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는 공동을 무시하지 마라-140화 (140/153)

140. 신궁의 궁주.

“미쳤군.”

정신을 차린 서역 사내 고력강은 정문이 전한 말을 듣고는 외마디의 감상만을 남긴다. 어쩌면 들린 말이 제법 굉장했기에 적당한 감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문은 정신을 잃은 고력강을 깨워 신궁의 궁주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림맹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이가 말이다.

전쟁에서 적대하는 세력의 수장들이 회담을 가지는 건 아예 없는 일은 아니다.

송(宋) 대의 장수와 그 이전 한(漢) 대의 장수들은 더러 그런 적이 있었고 또 전쟁 전 각 군의 수장들이 만나 간단하게 장기를 뒀다는 기록도 있으니, 그렇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은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낭만이 넘치던 시대의 이야기. 이제는 낭만이라는 말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국에 어느 세력의 수장이 쌍수를 들며 적군을 이끄는 자를 만나려 하겠나.

그런 생각에 고력강은.

잡힌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태도로, 자신의 감상을 내뱉었다.

“그냥 의사라도 전해보지?”

“편히 죽게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소?”

단주나 되는 자가 고작 다섯의 무림맹 무사에게 잡혔다. 그것도 스물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거기에 자신이 살기 위해 궁주에게 적군과 회담을 가지라는 말을 전하라니.

차라리 옥쇄(玉碎)하는 것이 나을 거라. 고력강은 그렇게 여기며 코웃음을 친다.

“궁주라는 자가 제법 꽉 막힌 모양이군.”

“죽이시오, 그냥.”

더는 나눌 말이 없다. 협상도 서로 이문이 맞아야 나누는 것. 고력강은 여기서 자신이 얻을 것이 없는 주제에 대해, 더는 혀를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너네도 지금 상황이 그렇게 좋진 않을 텐데? 대화만 나누는 거야. 대화만. 잘 생각해보라고.”

“서장과 전쟁 따위, 별다른 타격도 되지 않았소. 무림맹이 감히 신궁을 도모할 상황이 아니거늘···”

“그거 말하는 거 아닌데.”

- 씨익.

정문은 상황이라는 말에 서장을 떠올리는 고력강을 보며 입가를 비릿하게 올린다. 아무래도 자신이 신궁과 북경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서역은 모르는 모양이다.

“···시답잖은 농은 사양이오.”

“농이라?”

“흥. 그대가 서역에 대해 무얼 안다고···!?”

“모르는 게 많은 건 사실이야. 근데···, 너희 제법 안 좋은 쪽이랑 손잡았잖아?”

!!!

“그게 무슨···?”

“반응이 격하네. 평소답지 않게.”

평소에는 정문과 적절히 주고받으며 거래를 나눴던 고력강이다. 그런 고력강이 처음으로. 정문에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자신의 것을 내어줄지도 모를 상황에 부닥친다.

“떠보는 거라면···, 치우시오.”

“뜰 게 있다는 말로 들리고.”

“······.”

기선 제압은 정문이 승기를 잡는다. 북경의 수보 조숭과 서역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이미 흑시창을 통해 전해 들은 정문. 정보의 우위는,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 영감. 내가 치우게 해줄게. 너희도 그쪽이랑 손···, 끊고 싶잖아?”

!!

고력강의 동공이 대차게 흔들린다. 감정의 동요. 이는 사람의 얼굴 중 눈에서 제일 처음 표시가 나는 법이다.

“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누굴 말하는 건지···”

“이거 왜 이래? 알 거 다 아는 사이끼리. 북경. 더 말할 필요가 있나?”

“······.”

영감이란 말과 북경이란 말까지 나왔다. 주변에 다른 도인들이 듣고 있어 조심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패는 모두 공개한 무정검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만약 무정검이 이 모든 걸 알고 있고, 또 그 북경의 영감과의 관계를 끊어 줄 수만 있다면.

사실은 신궁에게 더없이 좋은 제안임을 고력강은 모르지 않았다.

‘무정검이라면···’

신궁의 누구보다 정문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정문이 해낸 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고력강이다. 다른 이를 잡고 이런 협상을 벌였다면 씨알도 안 먹혔을지 모르는 일지만, 그 상대가 고력강이라면.

잠시간에 머릿속에 망설임 정도는 심을 수 있을 것이다.

“···장담할 수 있소?”

!

됐다. 이 정도의 반응이면, 제법 긍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정문은 그렇게 여기며 고력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장담은 힘들지. 그쪽 궁주의 생각도 들어야 하니까. 하지만, 충분히 생산적인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거도 같은데?”

“······.”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여기서 정문이 확실하지 않은 장담을 내뱉었다면 고력강은 정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궁주의 생각만 통한다면.

짧게 내민 작은 조건이.

정문의 제안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만나는 거라면 주선을 해볼 수도 있소.”

고력강 역시 북경과 신궁의 관계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점점 신궁을 압박해오는 북경의 태도와 또 일방적인 소통까지.

