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아무것도.
따스한 햇볕이 내리는 오후.
양옆에 논밭이 즐비한 길을 따라 하나의 마차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그런 마차의 옆으로 고개를 숙이며 비켜서는 농민들. 마차란 물건이 쉬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저를 타고 다닐 정도의 인물이면 예사 인물도 아니기에 농민들의 어깨가 조금은 떨리고 있다.
마차를 모는 마부의 어깨는 하늘 높은 줄을 모른다. 대갓집 노비의 기세는 5품 관리의 기세라는 말처럼, 자신이 모는 것이 일반 말이 아닌, 마차라는 것에 자부심이 깃든 그의 모양새가 퍽 우스운 와중이다.
그리고 그런 마차의 뒤에는 홀로 흑마(黑馬)에 올라타 조용히 주변을 살피는 덩치 좋은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칼 찬 그의 모습이 누가 보아도 호위무사처럼 보였다.
마차는 소박했다.
소박하다는 말이 마차라는 말 앞에 붙을 수 있는지가 의문일 수 있으나, 다른 높으신 분의 행렬을 본 적이 있는 누군가는 분명 소박한 마차란 말을 남겼을 것이다.
아무런 꾸밈도, 또 마차에 탄 인물을 상징하는 장식도 없는 마차. 이를 수행하는 무사 역시 하나뿐인 풍경.
어쩌면, 마차에 탄 인물이.
높으신 분들 중에서는 제법 어정쩡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마차는 무심히 달려 농민들을 지나친다. 논길을 지나는 것이기에 전장을 달리는 전차의 기세처럼 바퀴가 구르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걷는 것보다는 빠른 그런 속도로.
그렇게 일각 정도를 더 논길을 달리던 마차. 그런 마차가 일순간에 길 위에. 멈춰 버리고 만다.
길 위에 쓰러진 한 마리의 소가, 자신의 덩치보다 몇 배는 큰 마차를 막아서고 있었다.
“네 이놈! 뭣 하는 짓이냐? 지금 인마차(人馬車)가 서둘러 길을 가고 있거늘! 어디 감히 마차의 앞을 막는단 말이더냐?”
마부는 기세가 좋게 채찍으로 바닥을 치며 쓰러진 소를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농민을 향해 소리쳤다.
멈춘 마차의 옆으로 말을 붙이는 무인. 무인이 다가서자, 마차의 창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얼굴을 끄집어낸다.
“무슨 일인고?”
“대인, 소가 쓰러져 잠시 길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끌끌끌, 소라? 너무 화내지 말라 이르거라. 천천히 가도 될 일이니.”
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밖을 보며 마부를 다독인다. 주변에서 이를 살펴보던 농민들이 안도하는 숨소리가 마차 안까지 들려온다.
“나, 나리!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 소가 말을 듣지 않아···”
“얼른 소를 치우게. 가야 할 길이 제법이니.”
“소, 송구스럽습니다요.”
소의 주인으로 보이는 농민은 서둘러 무릎과 이마를 땅에 대고 연신 땀을 흘려댄다. 이런 논길에 높으신 분의 행차가 있을 줄을 자신이 어떻게 알았겠나.
농민은 서둘러 소의 코뚜레를 잡고 연신 옆쪽으로 몸을 댕긴다. 내력도 아무런 신력도 없는 농민의 몸으로 소를 어찌 옮길 수 있을까.
소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고 자리를 지킬 뿐이다.
- 끼리릭.
마차의 문이 열린다.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한 노인. 키가 작은 노인의 체구에도 무언가 높은 사람의 기품이 뿜어져 나온다.
노인은 뒷짐을 지고는 그대로 농민의 곁으로 다가가 소의 상태를 살핀다. 고귀하신 양반이 무엇을 알겠냐만, 이리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 농민은 황송할 뿐이다.
“문제가 심각한가?”
“나, 나으리. 아, 아닙니다요! 그저 소 놈이 게을러···”
“쯧쯧. 그러게 적당히 부리고 적당히 쉬게 했어야지.”
