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는 공동을 무시하지 마라-135화 (135/153)

135. 관무불침.

“지원은··· 어렵습니다.”

국경의 관병 주둔지를 찾은 자정과 정문, 그리고 오봉학.

그런 그들을 향해 옥문관과 양관을 책임지는 무장, 양달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고창신궁이라는 곳에 대해서는 본관도 알고는 있습니다만···, 저들이 중원 무림과 갈등을 빚은 것은 사실이나···, 일반 백성들의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들입니다. 관병은 어디까지나 백성의 삶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무림의 알력 때문에 쉬이, 검을 들 수는 없겠지요.”

사실 정문과 자정, 오봉학은 양달을 찾아 인사만 올렸을 뿐이다. 당장에 무림맹의 무사대라는 병력들이 국경 근처까지 올라와 군영을 차렸기에 으레 하는 그런 인사.

그럼에도 양달은 지원을 바란다는 지레짐작으로 술술. 자신의 입장을 내뱉고 있다.

“또, 도울 여유 역시 없습니다. 저들을 토벌하기 위해 관병을 움직이면 사막의 군벌(軍閥)들이 관문을 노리고 올 게 분명합니다. 무림맹이 새외(塞外) 무림과 맞서는 것처럼. 관병 역시 새외(塞外) 군벌과 맞서고 있으니까요.”

딱 여기까지.

양달이라는 무장은 마치 준비한 것처럼 말을 유수같이 쏟아 내었다. 이제는 끝난 걸까, 정문과 자정이 눈치를 보며 슬쩍 입을 열려고 할 때.

- 처억.

“정말 죄송합니다. 허나, 사정이란 것이 있으니···!”

양달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이들에게 사죄의 말을 전한다. 너무도 깊게 숙이는 고개가, 마치 앞서 뱉은 말이 전부 사실인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아쉽게도, 정문은 양달이 뱉어내는 저 이유가 전부 핑계임을 알고 있다. 아니, 전부 핑계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저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관병이 마음만 먹는다면, 고창신궁이라는 이들을 공격할 수 있음을 모르는 정문은 아니다.

안왕부(安王府) 소속 무인은 늘 저렇다.

어떻게든 무림인과 엮이면, 그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아주 잘 아는 군인들. 그게 바로 안왕부 소속의 군인들이니까.

정문이 황궁에서 일할 적에도 안왕은 늘 무림인을 멀리했다. 말이 좋아서 무림인이고 호걸이지, 그 속을 들여다본다면 칼 차고 싸우는 법을 배우며 엄격한 규율로 다스려 단체를 이루는 일종의 사병들이 아닌가. 역모랑 묶기에는 가장 좋은 이들이 바로 무림인들일 것이다.

정치는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

안왕은 무림인과 친하게 지내다 골로 가버린 여러 황족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이들을 부러 멀리하고 있었다.

아마 이들 역시 안왕으로부터 그런 말을 계속해서 들어왔을 것이다. 특히나 국경에 있는 장수라면 더욱 조심해야 할 터.

정문은 이들을 이끄는 안왕이라는 자의 정치적 식견이 얕지 않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

“고개를 드시지요, 양 장군.”

자정이 애써 밝은 표정을 양달을 일으킨다. 애초에 지원을 받겠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던 이들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와중이다.

“마음으로는 무림맹을 응원합니다만···”

“이해합니다. 관무불침(官武不侵)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그저 인사를 드리러 온 자리이니, 부디 부담을 가지지 마시지요.”

“해도···”

단호한 어조로 지원은 없다던 양달 역시 마음에 걸리는 건 있는 모양이다. 무림인을 애써 밀어내는 그에게도, 어쩌면 무림에 대한 동경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조금 도와주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입을 우물거리며 무언가 조금은 불편해하는 양달에게 정문이 먼저 말을 건다. 다른 방식으로 도와달라는, 노골적인 말을.

“다른 방식이라면···?”

“아, 별건 아닙니다. 관병을 빌리거나 그런 게 아닌···, 그저 국경 밖. 무림맹은 국경 밖에 군영을 차렸으면 합니다. 이를 허락해 주실 순 있으시겠는지요?”

국경의 바로 밖은 군사적으로 제법 중요한 땅이다. 언제든 국경을 넘어 국토를 침범할 수 있는 곳이고 또 세작(細作)을 심기에도 좋은 곳.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이었다면, 당장에 경을 치며 내쫓았어도 무방했을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말을 뱉는 이는 다르다. 여기가 어딘가. 여기는 국경이고 관병 주둔지이지만, 크게 본다면 감숙의 땅이다.

