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학위사 강찬.
병장기 소리가 가득하던 협곡 아래가 침묵에 물든다. 새롭게 나타난 절벽 위, 한 무리의 군세 때문이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깃대에 적힌 ‘안(安)’이란 글자가 그들의 정체를 표하고 있었다.
무림맹과 신궁, 신궁과 무림맹의 무인들은 모두 이들을 보며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허나, 이들 중 가장 놀란 이들은.
다름 아닌, 조숭이 데려온 호천대일 것이다.
절벽 위 군세의 선두에는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흑마(黑馬)에 올라 자신의 위용을 내뿜고 있다.
큰 귀에 평온한 눈. 동글한 턱에 적당히 얇은 수염이 잘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기품이 뿜어지는. 쩍 벌어진 어깨에 우락부락하지 않은 풍채의 사내가 협곡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색 갑주에 투구를 따로 쓰지 않은 군세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옆으로 다가서는 한 무장. 수장은 그에게 자신이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건네며 고개를 다시금 끄덕였다.
보검을 받아든 무장이 앞으로 나선다. 옥문관의 관주이자, 안왕부의 무장이었던. 양달이다.
양달은 말에서 내려 절벽 끝으로 다가선다. 양측의 딱 가운데 즈음에 선 양달은, 이내 손을 들어 자신이 들고 있는 보검을 이들에게 자랑하듯 내보였다.
금장으로 둘린 보검. 넓이가 다른 협봉검에 비해 아득히 넓은 보검이 이들에게 위용을 자랑한다. 보검의 검갑에는 ‘대명(大明)’이란 글자가 음각으로 파여있다.
“무림맹과 신궁. 신궁과 무림맹의 무림인들은 들으시오!”
보검을 높게 들어 올린 양달이 내력이 달린 목소리로 협곡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다들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감이 가득한 상태로 양달을 향해 고개를 올려 보이는 무인들이다.
“본군은 안왕부 소속의 군인들로, 우선은 두 세력의 사전(私戰)에 개입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혀두는 바이외다!”
사전에 개입하지 않는다. 즉, 관무불침을 여전히 어기지 않겠다는 뚝심 있는 안왕부의 태도가 밝혀진다.
호천대의 무사들만이, 사전(私戰)이라는 말이 강조된 것에, 표정이 어둡게 변해갔다.
양달의 시선이 신궁의 진영을 잠시 더듬더니, 이내 호천대가 있는 곳에 시선을 고정한다.
“황군별동예하(皇軍別棟隸下) 금의위사부(錦衣衛士部) 호천대(護天隊)의 무사들은···!”
보검을 내밀며 호천대를 바라보는 양달. 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상방보검(尙方寶劍)의 명을 받들라!”
!!!!
- 척! 척! 척!
반응은 호천대가 아닌, 무림맹의 진영에서 먼저 터져 나온다. 일시에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펼치는 무림맹의 무사들.
상방보검이란 황제가 하사하는 신물로, 황명과 같은 권한을 위임하는 하나의 상징물이다.
그런 상방보검이 모습을 나타내니, 협의지사와 우국지사를 자처하는 강호의 명숙들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반대로 호천대의 반응이 수상하다. 황군에 소속된 이라면 황명의 황자만 들려도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게 당연한 상황. 호천대는 그저 우물거리는 모습만 보이며 눈치를 보기 바쁘다.
“조장···.”
호천대의 한 무사가 조장급 위사에게 다가가 어찌해야 할지를 묻는다. 조장급 위사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그는 그저 불안한 눈빛으로, 조숭이 있는 곳. 안왕부의 반대편 절벽을 올려볼 뿐이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무어라 개입하여 이들을 두둔해주어야 할 조숭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다못해 철환이라도 나서준다면 좋으련만, 어쩐 일인지. 둘 모두가 침묵해 더욱 당황스러운 호천대 무사들이다.
호천대 모두의 고개가 조숭이 있던 절벽으로 향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들의 눈에. 무언가 하나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누군가 한 명의 인물이. 절벽 끝으로 다가온 것이다.
‘대인께서···?’
제아무리 상방보검이라도 실질적인 권력은 조숭이 쥐고 있다. 호천대는 그런 조숭이 살아있는 한, 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절벽의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의 주인은 조숭이 아니었다. 조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키가 큰. 그리고 너무도 젊어 보이는. 진한 회색의 도복을 입은 무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
“사형!”
“무정검!”
협곡 아래에서는 절벽 위의 무인을 알아본다. 자신들의 대사형, 그리고 무림맹의 무정검, 이정문이 밝게 웃으며 협곡 아래를 내려보고 있었다.
