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는 공동을 무시하지 마라-144화 (144/153)

144. 무인과 정치가.

“퇴각하라!”

적갈색 머리에 눈썹이 진한 사내가 크게 소리쳤다. 손에는 철로 된 장(杖)을 쥐고 있는 사내의 표정이 유독 어둡다.

“백타대(隊)는 전원 퇴각한다! 서둘러라!”

사내의 옆으로 늘어선 부관들 역시 같은 말을 외친다. 연달아 퍼져나가는 퇴각 신호에 백색 무복으로 얼굴까지 가린 무인들이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백색 무복을 입은 백타대의 무사들은 큰 피해를 입은 걸까. 사막과 황야란 지형에 어울리게 백색으로 맞춘 이들의 무복은 깔끔하다.

작은 먼지와 흙이 묻어 누런색이 조금은 물들긴 했지만, 여전히 백색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 빨간 핏물이나 상처로 눌어붙은 딱지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전장에서 상처 입지 않은 병사의 퇴각은 당연한 불명예.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불명예를 감수하려는 걸까.

아쉽게도, 자신의 의지는 아니다.

“성주···,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저들은 당문의 무사대가 아닙니까?”

백타성의 성주, 구양종의 옆으로 그의 부관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서역에서 독문으로 유명한 구양씨들은, 당문을 상대로 퇴각을 결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명령이다···. 따라야지.”

“허나···”

이건 궁주의 의사가 아닌 다른 이의 명령이 아니냐. 그런 반박을 내려던 부관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아래로 박아 버렸다.

이를 말해도.

바뀌는 것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퇴각한다···. 그뿐.”

구양종은 말만을 남기고는 뒤로 돌아 전열을 다독였다. 그의 입가로, 한 줄기 핏물이 타고 흘렀다.

퇴각은 백타대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중앙에서 무림맹을 상대하던 백타대 외에도, 구자성의 구자대, 누란성의 누란대 등 서역을 대표하는 무사대가 가짜 교전을 일으킨 후 전력을 다해 협곡으로 퇴각했다.

점점 거리를 좁히며 이들을 추격하던 무림맹의 무사대. 그런 무림맹 무사대의 눈에 이제는. 신궁이라는 이름이 시작되는 협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곳이···, 그 협곡인가?”

생각보다는 크다. 입구만 본다면 그런 말이 절로 나올 협곡을 보며 오봉학이 입술을 핥았다.

불안한 걸까.

그건 아니다.

함정이란 모르고 당할 때야 힘들고 당황스러운 것. 하지만, 이미 저곳이 함정이란 걸 알고 결전의 준비를 마친 이들에게는.

그저 저 협곡이, 최후의 결전을 위한 비무대. 그 정도로 보이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결전은 늘 예고 없이 찾아와야 담담한 법이다. 멀리서 결전을 향하는 무대를 보는 무사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또 입이 마르기 시작한다.

고강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라고 다를까. 이들 역시 자신들이 향하는 곳이 이제 있을 큰 전쟁, 그리고 최후의 전쟁을 위한 무대라는 생각에 쿵쾅거리는 심장과 마른 입술을 함께 다스리는 중이다.

“생각보다 크군요.”

자정 역시 긴장이 가득한 목소리로 협곡을 바라본다. 뒤로 넓게 늘어선 무림맹 무사들을 이끄는 자정의 어깨가 무겁다.

“스승님. 이제 시작입니다.”

그런 자정의 옆에서 심지를 굳건히 하라며 말을 보태보는 정문.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스하다.

애초에 감숙과 공동을 위해 맹주란 자리에 오른 자정이다. 공동파 도인들만으로도 벅찼던 것이 그의 어깨. 이런 자리에 자원해 오를 인물도 아니었지만, 막상 오른 이상.

그는 어깨에 올린 것을, 어떻게든 지킬 인물이다.

“걱정 말거라. 내 알고 있으니.”

자정은 애써 자신을 스승님이라 칭하며 위로하는 정문을 향해 짙게 웃었다. 맹주가 아닌 스승이라 불러, 부러 이번 전쟁이 공동 역시 크게 엮인 전쟁임을 상기시킨 정문이다.

자정의 조금 뒤로 장포를 입은 중년인들이 기다리고 있다. 각 문파의 수장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 불리며 강호에서 누구보다 높은 명성을 누렸던 이들이. 지금은 공동파 장문인의 뒤에 줄을 서고 있다.

이전에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도. 또 이들이 자신들의 뒤에 서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자정.

자정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무림맹···, 진군.”

절도있게 내려온 자정의 손이 협곡의 끝, 신궁으로 향했다.

* * *

“무림맹이 협곡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퇴각을 완료한 성주들이 신궁의 가장 큰 방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런 성주와 궁주, 그리고 청하지 않은 객을 향해 울려 퍼지는 보고.

모두가 눈에 긴장감을 띄우며 한 곳을 바라봤다. 우선은 표면적으로 이번 전쟁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진, 궁주 국문소를.

