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협곡.
“준비, 끝나셨습니까?”
진명이 정문의 막사로 들어서며 말을 묻는다.
오늘은 고창신궁을 살펴보러 가는 날.
정문이 미리 말을 전해두었기에 사제들은 준비를 마치고, 정문을 기다리고 있다.
“응. 잠시만, 옷만 마저 입고.”
여유를 부리는 걸까. 사형은 아직 옷을 전부 갈아입지 않은 채로 몸을 닦고 있다.
주변을 살피는 진명. 정문의 자리에는 땀에 전 무복과 이를 닦아낸 헝겊이 자리하고 있다.
“수련···, 하신 겁니까?”
“어? 응. 잠을 일찍 깨서.”
여기는 전장 한복판이다. 거기에 정문에게 몰리는 업무의 양을 모르지 않는 진명이기에 잠시 틈을 내 수련에 매진했다는 정문의 말이 더욱 웅장하게 들려온다.
“···부끄러워지는군요.”
“뭐, 되는 사람만 하는 거지. 가능하면 너도 수일하고.”
정문은 아무렇지 않게 옷을 입으며 짐을 챙긴다. 간단한 채비에 검을 집어 드는 정문. 이제는 서류와 붓이 아닌, 무복과 검을 들어야 할 때일 것이다.
진명과 함께 정문이 막사를 나온다.
그를 기다리는 사풍과 명화, 묵환.
오랜만에 함께 떠나는 여정에 이들의 표정이 새롭다.
공동의 도인들은 말에 올라타 평야를 가로지른다. 사막과 석림만이 가득한 불모지. 서역 땅의 삭막함이, 이들을 집어삼키는 것만 같다.
“대사형, 오늘도 수련했다죠?”
말 머리를 옆으로 붙이며 진명에게 명화가 말을 묻는다. 정문의 막사에서 이것저것 잡일을 봐주는 명화는, 매일 정문이 수련에 나서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음. 오늘도 나서셨던 모양이더구나. 땀이 묻은 무복이 막사 안에 있더구나.”
“요즘 늘 그러신다니까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열심히 더라구요.”
“귀감으로 삼고, 배우거라. 더욱 수일해야지.”
진명은 올곧은 소리로 명화의 말을 일축하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정문의 모습에 느낀 바가 많은 모양이다.
“피. 이사형은 맨날 그래.”
전장이라는 곳의 답답함과 긴장감이 어린 여성인 명화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온 것일까. 명화는 대화의 끝을 삭막하게 내는 진명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근데, 그거 아세요?”
“뭘 말이냐?”
“대사형이 요즘 하시는 수련.”
“늘 비슷한 수련이 아니겠느냐? 사형의 수련이시고···, 우리와 경지가 다르신 분이니 감히 예상이 가지 않는구나.”
공동파 도인의 수련이 별다른 게 있겠나. 복마검결과 복마검법에 속한 검술들을 수련하는 것과 또, 정문은 거기에 이어 통천신공에 속한 통천검 정도를 수련하겠지.
진명은 그런 생각에 어정쩡한 답으로 넘어가려 했다.
“그게, 요즘은 조금 다르던걸요?”
!
“명화야!”
진명은 요즘은 조금 다르더라는 명화의 말에 크게 놀란 얼굴을 하며 주의를 준다.
다른 무인의 수련을 훔쳐보는 것은 강호에서 용납되지 않는 행위다. 그게 같은 사문에 속한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용인될 수도 있지만, 정문은 다르다.
후계자라는 이름을 달고, 또 장문인만의 비전 무공을 비운 정문의 수련은.
다른 제자들이 훔쳐봐서는 안 될 것이다.
“사형의 무공을 훔쳐봤다는 말이냐? 경을 치려고!”
진명은 얼굴로 최대한 노기를 표하며 목소리는 낮춘다. 사제를 혼내면서도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는, 딱 둘째 정도 되는 이의 배려일 것이다.
“훔쳐본 게 아닌 걸요···. 대사형이 필요한 걸 가져오라 하셔서 우, 우연히 본 거뿐이에요···. 또, 대사형 수련을 본다고 제가 뭘 알겠어요···.”
명화는 자신을 혼내는 진명을 향해 잔뜩 울상이 된 모습을 보여준다. 불러서 간 것뿐인데. 이렇게 혼을 내다니. 서러움이 차오른다.
“어허. 여기가 사문이 아니지 않느냐? 다른 이들이 이를 보면···”
무슨 말을 하겠나. 높아진 사문의 위상과 사형의 위치만큼 사제들도 조심해야 한다. 진명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괜찮다. 너무 다그치지 말거라.”
정문의 목소리가, 명화를 위로한다.
“드, 들리셨습니까?”
단전이 두 개고, 또 그 두 개가 가득 찬 정문의 기감은 일반적인 무인의 배가 넘는다. 정문의 귀에는, 사제들의 대화가 똑똑히 들렸다.