감숙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또, 민심이 기우는 곳인 공동파라면. 그리고 그런 공동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무림맹이라면.

딱히 그곳을 내어주어도 뒷말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국경 밖의 일이야···, 가끔은 눈을 감는 장수들도 있으니까요. 그거면 충분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들이 중원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고는 해도, 양 장군의 말씀처럼 어디나 무림 내의 일입니다. 관병이 개입하는 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지요. 무림맹이 해결하겠습니다.”

분명 부탁은 정문이 했고 호의는 양달이 베풀었다. 헌데도 표정과 어투, 그리고 몸짓에서는 정문이 마치 호의를 베푸는 것과 같은 그런 분위기가 풍겨진다.

이게 바로 담판이라.

오봉학은 말없이 웃으며 풍경을 감상한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이 양모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오늘 중으로 회의를 열어 국경 밖을 비우겠습니다. 무림맹에게 일임하는 거로 해두지요.”

“큰 결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양 장군.”

정문에 이어 자정까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한다. 마치 양달이 한 말에 대해 못을 박는 듯한 그런 모습이다.

양달은 오히려 무림맹이 먼저 제의해준 덕에 도움을 줄 수 있어 기뻤는지, 크게 기뻐하며 이들을 배웅했다. 그저 땅을 쓰는 것에 눈을 감는 게 전부이기에 이들과 별다른 구설도 없을 터. 양달로서는 무림맹에 도움도 되고, 자신이 잃는 것도 없는 제법 괜찮은 회담이었을 것이다.

“이거면 정말 되는 것이냐?”

관병의 주둔지를 벗어난 자정이 정문을 향해 말을 묻는다. 이미 회담에 들기 전부터 정문이 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못을 박아둔 덕에 자정 역시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관병이 끼어들어 좋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신궁 역시 다른 군벌에 의존할 수 있습니다, 맹주. 무림 내에서 무림의 방식으로. 저들을 토벌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압니다.”

오봉학 역시 정문과 같은 생각을 가진 건 마찬가지. 뼛속까지 무림인인 그는 관에 손을 벌릴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이다.

아쉽게도 정문은 오봉학처럼 관무불침이니 하는 그런 개념 때문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저 일전에 전해졌던 서신.

흑시창이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안왕부와 무림, 그리고 서역이 얽혀 곧 역모로 몰릴지도 모르기에 정문은 관병과는 거리를 두려 하고 있다.

주둔지에 다녀온 이들이 무림맹 본영에 도착한다. 분주한 무림맹의 본영. 이들이 떠날 때에 비해 더 많은 무인들이 본영 안에 가득하다.

“누가 왔느냐?”

“아, 노개. 후속 부대가 도착했습니다.”

“후속 부대? 어디더냐?”

무림맹의 후발대가 속속들이 돈황에 닿고 있다. 오봉학은 전열을 정리할 생각에 방금 들어온 이들이 어디 소속이냐는 말을 물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오봉학과 자정, 정문의 뒤에서 들려온다.

“무림 최강의 부대! 사천당문의 무사대이올시다!”

묵직하지만 밝은 어투, 그리고 늘 그렇듯 가벼움이 가득한, 당문의 가주, 당천정의 목소리였다.

“당가주.”

“당가주를 뵙습니다.”

“허허허, 다들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맹주. 기다리느라 목이 빠졌습니다. 보이십니까? 늘어난 거?”

오랜만에 만난 당천정은 잔뜩 너스레를 떨며 이들에게 다가선다. 목을 연신 내빼고는 손으로 가리키는 그의 모습이 제법, 가볍다.

“관병 주둔지에 다녀오셨다지요? 어찌,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국경 밖에 군진을 펼쳐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 아마 이번 일에 관은 불개입을 선언할 모양입니다.”

“암요. 무림의 일인데, 당연히 그래야지요. 이참에 관에도 보여줘야 합니다. 다시는 무림을 무시하지 마라! 라고!”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다. 정문은 혹여나 저 인간이 어디서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눈을 흘겼으나, 그랬을 리는 없을 것이다.

“화산과 종남의 무사대 역시 오늘 중으로 돈황에 닿을 겁니다. 질 수 없어서 앞질러 왔더니, 어느새 도착했지 뭡니까! 하하하!”

“허면, 내일이면 일진(一陣)을 이루는 이들이 모두 모이겠군요. 군진을 어디에 둘지 정해진 이상···, 일이 빠르게 진행될 듯합니다.”

