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저들이 노리는 곳.
무림맹이 움직였다.
제법 강호를 크게 울리는 이 말은 무겁게 중원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림맹이 기치를 올린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행보이기에 더욱 중원의 관심이 무림맹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맹에 가입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맹의 저력을 엿볼 기회일 것이고, 맹에 가입한 이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에 당위성을 실어 줄 그런 기회일 것이다.
서역이라는 공적을 내세우며 무림맹을 만든 이들이지만, 눈앞에 적이 없는 와중에는 이런저런 말들도 많았다.
서역에 생겼다는 그 세력이 실존하냐는 의문부터, 소림과 화산, 무당과 남궁, 당문과 공동이 서로 입을 맞춰 이를 지어냈다는 음모까지.
그중에는 공동이라는 말석에 가까운 문파를 앞줄에 내세워 소림을 비롯한 다른 문파들이 무림맹을 뒤에서 지배하려 한다는 막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당장에 무림맹이 무어라도 하지 않는다면.
이런 반응들이 심해질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마침 이런 시점에 사파가 적절히 움직여 주다니.
서역과 충돌 전에 뒤를 깔끔히 해두고 싶었던 무림맹은 사파들이 회합한다는 그 소식을 놓치지 않았다.
실리는 충분하다. 집을 나서기 전 뒷마당을 치울 필요가 있고 무림맹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타당성 역시 필요하다.
이제 남은 건 명분.
정파가 사파를 침에 무슨 명분이 필요하겠냐만, 그래도 정파는 정파다.
사파가 이유 없이 정파와 민중을 헤쳐서 사파라면, 정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분 아래에서만 사파인을 토벌하기에 정파라 불린다는 말이다.
무림맹의 명분은 무엇일까. 평소라면 제법 멋들어진 명분을 내세우며 저들을 향해 단죄의 칼을 겨눴을 정파지만.
지금의 무림맹은 다르다.
무림맹은 자신들의 실리를 그대로 명분으로 삼았다. 서역에 대한 대비를 위해 뒤에 적을 두지 않겠다는 다소 세속적인 그런 명분을 말이다.
그게 지금 무림맹의 ‘중추’인 공동의 방식이니까.
“오늘 검토하실 정보들입니다.”
섬서에서 중경으로 향하는 길목인 평리.
사천과 섬서, 호북과 중경을 이어주는 삼성협(三省峽)의 바로 옆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에 무림맹은 자리를 잡고 사파인의 동향을 살피고 있다.
“흠, 확실히 난주에 있을 때보다는 개방이 역할을 잘 해주는 거 같네.”
“아무래도 가까이 있으면 노개께서 활동하시기 편하니까요.”
정문은 자신을 향해 오늘 검토해야 할 정보를 건네주는 진명과 사풍을 보며 말을 건넨다. 고개는 들지 않는다. 봐야 할 서류가 정문에게도 넘쳐나니까.
이상한 장면이다. 아무리 명성이 뛰어난 고수라 한들, 이립도 되지 않는 무인에게 이렇게 많은 사무가 몰리는 일은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미 무정검 이정문이라는 인물이 맹 내에서 가지는 입지는 이 정도의 사무를 처리하며 검토하기에는 충분한 입지였기에 모두가 그를 믿고 사무를 맡겼다.
“우선 저들이 전부 남녕(南寧)으로 모이고 있다는 것만 확실한 상황이라는군요. 만해문이 어제 남녕에 도착했고 나머지들 역시 남녕 쪽을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녕이면···, 삼성협 바로 코앞이군요.”
“흠···, 그렇지. 사천련의 본부가 있었다곤 해도···, 제법 용감한 결정이네.”
남녕은 삼성협이라는 협곡만 넘으면 곧장 정파의 영역에 닿을 수 있는 중경의 성도였다. 그런 곳에 사천련이라는 거대한 단체가 완성된 후라면 몰라도, 아직 결성도 전에 모이는 이들의 속내가 제법 대담하다.
“병력은 어떻다드냐?”
“그게 말입니다만···”
일은 좋게 대화로 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에 저들이 끌고 온 병력에 비해 우리의 병력이 많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무림맹의 준비는 적지 않다. 당문과 종남, 화산과 무당이 움직였는데, 어찌 준비가 부족하겠나.
