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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공동을 무시하지 마라-149화 (149/153)

149. 경지를 넘어서다.

지류가 만나면 강이 되고 강이 만나면 바다가 된다. 이는 명백한 자연의 섭리. 흐르는 것들 두어 개가 마주하면, 그 수는 둘이 아닌, 그 이상이 된다는 뜻이다.

정문은 이런 방식을 조금 다른 곳에 적용하고자 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상상조차 못 할, 아니 상상조차 하지 않을.

바로 단전이라는 곳에.

당연한 말이다. 남들이야 단전이라는 것이 하나뿐이기에 둘을 하나로 만든다는 개념이 존재하기나 하겠나.

허나, 정문은 다르다. 정문은 단전이 두 개인 몸. 그런 정문에게 지류가 합쳐져 합쳐진 두 개의 지류보다 더 큰 강이 된다는 자연의 섭리는.

제법 매력적인 명제로 다가왔다.

허나, 이런 자연의 섭리에도 일정한 제약은 있었는데, 지류 역시 그 성격이 비슷한 지류가 아니면 하나의 강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황하의 강물은 장강의 강물과 쉬이 섞이지 않는 법. 서로 간 희석이 없이는 바로 만나지 않는 것이 두 개의 이질적인 강물이다.

원래의 정문이라면, 두 개의 단전이 있었어도 이런 제약 덕분에 이를 하나로 만들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문의 한쪽 단전에는 공동파의 정순한 도기가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지만 살기가 조금 강한 이질적인 기운이 있었고.

도기란 제법 정순하고 다루기 힘든 기운. 이를 살기가 묻어있는 기운과 하나로 합치는 것은,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연이라는 것이 정문에게도 있었던 걸까. 정문은 달뢰라마를 서장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새로운 기운을 단전에 품을 수 있었다.

바로, 불기(佛氣).

사령충을 토해내게 만들고 정문의 몸으로 대수인(大手印)이라는 무공을 쓸 수 있게 만들었던 달뢰라마의 불기가. 정문의 다른 한쪽 단전에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내력을 밀어내고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불기와 도기.

도기와 불기.

어떻게 보면 이 둘 또한 성격이 다른 기운으로 보일 수 있다. 허나, 만류는 귀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돈황에서 천불사, 월아문과 나눴던 대화가 정문에게는 실마리로 다가왔다.

- 월아문의 뿌리는 서장 불교입니다.

도문의 뿌리가 서장의 불교라는 말. 진명이 크게 반발하며 얼굴을 붉혔던 그 개념이 정문의 머리에 스친 건 얼마 되지 않은 날의 시점이었다.

도즉불, 불즉도(道卽佛, 佛卽道).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는 말이 도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중원 도가의 가르침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서로가 분명 통하는 부분 역시 있을 것. 해서 정문은 이곳에 모든 걸 걸기로 했다. 만류귀종이든 도즉불 불즉도든 무엇이든.

우선은 합쳐보고, 그 결과를 보자는 것이, 정문의 도박이었다.

다행히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정문의 어깨 위로 샘솟는 저 불꽃 형상의 기력이,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네놈···, 무슨 짓을···?”

철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빈틈을 줄이고 정문을 향해 눈매를 좁혔다. 실체를 가진 기운이라. 정문이 경지를 넘었음을, 철환 역시 알아챘다.

“······.”

정문은 답이 없다. 경지를 넘었다면, 많은 것이 바뀐다. 지류가 합쳐지면 그 수량이 두 개의 지류를 아득히 넘어서는 것처럼, 경지 역시, 넘는 순간 그 내력의 양이 기존의 단전을 크게 넘어서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저렇게 갑작스레 경지를 넘은 무인은.

주화입마(走火入魔)란 것에 빠질지도 모른다.

- 스윽.

철환이 슬쩍 발을 뒤로 뺀다. 늘어나는 내력의 양과 넘어선 경지. 거기에 의식이 없는 주화입마의 상태라면. 의식을 가지고 무공을 휘두르는 이보다 훨씬 위험함을 철환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 씨익.

짙은 미소와 함께 정문의 고개가 들린다. 그의 얼굴에는 또렷한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

“무, 무슨···?”

의식이 있다. 그리고 경지를 넘었다.

모든 것이 명백해지자, 철환은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무인은.

더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상대하던.

그 무인이, 아닐 것이다.

- 턱.

“···이런 기분이었나···”

의식을 차린 정문은 자신의 검을 땅에 꽂아 두고는 양손을 들어 올린다. 특위사에게 당했던 좌수의 상처가 불꽃에 휩싸이더니 이내 상처는 찾아볼 수가 없다.

