 자던 점소이는 정문을 알아보고 윗층으로 안내한다. 이제는 익숙한, 그 방으로.

그리고 그 방에서 창가에 앉아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달구경을 하는 한 사내가 고개를 돌려 정문을 맞이했다.

“오랜만이군. 조륜.”

“무정검. 그대 역시. 발걸음이 뜸하더군.”

조륜은 속으로 기뻐하는 감정을 절제하며 아무렇지 않게 정문을 맞이한다.

조륜은.

정문이 자신의 전 상관이었던 학위사 강찬임을 이미 알고 있다.

분명 정문은 조륜에게 자신이 그분을 모시던 검 중의 하나란 말만을 남겼었다. 조륜은 어떻게 정문의 정체를 아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정문이 그분이 남긴 것이라며 전했던 서신.

바로 그 서신 덕분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조륜은 정문이 건넨 서신을 손으로 더듬어 읽었다. 시력을 잃은 맹인은 다른 감각이 발달하는 법.

그런 조륜의 손끝에.

전부 마르지 않은 먹물의 촉촉함이 분명히 느껴졌던 것.

학위사가 죽은 지는 그 당시만 해도 반년이 한참 지난 다음이었다. 그런 시점에. 그의 친필이 담긴 서신이 아직 먹물도 마르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필체는 분명한 그분의 필체.

먹물이 전부 마르지 않았다는 건 쓰인 지 고작 이틀이 지나지 않았다는 뜻.

거기에 자신과 그분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처음 보는 무인까지.

조륜의 생각은 한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 그분이다!’

라는 곳으로.

당장에 아는 척하고 싶었다. 달려가 품에 안겨 눈물을 쏟고 싶었고, 다행이라는 말 역시 전하고 싶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같이 조숭 놈을 토막 내 버리자고.

하지만, 그런 조륜의 발목을 잡은 것 역시.

정문이 전한 서신이었다.

잊어라. 복수는 잊고, 자신의 삶을 살아라.

정말 유언처럼 들리던 그 서신에 담긴 뜻을.

조륜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 그걸 원하시는 건가···’

새로운 삶. 이 말은 자신뿐 아니라, 그분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리라, 조륜은 그렇게 생각했다.

황궁에 갇히다시피 살아오셨던 분이다.

높았다면 높았을 자리지만.

자유는 없었던 몸.

그의 몸은.

수보라는 노인에 의해 묶여 있었으니까.

그런 분이 무인의 몸으로 새로 살아가고 있다. 조륜 자신과의 연관성을 빼고 봐도 제법 성공적인 무인의 삶을. 이전의 삶에 대한 미련을 털어 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

생각이 거기에 닿자.

조륜의 머릿속에 복수란 단어는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조숭이라는 놈은 싫다.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

하지만, 그를 증오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주군을 죽였다는 점.

헌데, 그 주군이 새롭게 태어나 자신의 눈앞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륜이 굳이 복수심을 불태울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해서, 조륜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주군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저, 지금 앞에 앉은 이가 뱉은 대로.

그의 말을 믿는 척을 하며.

그렇게.

평대로 상관을 대한다는 것이 제법 힘든 일이지만, 그분의 뜻이라면, 못 할 것이 어디 있겠나.

해서, 요즘.

부쩍 웃음이 많아진 조륜이다.

“뭐, 아무래도 일이 무림맹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이해는 하지만. 섭섭하긴 하더군.”

“···가끔 들르지.”

“그리움을 공유할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일세. 가끔은 그분을 그리며···, 담소나 나눴으면 좋겠군.”

“뭐···, 그러도록 하지. 오늘은 무슨 일로 불렀지? 안 그래도 올 생각은 있었는데···, 전할 소식이 있다더니.”

“급보가 날아왔네. 자네가 좋아할지···, 아니면 싫어할지는 모르겠지만.”

급보란 말에 정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시기적으로. 지금 날아올 급보 중에는 정문이 좋아할 소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남인가? 아니면···, 북경?”

“이미 상정하고 있었나 보군.”

“일은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조륜. 그분의 가르침을 잊은 거냐.”

일은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하나의 일이 있으면 그에 맞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또 그에 맞춰 또 다른 일이 벌어지는 곳이 무림이다.

무림의 정보를 다루는 이가 늘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하나의 정보로 인해 벌어질 다음 일을 예측하는 것. 황궁 시절 정문이 늘 수하들에게 강조했던 개념이다.

“그럴 리가.”

“어느 곳이지?”

“북경.”

“역시 황궁이군.”

“조숭을 감시하던 감시조가 모두 전멸했다. 호천대를 감시하던 조 역시 마찬가지.”

“감숙으로 오려는 것인가.”

“같은 생각을 하는군.”