하지만.
사제들의 반응이 조금.
미적지근하다.
“···많냐?”
“무, 물론 아직 전부 파악된 건 아니란 말이 있습니다만···, 남녕 뒤쪽으로는 진입을 못 하고 있기도 하고···”
“편히 말하거라. 듣고 판단은 내가 할 테니.”
“······.”
무언가.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정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지 못하는 진명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생각보다··· 많은가?”
정문은 어물쩡거리는 진명에게 재차 물음을 던진다.
“···그게 아닙니다.”
“허면?”
“···생각보다, 적은 수라는군요.”
!
생각보다 적다라.
당장에 자신들을 향해 밀고 올 수 있는 무림맹을 앞에 두고 저들은 적은 병력을 몰고 왔다고 한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당장에 무림맹만 상대하는 거라면, 상대가 정파이기에 자신들이 먼저 칠 생각만 없다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저들은 사파인이다.
정문은 그 점에 주목하려 한다.
‘자신들끼리도 세를 겨루지 않는단 말인가?’
사파인들끼리 알력은 온전히 그들 본연의 무력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회합의 자리에 더 많은 머릿수와 더 많은 고수를 데려올수록.
사천련이라는 단체 속에서 발언권이 커지는 곳이 사파임을 모르는 정문이 아니었다.
“아직 다 밝혀진 게 아니고 개방의 형제들이 남녕 뒤쪽까지 곧 진출할 수 있을 거라니··· 기다려 보는 것이···.”
이미 사파 내에서는 서열이 정해진 건 아닐까. 정문은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기로 한다.
저들 사이의 알력이 정리되었고 저들이 이곳에 모이는 것이 그저 형식적인 행동의 일부라면.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도 조금은 이치에 맞을 수 있으니까.
“병력이 제일 적은 곳은 어디라더냐?”
진명은 어물쩡거리며 눈치를 보던 태도에서 밝은 표정으로 바뀌며 정문의 말에 반색했다. 아마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그런 주제가 나온 모양이다.
“만해문이랍니다.”
“일전에는 만해문이 가장 많이 움직였다고···?”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만해문이 가장 적고 나머지는 엇비슷한 수라고 적혀 있습니다.”
‘착오라···’
과연 진짜 착오일까. 정문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보에 착오가 있는 경우는 많다. 다만, 그 착오란 것이, 많다거나 적다는 말에는 잘 끼지 않기 때문에 정문은 조금 의아해하고 있다.
찝찝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이번 일의 경우에는 더더욱.
정보가 적다는 상황 속에서 너무도 좋은 시기에 너무도 필요했던 움직임이 무림맹을 맞았다.
마치.
무림맹이 이렇게 행동해주기를 바라듯이 말이다.
자신 역시 적당한 시기에 찾아온 적당한 소식에 적당히 반응했던 정문이고.
헌데, 이러한 적당한 연쇄들이 계속되고 그 속에서 의아한 점들이 겹쳐지기 시작하자.
정문은 점점.
뒤를 한 번 돌아, 무언가를 다시 살펴봐야 함을 느끼고 있었다.
‘과민 반응일까···’
과민한 반응일 수도 있다. 당장에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사파에는 이 정도의 흉계를 꾸밀 인물이 없다는 것.
정문은 그 역시 잘 알고 있기에 이번 일을 쉬이 처리했다. 당금 사파에서 이 정도로 시기를 읽고 무림맹이 원하는 것을 알고 던져 줄 인물은. 없으니까.
‘그럼 누가···’
바로 머리를 스치는 건 서역이다. 이미 청해의 사파를 회유하려 했던 그들인만큼, 강남까지 손을 뻗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정문은 이내 서역이라는 생각은 머리에서 지우기로 했다. 서역이 정말로 강남 사파의 배후라면. 병력을 모아 지금 바로 교전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 더 이득일 것이다.
‘우선 상황부터 다시 봐야겠군.’
우선은 다른 걸 먼저 살펴야 한다. 정문은 그런 생각에 배후에 대한 의심을 지우고 지금의 상황을 처음부터 다시 살피기로 한다.