“어, 어째서 저자가···?”
왜 조숭이나 철환이 아닌 저 젊은 도인이 저기에 있을까. 호천대의 그런 의문은 빠르게 해소되었다. 무정검이라 불리는 저 무인의 손에.
조숭이었던 동그란 구체가 하나,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정문이 그대로 조숭의 목을 들어 올린다. 모두 잘 보라는 듯, 높게 들어 올리는 정문. 정문이 조숭의 목을 들어 올리는 것에 맞춰, 맞은 편에 있는 양달 역시, 목을 울렸다.
“수보 조숭은! 황군을 사적으로 움직여 사전에 관여한 죄를 감히 가늠할 수 없다. 이에, 안왕 전하께서는! 직접 황상께 이를 상주해 조숭이 역적이라는 교지를 받았으니! 오늘부로 조숭이라는 이름은···! 시절을 더럽힌 역도로 명하는 바이다!”
양달은 마치 정문과 사전에 모의한 것처럼 정확히 박자를 맞춰 말을 뱉었다. 계속해서 목을 울리는 양달.
“조숭은 죽었다! 호천대는 지엄한 상방보검의 엄명에 따라 이곳에서 철수한다! 이에 따르지 않을 시···! 호천대는 모두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처벌받을 것이다!!”
!!!!
조숭은 이제 역적이다. 상방보검 아래에서 정식으로 임명받은 무장이 선언한바. 그렇다면, 북경에서 사전 작업도 이미 끝났다는 뜻일 것이다.
명령권에 제 일 순위인 조숭은 역적으로 죽었고, 다음인 철환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호천대가 따라야 할 건 명백히 황명.
호천대는 상방보검으로 전해지는 황명을, 거부할 수 없다.
- 처억!
호천대의 조장급 위사들이 앞으로 나선다. 무릎을 꿇으며 가슴에 손을 올리는, 황궁식 예법을 표하는 그들.
“···황군별동예하 금의위사부 호천대.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제법 계산이 들어간 복종이지만, 충돌 없는 수습에 안왕부는 만족하기로 한다.
“···호천대는 전원 절벽 위로 올라 이곳을 떠난다. 또한, 북경을 포함한 중원의 모든 관(官)은. 여전히 이번 중서대전에 불개입을 천명하는 바이니라. 본군이 떠난 후의 일에 대해선. 관은 어떠한 책임도 무림맹이나 신궁에 묻지 않을 것을 밝힌다.”
양달은 말을 마치며 상방보검을 내렸다. 상방보검이 전하는 동안 그가 뱉은 말은 모두 황명에 준하는 것. 그는 그저 황명만을 전하고는 그대로 상방보검을 안왕에게 반납했다.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안왕. 그가 만족스럽게 한 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고는 말 머리를 뒤로 돌렸다.
“이제···, 된 것인가?”
“예, 전하. 거래는 이걸로···, 모두 끝입니다.”
그의 말 머리가 향한 곳에서 그에게 포권하며 고개를 숙이는 한 인물. 눈에 백태가 가득 낀, 흑시창의 창두 조륜이다.
“저자인가? 이번 거래를···, 제안한 사람이.”
“걸출한 무인이지요, 전하.”
안왕은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해 온 절벽 건너편의 무인을 바라봤다.
무림인과는 어떻게든 엮이지 않기 위해 애써왔던 안왕. 이번 일 역시 무정검이라는 무인이 적기에 나서주지 않았다면, 안왕은 무림인과 한 곳에 엮여 역적으로 몰렸을 것이다.
그런 안왕이. 마지막 승부에서는 그토록 멀리하던 무림인과 손을 잡고 평생의 숙적, 조숭을 쳤다.
정치가는 언제든 뒤를 노릴 수 있는 사람. 안왕 역시, 제법 탁월한 식견을 가진 정치가였다.
“일이 마무리되면···, 안왕부에 들르라 전해주게. 이제는 무림인을 밀어낼 필요도 없으니.”
안왕은 조륜에게 마지막 말만을 남기고는 호천대를 호령해 국경으로 돌아갔다. 말 그대로 호천대와 조숭의 일만 수습한 후. 관무불침을 여전히 지킨, 안왕이다.
조륜은 흑시창을 이끌고 절벽 위에 남아있다. 이제 협곡 아래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만약 신궁이 계속해서 항전할 의지가 있다면. 조륜은 무림맹 쪽에 가담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협곡 아래에는 침묵만이 감돈다. 중서대전을 부추겼던 조숭은 죽었고, 호천대는 물러갔다.
전쟁은 계속해야 할까.