좌수와 우수, 양손에 발하는 두 개의 불꽃. 하나는 도기를, 하나는 불기를 담은 두 개의 불꽃이 정문의 몸 가운데서 합쳐졌다.

“만류(萬流)···”

그를 내려다보는 정문.

양손을 번갈아 바라본 정문이 이내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의 턱이, 하늘로 향했다. 마치, 무언가를 음미하듯이.

“통천(通天)···”

경지를 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꼭 필요하다. 깨달음과 경지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말. 정문은 이런 깨달음이 없이 경지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뒤늦게야 경지를 넘어선 정문을.

찾아오고 있었다.

‘경지를 넘고 뒤늦게···?’

그저 경지만 넘은 거라면. 깨달음이 없었던 거라면. 철환도 크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강제로 뛰어넘은 경지는, 필시 그 부작용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저렇게 깨달음이 뒤따라 온다면.

정문이 넘은 경지는 완성되고 말 것이다.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한다. 그런 깨달음이 전부 오기 전에 저 무인을 죽여야 한다. 철환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는 얼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깨달음이 찾아오는 중은 무아의 지경(無我之境).

지금이 저 무인을 처리할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 콰아앙!

철환의 발이 땅을 크게 때렸다. 이전과는 달리,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철환의 움직임. 덕분에 더욱 날카로워진 철환의 천경무의검법이 정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 슈우우우욱!

철환의 강기가 그대로 칼날에서 실체로 발한다. 주변을 빨아 당기듯 거침없는 기세로 나아가는 철환의 검.

하지만.

- 휘이이이익!

철환의 검은, 정문의 신형이 아닌, 바로 앞. 허공을 가르고 반대편을 향해 그대로 곡선을 그렸다. 허상(虛像)을 베어버린 것이다.

!!!

철환은 서둘러 눈을 고쳐 떴다. 자신이 향하던 곳을 바라보는 철환. 자신이 무정검이라 생각했던 것은. 그대로 실체화된 정문의 기력. 즉, 정문이 기력으로 만든 허물이었다.

‘벌써 실체화를···?’

예사 재능이 아니다. 이제 막 경지를 넘어섰음에도, 실체화를 다루는 솜씨가 무르익은 무인의 솜씨다. 철환은 이미 격(擊)의 자세로 들어간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며 회수(回收)의 자세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때.

- 후우우욱!

정문의 왼손이 거칠게 바람을 가른다. 젖혀진 검 때문에 균형을 잃은 철환의 하복부로. 실체를 가진 일곱 개의 기력을 두른, 정문의 칠상권이 강타했다.

- 빠악!

- 스스스슷!

“욱!”

크게 밀려나는 철환의 신형. 내부가 진탕되며 올라오는 토혈이 그의 목에 가득하다.

큰 내상은 아니다.

허나, 확실한 것은.

정문이 처음으로.

철환에게 타격을 입혔다는 것.

철환 역시 자신이 타격을 입은 것에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

철환의 입가를 타고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린다. 얇은 줄기지만, 상징적인, 그런 핏줄기가.

반대로, 정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비릿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쓰는 거군.”

열리는 정문의 입. 경지를 넘어서고 처음으로 꺼내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공평한 거 같진 않아서. 조금 맞춰봤지. 균형을.”

균형을 맞췄다. 간단하게 말을 뱉는 정문을 보며 철환은 경악을 얼굴에 띄울 뻔했다. 경지라는 것이 이리 간단히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다시 해보자고. 제대로.”

정문은 옆에 꽂혀있는 검을 뽑아 들며 크게 갈무리한다. 흙을 털며 강기를 옮기는 검의 형상이 날카롭다.

“······.”

철환은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는 정문을 바라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다. 허나, 지금 안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잠시간의 눈싸움이 마친 후, 두 무인의 신형이 가운데서 마주한다. 조금 전처럼 격렬하게 부딪히는 둘. 격렬한 충돌임은 분명하다. 조금 전과 같이 서로를 향해 절초를 뿌려대는 양상인 것도 분명하고.

다만,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은.

이를 압도하는 이가, 또 그가 쓰는 검술이.

바뀌었다는 점일 것이다.

- 슈욱!

- 까앙! 까앙! 까앙!

철환의 검이 점점 뒤로 밀려난다. 힘차게 정문의 검을 밀어내던 기세와 다른 철환의 검. 바뀐 검술 때문은 아니다. 무정검이라는 무인이 펼치는 검술은, 이전보다 더 유(流)해진 것이 분명했으니까.