“맹 내에서 회의나 내가 움직여야 할 일이 있느냐?”
“지금은 없습니다, 사형.”
“바쁠 게 없는 지금입니다. 저들의 움직임도 없고···, 그저 대치만 계속되는 상황이니. 혹여 필요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흠···. 아무래도 일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봐야겠다.”
“처음부터 말입니까?”
“전부···?”
일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겠다는 말에 진명과 사풍은 경악하며 정문의 얼굴을 바라본다. 진중함이 가득한 정문의 표정이 이들을 맞이한다.
사형의 저 표정은.
아무도 말릴 수 없음을 잘 아는 사제들이다.
“하. 정말 일을 사서 하시는군요.”
“흥. 제값에 주고 사는 법이 없지.”
“뭘 도우면 되겠습니까?”
“우선, 진명.”
“예, 사형.”
“지도. 강남과 강북, 감숙이 전부 그려진 지도를 구해오거라. 문파와 맹의 연락소가 기록되어 있으면 더 좋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사풍.”
“말씀하십쇼.”
“사파의 움직임이 최초로 보고된 정보부터 오늘 들어온 것까지 전부. 이 방으로 모아두거라. 개방에 내가 원한다고 하면 전부 건네줄 것이니,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야 한다. 특히나 내게 보고되지 않은 거라면 더더욱. 사소한 것까지.”
“전부 다 말씀입니까?”
“전부, 다.”
“···예, 사형.”
정문의 명을 하달받은 사제들이 서둘러 방을 빠져나간다. 지도와 자료. 머릿속에는 전부 들어 있는 것들이다. 정문의 기억력이 이를 담지 못할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놓친 것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들. 자신의 기억력 속에서 의도적으로 지운 것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절대 기억력으로 불러오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해서 정문은 일을 빠짐없이 처음부터 다시 살피기 위해 모든 자료를 주문했다.
일이 찝찝하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다. 그럴 때는.
처음부터 다시 살피는 것이, 정문의 오랜 방식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양손에 지도와 서류 뭉치를 든 진명과 사풍이 정문의 방으로 들어선다.
빠르게 준비를 해주는 사제들. 정문은 그저 가득찬 머리를 비우고, 지금의 시선을 빼버린 채, 일을 처음부터 다시 살피기로 한다.
“나가 있겠습니다.”
“응. 부탁 좀 할게.”
준비가 끝나자, 사제들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워준다. 정문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는 것이다.
고요한 정적이 정문이 있는 방을 채운다.
집중하기 딱 좋은 환경.
정문은 각 문파의 위치와 무림맹의 연락소가 있는 지도를 펼쳐두고 자료를 처음부터 검토하기 시작했다.
‘처음 소식이 들려온 것이 보름 전. 이들이 움직인 건 그보다 열흘···’
정보가 닿은 시기부터, 움직인 시기, 그리고 풍문이 돈 시기, 정보를 입수한 시기까지.
정문은 위치와 시간, 그리고 무림맹의 움직임까지 되짚어가며 이를 검토한다.
지도에 그려진 무당과 종남, 화산과 당문의 병력을 조금은 옆으로 옮겨보는 정문.
그렇게 지도를 보던 정문의 시선이. 장강 이남에 닿는다.
강서성.
호북과 안휘, 절강과 면을 맞대고 있으며 강남의 수문과도 같은 그곳에 말이다.
강서에는 작은 장원 모양의 그림과 함께 ‘만해문’이란 글자가 적혀있다.
‘만해문···. 분명 제일 많은 병력이 움직였다는 소식이 보름 전에···’
조금 전 진명은 오늘치 보고서를 읽으며 만해문이 어제야 남녕에 닿았다는 말을 전했다.
강서가 멀기는 하지만, 보름이나 걸리진 않을 거리. 거기에 이미 움직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는 말은, 그 전에 행동을 개시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적어도 스무날에서 한 달 정도 전에는. 만해문이 강서를 벗어났었다는 말이 된다.
정문은 지도에서 거둔 시선을 보고서에 던진다. 분명 자정의 책상에서 읽었던 그 서류로.
정문이 손에 든 서류에는,
- 만해문의 무사 ‘다수’가 움직임.