조륜은 정문의 생각이 자신과 일치하자, 입꼬리를 올리며 감정을 숨기는 걸 잊고 만다. 얼른 지우는 그의 웃음이. 수상하기 짝이 없다.

“평량과 난주 주변에 감시를 늘렸네만. 영 보이질 않아.”

“강남이나 청해로 갔을 경우는?”

“물론 상정했네. 허나···, 강호 어디에서도. 그를 봤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군.”

지금 흘러가는 강호의 순리대로라면, 수보 조숭은 무림맹에 대비하기 위해 사파 무림의 문파를 만나거나 무림맹에 참여를 천명하지 않은 정도 문파를 만나고 있어야 한다.

무림맹을 흔들기에는.

그 둘이 가장 좋은 조건이니까.

뭐, 무림맹에 속한 다른 문파를 회유하려 들 수도 있다. 허나, 이 경우 역시. 흑시창의 눈을 피하진 못했을 것이다.

“보이질 않는다라···”

“우선은 최악의 경우들은 피해가고 있으니.”

“흠···.”

황궁이 무림맹과 직접 접촉하려는 움직임은 없다. 이를 와해시키려 반대 세력을 만나려는 움직임 역시 없고. 그래도 움직인 시기는 정확히 무림맹의 결성이 북경에 닿은 다음.

어디로 갔을지는 몰라도.

무림맹이라는 계기로 인해 움직였음은.

분명한 상황이다.

“혹여라도 조숭의 행적이 잡힌다면, 그대에게 바로 알려주도록 하지.”

“쫓을 방법은 있는 건가?”

“글쎄···. 영업 비밀이라.”

조륜의 마지막 말이 조금은 불안하다. 그를 오래도록 부려왔던 상관이기에 느낄 수 있는 불안감. 정문은 그런 불안감에도.

이전과는 달라진 상황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한다.

“···그럼, 부탁하지. 강남이나 청해에 관한 소식도. 있다면 즉시 알려주면 고맙겠군.”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정문.

그런 정문의 소리를 듣고는 조륜이 아쉬운 표정을 지어본다.

“가는 건가?”

“할 말은 다 나눴으니.”

“뭐···. 그렇긴 하지.”

표시는 난다. 아쉬워하는 것이.

그래도, 정문은.

그저 그리움 때문일 거라.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거라 여기며, 애써 이를 외면했다.

정문이 나간 방에 설매가 들어온다.

여전히 아련함에 젖어 있는 조륜의 표정.

“기쁘셨나 보군요. 창두.”

“음. 조금 짧았지만, 충분히.”

“다행입니다.”

“준비를 좀 해두거라. 수보 조숭···을 찾아야겠다.”

조륜의 움직임을 도와주던 설매는 조숭이라는 이름에 몸을 멈칫한다. 이들이 얽혀 있는 관계를. 모르는 설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 움직이시려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구나. 그분의 신경이 덜 가게 하려면···, 내가 움직여야지.”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지요···?”

“가야지. 결국에는 조숭이 돌아올 장소로. 거기서부터···, 역으로 추적한다. 누구와 마주쳤는지, 또 무얼 하고 온 것인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설매는 그런 말을 차마 뱉지 못했다. 계획을 말하는 조륜의 얼굴에. 어느 때보다 진한 기력이 감돌고 있었기에.

“···속하,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북경으로 간다.”

정문이 주루를 들리고 며칠 후.

평량에서 제법 인기 있던 맹인 악사 하나가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무림맹이 문을 여는 날이 다가왔다.

그간 중원 무림은 많은 것이 변했다.

여러 중소 문파는 지역별로 회의를 열어 자신들의 입장을 정했고, 그 정해진 입장의 대부분은.

무림맹에 참여하겠다는 것이었다.

섬서를 시작으로 호북과 안휘, 절강과 강소, 산동과 하북, 산서와 하남에 이어 사천과 운남까지.

대부분 지역의 문파들이 무림맹에 참여 의사를 보내왔다.

그에 따라 무림맹은 점차 내실을 다지며 그 인선을 채워나갔다. 실무를 보는 장로진부터 현장에서 무력을 책임질 무인들까지.

무림맹은 이제 그럴듯한 체계를 찾아가는 중이다.

체계에 맞춰 난주에서 시작된 무림맹 본부의 개축 공사 역시 끝을 향해 갔다. 이제 하루 이틀이면 끝나는 완공.

그에 맞춰, 무림맹의 무사들이.

맹주인 자정을 모시러, 평량까지 찾아왔다.

“모시겠습니다.”

산문 앞까지 배웅을 나온 공동의 도인들과 평량 시내를 꽉 채운 무림맹의 무사들.

높이 오른 깃발과 무사들의 가슴에는.

