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는 공동을 무시하지 마라-133화 (133/153)

133. 북경의 사정.

“무림맹이 중경으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책상에 앉아 서류에 몰두하는 한 노인에게 건장한 체격의 무인이 보고를 올린다. 무인의 얼굴에는 말을 꺼내는 것이 힘들다는 표정이 잔뜩 지어져 있다.

- 스윽.

보고를 듣던 노인의 붓이 멈춘다. 고개도 들지 않고 서류를 누비던 붓이 잠시간 멈춘 것이다. 붓은 이내 다시 자신의 길을 찾아 획을 그린다.

“제법 무정한 놈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래. 평량으로 향했다는 사파인들은?”

“···대인.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실패했다고 합니다.”

무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보고를 마저 뱉었다. 어차피 뱉어야 할 말이라면, 얼른 뱉는 것이 속이 시원할 것이다.

“실패라···?”

“금의위 위사들을 포함, 공동산에 오른 무리들이 모두 추포되었다고 합니다.”

노인의 붓은 이번에는 멈추지 않는다. 제법 동요가 올 법도 한 보고임에도 아무런 미동도 없이, 여전히 글을 써가는 노인의 붓이다.

“그래···. 전(前) 금의위 위사들이 포함된 사파인들이 토벌되었다는 말이지?”

“······.”

“중경에서 작당 모의하던 사파인들 역시 토벌되었다니, 백성들의 홍복이구나.”

노인은 마치 이번에 있었던 일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말을 뱉는다.

늘 이런 식이다.

일이 형통하면 모두 자신의 공이고, 이번처럼 일이 어긋나면, 이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

이게 바로, 수보 조숭의 방식이다.

무인이 노인의 눈치를 살핀다. 별다른 변화가 없는 표정으로 사무에 열중하는 노인. 제법 공들인 일이 실패했다.

말이야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 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다른 이야기. 분명 속이 뒤틀리고 기분이 상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노인의 표정과 움직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노인이다.

- 탁.

노인이 붓을 내려놓는다. 올라가는 노인의 고개. 그의 눈이 보고를 올리던, 무인과 마주하자 이내 씁쓸한 웃음이 자리한다.

“해도···, 영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구나.”

“···요즘 들어 일이 잘 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감숙과 관련된 일이···”

“그래, 감숙. 감숙이 늘 문제구나···.”

“이러다 신궁이라는 자들이 중원까지 닿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무인은 신궁이라는 말을 꺼내 앞으로 있을 일에 난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투로 말을 이어간다. 일전에 노인과 함께 서역에 다녀온 무인이기에 앞으로 있을 일을 대략은 알고 있다.

“철환아.”

“예, 대인.”

“서역이라는 놈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오나···”

많은 공을 들였지 않나. 무거운 당신의 발이 그곳까지 향했었고, 또 그들을 지원했던 금자 역시 만만치 않았기에 무인은 무어라 반박하는 말을 뱉고 싶었다.

“놈들을 중원까지 불러들인다는 말 역시 허상이니.”

하지만, 노인은 이제야 철환이라는 믿음직한 심복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려준다.

“그게 무슨···?”

노인은 분명 서역의 세력을 끌어들여 그들을 인정하고 자신의 새로운 지지기반으로 삼을 거란 말을 했었다. 그게 서역의 신궁이라는 자들과의 거래 조건이기도 했었고.

헌데, 이제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조금. 다른 말이다.

“중원까지 부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허면···?”

“옥문관과 양관. 아니지, 그것보다는 조금 더. 그래, 감숙의 중간 정도가 좋겠구나. 거기까지만 그들이 와준다면···”

“그 이상은 불허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클클클. 그래야지. 감히 어디. 더러운 이민족이 중원에 발을 붙이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이더냐?”

“감숙에 그들이 머문다면···, 반발하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당장에 무림맹도 감숙에 있고 공동파도 감숙에 있다. 아니, 다 떠나서. 더 큰 인물이 감숙에 연고를 두고 있음을 철환은 말하고 싶었다.

“둔다라? 누가 둔다더냐?”

!!

“설마···?”

“글쎄···,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으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슬쩍 뒷짐을 하며 앞으로 나오는 노인. 철환은 노인이 자리에 둔 붓을 살펴본다.

아무렇지 않게 노인이 쥐고 글을 휘갈기던 붓. 그 붓이 고명하게 두 조각으로, 동강이 나 있다.

“서역의 폭도들이 감숙에 들어 온다면···, 북경의 황군이 나설 수밖에 없겠지.”

!!

“대인···! 안왕(安王)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철환은 황군이 감숙으로 들어온 서역의 무리를 토벌하겠다는 말을 듣자, 서둘러 안왕이라는 이름을 꺼낸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듣자, 크게 일그러지는 노인의 얼굴. 노인이 이렇게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는 일은. 쉬이 있는 일이 아니다.

“안왕···, 안왕이라.”

안왕(安王).

