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2화 (3/61)

제 2 장       당 신 을   만 나 고   싶 었 어 요

1

황혼이 붉게 물든 가을 저녁에 철각령(鐵角嶺)의 고개를

넘어본 사람이라면 그 단풍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등에 백왕의 가죽이라도 짊어지고 있다면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철각령은 산서성(山西省)의 동북쪽에 있는 높다란

고갯마루였다. 안문관(雁門關)에서 멀지 않았고, 대(代)에서

대동(大同)으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할 고개이기도 했다.

노독행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철각령의 단풍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철각령의 단풍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장백산을 떠난 지 십 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곳은 아직 단풍이 떨어지지 않았다.

철각령은 산이 많은 산서성내에서도 험준하기로 유명한

고개였지만 그는 조금도 힘든 줄을 몰랐다.

그가 막 철각령의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였다.

두두두...

등뒤에서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산 아래에서

한떼의 인마(人馬)가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독행이 옆으로 비켜서자 말의 거친 숨소리가 다가오며 세

필의 말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노독행은 힐끗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말위에는 세 명의 남녀(男女)가 타고 있었다.

가장 앞선 인물은 짙은 남색 장삼을 입은 청년이었고 그뒤에는

체구가 거대한 금포중년인이 있었다. 제일 마지막의 인물은

전신에 흑의경장을 한 여인이었는데 얼굴에는 검은 망사를 써서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두두두....

세 필의 말이 달려나가며 뿌연 흙먼지가 하늘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들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갈 때 그는 흑의경장여인의 눈과

잠깐 마주쳤다.

망사사이로 살짝 드러난 그녀의 눈빛은 밤하늘의 유성처럼

영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뿐이었다.

그녀는 다른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말을 달려 사라져갔고,

노독행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하나 그 짧은 만남이 두 사람의 앞길에 그토록 질긴

운명(運命)의 끈을 드리우게 될 줄을 그들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               *             *

철각령의 정상을 넘자 저 멀리 집의 대문이 보였다.

노독행의 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빨라졌다.

한 달 만이었다.

한 달 전에 훌쩍 집을 나선 뒤 이천 리가 넘는 길을 걸어

장백산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노독행은 늦지 않게

도착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방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있었다.

노독행은 방 한쪽에 가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할 때 누군가가 방해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자신도 남들이

무엇을 할 때 방해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안색은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참동안

편지를 들여다 보고 있던 아버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한쪽

구석에 그가 서 있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때는 벌써 그가 방에 들어온 지 거의 반 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언제 돌아왔느냐?"

아버지의 음성은 언제 들어도 묵직했다. 노독행은 아버지의 이

묵직한 음성을 좋아했다.

"방금 왔습니다."

아버지는 묵묵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푸르뎅뎅했고,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어 흉흉해 보였다. 옷에 가려져 있지만 전신에도 적지 않은

상처들이 나 있을게 뻔했다.

아버지는 물끄러미 그의 상처가 가득한 얼굴을 보다가 시선이

왼쪽 팔로 향했다.

"팔은 괜찮느냐?"

그의 왼쪽 팔은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는데 붕대 사이로

붉은 혈흔(血痕)이 내비치고 있었다.

노독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가 어디에서 이런 상처를 입었는지 묻지 않았다.

노독행도 그것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혼자의 의지(意志)로 자신의 몸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였고,

아버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럼 됐다. 이제 가서 쉬거라."

노독행은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손님이 왔습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느냐?"

"철각령을 넘을 때 몇 사람이 이쪽으로 오는걸 보았습니다."

"그들은 후원에 있다. 잠시후에 나는 그들과 어디를 갔다

와야겠다."

아버지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과 어디를 가야 하는지

말하지 않았고 노독행도 더는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들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으면 벌써 말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천하의 누가 물어보아도 아버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방을 나오자 그는 형을 찾아갔다.

"돌아왔구나."

형은 언제나처럼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노독행은 말없이 백왕의 가죽을 내밀었다.

형은 백왕의 탐스런 털가죽을 쓰다듬으며 그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와 동여맨 왼쪽 팔을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놈을 잡으려고 고생깨나 했겠구나. 나도 다행히 늦지 않게

완성을 했지."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으로 다가가더니 벽에 두른

휘장을 걷었다.

휘장뒤에는 하나의 커다란 나무의자가 놓여 있었다.

노독행은 한 눈에 그 의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거대한 오동나무를 잘라 정교하게 다듬은 것으로, 단

한 군데도 못질을 하거나 이은 곳이 없이 통째로 연결된

것이었다.

공예품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훌륭한 조각품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 일이 결정된 것은 한 달전이었다.

그때 그들은 한 달앞으로 다가온 아버지의 생일날에 무엇을

선물할까 하는 문제를 상의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좋은 의견을

말한 사람은 형이었다.

