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고창신궁.
“이게 무슨 소리냐!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하는 게야!”
걸걸하면서도 거친, 그리고 노기를 잔뜩 담은 목청이 잔뜩 사치스러운 장원의 담벼락을 넘는다. 수보라 불리는 한림원 대학사의 장원, 담벼락이다.
“대, 대인···”
그를 보좌하는 학사들이 당황하며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서는 조숭의 호위무사, 철환. 천검(天劍)이라 불리는 천하제일검은, 조숭의 목청에도 아무런 떨림이 없다.
- 와장창!
깨어지는 집기들.
조숭은 잔뜩 노기를 나타낸 얼굴로 손에 잡히는 걸 허공에 던지고 본다.
감정을 절제하고 잘 표현하지 않는 그에게 있어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대인. 왜 그러십니까?”
몸을 위축한 학사들의 곁으로 다가서는 철환. 철환은 조숭이 저리 화를 내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처, 천검대주···, 대인께서 지금 기분이···”
“모두 꺼지거라! 당장! 이런 쓸모없는 것들!”
무어라 변명을 하기도 전에.
조숭은 다른 학사들을 얼른 퇴청시킨다.
더는 꼴도 보기 싫다는 표정이, 조숭의 얼굴에 역력하다.
“대인. 진정하시지요.”
믿음직한 충복의 등장 덕분일까. 조숭은 화를 겨우 누르며 자리에 몸을 앉힌다. 붉어진 그의 얼굴이, 노년의 모습과 합쳐져 조금은 위태해 보인다.
“후우우우. 힘들구나.”
“어찌 그러십니까, 대인?”
“무림맹이···, 국경 밖으로 나갔다는구나.”
!
“국경···, 밖으로 말씀입니까?”
철환은 일전에 조숭이 안왕을 처리하기 위해 세우고 있는 계획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의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서역의 신궁 세력이, 무사히 감숙 지역 안까지 들어와야 할 것이다.
“일이 처음부터 꼬인 게야. 달뢰라마가 무사히 서장으로 간 것 하며···, 중경에서 일이 실패한 것까지.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이렇게 서역의 발목을 잡는구나.”
“···그렇지 않아도 서역에서 전해진 서신을 가져오는 길입니다.”
“뭐라더냐?”
“···무림맹과 교전에 나설 수는 있으나 적극적인 진격은 어렵다고···”
- 휘이이익!
- 쨍그랑-!
철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숭은 옆에 두었던 벼루를 집어 던져 벽이 박살 나고 만다. 아무런 무공을 익히지 않은 노인의 몸이지만, 제법 노기를 담을 줄은 아는 모양이다.
“이 배은망덕한 놈들이!”
“방금 전쟁을 끝낸 이들입니다. 조금은 무리가 있는 것이···”
이제야 서장과 전쟁이 끝나가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곧바로 다른 전쟁에 투입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 그럼에도 조숭은 자신의 입장만을 바라보며, 답답함을 표하고 있다.
“후우우우. 그놈만 있었어도 일이 이렇게 복잡해지진 않았을 것을···”
“강 학위사···, 말씀입니까?”
거칠게 고개를 젖히며 몸을 눕히듯 앉은 조숭의 입에서 그리운 이름이 나온다. 일이 이렇게 꼬여갈 때면, 늘 생각나는 이름이 바로 강찬이다.
“건방진 놈이었지. 허나, 그만큼···, 일을 잘하기도 했고.”
“······.”
철환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조숭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 그립다는 이름을 제 손으로 치운 사람이 바로 저 조숭이 아닌가.
자신이 보내버린 사람의 이름을 저리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니.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지만, 저런 모습은 영 불편한 철환이다.
“흑시창은 확실히 치웠느냐?”
“본부를 습격했고···, 거기에 있는 모두를 죽였습니다. 허나···, 조륜이 죽었는지는···”
“그래, 알 수가 없겠지. 조륜이라는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니. 이 또한 찬아가 떠오르는 일이로다.”
“허나, 흑시창의 본부가 분명했고, 모두를 처리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래···, 네가 있어서 그래도 한시름을 더는구나. 못해도 북경에서 흑시창의 씨는 말랐을 터이니.”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숭은 철환의 일 처리를 제법 믿는 듯, 흑시창의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한다.
“···안왕(安王) 쪽 움직임은 어떻더냐?”
“현재로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감감무소식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입니다.”
“무소식이라···?”
분명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아군의 상황을 말할 때나 쓰일 법한 말. 적에 대해서는, 무소식이. 가장 무서운 것임을 조숭은 모르지 않았다.