황실은 수많은 종친을 두고 있다. 직계부터 시작해서 방계까지 황실이 먹여 살려야만 하는 종친의 수가 세금의 반절을 차지하는 때도 있었다고 하니, 그 수가 얼마인지는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수많은 종친 중에서도 ‘왕’의 칭호를 하사받는 이들은 상당히 드물었는데, 그 번왕(藩王)들은 크게 친왕과 군왕의 두 작위로 나누어져 있었다.

황제에게 직접 왕의 직위를 하사받는 이가 바로 친왕. 친왕은 이를 하사한 황제의 권한이 얼마나 강한가에 따라 그의 권력이 결정되곤 한다.

지금 이들이 말하는 안왕은 바로 이 친왕에 해당하는 인물로, 현 황제의 숙부이자, 전 황제의 동생 되는 인물이다.

선대 황제는 지금의 황제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수보 조숭을 믿고 전권을 맡긴 채 향락에 빠진 지금의 황제와는 달리 선군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던 것이 선대 황제.

그런 선대 황제의 황권만큼이나, 친왕인 안왕의 명성은 황궁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에서 흠모받기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안왕이 선대 황제에게 식읍지로 받은 것이 바로, 감숙. 감숙은 친왕이자 선대 황제의 동생, 현 황제의 숙부인 안왕이 왕부를 두고 다스리는 곳이라는 말이다.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황군이 움직이는데···, 왕부에서 이를 막는다? 괘씸한지고. 아···! 아니면···, 그 왕부 역시 반란에 가담했으려나?”

!!

철환은 이제야 저 수보라는 노인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굳이 서역의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이유도, 또 공동을 이번에 처리하려 했던 이유도.

이제야 명확해지는 것이다.

감숙을 영지로 둔 안왕은 몇 년 사이 그 세력을 크게 키웠다. 이전에도 번왕들 중 세력을 키워 조숭을 몰아내려는 이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매번 조숭의 손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들이 모두. 황제가 되려 하는 욕심에 가득 찬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왕은 다르다.

그는 욕심이 없다. 그가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세력을 키우는 이유도, 또 조숭을 몰아내려는 이유도. 모두.

그저 무너진 황권을 다시 세우고 선대 황제의 아들인 현 황제를 바로 잡기 위한 것. 그게 전부일 것이다.

누군가는 정치에 있어서 정의를 의미 없는 겉치레라 부를지도 모른다. 허나, 정치의 근간은 어디까지나 민의(民意)에 있다.

정의라는 겉치레가 가증스러워도 안왕처럼 한결같은 인물이라면.

민의가 실리곤 한다는 말이다.

해서 조숭에게 안왕은 특히나 까다로운 인물이다. 어떻게든 그를 처리하고 싶지만, 황족이란 신분과 민의라는 무기를 함께 가진 그를 처리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는 새도 떨어트리고 호통을 치면 천자마저 눈물을 흘린다는 그 조숭에게도.

안왕은 어려운 상대라는 뜻이다.

“······.”

그런 안왕을 조숭은 무림인과 관련된 반란 사건을 통해 엮으려는 것이라, 철환은 알 수 있었다.

관에서 무림인을 처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모반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무인이라는 특성과 단체를 이루는 특성을 모두 합치면, 결국 이는 모반이라는 탈을 쓰기 가장 쉽기 때문이다.

강호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안왕을.

조숭은 이렇게 처리할 계획인 것이다.

“그림은 잘 그려지는 것 같은데···, 어찌 계속해서 날파리가 꼬이는구나.”

“···공동파 말씀이시군요.”

“흠···, 저들이 계속해서 내 계획을 방해하니···, 눈가가 자꾸 찡그려지는 것도 사실이니.”

신궁의 행보를 하나씩 방해하며 조숭의 계획을 망친 건 늘 공동이었다.

달뢰라마를 서장으로 보내 서역이 서장과 전쟁을 하게 만들었으며, 또 무림맹이라는 걸 만들어 서역의 무혈입성을 막아냈다.

이제는 그들을 향해 던진 공격에 대한 방어까지.

이상하게도 자꾸만 얽히고 있되, 그 상황이 좋지 않은 공동과 조숭의 지금이다.

“우선은 지켜보자꾸나. 저들이 또 어떻게 움직일지···. 또 서역에 한 번 더 독촉하는 서신을 보내도록 하거라. 뒤가 비어버린 무림맹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

“예, 대인. 그리하겠습니다.”

철환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선다. 주변을 살피며 혹시 이야기를 엿들은 이는 없는지 보는 철환.

그저 조숭의 집무실 근처에는.

귀가 먹은 시비들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시비들은 철환이 나왔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각자가 맡은 일에만 열중한다. 새어나가는 말이 없게 하기 위한 조숭의 조금은 사악한 취미일 것이다.

‘너무 큰 이야기를 들었군.’

철환은 그저 들은 말이 커서 괜히 예민하게 구는 거라, 그렇게 생각하며 조숭의 집무실을 떠났다.

* * *

- 스스스슷.

늦은 밤.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도 남을 대도시 북경에도 밤은 찾아와 달빛만이 거리를 비추는 시간.