‘검술이 바뀌었다···?’

확실히 이전에 보여주던 실용적인 검술이 아니다. 이건, 마치 정파인의 상징처럼 멋들어지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정순한 검술.

그럼에도, 이전보다.

훨씬 막기 힘들어진 철환이다.

정문은 밀려나는 철환을 향해 복마검결을 풀어낸다. 살검식(殺劍式)이 아닌, 공동의 검술을 펼치는 정문.

도기와 불기를 합쳐 하나의 단전으로 만든 정문은 이제 더는 살기가 가득한 살검식을 펼칠 수 없다. 대신,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공동의 무공이.

더욱 강건해진, 지금의 정문이다.

소양검이 절제된 검로로 철환의 퇴로를 제압한다. 연이어 펼쳐지는 혼원검. 뒤로 쫓기던 철환은 혼원검의 검세에 맞춰 반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천운검이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춘다. 마치 산수화의 산맥을 그리듯 곡선으로 변화며 철환의 검을 피해내는 정문의 검술. 철환이 정문의 변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현천검의 패도적인 기운이 굵은 선을 그리며 산수화의 선을 마무리한다.

- 카가가가강!

거칠게 검을 갈며 겨우 몸을 세우는 철환. 버거움이라는 말이 실체화가 되어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다. 평범한 검술이다. 헌데도 어찌 이리 강맹한 기운이 가득한지, 철환의 몸은 저 기운을 모두 받아내지 못한다.

‘마치 두 명의 무인을···’

두 명의 무인을 상대하는 것 같다. 초식은 하나이나 실리는 기운이 두 명, 그 이상인 것만 같은 철환. 철환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정문을 다시금 마주했다.

- 슈슈슈슛!

칠살검의 일곱 줄기 기력이 정문의 검에 맺힌다. 마치 날카로운 톱날처럼 실체화되어 검을 감은 일곱 개의 검기.

산수화의 끝을 장식하는 점들 마냥, 정문의 검은 철환의 몸을 찔러가기 시작했다.

철환이 검을 옆으로 돌려 원을 만든다. 여러 개의 신형의 발하는 철환의 검. 조금 전 정문의 몸을 베었던, 다천무의(多天無意) 초식이 검에서 발하며 수 개의 검을 실체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충돌하는 두 개의 검술. 칠살검과 다천무의검. 실체로 발한 두 개의 검기가 그대로 허공에서 서로를 노렸다.

- 펑! 펑! 펑!

터지는 검기들. 실체화를 서로 멸하는 공격의 끝에는.

- 푸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깊게 찔린, 한 군인이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쿨럭-!”

토혈이 쏟아진다. 그저 검상에 당한 것은 아닌 모습. 몸을 베고 지나며 내부를 일곱 갈래로 가르는, 또 다른 칠살검의 묘리가, 철환의 몸을 뒤집었다.

이번 격돌의 승기는, 정문이 잡은 것처럼 보였다.

“비켜. 집 지키는 개까지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몸속에 불기와 도기가 가득해서일까. 정문은 철환을 향해 그저 물러서라는 말을 전했다. 원한도, 필요도 없다. 이 자리에서 철환이 아닌, 조숭만 잡으면 일은 쉬워지니까.

하지만.

“군인은···, 명에 따라 움직인다···. 아무런 명이 없는 지금은···. 그저 싸울 뿐.”

철환의 심지는, 굳건하다.

정문이 철환을 바라본다. 도기와 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철환이 산다면, 조숭이 죽고 호천대를 물리기 쉬울 거라는 생각, 그 때문이었다.

조금은 일이 귀찮게 되었지만. 철환을 확실히 물리쳐야만 할 것 같다.

정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핀다. 맑은 하늘. 하늘을 노니는 새 한 마리 없는 황량한 하늘을 보는 정문. 그런 정문의 앞에서.

철환은 검을 굳게 쥐고, 마지막 수를 준비한다.

자신이 천검(天劍)이라 불리며 인세(人世)의 유일한 하늘을 지키는 군인이었던 이유. 그리고 천하제일검이라 불릴 수 있었던, 그 마지막 수를 준비하는 철환.

검을 꽉 부여잡은 철환의 몸에서, 푸른 빛 기력이 뿜어지며 이내 실체가 된 형상으로 발하기 시작했다.

- 후오오오오오오!