“예, 예. 암요. 허허.”

중년들의 대화는 끝이 없는 법이다. 특히나 오랜만에 만났고 대화를 나누는 한쪽 상대방이 퍽이나 가볍다면. 정문은 슬쩍 자리를 피하며 이곳을 겨우 빠져나왔다.

오늘은 크게 할 일이 없다. 회담은 잘 끝났고 군영은 규율로 잘 짜여 있다. 새로운 무사대가 합류했지만, 그들 역시 나름의 규율이 있을 터.

정문이 나서서 무언가를 할 일은 오늘은 더. 없다는 말이다.

정문은 조금 한적한 곳을 찾아가 이내 몸을 내룬다. 응달에 숨어 서쪽의 강한 햇살을 겨우 피하는 정문. 그가 어느 정도 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익숙한 기도가 하나. 정문을 찾아 온다.

“노개.”

“음. 무정검. 여기에 있었나?”

“당가주께는···, 잘 빠져나오셨나 보군요.”

“조금 불충하지만, 맹주님을 볼모 삼아 몸을 빼 왔다네. 용서하시게.”

“하실 말씀이 있군요.”

“표가 나는가?”

제법 한적한 구석이다. 이런 곳까지 자신을 직접 찾아올 정도면 할 말이 있는 것이 분명할 터. 정문은 표가 나냐는 오봉학의 말에 웃음으로 답한다.

“가시지요. 회의입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정문. 힘든 일정이지만, 맡은 일은 해야 하니 정문은 몸을 일으켜 오봉학과 막사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여기서 했으면 하네. 개인적인 일이니.”

오봉학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조금은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이요?”

“흠···, 사실 이 말을 자네에게 전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네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일 때는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도 있더군. 해서 내 한 번 해볼까 함세.”

“사설이···, 제법 기십니다. 무섭게요.”

오봉학은 이런 사람이 아니다. 말끝을 늘리거나 사족을 보태는 그런 사람이.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정문이기에 오봉학이 평소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허면, 내 본론으로 바로 가겠네.”

“하시지요.”

정문은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튕기고는 오봉학의 눈을 바라본다.

“북경에서 소식이 하나 전해져 왔네. 아직 풍문 단계이고 정확한 정보는 아니네만···”

“대게 풍문의 반절 이상은 정보로 가는 법이지요. 적절한 대조와 조사만 있다면.”

“조사를···, 그래. 할 수가 있다면 꼭 해보겠네만.”

오봉학은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걸까. 딱히 그리 중한 말도 아닌 것 같은데, 계속해서 말을 끄는 그를 보며 정문은 조금 눈을 꿈틀거렸다.

“···흑시창이 말일세.”

!!

“···예?”

그리고 열리는 오봉학의 입에서는 흑시창이라는 말이 나왔다. 다른 사람의 입이었다면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개방이라는 곳이. 흑시창과 대척점에 있는 곳이 아니고 또 그런 곳의 장로가 오봉학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오봉학은 이미 정문과 흑시창이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게 어느 깊이인지는 모르지만, 딱히 이를 따지지 않기로 했던 것이 오봉학.

그런 오봉학이 다시금 흑시창의 이야기를 꺼내자, 정문은 조금 당황한다.

“혹, 충돌이 있었습니까?”

오봉학은 분명 북경에서 소식이 왔다고 말을 전했다. 조륜 역시 지금 북경에 있을 터. 정문은 처음에는 흑시창과 개방의 충돌을 예상했다.

“그건 아니네. 아무런 충돌도 없고···, 오히려 요즘은 서로가 편의를 봐주는 정도였지.”

확실히 정문과 가까워지고 난 뒤부터는 흑시창이 개방에 대한 방해를 전혀 하지 않았다. 정보를 수집함에 있어서는 이는 어마어마한 이득.

오봉학은 흑시창이 개방과 대립에서 손을 뗀 것이 자신이 공동과 가까워졌을 무렵임을 모르지 않았다.

아마 정문은.

흑시창과 깊게.

그리고 제법 긴밀하게.

관련이 있을 거라, 홀로 그리 생각하며.

오봉학이 정문의 얼굴을 바라본다. 마치 꺼내려는 말이 제법 무거운 듯 숨을 한 번 들이마시는 오봉학. 그의 입이 무겁게 열린다.

“흑시창의 본부가··· 궤멸 되었다는 소식이 있네.”

!!

정문의 어깨가 크게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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