수보 조숭의 집무실에서 일을 보는 시비가 빠르게 밤거리를 뛰어간다. 연신 주변을 살피는 그의 모습이, 영락없는 세작(細作)의 모습이다.

아쉽게도 시비의 달음박질에서 무공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무공을 배우지 못한, 그저 평범한 세작이 그의 신분, 전부일 것이다.

이미 조숭의 집에서 일하게 된 지 오 년이 넘었다는 이조차 세작일 정도로. 조숭의 곁에는 아군보다 적이 많은 현실이다.

분명 조숭의 집에서 일하는 시비들은 모두 귀가 먹은 이들이었다. 헌데, 조금 이상하게도,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달려가는 저 시비의 표정이 의미심장하다.

마치,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 작은 소리에도 금방 반응할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다.

어쩌면.

귀가 먹은 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시비는 밤거리에서 누군가를 마주한다. 잠시 스치는 둘. 아무런 대화도, 아무런 주고받음도 없었지만, 둘을 지켜보던 시선은 이내 시비에서 그와 스친 사람에게로 옮겨 간다.

아주 잠시지만. 무언가 작은 종이가 둘의 품에서 옮겨지는 것을 목격한 탓이다.

시비에게 종이를 받은 인물은 평범한 상인으로 보인다. 그런 상인 역시 배회하듯 한밤중의 북경을 이상하게 떠돌긴 마찬가지.

아마 따라붙은 이가 없나 확인하는 거라, 쫓는 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하게 뒤를 따라붙었다.

상인은 시비가 했던 것과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거리를 헤매다 또 다른 누군가와 스치며 종이를 전달했고, 전달받은 이 역시 상인과 시비가 했던 것과 같은 짓을 또 반복했다.

철저하게 숨기기 위한, 저들 나름의 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한 종이가 몇 사람의 손을 탔을까. 마지막으로 점소이 정도로 보이는 삐쩍 마른 사람의 손으로 간 종이는 이내 또 다른 주인을 맞이한다.

한참을 떠돌던 점소이가.

북경의 연못가 근처에서, 어울리지 않는 복장의 한 여인을 마주했다.

여인의 행색은 기루의 기녀처럼 보였다. 흑색 의복에 금색으로 수를 놓아 누가 보아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의복을 입은 여인.

면포로 얼굴을 전부 가렸음에도 앵두 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입술이 멀리서도 유독 도드라지는 밤이다.

계속해서 조심히 옮겨지던 종이는 이제 대놓고 점소이의 품에서 여인에게로 향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는 저들의 안일함이.

뒤를 쫓는 이들에게 미소로 발한다.

점소이는 여인에게 종이를 건네고는 고개까지 한 번 읍한다. 아마, 제법 높은 여인일 거라. 그렇게 생각하는 추적자들이다.

‘과연 근본은 근본인가···’

지금 이들이 쫓는 이들은 점소이와 기생이 근본이 된 단체다.

마지막이 점소이와 기녀라니.

참으로 식상한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종이를 건네받은 여인의 걸음이 움직인다. 뒤를 쫓던 이들은 이내 신호를 주고받으며 여러 준비를 마친다.

병장기를 살짝 품에 품은 그들의 모습이 꽤 살벌하다.

여인은 도시를 배회하지 않았다. 여인의 몸으로, 기생의 복장을 하고 밤중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오히려 수상할 테니까.

그대로 목적지를 향하던 여인.

그런 여인의 발이, 으리으리한 한 장원에 닿는다.

이윽고 여인은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대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북경의 조금 외곽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장원. 마치 주인을 누구나 알 것만 같아 정체를 숨기는 이는 절대 숨을 리가 없어 보여 더욱 숨기 좋아 보이는 그런 장원으로.

그리고 여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모습을 나타내는 몇 개의 그림자들.

- 스스슷.

장원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위치만을 확인한 그들이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천검(天劍)께 보고하겠습니다.”

짧은 말을 남기고는 사라지는 한 무인.

남은 무인들은 조용히 장원의 주변을 돌며 빠져나갈 곳은 없나 확인을 거친다.

잠시 후, 모습을 나타내는 호천대주, 천검 철환.

그의 곁으로 기도가 정갈한 금의위의 무사들이 가득하다.

“주변은?”

“빠져나갈 곳이 없습니다. 아무도 나온 놈들 역시 없었습니다.”

“확실히 입술이 도드라진 여인이 맞았느냐?”

“예, 대주. 확실합니다. 아마…, 최근 조륜의 측근으로 부상한 설매가 아닐지….”

보고를 올리는 이는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더해 목격한 현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마치, 이번 보고가 큰 공이 될 것처럼.

“확실하진 않아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다들 준비하거라.”

철환은 그런 부하들에게 일시에 명령을 하달한다. 기도를 가다듬고 병기에 손을 올리는 금의위의 모습이 웅장하다.

“지금부터. 흑시창의 창두, 조륜을 잡는다.”

금의위의 칼날이 장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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