‘맹(盟)’이라 적힌 글이, 용사비등한 자태를 자랑했다.

“잠시 시간을 줄 수 있겠나.”

“당연한 말씀을요. 맹주님.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을 내리시면, 따를 뿐입니다.”

단악도성(斷惡刀星)이란 이명으로 불리던 정파의 독행 무인, 필성은 자진해서 맹에 가입하여 맹주의 호위를 맡았다.

섭혼검과 오랜 은원에 있던 그가, 섭혼검을 단박에 제압했다는 자정의 이름에 이끌려 평생 처음으로 적(籍)을 두게 된 것이다.

첫 만남임에도 충성스러운 그의 태도가, 무림맹이 제대로 굴러가는 곳임을 나타내는 것만 같다.

자정은 그런 필성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돌아선다. 자신을 배웅나온 사문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자정.

“사문을 잘 부탁하네, 자명. 내가 없는 동안은, 자네가 책임자임을 잊어서는 아니 되네.”

“걱정마십시오, 사형. 중요한 안건은 맹으로 보내 보고를 올릴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명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한다. 실상이 그렇지 않음을 가장 잘 아는 자명이지만, 사형의 어깨에 짐을 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당장에 장로가 하나 사문을 비워도 사무가 차고 넘치는 곳이 구파일방이다. 장문인이 장로들에 비해 많은 사무를 맡는 건 아니지만, 그가 자리를 비우면.

남은 장로들의 몸이 고단해질 건 뻔한 일이다.

자정 역시 이를 알고 있다. 그래도, 든든히. 자신을 응원하는 사제의 마음을 따스하게 받기로 하는 자정이다.

자정의 시선이 일대제자들에게 닿는다. 자신의 제자들이자, 공동의 자랑에게.

우선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자신의 대제자, 이정문이다.

“정문아.”

“예, 스승님.”

“이쪽으로 와야지, 거기서 뭣 하느냐?”

“아. 옙옙. 습관적으로···. 헤헤.”

정문은 머리를 긁으며 얼른 자정의 뒤에 선다. 정문을 따라 진명과 사풍, 명화와 묵환까지.

이들은 함께.

무림맹으로 가게 되었다.

“노각.”

“예, 장문인.”

“우리가 무림맹으로 떠나면, 각이 네가 가장 맏형이 되는 거다. 알고 있느냐?”

“···율법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그래, 율법. 각이 너는 언제나 율법을 지키는 아이였지.”

“구천각의 제자이니, 당연합니다.”

“너무 얽매이지 말고, 혹여 힘이 들거든 언제든 주변에 의지하거라. 공동은···”

“한 명의 뛰어남이 아닌, 여럿의 만남이 만든 곳. 제자,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좋구나.”

든든한 인상의 노각이 자세까지 갖춰가며 다짐하듯 말하자, 이내 자정의 얼굴이 밝아진다.

노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그의 모습이, 아련하다.

“다들 듣거라! 장문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지만, 변하는 건 없다! 늘 수일(守一)하거라. 해서···”

- 처억-!

“진일보한다! 그게 바로 공동의 무인!”

“진일보한다! 그게 바로 공동의 무인!”

“진일보한다! 그게 바로 공동의 무인!”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기려던 자정의 말을, 다른 문도들이 일시에 낚아챈다. 무릎까지 꿇으며 동시에 입을 여는 공동의 도인들.

우렁찬 그들의 목소리가.

공동산과 평량, 그리고 자정의 가슴에 울린다.

“······!”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참던 자정이 겨우 어색한 미소를 남기고 몸을 돌린다.

휘날리는 흑색 장포에 그려진 ‘칠(七)’이라는 글자가, 꾸겨지는 천 자락에도 선명한 순간이다.

“가세.”

자정은 다른 말을 남기지 않고 준비된 말에 올라탄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문도들을 뒤로 말을 몰아 난주로 향하는 자정. 애절한 이별이 막 마무리되려 할 때.

“아니, 어디 멀리 가시나? 닷새 거리에 난주 가시면서···. 생이별하시는 것도 아닌데···”

그런 분위기를 깨는 익숙한 말투가 들려온다. 이건 분명 정문···

“쉿. 분위기 잡으시는데 냅둬요! 스승님도 이런 거 해봐야죠!”

“난주면 심부름으로도 오갈 수 있는 거리지. 암.”

“어허!”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아마 다섯 정도.

그래도 자정은 차마 고개를 돌려 들려오는 저 말들에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저런 말에 반응하는 모습이.

너무도 초라할 테니까.

‘나는 맹주다···, 나는 맹주다···, 맹주···’

스스로 되새기며, 맹주의 위신을 겨우 지킨 자정이.

무림맹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