"아무래도 의자를 만들어 드리는게 좋을 것 같구나. 지금

아버님이 사용하시는 의자는 조금 작아서 가끔 불편해 하시는 것

같다."

"그럼 형이 의자를 만드세요. 나는 그 의자에 씌울 짐승가죽을

구해오겠습니다."

형은 승락을 했고, 그는 그날 밤에 집을 떠났다. 그리고 한

달만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형의 솜씨는 과연 뛰어났다.

백왕의 가죽을 그 나무의자에 씌우자 그것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호피(虎皮)의자가 되었다. 아마 형 외에 백왕의

가죽에 이토록 어울리는 의자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형은 온화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백왕의 가죽을

씌운 의자를 만졌다.

"내일 아버님께서 이것을 보시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가죽이 정말 좋구나."

노독행은 잘라 말했다.

"의자가 더 낫습니다."

형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말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형의 나이는 노독행보다 네 살이 더 많았다. 노독행과는

성격도 틀리고 얼굴모습도 전혀 닮지 않았다. 아버지도 형을

보고 생김새나 행동이 꼭 죽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하곤 했다.

노독행은 아버지를 닮은 편이었다.

"바람을 좀 쐴까?"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서쪽 하늘은 온통 노을에 물들어 세상을 붉은 색으로 칠해

놓은 것 같았다. 노독행은 문득 그 붉게 물든 노을이 꼭 핏빛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양이 정말 아름답군."

형은 기울어져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한동안 두 형제는 우두커니 노을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형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오기 조금전에 세 사람이 아버님을 찾아왔다."

노독행은 말없이 형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후원에 있는데 나는 그들중 한 사람의 얼굴을

전에 본 적이 있지. 그의 이름은 신도비응(神刀飛鷹)

엽표(葉豹)라고 한다."

노독행도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노독행은 잠시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자는 혹시 남삼을 입고 얼굴이 길쭉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형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다. 그들을 만났느냐?"

"이곳에 오기전에 세 사람이 이쪽으로 오는걸 보았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누구지요?"

"둘다 내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짐작은 할 수 있지.

체구가 큰 금삼중년인은 아마도 엽표와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무적철환(無敵鐵丸) 구여해(丘如海)일 거야."

구여해란 이름을 듣고서야 노독행은 엽표의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생각이 났다.

엽표와 구여해!

그들은 바로 강북(江北)을 석권한 천상회(天上會)의 고수들로

새외쌍절(塞外雙絶)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이었다.

천상회는 강북의 크고 작은 십삼개 문파(門派)를 연합하여

명실상부한 강북무림의 최고세력으로 부상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조직은 엄밀하고 방대했으며, 행사가 치밀하고 집요해서

강호무림에서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천상회의 고수들이 이곳을 무슨 일로 찾아왔을까?

노독행은 진짜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들과 동행한 여자는?"

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엽표와 구여해는 천상회에서도 서열 이십 위안에 드는

절정고수들이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온 그 여자도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지."

형의 눈은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노독행은 형의 눈빛이 꼭

별빛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엽표와 구여해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로 보아 그녀는 그들보다

지위가 높은게 분명하다. 천상회에서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여자는 오직 세 명 뿐인데 그중 한 여자는

머리가 백발(白髮)이고 한 여자는 기형적으로 뚱뚱하다."

노독행이 조금 전에 본 흑의망사녀는 백발도 아니고

뚱뚱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남은 여자는 오직 하나뿐이지."

"그녀가 누굽니까?"

"그녀는 바로..."

바로 그때 그들의 뒤에서 하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마표향(司馬飄香)."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직한 저음의 음성이었다.

두 형제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의 뒤에는 흑의경장을 한 훤칠한 키의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흑의여인의 얼굴에는 검은 망사가 드리워져 있어 아쉽게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나 망사너머로 내비치는 그녀의

눈빛은 밤하늘의 유성보다도 영롱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심혼(心魂)마저 녹아버릴 듯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형은 눈을 빛낸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무어라고 하셨소?"

흑의망사녀는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사마표향이라고 했어요."

그녀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어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사마표향이라는 이름을 듣자 형은 아무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노독행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마표향!

그녀에 대한 이름은 노독행도 들은 적이 있었다.

-강남(江南)에는 피다만 연꽃 하나, 강북에는 떠도는 향기

하나...

이것은 요즘 강호무림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노래였다. 이 노래가 가리키는 것은 두 명의 여인으로,

남연(南蓮)과 북향(北香)이라고 했다.

그중 북향이 바로 사마표향이었다.

그녀는 천상회의 당대(當代) 회주(會主)인

사마일련(司馬日聯)의 외동딸로, 미모나 무공이 백 년내

무림에서 배출된 여고수들중 가장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마표향의 시선은 줄곧 형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묵묵히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마표향이 다시 예의 독특한 저음으로 말했다.