“준비하거라.”

저들이 협곡으로 들고 있다면, 이제 전면전은 바로 목전. 서역과 중원, 두 무림의 생사를 건 결전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옙!”

절도있는 대답과 함께 성주들이 각자의 무사대를 정비하기 위해 흩어진다. 저마다 울분과 호승심, 그리고 자부심을 억지로 삼키며 퇴각했던 성주들이 투지를 불태운다.

“클클클. 이제야 일이 제대로 되는 것 같소이다.”

“누구 덕분이지요.”

“무슨 그런 칭찬을. 클클클.”

궁주의 옆에서 손으로 뒤로 하고 거북목으로 대화를 듣던 조숭이 끼어든다. 자신의 계책이 제대로 먹혀, 잔뜩 그의 어깨가 올라가 있다.

“대인께서도 준비하셔야지요?”

“준비? 본노가 말이외까? 무엇을?”

“전쟁을···, 도우러 오신 것이 아닙니까?”

“도와야지요, 암. 허나···, 너무 의존하시면 곤란합니다, 궁주.”

정치가는 정치가다.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온 것을 두고 조숭은 도움이란 단어로 포장했다. 부러 준비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 궁주의 입에서 먼저 준비하란 말을 꺼내게 했고.

조숭은 지금 자신이 나서는 걸, 신궁의 요청으로 만들려는 일종의 공작에 들어간 것이다.

요청으로 나서는 이는 개입할 여지가 더욱 커진다. 다른 이들이 반발할 것 같은 조숭의 개입도. 이런 그림으로 포장된다면, 정당화가 된다는 말이다.

조숭은 이번 전쟁에서.

지휘봉을 국문소의 손에만 맡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호천대는 어떻게 참전할 요량입니까?”

“글쎄외다. 우선은 상황을 조금 지켜봐야 하지 않겠소이까?”

“전장에 직접 나서실 생각입니까?”

“클클클. 궁주께서는 본노가 전장에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다기보다는···, 그저 걱정이지요.”

“걱정?”

“무인도 아닌 분께서···, 혹여나 전장에서 다치시기라도 한다면···, 이 국문소, 그 슬픔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절대 진심이 아니다. 이 대화를 듣는 이가 있었다면 그렇게 느꼈을 말을 국문소가 조숭에게 뱉었다. 가늘게 올라가는 국문소의 입꼬리가, 자신이 지금 이죽거리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궁주께서 그리 걱정을 해주시니···, 이 조숭.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조숭은 그런 국문소를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기 싸움에 능한 정치가가 무인의 대련을 귀엽게 받아주는, 그런 태도다.

“허나, 이 조숭 역시 목숨은 아깝소이다. 궁주의 걱정도 있고. 허니···, 본노는 알아서 잘 숨어 있겠소이다.”

받은 걸 그대로 이용하는 성향은 조숭의 특기인 걸까. 원래 목적하는 바가 있어 전장에서 숨으려던 조숭은, 마치 이걸 국문소의 탓인 양 그대로 받아 버렸다.

“···전장에 나오지 않으시겠다는···?”

지휘관이 전장을 보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즉, 전장을 살피지 않고도 명령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 만약 조숭이 전장에 나서지 않는다면, 호천대의 지휘권 역시 국문소에게 넘어갈 것이다.

“클클클. 그리 들렸소이까? 아쉽게도···, 그건 아니외다.”

놀라는 국문소를 보며 재밌다는 듯, 특유의 걸걸한 웃음소리를 내는 조숭. 그가 시선을 거두며 말을 이어간다.

“전장이 보이는 곳. 어쩌면 전장 속. 어딘가에는 있을 거 외다. 그게 어디라도. 호천대에 대한 명 역시···, 직접 내릴 것이고.”

“말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만···”

“다르지 않소. 그저 본노의 말은···. 그걸 궁주께 알려드리지 않겠다는 말···”

!!!

“그게 전부외다.”

“대인!”

국문소는 자신이 어디에서 전쟁을 관전할지를 말하지 않겠다는 조숭에게 버럭 하며 목청을 높였다. 둘은 원래 신뢰에 기반한 관계는 아니다.

허나, 신뢰가 없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면적인 이야기. 그 어떤 신뢰가 없는 관계라도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추켜세우며 신뢰를 표해야 함을, 모르는 국문소가 아니다.

“그리 목청을 높이셔도 소용없소이다. 이는 늘상 있는 일. 이 조숭···. 그 누구에게도 신뢰란 이름으로 본인의 목숨을 걸지 않으니.”

누구에게나 믿음을 주되, 누구도 믿지 말라. 조숭은 그런 말을 늘 가슴에 두고 살아왔다. 조숭에게 전쟁이란 지역은 자신의 목이 베일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

조숭은 그런 곳에, 자신이 곧 칼날을 향하게 할 국문소와 함께할 생각이 전혀 없다.