“봐도 되는 거니, 너무 혼내지 말거라. 명화도 진명이 마음을 이해하고.”
정문은 평안히 말을 몰며 두 사제의 사이를 중재한다. 지금 정문의 경지는 수련을 보여줘도 타인이 모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득히 넘었기 때문이다.
“사형, 근데 그 검술은 뭐예요? 전 생전 처음 보는 검술이던데요.”
명화는 대사형이 괜찮다는 말을 하자, 이내 얼굴을 밝게 펴고는 대화의 대상을 정문으로 바꾼다. 활기차게 말을 걸어오는 명화의 물음을. 정문은 무시하지 못한다.
“녀석, 그게 그리 궁금하더냐. 직접 묻지 않고.”
“혼날까 봐 그랬죠!”
“진명에게 혼나는 건 괜찮고?”
“혼낼 줄 몰랐으니까요···, 헤헤.”
“다음부터 그런 게 궁금하면 직접 묻거라. 진명이 속만 복잡해진다.”
“넵! 그럴게요!”
정문은 명화를 향해 한 번 밝게 웃어주고는 시선을 앞으로 옮긴다. 답을 듣지 못한 명화와 또 뒤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던 사제들은 여전히 정문이 요즘 수련하는 검술이 무엇인지 궁금한 모양이다.
“저···,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혹 새로 수련하시는 검술이 있으십니까, 사형?”
“응?”
“명화가 말한 그 처음 보는 검술 말입니다.”
명화는 뭘 본 걸까. 정문은 공동의 검술 말고도 제법 많은 검술을 익히고 있다. 다른 문파의 검술도 있고, 또 살검(殺劍)이라 불리는 사도한 무공까지.
그래도 살검은 아닐 것이다. 이미 독충을 뱉어냈다고는 하지만, 살검은 진한 살기가 어리는 무공이기에 정순한 도기를 품은 명화가 이를 봤다면 살기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
명화는 무언가, 살검과는 다른.
그런 검술을 본 것 같다.
“새로운 검술을···, 하나 만들고 있다.”
!!
“새로운 검술이요?”
“뭐, 딱히 새로운 건 아니지. 재료가 되는 검술이 따로 있으니.”
“공동의···, 검술을 토대로 말씀입니까?”
“아니.”
“구, 궁금합니다!”
잠잠히 대화를 듣기만 하던 사풍과 묵환. 그 둘까지, 정문의 입에서 새로운 검술이란 말이 나오자 한마디를 보태며 대화에 끼어든다.
하나의 무공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괜히 개파 조사를 배향당에 모시고 그들을 신성시하겠나.
무공의 창조란, 경지를 넘어가는 그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 그래도 사제들은, 사형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정문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냥···, 대비는 해둬야지. 어떤 적과 싸울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새롭다고는 해도···, 그냥 파훼식이야.”
정문은 별다른 장황한 설명을 풀지 않는다. 그저 파훼란 말. 그게 전부였다.
“서역과 결전에 대비하시는 거군요. 역시 철저하십니다.”
"와! 그런 거면, 나중에 저도 가르쳐 주세요!"
“뭐, 결전에 대한 대비는 대비지. 기회가 되면···, 알려줄게.”
정문은 한번 씨익 웃고는 말을 몰아 앞서 나간다. 결전에 대한 대비라는 말. 아직 어떤 무공을 쓰는지, 또 어떤 이들이 모여 있는지도 모르는 서역에 어떻게 대비를 하고 어떤 무공을 만든다는 말일까.
듣기 전보다.
사제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도인들의 말이 계속해서 나아간다. 장황한 대지의 신비로움을 표현하듯 넓게 펼쳐진 사막과 평원, 그리고 높게 솟은 석림까지.
황량하게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헤치며 나아가던 이들의 앞에 마른 석림이 절벽으로 형상화된 넓디넓은 협곡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화염산(火焰山)인가···”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네요.”
석토로 이루어진 석림은 보통 산처럼 뾰족한 모양을 하지 않는다. 위에는 평평하고 능선은 울퉁한 절벽과 같은 모습인 게 대부분.
허나, 지금 이들의 눈앞에 나타난 모래 산은. 제법 뾰족한 모양을 하며 마치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화염산이라.
당(唐) 대의 한 고승이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며 이곳을 들렀다는 전설이 있는 명산(名山)이 이들을 맞이한다.
- 처억.
지도를 펼치는 정문. 개방이 전해준 지도에 따르면, 화염산의 옆으로 난 협곡을 따라가면 그 끝에 고창신궁의 본거지가 나온다고 한다.
마른 협곡의 위쪽 절벽을 따라 조심히 이동하는 도인들. 협곡과는 조금 거리를 두며 멀리서 아래를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 이들이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나리는 햇빛에 이들의 수분이 점점 말라갈 즈음.