“금의위 정보부가 제대로 붙어서 감시하고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안왕부에는 이들을 따돌릴 이들이 없습니다. 정보를 지우려면 금의위 이상 가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만···”
그런 이들은 더는 북경에 없다. 철환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일전부터 개방이 안왕부에 줄을 대려던 움직임은 있었느니라. 혹여 개방이 뒤를 봐줄 가능성은?”
“개방은 감히 금의위 정보부에 비견할 실력이 되지 못합니다. 흑시창이면 몰라도···, 개방은 금의위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개방은 정도의 방식에 따르는 협의지문을 표방한다. 그런 이들이 은밀함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금의위와 흑시창을 앞설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만약 안왕이 행적을 지우고 있다면 이는 흑시창의 도움일 것인데, 흑시창은 방금 철환의 손으로 쓸어 버렸다는 보고를 마치지 않았나.
“걱정 마시지요. 저들은 정말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일 테니.”
“흠. 그렇겠구나. 다행인고로.”
같은 말을 몇 번을 더 물어 확인한다. 그게 조숭의 방식. 이런 방식 덕에 그가 여태까지 지상 최대의 흑도굴인 황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흠, 안왕이 조용하다라···”
조숭은 등을 뒤로 기대고 천정을 바라본다. 혹여나 천정에 답이 있진 않나, 함께 시선을 올려보는 철환. 아무런 답도 없다. 그저 조숭의 머리만이, 미래를 계산하는 중이다.
“철환아.”
“예, 대인.”
“금의위···, 몇이나 움직일 수 있겠느냐?”
!!!
“대인!”
“다른 이들이 모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금의위는 몇이나 되느냐?”
철환은 조숭이 저렇게 물어오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아,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조숭은 지금. 서역이 군세를 회복하지 못하는 것을 원조하기 위해, 금의위를 이용해 무림맹을 공격할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대인···, 안왕 쪽 세력에 트집이 잡힐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역모로 몰릴지도 모른다. 황군의 사적 유용은 명백한 역모. 철환은 조숭에게 이를 주지시키고 싶었다.
“안왕부만 모르면 될 일이 아니더냐?”
“옥문관과 양관, 감숙이 전부 안왕부의 영역입니다. 대인···!”
“무림맹이 국경 밖으로 이동했다. 국경 밖은 안왕부의 영역이 아닐 터. 그들만 뚫고···, 나머지는 신궁에 맡긴다. 그 뒤 황군이 정식으로 토벌에 나서면 그만이니···. 걱정은 거두거라.”
“······.”
사람은 계속되는 실패를 겪으면 중요한 순간에 착오를 일으키곤 한다. 무인 역시 마찬가지. 이를 잘 아는 철환은, 혹여나 조숭의 지금 판단이 그런 중대한 실수는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걱정하지 말거라. 지난 기간···, 너무 사람을 부리는 것에 익숙해진 모양이더구나. 이번 일은 내 직접 나서서. 처리할 것이니.”
“직접···”
조숭은 노련한 정치가이자 승부사이다. 이는 그의 옆에서 수십 년을 함께한 철환이 가장 잘 아는 사실. 만약 지금 조숭이 승부를 거는 거라면. 철환의 승부수는 조숭을 믿는 것일 거다.
“호천대(護天隊)를 움직이겠습니다.”
철환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자신의 패를 내보인다. 호천대는 금의위에서도 가장 무력이 강한 무사대. 천검이라 불리는 천하제일검 철환이 대주로 있는 무사대 역시, 바로 호천대였다.
황군의 사적 유용이.
제법 대담하다.
“호위는 그림자를 쓸 터이니, 철환 너는 병력을 인솔하는 것에 집중하거라.”
조숭은 늘 달고 다니는 철환이 아닌 ‘그림자’를 호위로 쓰겠다고 한다. 그 그림자라는 말이, 금의위 내에서도 가장 암약에 특화된 이들, 특위사를 말하는 것을 아는 철환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서역이 성공적으로 국경을 넘어야 모든 것이 해결된다. 안왕도···, 늘 우리의 행보를 방해했던 무림맹도···! 준비하거라. 우린, 서역으로 갈 것이니.”
“예, 대인!”
승부를 걸었다면, 그 수에 대한 의심을 지워야 한다. 철환은 어느새 망설이던 감정을 지우고는 결연한 눈빛을 얼굴에 표한다.
그의 포권을 받아내는 노인의 얼굴에도, 승부사의 결연함이 멋들어지게 장식했다.