무림맹은 서역의 신궁이 중원을 노리지 않는다면, 더는 이들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신궁은, 조숭의 부추김과 협박이 아니라면 당장에 중원을 도모할 여유가 없고.
서로의 사정을, 정문을 통해 알고 있는 두 세력의 수장은. 어떤 방식으로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자정과 국문소, 둘이 동시에 절벽 위, 정문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마치, 답을 알려달라는 그런 눈빛이다.
“흐음, 골치 아프신 모양이네.”
재밌다는 듯 둘을 내려다보는 정문. 절벽 끝에 올라선 그의 얼굴에, 여유가 가득했다. 정문은 어느새 자신을 휘감던 기력을 갈무리하고 조숭의 목마저 뒤로 내팽개쳤다.
전쟁이 끝나 침묵에 빠진.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웃으며 바라보는 정문이다.
[스승님, 먼저 손을 내미시지요.]
정문은 기력을 쏘아 자정의 단전을 울려 전음을 전했다. 이제는 경지를 넘은 정문의 기력 조절이, 절정에 달했다.
“정문···?”
자정은 저 멀리 서 있는 제자의 목소리가 귓속을 울리자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핀다. 전음을 처음 겪은 자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먼저 손을 내미시면, 자연스레 해결될 겁니다.]
정문은 그런 자정의 귓가에 다시금 전음을 울린다. 먼저 손을 내밀라는 말. 이번 전쟁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단서일 것이다.
“······.”
싸우던 상대에게 먼저 손을 건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허나,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한 단체의 수장으로서 못할 일도 아니다.
자정이 앞으로 나아간다. 안왕이 개입하기 전까지 자신과 손을 섞던 신궁의 궁주, 국문소 쪽으로.
긴장하며 국문소를 지키려는 신궁의 무인들. 국문소는 손을 저어 그들을 물리치며 자신의 몸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운데서 만나는 두 무인.
“···조숭이 죽었고, 호천대가 물러갔소. 만약 신궁이 중원으로 진격할 생각이 없다면···. 무림맹은 여기서 회군을 결정할 생각이오.”
담담히. 누구의 승패도 거론하지 않고. 자정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했다. 상대가 그럴 의사만 있다면. 좋게 풀릴 대화였다.
“···무림맹이 신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면 신궁 역시 응전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쩌면, 모든 일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조숭이라는 이름도, 자신들이 협박당했다는 말도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서역의 치부. 적당히 잘 돌려서, 종전의 의사를 전하는 국문소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장담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와 보니···, 그 장담을 어기면 대가가 상당할 듯 보이는군요.”
“아마 그 누군가가 본도가 생각하는 이가 맞는다면···, 대가는 가혹하실 거요.”
“훌륭한 ‘무인’···을 제자로 두셨군요.”
- 씨익.
마주한 두 세력의 수장이 미소를 짓는다. 대화는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를 지켜보는 모두가.
전쟁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 휘익.
둘은 한 번의 눈인사를 나누고 부드럽게 돌아섰다.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둘.
그리고 둘의 입이, 동시에 종전을 알린다.
“전쟁은··· 끝이오!”
“신궁은··· 돌아간다!”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길고 긴, 그리고 힘겹고 힘들었던 전쟁이 끝이 났다. 서로가 물러설 곳 하나 없이 그저 목숨만을 담보삼아 칼을 휘두르던 수라장이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끝이 없을 것 같던 그 전쟁이 끝이 났다는 것. 그게 전부일 테니까.
- 무림맹! 무림맹! 무림맹!
- 신궁! 신궁! 신궁!
승자와 패자가 없는 전쟁이었다. 누군가의 계략에 의해 벌어진 의미 없는 전쟁. 그런 전쟁의 끝에, 서로가 승자가 되어 자신들의 이름으로 협곡을 채운다.
“훗.”
이를 즐겁게 내려다보는 절벽 위의 무인, 무정검. 정문은 자신이 만들어낸, 그리고 살려낸 무인들을 보며 기력을 풀고 밝게 웃고 있었다.
눈 밑으로 보이는 사제의 숫자가 줄지 않아, 더욱 기쁜 정문이다.
- 와아아아아아아!
- 와아아아아아아!
- 저벅. 저벅.
- 와아아아아아아!
함성은 전쟁이 남긴 상처의 격통을 덮어버린다. 그리고, 그 속에 묻힌 또 다른 무언가. 누군가를 향하는 어떤 발소리 하나가, 함성에 묻히고 만다.
정문은 밝게 웃으며 아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지만 무사한 사제들이 정문을 웃으며 반겼다.