노인은 코뚜레 사이로 손을 넣어 이를 열심히 당기는 농민을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호위무사를 바라보는 노인.
“철환아.”
“예, 대인.”
“네가 좀 거들어주거라. 가엾은 소이니, 조심히 다루고.”
“예.”
철환이라 불린 무인은 말에서 표표한 움직임으로 뛰어내려 소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농민을 물린 뒤 한 손으로 소를 거칠게 밀기 시작한다.
- 우오오오오!
소는 움직이기 싫은지 울음소리를 크게 내며 몸을 버팅긴다. 하지만, 이내.
- 부우웅!
하는 파공음과 함께 소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논밭으로 그 위치가 바뀌어 버리고 만다.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원리로 소를 옮긴 무인은 가볍게 손을 털고는 다시금 말에 올라탔다.
“적당히 하시게. 뭐든 부릴 때는 적당히가 중한 법이니.”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정말 감사합니다!”
농민은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금 고개를 조아리고는 소에게 다가섰다.
혀를 한 번 차고는 마차에 다시 오르는 노인. 그런 노인의 마차를 향해. 한 마리의 말이 또. 먼지를 날리며 다가온다.
“대인!”
거칠게 말을 몰며 다가온 무인의 가슴에는 호천(扈天)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어 그의 소속을 나타낸다.
“대인과 대주를 뵙습니다.”
“무엇이더냐? 잠시 후면 북경에 닿을 것을.”
노인은 이동하는 중에도 몰려오는 일거리에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는다.
그런 그에게, 달려온 전령은.
“무림맹이 움직였습니다!”
라는 짤막한 보고만을 올릴 뿐이다.
- 씨이이익.
거칠게 올라가는 노인의 입꼬리. 노인은 마부를 향해 근처 그늘 가에 마차를 댈 것을 요구했다.
적당히 경사가 있는 언덕.
마차는 그 언덕 위에 있는 당산나무 아래에서 멈추어 섰다.
노인은 가만히 그늘에 앉아 전령이 가져온 서신을 읽어간다. 그 서신에는 무림맹이 움직여 중경 근처로 향했음과 주변의 문파들이 무인들을 중경과의 경계로 배치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 담겨있다.
“흠.”
“계획하신 대로군요.”
“그래, 순조롭게 흘러가는구나.”
노인은 자신을 지키는 호위무사와 함께 서신을 읽으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제법 믿는, 그런 무인인 모양이다.
“이리 쉽게 넘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넘어오지 않을 도리가 있나. 끌끌끌.”
“대인의 지략 덕분입니다.”
노인은 자신을 향해 칭찬하는 무인을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본다.
“어울리지 않는구나.”
“어째서···?”
“그런 말도 다 할 줄 알았더냐?”
“···그간은 대인께서 직접 나서실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일 처리에 그만···”
덩치가 좋은 무인은 부끄럼을 타는지 제법 붉힌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인다. 정다운 수하와 주인의 모습이 둘 사이에 펼쳐진다.
“지략 때문이 아니니라. 그저···, 정보를 어찌 다루는지. 그게 전부이지.”
“해도 개방을 끼고 있는 무림맹이 아닙니까? 저들이 이리 쉽게 넘어오리라곤···”
“별일 아니니라. 그저 시기와 제한된 정보···, 그리고 저들에게 부족한 것을 이용했지.”
“부족한 것이라면···?”
“저들은 시간이 없지 않으냐? 끌끌끌. 언제 서역과 서장이 전쟁을 끝낼지 모르는 상황에 눈앞에 놓인 상황이 그저 좋게만 보였을 터. 인간은 늘 그런 것에 시선을 뺏기는 것이지.”
“탁월하십니다.”
“오늘따라 간지러운 말을 많이 하는구나.”
노인은 보고차 올라온 서신을 무인에게 던지듯 건넨다. 그걸 받아든 무인은 손에 내기를 끌어 올리더니 이내 서신을 재로 만들어 버렸다.
“헌데, 저들이 중경에서 충돌하려 하겠습니까? 무림맹은 몰라도···, 사파 놈들은 아무런 대비가 없을 텐데요?”