“사형!”
진명이 손을 뻗으며 협곡 아래를 가리킨다. 그의 손이 향한 곳에는.
“강···?”
물줄기가 흘러, 협곡을 채우고 있다.
분명 마른 협곡이었다. 주변에 수원지로 볼만한 다른 강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제법 넓은 너비로 협곡을 채우고 있는 물들.
정문은 다시금 지도를 살피며 자신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기억을 꺼내본다.
“지하수로가 있다더니, 그건가.”
서역의 땅은 마르고 척박하다. 허나 수천 년 전부터 사람은 살고 있었는데,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서역의 땅을 이루는 석토의 성질 덕분이다.
서역 땅의 석토는 물을 흡수하지 않는다. 그저 아래로 내려보낼 뿐.
그렇기에 비가 내리고 또 주변 녹주의 물과 천산(天山)의 눈이 녹으면, 이는 모두 땅 아래로 잠긴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런 물들이 일정한 흐름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니, 사람들은 땅을 파 토양 아래에 이를 이용할 수 있는 인위적인 수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지하수로를 중심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던 것이 서역 문명의 시작.
정문은 천불사의 주지, 요공이 전해준 지리서에서 이런 내용을 읽은 기억을 불러왔다.
“음, 그래도 너무 인위적인걸?”
“꼭 모습이···”
“해자(垓字) 같군요.”
도인들의 눈이 한곳에 모인다. 모두의 생각이, 일치한 것이다.
“저 중심에 있는 석벽. 저걸 중심으로 살피자.”
“옆으로 돌아가 보시겠습니까?”
“응.”
이들의 시선이 해자가 둘러싼 커다란 괴석으로 이루어진 석벽에 닿는다. 마치 덩어리 그 자체로 보이는 석벽이, 너무도 반듯하게 네모난 모양이라, 이들의 의심을 받고 있다.
협곡을 사이에 두고 절벽 두어 개가 더 떨어진 위치에서 이들이 말을 몰아간다. 점점 보이기 시작하는 석벽의 옆면.
이들의 발이 마지막으로 닿은, 석벽은 정확한 측면에서, 도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건···!”
석벽에는 수많은 동혈이 뚫려 있다. 물기를 흡수하지 않아 깎아내기 좋은 특성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뚫은, 석굴이다.
이제야.
정문은 ‘신궁’이라 불리는 곳의 본거지가.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건축물이 아닌.
자연을 그대로 이용해 하나의 천혜(天惠) 요새임을 알 것도 같았다.
“협곡에 있는 석벽을 그대로 ‘궁’으로 쓴다···?”
“해자 역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마···”
저 거대한 석벽 전체를 두르고도 남을 거다. 멀리까지 내다 본 사풍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
“······.”
도인들의 입이 일시에 닫힌다. 모두가 말하지는 않지만,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건.
공성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무인은, 아니 군대가 와도.
이건, 쉬이 뚫을 수 있는 그런 요새가 아니라. 모두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협곡 자체가···, ‘신궁’이었군.”
“말 그대로네요.”
“허, 허어.”
“쳇. 이딴 걸 무슨 수로···!”
다들 한숨만이 나온다. 허탈한 표정으로 이들이 협곡 아래에 있는 신궁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멀리서 흙먼지가 일어나며, 협곡을 달리는 한 무리의 기마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저건 뭐지?”
제일 먼저 시선을 준 건 정문. 스물이 조금 안 되어 보이는 무인의 무리를 보며 정문이 안력에 집중했다.
“신궁 쪽 무인들 같습니다, 사형.”
“신나서 달려 대는군요.”
익숙한 지형이라 그런지 흙먼지를 일으키는 그들의 움직임에는 아무런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인물들의 면면이 잘 보이진 않는다.
조금은 집중해서, 눈가에 내기를 집중하는 정문.
그러자, 이내.
저들의 선두에 서서 말을 모는 인물의 모습이, 대략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붉은···머리?”
익숙한 외형이다. 특히나 머리 색과 피부의 색이. 하얀 피부에 새빨간 머리, 큰 코에 짙은 눈썹까지. 거기에 묶지 않은 머리는 굽이짐이 더해 결을 자랑하며 휘날린다.
일전에 무위와 난주에서 마주쳤던.
그 서역인이다.
고력강이라는.
- 씨익.
“하늘이 돕네.”
정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사, 사형···?”
“서, 설마 여기서···?”
사제들은 그런 정문의 모습을 보며 조금씩 불안감을 느꼈다. 정문이 저 미소를 지을 때는. 늘,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이곤 했으니까.
이번에도 정문은 사제들의 기대에 보답하려 한다.
턱을 한 번 쓰윽 매만진 정문의 입이 열렸다.
“쟤들···, 잡자.”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