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다수(多數)라.
정보를 다루는 이가, 그것도 현장에서 글을 써 올릴 이가 다수라는 말을 선택할 때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이를 썼을까.
정말 자신이 느끼기에 소수(小數)가 아니란 숫자. 적지 않다고 느낄 그런 머릿수를 보고야 이런 단어를 택하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정문은 방금 진명이 읽었던 서류 중 남녕에 있는 무인들의 수를 기록한 서류를 들어 올린다.
- 많지 않은 무인들이 남녕을 채움. 이는 모든 문파가 같음. 만해문이 적어 보임.
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말은. 수를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는 뜻. 확연히 앞선 보고와는 수를 다루는 어투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보고다.
분명.
강서에서 중경으로 향하며 이탈한 무인들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어디로···?’
시간은 이들이 곧장 목적지로 달렸다는 가정하에 스무날에서 한 달의 여유가 있었다. 강서에서 무인의 달림으로 한 달이면 닿는 곳을 살펴보는 정문.
운남일까.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운남까지는 한 달이 조금 넘게 걸리니까. 허면, 같은 강남 내의 귀주? 무슨 이유로? 이득이 없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에는.
그렇다면.
이들이 강북으로 향했을 수도 있다는 뜻인데.
강서는 안휘와 절강, 그리고 섬서로 둘러싸인 강남 지역이다. 이들이 강서를 벗어나 강북으로 향한다면, 강북 내에 있는 정파인들의 눈에 걸리고 말 거란 뜻이다.
‘남궁이나 무당이 잡아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 생각으로 이번 가정 역시 정문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할 때.
- 쉬익!
정문의 머리로 무언가, 한 줄기의 빛이 스치고 만다.
손을 올려 자신의 앞머리를 움켜쥐는 정문. 손에 제법 힘이 들어가, 가볍게 떨려오는 중이다.
‘설마···?’
이것 때문에 중경으로 모인 것인가. 그런 생각이 정문을 스친다.
이제야.
조금은 머리가 비워지며 지난 일들이 정리되기 시작하는 정문.
무림맹은 사파인들이 중경으로 몰린다는 말에 중경 주변의 성에 연통을 넣어 문파들을 움직였다.
대표적으로 움직인 문파들이 호북의 무당이며 섬서의 종남과 화산, 그리고 사천의 당문이다.
지금 이 그림을 그리는 이가 정녕 그리고 싶었던 그림은 아마.
무당과 종남, 화산이 각 성의 중심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경계로 병력을 보내 내부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게 분명했다.
정문이 지도 위 만해문에 붓을 찍는다. 그대로 무당산을 향해 직선을 그리는 정문. 조금은 돌아간다 치더라도, 이를 지나쳐 섬서로 가면 화산에 닿는다. 화산 역시 지나치는 정문. 화산도 이미 경계로 병력을 옮겼으니까.
가는 길에는 서안의 옆을 지난다. 하지만, 괜찮다. 종남 역시 서안의 종남산을 비웠으니까.
그렇다면.
여기 모인 이들 중 사천의 당문과 무림맹만이 남는데, 이들 중 하나는 허초일 것이다.
주변 문파들의 연관성과 위치를 봤을 때 허초일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은 사천의 당문.
정문은 무심하게 당문에 줄을 두 줄 그으며 이를 시선에서 밀어낸다.
그렇다면. 이제 한 곳이 남는데, 이는 감숙성의 무림맹이다.
이들은 빈 무림맹을 노리려 한 것일까.
정문은 그 생각 역시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 지워버렸다. 무림맹의 본진은 현재 무사도, 중진도 상주하고 있지 않다. 이미 병력은 이곳과 돈황으로 나뉘어 방비를 시키고 있으니까.
저들이 굳이 무림맹을 무너트려도.
건물을 무너트린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림맹의 무사들을 빼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주변에 있는 어딘가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는 것.
정문의 결론은 그거였다.
“이···, 이 미친놈들이···?”
정문의 붓이 섬서에서 조금. 아주 조금 더 위로 올라간다. 감숙 내에서도 옆으로 조금 기울어진 남감숙에 위치한 작은 도시.
공동산이 있는, 평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