* * *
“맹천검대가 적과 교전, 적을 패퇴시킨 후 귀환 중이라고 합니다.”
정문의 막사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간다. 맹주인 자정 역시 여러 말을 묻고 들으러 직접 찾아오고, 또 탐문을 맡은 오봉학과 정보를 전하는 개방의 형제들까지.
정문은 그저 한 자리에서 무림맹 내의 모든 움직임을 통솔하고 있다.
국경 밖에 자리를 잡은 무림맹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탐색하러 온 척후대와 마주했다.
‘신궁(神宮)’이란 깃대를 내건, 당당한 고창신궁의 무인들이었다.
전력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직 서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저들의 본대가 귀환하지 않았는지, 저들은 전투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으니까.
이미 몇 차례 교전을 나눈 무림맹은.
연전, 연승 중이다.
“흠···, 곧 이진(二陣) 역시 이곳에 닿아야 할 텐데.”
국경 밖은 광활한 초원과 사막이 펼쳐져 있다. 이 중 사람이 머물만한 녹주는 일부. 이번 전쟁에서는 이곳들을 선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지금 저들과 자잘한 교전이 일어나는 이유도, 바로 이 녹주를 차지하기 위함이고.
정문이 지도를 열심히 살핀다. 무림맹이 이미 선점한 녹주와 그렇지 못한 곳을 구별해두는 정문. 정문의 눈이 저들이 나타났던 방향을 훑으며, 본진을 찾고 있다.
“무정검!”
그런 정문의 막사로 한 노인이 뛰어든다. 탐문과 탐색을 맡은 개방의 장로, 오봉학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노개, 충분히 바쁩니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급하네!”
“뭡니까···?”
“찾았네! 드디어! 신궁의 위치···! 쿨럭!”
너무 급하게 뛰어온 걸까. 오봉학은 숨이 차 기침을 몇 번 하고는 겨우 말을 이어간다.
“고창신궁의 본거지! 찾았단 말일세!”
“신궁의 본거지를 말입니까?”
그간 실체도 알지 못하고 저들과 맞섰던 무림맹이다. 그런 무림맹이 드디어. 저들의 실체를 찾아낸 모양이다.
“어딥니까?”
“토로번(吐魯蕃)! 토로번에서 멀지 않은 협곡에 신궁이 있다는 말을 전해 받았네!”
“토로번이라···, 멀지 않군요.”
“당장에 척후를 보내 탐색을···!”
오봉학은 신궁이라는 곳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것이 기쁜지 얼른 척후대를 보내겠다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제가 가겠습니다.”
“응···?”
“제가 간다구요.”
“어딜?”
“신궁.”
“······.”
하마터면, ‘아, 그래.’ 하고 넘어갈 뻔했다. 오봉학은 방금의 상황을 그렇게 회상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간다는 말을,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뱉은 정문이기에 벙찐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리는 오봉학이다.
“왜···?”
“궁금합니다. 어떤 모습인지. 또···, 제가 직접 봐야 공성에 나설지 아니면 저들을 불러낼지, 뭐 그런 걸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군사가 직접 움직인다는 말인가···?”
“노개. 제가 언제부터 군사입니까? 저···, 나름, 강한 무인입니다.”
“아.”
살짝 잊고 있었다. ‘나름’이란 말을 붙여 겸손하게 말해오는 정문 덕에 오봉학은 정문이 그저 총명한 군사가 아니라,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임을 겨우 떠올려 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게. 그래도 호위대를 끌고 가시고···. 크흡.”
생각해보니 옳다. 다른 누구를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고강한 무공을 지닌 정문을 보내는 것이 어떤 척후대보다 안전하리라, 이제는 오봉학이 바른 판단을 내린다.
“사제들만 데리고 조용히 다녀오겠습니다.”
“그거면 되겠나?”
“너무 많으면 눈에 띄게 됩니다. 위치를 표시한 지도는 있습니까?”
“여기 있네.”
오봉학은 개방의 방도가 신궁의 위치를 표시해둔 지도를 정문에게 건넸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토로번에 있는 넓은 협곡. 그곳에 붉은색으로 교차하는 선이 그려진 지도가 정문의 손에 넘어왔다.
오래 걸렸다. 참으로.
신궁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고 그들의 실체를 직접 마주하기까지.
자신이 강호에 처음으로 발을 나섰던 순간부터 지독하게 얽혀왔던 그 신궁이라는 곳을.
정문은 이제 눈으로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