누가 보아도 마지막 수다. 그만큼 강한 공격을 펼칠 것도 분명한 상황. 정문 역시 자신이 가진 가장 강한 기운을 뿜으며, 철환에 맞선다.

- 쿠오오오오오오!

검정색 불꽃이 발하며 정문의 어깨를 타고 올라온다. 익숙한 기운. 절벽 아래에서도 뿜어지고 있는 그 기운이 정문의 어깨에서 발했다. 마치 마공(魔功)처럼 보이는, 그런 검은 기운을.

- 툭.

정문이 검을 내려놓는다. 아마, 마지막 수는. 검술이 아닌 모양이다.

- 저벅.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철환. 서서히 몸을 움직이던 그의 모습이, 전신을 뒤 감은 불꽃과 하나가 되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정문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천경무의검법-, 무의파천-!’

천경무의검법의 오의를 온몸으로 토해내는 철환. 그의 몸이 한줄기 불꽃처럼 빛나며 정문을 향한다.

- 후오오오오오오!

타오르는 푸른 불꽃. 그 속을 가득 채운 검강이 그대로 정문을 향해 뻗어 갈 때. 정문은 여전히. 부동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걸 포기한 걸까. 그런 헛된 희망에 철환이 미소를 지으며 높이든 검을 정문을 향해 내려칠 때.

“통천신공(通天神功)···”

정문의 입에서, 도기를 가득 담은, 정순한 무공의 이름이 나온다. 결국에는 공동의 무공으로 마무리를 지으려는 걸까. 철환의 푸른 불꽃이 정문의 검은 불꽃을 마저 찢으려는 순간.

- 처억!

정문의 손이 위로 향한다. 손을 쫙 펼친, 장법(掌法)의 모습이다. 정문의 손은 펼쳐진 채로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마치 무언가를 내려찍는 모습. 그리고, 정문의 입은. 그 무공의 정체를 말한다.

“대수인(大手印).”

- 퍼퍼어어어어엉!

- 꽈아아아아아앙!

거대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마치 천근의 바위처럼 무게를 가지는 하나의 기운. 높이 떠 정문의 불꽃을 베어가던 철환의 몸은, 그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붙어 버린다.

- 쩌저저저저정!

갈라지는 황야의 석림. 무거운 기운이 허상이 아니란 듯, 땅마저 갈라지며 이내 철환의 몸에서는 으스러지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의 검은. 이미 주인을 잃은 지, 오래다.

“끄어어어어얽-!”

거칠게 토를 내뱉는 철환의 입. 으스러지고 갈라지는 격통 속에서, 그의 잇몸이 붉게 물들고 있다. 몸부림치는 그의 온몸이, 지금의 격통을 증명하는 것 같다.

- 처억.

정문이 다시 손을 거둔다. 그리고 끝나는, 철환의 격통과 비명.

이미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 하얀색 자위만이 터진 핏줄과 함께 눈알을 채울 뿐이다. 경련을 일으키며 떨리는 철환의 몸.

지키지 못한, 군인의 최후였다.

- 후우우우.

정문이 기운을 갈무리하고 앞을 바라본다.

철환의 몸이 바닥에 딱 붙은 그 지점에는.

거대한 모습으로 발한, 하나의 손바닥이 그려져 있다.

도기(道氣)가 가득한, 불장(佛掌)이.

도가의 신공에 불가의 초식이라.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지를.

정문이 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문이 앞으로 나아간다. 철환은 목표가 아니다. 그저 목표를 향해가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

정문의 진정한 목표는.

저 절벽 끝에 서, 이 격돌을 모두 지켜본.

조숭이라는 자일 것이다.

자신을 지켜주던 철환이 죽었다. 천하제일검이라 자부하던 호위무사가. 그리고 조숭이 마주해야 하는 건 거칠기로 유명한 무림인, 무정검.

조숭은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정문은 내심 기대하는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빌지는 않을까. 살려달라고.

아니면 답지 않게 결연히 죽음을 받아들일까. 죽이라며.

어떤 반응이든, 이번 전쟁의 결과는 자신이 이겼음이 분명하리라. 정문은 그런 생각에 조금은 미소를 곁들이며 걸음을 옮겼다.

슬쩍 하늘을 올려보는 정문. 여전히 새 한 마리 없는 창공이 그를 반긴다. 조금은 아쉬워지려는 찰나.

정문의 발이 멈춘다.

그리고 정문의 앞에는.

오래도록 그를 괴롭혀온 악연.

이번 생과 이전 생에 모두 그를 옥죄여 오던 한 인물.

수보 조숭이.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정문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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