"그 전부터 당신을 한 번 만나고 싶었어요."

형은 담담하게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

사마표향의 눈빛은 유성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노가살수문(路家殺手門)에 수재(秀才)와 독종(毒種)이 한

명씩 있다는건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당신이 바로

노가수재(路家秀才)라는 노군행(路君行)이지요?"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노군행이오. 그리고 이쪽은 내 동생인 노독행이라

하오."

형은 그녀에게 노독행을 소개했으나 그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짤막하나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당신이에요."

노독행은 여전히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말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형은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으나 그를 막지는 않았다.

누구라해도 노독행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독행이 이곳에 더 있고 싶었다면 누구도 그를 떠나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다면 누구도

그를 제지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독행은 형과 사마표향을 남겨두고 혼자서 뒷뜰로 갔다.

휘이잉...!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옷자락을 펄럭이고 지나갔다. 그는

커다란 고목나무에 등을 기대고 섰다.

생각만큼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마표향과 형이 혼사(婚事)가 오가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만나고 싶은 상대가 다름아닌 형이라는

것이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형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이상야릇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형은 언제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재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됨이

준수하고 관옥(冠玉)같아서 그를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탄복해

마지않는 젊은이였다.

반면에 노독행은 말이 없고 무뚝뚝하며 과격했다. 그의

냉혹하리만치 거칠고 과격한 성격은 어려서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렸을때 노독행은 형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형이 머리를 잔뜩 헝클어주면 그 상태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곤 했다.

한번은 막내삼촌의 친구 한 사람이 멀리에서 놀러왔다가 그런

그를 보고 미친 망나니같은 꼬마라고 웃은 적이 있었다.

노독행은 그 사람을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는 삼촌의 친구에게 다가가

오른 손을 휘둘렀다. 그의 고사리같은 손에는 주방에서 들고온

날이 시퍼런 식칼이 쥐어져 있었다.

삼촌의 친구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영원히 왼쪽 팔을 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막내삼촌은 그 일로 그를 꾸짖지는 않았다. 단지 씁쓸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너는 너무 살기가 짙구나. 아마도 우리 가문(家門)은 너로

인해 흥하거나 망하게 될 것이다."

그 뒤로 그를 놀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열 세살때 외가(外家)의 친척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노독행의 성격이 소문처럼 그렇게 대단한가 궁금해서 그에게

물었다.

"너는 올해 열 세 살이지?"

"그래요."

"너는 진무양(秦舞陽)이란 사람을 알고 있니?"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그 친척은 피식 웃었다.

"그럼 형가(荊軻)는 알겠지?"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자객말인가요?"

"그래. 진무양은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을때 그를

따라갔던 용맹무쌍한 인물이다."

그는 노독행을 바라보며 빙글거렸다.

"진무양은 네 나이때인 열 세살때 이미 사람을 죽여서 천하에

명성을 떨쳤지. 그런데 너는 아직 사람을 죽이기는 커녕 싸워본

적도 없겠지?"

노독행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사람을 죽여보지 않고는 아직 사나이라고 할 수 없다. 너는

남자일지는 몰라도 사나이는 아니야. 기껏해야 어린 아이일

뿐이지."

아마 반쯤은 놀리려는 뜻에서 한 말이었겠으나 열 세살의

소년에게는 너무 심한 말이었다.

열 세살이란 나이는 소년에게는 무척 민감한 시절이었다.

이 또래의 소년들에게 가장 모욕적인 말은 바로 어린아이라는

말이었다. 다른 소년들이라면 얼굴이 시뻘게지거나 이를 갈아

붙였을 테고 성질이 과격한 소년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독행은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친척은 필시 노독행이 길길이 날뛰려니 하고 그 모습을

감상하려고 있다가 그가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자 어리둥절했다.

그때 마침 그들에게로 다가오던 노독행의 아버지가 노독행의

얼굴을 보고는 안색이 대변해 쏜살같이 달려왔다.

"바보같은...."

아버지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노독행의 양쪽 뺨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그의 입에 집어 넣어 이를 깨물지 못하게

했다.

그 친척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이미 노독행의

입가로는 한 줄기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노독행이 스스로 혓바닥을 깨물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동작이 조금만 늦었으면 노독행의 혀는 완전히

잘라졌을 것이다.

아버지는 노독행을 꾸짖지 않았다. 그 친척에게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친척은 그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져서 그날중으로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이 일이 있은 뒤로 그가 화를 내면 자신을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무서워진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와

이야기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우연하게 그를 마주쳐도 슬슬

피하기만 했다. 노독행은 그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사람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짐승의 뒤를  기 시작했다.

사냥만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짐승의 뒤를  고,

추격을 하고, 습격을 해서 그 배를 가르고 신선한 피를 마실

때처럼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짐승을 사냥하는 것이고, 그의 유일한

말상대는 오직 형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아버지가 있다.