대등한 관계가 아닌, 일방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한쪽의 태도가, 이들 사이에 금을 만든 것이다.

“좋아. 이제야 말이 통하네.”

“대신···! 내가 먼저 듣겠소. 내가 듣고. 그대의 말이 정녕 믿을 만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때. 그때 만남을 주선하겠소.”

고력강은 자신이 먼저 정문의 계책을 듣겠다는 말을 전했다. 옳은 생각이다. 작은 상단조차도 아랫사람이 먼저 물건을 확인하고 보고를 올린다.

하물며 이런 신궁과 무림맹의 일이라면 더더욱 중요하지 않겠나.

“뭐, 어려울 거 있나.”

정문 역시 그러한 거래 조건을 알기에 고력강을 만류하지 않았다. 줄 건 주고, 또 받을 건 받는 것이 정문의 방식이니까.

그렇게 정문은 고력강에게 자신이 가진 계획의 일부를 차근히 들려줬다. 모두는 아니다. 그저 일부. 하지만, 그런 일부라도, 고력강이라는 인물을 설득하기에는 충분했다.

잠시 후, 이들이 머무는 협곡의 절벽 끝자락에서 한 마리의 새가 날아오른다.

멀지 않은 거리. 그렇지만, 신궁이라 불리는 괴석의 제법 높은 층을 향해, 전서구의 날개가 힘차게 뻗기 시작했다.

* * *

- 휘우우웅!

황야의 밤은 생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낮에 내리쬐는 뙤약볕이 무색하게, 밤에는 차디찬 공기가 가득한 곳. 그래서 더욱 삭막하고 황량하기만 한 곳이 바로 이곳, 서역의 황야일 것이다.

그런 황야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협곡. 그런 협곡의 변두리에 속한 작은 절벽 위에, 정문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만나면 되는 건가?”

“다른 방법이라면···, 신궁으로 직접 가는 건데, 가시겠소?”

그런 정문의 뒤로는 혈도를 제압당하고 석림에 몸을 기댄 고력강만이 자리하고 있다.

다른 사제들은 절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서역의 무인들을 감시하며 정문을 기다린다.

무슨 일인지 다들 궁금해하고 사형을 지키겠노라, 그렇게 말을 했지만, 정문은 애써 이들을 만류하며 떨쳐냈다.

지금부터 정문이 해야 할 일은 정도 무림의 대표인 무정검이 아닌, 어쩌면 황궁에서 일하던 강찬이라는 학위사에 더욱 어울릴지도 모르는 그런, 일종의 거래니까.

사제들에게 이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정문이다.

“그건 싫군. 범 아가리도 크기를 봐가며 드밀어야지.”

신궁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정문 역시 궁주라는 자를 만나 대담을 나누고 싶은 건 맞지만, 그 정도의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

“···헌데, 오긴 오나? 궁주나 되는 자가 부하의 전서를 받고 온다는 말이 조금 이상한데.”

“믿기 싫으시면, 그만두시오.”

“뭐, 방도가 없긴 한데.”

“한때는 성주(城主)의 직위에 올랐던 몸이오. 또···, 서신에는 그대의 말 역시 일부 기록해두었으니.”

고력강은 자신의 신분만을 믿고 성주를 기다리진 않는다. 강호란 무정하다는 말이 곧 그자의 능력을 표하는 곳이다. 그런 강호에서 무림인으로 사는 이가, 다른 이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담보로 믿는다는 감정을 내보이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저, 고력강은. 자신이 전한 이야기가 충분히 궁주에게 매력적이었기를. 그것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군사나 끌고 오지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그럴 리는 없을 거요. 그리고 충고를 해두자면···. 그런 생각으로 궁주를 대하면, 필시 원하는 바를 얻지는 못할 것이오.”

고력강은 충고라는 말을 보태 정문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조금은 대담이 잘 성사되길 바라는 그의 바람이. 잘 전해졌을지는 모르겠다.

“···뭐, 보면 알겠지.”

궁주라는 자에게 어떻게 보면 불손한 행위를 하고 있는 고력강이다. 그럼에도 무언가 내심에서 뿜어져 오는 작은 믿음이 있는 것만 같아, 정문은 저자와 궁주의 관계를 쉬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문의 눈이 달빛이 나리는 협곡의 아래로 향한다. 달빛을 가로막는 산세가 없어 훤한 황야의 밤.

싸늘한 밤공기만이 이들의 살갗을 핥고 가는 그 시간에.

조금은 이질적인 바람이, 정문의 도복을 스친다.

- 쇄애애앵.

‘오는가.’

눈매를 바로잡으며 표정에 힘을 주는 정문. 처음 보는 일궁의 궁주를 대할 때는 어떤 표정이 어울릴까. 그런 생각에 정문이 협곡의 아래를 내려다보려 할 때.

- 스슥.

정문의 곁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하나의 신형이 그대로 정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 버린다.

!!