“끌끌끌. 철환이 네놈도 그리 생각하느냐?”
“예?”
“정사의 충돌은 없느니라. 그저 미끼지.”
“허면, 굳이 저들을 움직이게 만드실 이유가···?”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어울리지 않게 겸양하려는 것일까. 노인은 자신의 공이 아니라는 듯한 말을 거침없이 뱉어낸다.
“그저 정보를 막았고. 적당한 시기에 ‘풍문’이라는 걸 퍼트렸다. 아, 몇몇 관리를 움직이긴 했으나. 관무불침이란 말이 있지 않으냐? 그게 어찌 무림에 무언가를 한 일일꼬.”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래. 했지. 말 정도. 그리고 금의위 위사를 몇 전역시켜 무림에 풀었다만. 그게 무슨 큰 문제일까.”
노인은 진하게 웃으며 무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때로는 그저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켜 저 먼바다에서는 초가를 삼키는 해일이 되곤 하는 법이다. 허면, 묻겠느니라. 내가 그 해일에 삼켜진 초가를 망친 악인이더냐?”
“······.”
“암, 아니지. 허니,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느니라. 그저 말을 전했을 뿐.”
노인은 자신만의 철학을 뱉으며 짙게 웃는다.
말을 전했다라. 직접 지시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지략은 나눠줬다는 말을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는지, 무인은 오늘 처음 알았다.
거기에 금의위 위사를 몇 전역시켰다는 말은 실질적으로 병력까지 지원했다는 말이 아닌가.
정치가의 혀는 역시나.
현란한 것이다.
“···이번 파문이 서역에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요.”
“흠, 챙겨주는 것 정도는 알아서 먹겠지. 그저 무림맹을 한 번 주춤하게 하면 되는 일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중추를 무너트릴 필요가 있으니.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서역 역시 쓸어버려야지.”
노인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살벌한 말을 뱉어간다. 덤덤히 말하는 그의 표정이, 더욱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것 같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 전에.”
노인은 자신을 향해 맹세를 다짐하는 무인에게 이전과는 다른 눈빛을 보낸다. 마치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다.
“잡아 와야겠지?”
철환은 그런 노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왔던 길을 향해 발을 움직인다. 표표하게 날아가는 그의 신형. 그가 땅을 밟는 지점에는. 아무런 자국이 남지 않는다.
그렇게, 일다경이 지나자, 철환이 돌아온다. 그의 손에는 축 늘어진, 조금 전 소를 몰던 농부가 들려있다.
- 툭.
무심하게 농부를 내려놓는 철환. 혈도가 제압된 농부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몸을 부들거릴 뿐이다.
“무공은 모르는 놈입니다.”
“흑시창 놈이렷다?”
!
이게 무슨 말일까. 노인은 농부와 눈을 마주치며 전부 안다는 듯한 그런 표정을 지어본다.
“아혈을 풀어주거라.”
- 팟.
“나, 나리! 소, 소인은···!”
- 콰직!
무어라 변명을 하려던 농부. 그런 농부의 다리가, 철환이라는 무인에 의해 일시에 두 동강이 나고 만다.
“끄아아아악!”
“아혈을 괜히 풀었구나. 끌끌끌.”
“허어억. 허억.”
“농부란 놈이 소도 몰 줄 모르고. 아니지. 소에 대해서도 알지를 못하는 모양이더구나.”
“그, 그게 무슨···?”
“쯧쯧. 요즘 것들은.”
노인은 거칠게 혀를 한 번 차고는 농부와 마주친 시선을 거둔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인. 노인이 뒷짐으로 손을 옮긴 후 말을 이어간다.
“소는 코뚜레로 끄는 가축이 아니니라. 오히려 코뚜레에 손을 대면, 굳는 것이 소의 본능. 평생 소를 친 농민이 그를 모른다라? 또. 소를 일으키려거든 머리가 아닌 둔부(臀部)를 드는 것이 기본적인 지식이거늘. 어찌 너는 자연스레 머리로 손이 간다는 말이더냐? 다리가 부러진 소이기에 부러 그런 것이 아니더냐?”