“···보는 눈은 전혀 생각지 않으시는 겁니까?”

“보는 눈이라···? 궁의 인물들을 말하는 거외까?”

“병사들의 사기도···, 궁 내의 반발도 있을 겁니다.”

“허허허, 이상한 말을 하십니다, 궁주.”

“······?”

“궁주께서 말하는 모든 건···. 총책임자인 궁주의 책임이 아니외까? 사기 역시 궁주께서 다독이셔야 하고 반발을 잠재우는 것 역시 궁주의 역할. 어째서 본노에게 그런 책임을 전가하시는지?”

뻔뻔하다. 명백한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이가 자신의 입으로 그 잘못을 전가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논점의 본질을 흐리는 조숭의 말이 국문소의 반박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우린 서역이기 이전에 무인입니다, 무인! 그런 무인을 믿지 못하는 이가 어찌···!”

신궁을 향해 손을 뻗었던 무림맹의 무정검을 뿌리치고 이곳에 있는 국문소였다. 썩은 고기를 두 번 먹지 않겠다는 그런 다짐으로.

헌데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런 푸대접이 전부라니. 국문소의 비참함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궁주. 무인과 정치가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오?”

“······.”

“모르시겠지. 궁주께서는 정치가에는 가깝지 않으시니. 들어 보시오. 무인은 상대의 뒤를 노리지 않소. 반대로 정치가는 언제나 상대의 뒤만을 노리는 자들이오. 그런 정치가가···, 가장 무서워하는 이가 있으니. 그게 누굴 거 같소?”

“무인···이란 말씀입니까···?”

“정답이오. 허면, 이유도 아시겠소?”

국문소는 치욕과 함께 올라오는 화를 억누르며 붉어지는 얼굴로 조숭에게 답을 하고 있다. 이제 와 불화를 만들어 신궁의 사기를 떨어트리면, 대사를 망칠까 조심스러운 국문소다.

“···무인의 신념은···, 정치가도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니.”

신념. 자신이 이제야 뒤돌아보며 느끼는 가장 큰 가치. 국문소는 그것을 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는 조숭의 손을 잡으며 버렸던, 이제는 절대 버리지 않겠노라 그리 다짐한 그 단어를.

하지만.

“틀렸소이다.”

조숭의 냉정한 어투가 그런 국문소의 낭만을 더럽힌다.

“무인은 언제든 정치가가 될 수 있소. 언제든 뒤를 노려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는 말이외다. 이 조숭···, 그런 무인을 많이 봤소이다. 무인의 뒤통수는···, 예상이 가능한 정치가의 그것보다 무서운 법이오.”

조숭은 그런 무인을 많이 봤다는 말을 하며 일부러 국문소와 눈을 맞췄다. 조숭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국문소다.

“허나···, 정치가는 무인이 될 수 없소. 늘 뒤만 노리던 이들이 어찌 다시 정공법을 택하겠소이까? 정치가가 무인이 되려는 순간···, 그들의 수명은 거기서 끝인 거외다.”

조숭은 아무런 막힘이 없이 자신의 철학을 뿜어냈다. 국문소의 가슴에 남은 낭만을 철저히 짓밟는 조숭의 사상이, 계속해서 쏟아진다.

“이 조모는 그래서 무인이 두렵소. 그들이 정공법을 써서가 아니라!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점점 강해지는 조숭의 목소리. 그런 목소리가 일시에 힘을 풀더니, 마지막 말을 토해낸다.

“언제든 그들이 내 뒤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오. 그들은 꼭 중요한 시점에만 정치가로 돌아서곤 한다오. 마치 이번 전쟁처럼···, 아주 중요한 시점에 말이지.”

조숭은 말을 마치며 진득한 미소를 보이며 국문소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마치 경고를 남기고 돌아서는 이의 모습이, 그의 모습과 일치한다.

“궁주 역시···, 너무 무인을 믿지는 마시오. 그대가 믿는 무인이···, 정치가일 수도 있으니.”

“······.”

조숭이 무언가를 알고 뱉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혹시 모를 일말의 가능성에 국문소를 단속하는 그런 말. 무림맹이 이미 국문소와 접선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그런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늘.

사람의 마음에 의심의 불씨를 키우는 좋은 양분이 된다.

조숭은 허공에 시선을 놓은 채 말이 없는 국문소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천검(天劍)을 대동한 그를 뒤쫓을 수 있는 이는 없으니까.

가만히 남아 조숭의 말을 곱씹어 보는 국문소.

무인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

언제든 정치가가 될 수 있는 자들?

아니면, 국문소의 말처럼 증명하는 자들?

아직 국문소는 그 답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왜인지.

이번 전쟁이 끝나면.

누군가 이를 증명해주리라.

아니, 증명해줬으면 좋으리라.

국문소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리며 전장으로 향했다.

협곡의 중간 지점에서, 드디어.

무림맹의 군세와 신궁의 군세가 서로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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