“사혀어어어엉!”
“대사형!!”
- 저벅.
“내려 오십쇼!”
“아, 얼른!”
그저 신이 나 기력을 풀고 아래를 바라보는 정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 발소리를, 전혀 알지 못한다.
- 저벅.
느릿하다. 마치 몸속의 뼈가 으스러진 듯 느릿하게 걸어오는 하나의 신형. 벌벌 떨리는 그의 손에는, 하나의 검이 들려있다.
주인을 잃었던, 그런 검이.
신형의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이미 몸속의 기력을 모두 소진해, 아무런 기도가 느껴지지 않는 그런 신형이다.
열심히 절벽 아래를 보며 손을 흔들던 정문. 그런 정문도. 이제는 자신의 뒤로 다가오는 무언가를, 어렴풋이 느끼고 만다.
‘무슨···?’
서둘러 뒤를 돌아보는 정문. 그런 정문에게.
- 타타탓!
“···무정거어엄···!”
온몸의 뼈가 바스러진 채 겨우 검을 잡은 철환이 양팔로 검을 안고 뛰어들고 만다.
!!!
정문은 절벽의 끝에 서 있었다. 아무런 방비도, 또 기력을 두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마주하게 된 철환의 공격.
자신의 주군과 수하, 그리고 명예까지. 모든 걸 잃은 철환이 죽어가는 몸의 진기를 끌어 올려 정문을 향해 칼을 뿜었다.
무공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몸으로 겨우 들어 올린 칼을 정문에게 찔러 넣는 것. 허나, 무공이 아닌 덕분에. 정문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고, 또 방비가 없는 몸으로, 철환의 공격을 맞고 만다.
- 쨍그랑!
철환의 검은 정문의 가슴팍을 그대로 찌른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균형을 잃고 아래로 기울어지는 정문의 눈앞으로 흑요석 파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 목걸이···’
목걸이. 정문이, 아니. 원래 이 몸의 주인인 이정문이 늘 차고 다녔다는 그 목걸이. 그 목걸이에 달린 흑요석 장신구가 검을 맞아 조각이 난 것이다.
철환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흑요석을 뚫고 정문의 가슴을 찌르는 철환의 검. 검으로 뒤엉킨 정문과 철환의 몸은, 그대로 절벽 아래로 향한다.
- 후우우우웅!
“···모든 걸 잃었다! 네놈만은···! 네놈만은···!”
“크윽!”
검이 제법 깊게 박혀 피가 차오르는 정문의 목. 정문은 올라오는 토혈에도 우선은 해야 할 일을 한다. 기력을 가득 담은 정문의 손이, 철환의 관자놀이를 향했다.
- 퍼어엉!
“커윽-!”
터져버리는 철환의 머리통. 정문이 때린 반대편으로 뇌수(腦髓)가 터지며 철환이 절명에 이르고 만다. 진작에 했어야, 했던 일이다.
철환의 신형은 정문과 떨어진 곳에서 더욱 빠르게 바닥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리고 흩날리는 흑요석 조각과 함께 아래로 향하는 정문의 신형.
흑요석이 아름드리 흩날릴수록. 정문의 의식이 흐려져 갔다.
“사혀어어어어어엉!”
“대사혀어어어어엉!”
“무정검!!!!!!!”
“정문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들. 그런 소리에 휩싸이며 절벽으로 떨어지는 정문.
주변의 모든 환경이 느리게만 느껴지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희미해져 간다.
흑요석이 깨어져 흩날리는 가루 사이에서, 정문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 또옥.
한 줄기 물방울이 떨어지며 파문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내 그 파문이 발목에 닿자, 자신을 자극하는 파문에 반응하는 인물.
조금 전, 절벽에서 떨어진 무정검, 이정문이다.
‘여긴···?’
익숙한 곳이다. 이전에 한 번. 아마 자정이 흑요석 반지로 자신의 이마를 만졌을 즈음. 그때 닿았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세계.
아마, 그쯤이겠지.
주변은 컴컴하다. 보이는 건 없고 발목까지 들어찬 정체를 알 수 없는 물만이 있을 뿐.
어쩌면 이게 사후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랜만이네.”
!!!!
어떤 목소리가 정문을 반긴다. 익숙하고 정겨운 목소리. 정문은 이 목소리의 주인을 모르지 않아, 크게 놀라고 만다.
- 휘익.
정문이 고개를 돌린다.
“무정검 이정문···, 아니.”
그리고 마주하게 되는 목소리의 주인공.
“학위사 강찬.”
정문은, 또 다른 이정문과 마주했다.
진짜, 공동파의 대제자, 이정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