‘놓쳤다?’

잠시. 아주 잠시지만, 누군가 자신의 곁을 스친다는 것 외에는 모든 움직임을 놓친 정문이다. 강호에 발을 들인 후 이런 경험이 없었던 정문은.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뒤를 돌아봤다.

정문의 뒤로는 하늘거리는 백색 장포를 나부끼는 한 신형이 고력강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의 몸이 가느다랗고 하얘, 감히 성별을 예측할 수가 없다.

‘여자···? 아니, 굵은 선도 있는 거 같은데···?’

이렇게 가까이서 성별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건 꽤나 많은 것을 의미한다. 정문의 기감이, 저자의 기도를 완전히 읽어 내지 못했다는 그런 의미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궁주···시오?”

정문은 눈매를 가볍게 교차하며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 수 없는 경계심이, 자신의 뒤에선 신형을 향했다.

“이곳에선 나를 그렇게 부르지.”

목소리를 들으니 알 것 같다. 저자는 사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여전히 하늘거리는 장포에 가려진 사내의 정체다.

정문은 자신의 말에 답해오는 사내를 보며 대화를 나눌 준비를 마친다.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려는 정문.

하지만.

- 스윽.

가볍게 들어 올린 사내의 손이, 정문의 입을 막는다.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듯.

궁주로 보이는 사내는 자신의 수하 고력강에게 다가간다. 혈도가 제압당해 거동이 힘든 고력강의 몸을 살피는 사내.

“궁주···, 속하의 불충을 용서하소서···. 궁에 도움이 될 이야기 같아 그만···. 이번 일이 끝나면, 죽음으로 불충을 용서받겠습니다.”

하마터면.

정말, 하마터면.

정문은 저 말을 뱉는 사내가 자신이 알던 고력강이 아니라고 생각할 뻔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고력강은 어디까지나 계산이 철저하고 본인에게 이득 되는 일을 먼저 골라서 하는 이. 그게 이번 거래를 위해 저자를 잡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궁주라는 자의 앞에 선 고력강은.

정말로 성심과 성의를 다해, 자신의 충성을 나타내고 있다.

“강아.”

“예···, 궁주.”

“고생이 많았겠구나.”

“흑수 단주, 고력강···”

직책을 말하며 다시금 용서를 빌려는 고력강. 그런 고력강을 향해 궁주가 고개를 저어 보인다.

“일어나거라.”

궁주는 손을 뻗어 고력강의 혈도를 풀려 한다. 그를 보며 입을 떼는 정문.

“안 될 거요, 아마. 혈도를···”

혈도는 자신이 직접 제압했다. 내력으로 혈도를 막아 제압하는 공동의 점혈법으로. 타인이 제압한 혈도를 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내력이 필요함을 모르지 않는 정문은 원활한 협상을 위해 이를 직접 풀어주려 했다.

하지만.

- 슉! 슉! 슉!

가볍게 고력강의 혈도를 타는 사내의 얇은 손이 이미 그의 혈도를 모두 풀어버리고 만다. 궁주의 손에는 선명한 내기가 맺혀 밤하늘에 수를 놓듯 혈도를 이어버렸다.

‘······.’

과연 서역의 우두머리에 있는 자라는 걸까. 궁주의 무공이나 내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정문은 얼른 알 수 있었다.

“죽지 않아도 된다. 네가 애를 쓴 것을 알고 있으니. 단주로 보내 너를 고생시킨, 내 잘못이니라.”

“궁주···”

정문은 보이지 않는 걸까. 궁주는 뒤에서 열렬한 시선을 보내는 정문을 뒤로하고는 고력강의 몸만을 살핀다.

‘이득만을 추구하는 곳은 아니란 뜻이군.’

부하를 생각하는 궁주라는 자의 눈빛이, 제법 진심이다. 부하를 아끼는 것 같은 궁주의 태도. 부하의 서신에 달려오는 우두머리를 보면, 이들의 유대를 짐작할 수 있다.

“끝나셨소? 제법 애틋해 보이는데.”

정문은 애써 침착한 척 여유로운 말을 던져, 둘 사이에 자신을 끼워 넣었다. 기다리기만 해서는, 주도권을 찾기가 힘들 것이란 계산에서다.

“···궁주, 속하가 보낸 서신이···”

다행히, 고력강은 정문을 배신하지 않는다. 이미 궁주에 의해 몸이 풀린 상황에서 도망가도 충분한 이들이지만, 고력강은 진심으로.

궁주가 무정검과 대화를 나누길 바라는 모양이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본주가 처리할 것이니.”

“그럼···.”

고력강은 가볍게 고개를 털고는 조금 멀리 있는 석림 뒤로 사라진다. 무정검과 궁주, 두 사람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하는 고력강.

이제는 협곡 속 절벽 위에, 정문과 신궁의 궁주, 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드디어, 궁주란 자의 시선이.

정문에게 닿았다.

싸늘한 기운이, 정문의 등골을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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