노인은 고귀한 신분에 걸맞지 않은 가축 치는 법에 대한 지식을 뽐내기 시작한다. 흙이라곤 묻어 본 적이 없어 보이는 그의 손이, 이런 지식과 대비되어 농민의 고개를 더욱 갸웃하게 만들었다.
“쯧쯧쯧. 치국(治國)의 기본은 치민(治民)이요, 민(民)의 본(本)은 농(農)이니. 노부가 어찌 가축에 대해 모르겠는가?”
!!
그제야.
농민의. 아니, 농민이라 보였던 사내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노인이 알 거라곤. 사내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몇 군데를 더 부러트려 보고 답이 없거든, 죽이거라.”
노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 탁!
하고 닫히는 마차 문의 소리 뒤로,
- 콰직! 콰직!
하는 소리와
“끄아아아악!”
하는 소리가 몇 번을 더 들리고 나서야 무인이 노인을 찾아온다.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어차피 흑시창 말고는 내 뒤를 캘 놈들도 없으니.”
“연왕(燕王)이나 강왕(康王) 쪽 인물은 아닐지요?”
“클클클. 어리석은 황족들 말이더냐? 놈들은 이 정도로 뒤를 쫓을 그릇도 안 되느니라.”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도 달라붙은 모양입니다.”
이미 북경을 나서기 전에 붙은 흑시창의 감시조는 모두 처리했던 이들이다. 헌데도 점점 북경이 가까워지자. 흑시창의 감시망이 다시금 이들을 둘러싸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륜···. 주인을 잃은 개새끼가 어찌 다시 이빨을 보이는고?”
“한동안 물러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그렇지. 감시조 외에는 모두 거뒀었으니. 놈에게 새 주인이 생긴 것인가?”
“쫓아 보겠습니다.”
“끌끌끌. 쓸데없는 짓. 모기를 쫓는다고 모기집이 나온다더냐? 두거라. 모기는 불러서 잡으면 그만이니.”
“······.”
노인의 말에 한 번도 대답하지 않은 적이 없던 무인이다. 허나, 자신의 힘으로 힘들 거라는 노인의 말에는 쉬이 답이 나오지 않는 무인이기도 했다.
“자존심이 상하더냐? 불견무영(不見無影)이라 하지 않더냐? 그런 놈을 쫓지 못하는 건 네 능력이 모자람이 아니니 상심치 말거라.”
“···예, 대인.”
무인은 애써 고개를 당기며 노인에게 대답했다. 조금은 꽉 깨물린 그의 어금니가, 턱 근육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가자꾸나. 중경에서. 또 감숙에서 날아올 소식이 기다려지니. 방에서 편안히 듣고 싶음이야.”
“예, 대인. 서두르겠습니다.”
노인을 태운 마차가 다시금 움직일 준비를 마친다. 이제 길을 떠나려는 걸까. 마부와 무인이 준비를 마치려 할 때.
- 드르륵.
“철환아.”
“예, 대인.”
“저놈이 흑시창이라면···, 행적이 쫓길 수도 있겠구나.”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우거라. 흐음···. 산적. 아니지, 화전민. 그래, 옳다. 흉년으로 일어난 화전민으로 하자꾸나. 놈도 거기에 휘말린 거로 해두고. 무공을 모른다 했으니.”
노인은 그 말만 남기고 다시금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굴러가는 마차의 바퀴 위로 둥그런 태양이 떠오른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 서쪽으로 조금 기운 태양.
처음 올 때와는 다른 점이 없다.
아, 뒤에서 따르던 무인이 잠시 왔던 길로 돌아갔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것 외에는.
붉은 노을이 논길에 나린다.
마치, 피처럼 진한 붉은 빛이.
얼마 후, 북경 근처 마을에 화적으로 변한 화전민으로 인한 몰살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 때문에 한림원의 수보, 조숭이 크게 슬퍼했다는 소식이 북경의 백성들을 감동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