그는 항상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일생(一生)에서 좋아하는 일이 있고, 이야기할

상대가 있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노독행은 문득 어두워오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검은 비단을 펼쳐놓은 것 같은 밤하늘에는 보석같은 별들이

점점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저 별빛을 닮았군...'

그 찬연히 빛나는 별빛을 보며 노독행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검은 망사사이로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

한 번 본 순간 그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각인(刻印)이 되어버린

눈이다.

아쉽게도 그 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

눈은 처음 나타났을 때 부터 오직 다른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노독행은 그 사람이 형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그 반대인가?

쾅!

노독행은 왼손으로 옆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후려쳤다.

상처가 다시 터지며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왔다. 짜릿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온 몸으로 퍼져오는 통증을

느끼며 노독행은 피식 웃었다.

'다시 사냥을 가야겠군. 이번에는 어느 쪽으로 갈까?'

그는 이번에 길을 떠나면 형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때쯤이면 모든 일은 끝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별빛을 닮은 눈 같은 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있을

것이다.

그날 밤, 아버지는 사마표향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났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노독행은 그들이 가는

곳이 천상회일 거라고 짐작했다.

아마 사마일련을 만나서 형의 혼사를 마무리지으려는

것이겠지...

떠나기 전, 사마표향은 형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형이 그것을 받아들었을 때 그녀는 말머리를 돌려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다가닥...다가닥...

형은 뿌연 흙먼지를 뿌리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손에 잡힌 물건을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피처럼 붉게 핀 한 송이 장미꽃이었다.

붉은 빛이 너무도 선명해서 어둠속에 핀 한 떨기

혈화(血花)같았다.

형은 붉은 장미꽃을 천천히 코에 갖다 대었다.

아마 진한 향기가 풍겨나오겠지....

떠도는 향기(飄香)가...

노독행은 당장 내일 길을 떠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2

노독행이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형이 들어왔다.

준비라고 해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소금에 절인 쇠고기를 바짝 말린 육포와 두툼한 털옷 두 벌,

팔에 감을 수 있는 물소가죽으로 된 붕대 몇 개, 십 여개의

단도, 쇠로 만들어 깨어지지 않는 술병과 약간의 은자, 그리고

죽창 한 개면 그만이었다.

이 이상은 장비가 아니라 오히려 짐만 될 뿐이었다.

노독행은 이보다 적은 장비로도 산속에서 석 달동안 겨울을

지낸 적도 있었다.

그것은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혹독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당시의 일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형은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노독행이 장비를 꾸리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독행이 가죽붕대를 왼팔에 감고, 검고 윤기가 나는

가죽주머니 하나를 옆구리에 차자 형은 불쑥 물었다.

"그 주머니는 무엇에 쓰는거냐?"

"갓 잡은 짐승의 간(肝)을 넣어두는 거에요."

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왜?"

노독행은 형도 모르는 것이 다 있구나하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식지 말라고 그러는 겁니다. 뜨거운 간은 산속에서는 최고의

식량이 되거든요."

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형은 별다른 말없이 노독행이 각반을 메고 열 다섯

개의 단도를 허리띠에 차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두 번인가 형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다가 머뭇거렸다.

평소의 형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다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떠날 생각을 했느냐?"

노독행은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제작년에 제가 오대산(五臺山)에서 몇 달간 지낸 적이

있지요?"

"그래. 겨울내내 그곳에서 보냈지. 그때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오대산의 겨울은 매섭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노독행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오대산 현통사(顯通寺)의 주지스님에게 몇 년후에 다시

오기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형님도 알다시피 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자는 성미 아닙니까?"

형은 노독행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성격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너는 아직도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

"오대산에 가는 것은 언제라도 갈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오늘 가야할 필요는 없지."

형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는 사냥을 다녀온 후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에 길을

떠나곤 했다. 더구나 이번처럼 부상이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로 사냥을 가지 않았지. 무엇때문에 너는 집에 온지 하루도

되지 않아 다시 떠나려는거냐?"

노독행은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에게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별빛을 닮은 눈동자 때문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전혀 평소의 형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네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만...이번에 아버님이 가신 일은

어쩌면 상상외로 흉험할지 모른다."

노독행은 형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제 아버지가 떠난 것은 형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의 음성이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나는 요즘 천상회 내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님께서 천상회에 가신다기에 혹시나

했는데...어제밤에 아버님은 그들과 떠나기 바로 전에 나를 불러

월영도(月影刀)를 맡기셨다."

처음으로 노독행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월영도는 그의 가문의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보도(秘傳寶刀)였다. 그것은 그의 집안의 상징이며

가주(家主)의 신물(信物)이었다.

그것을 맡긴다는 것은 곧 가주의 지위를 인계한다는

것이나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형에게 가주의 지위를 인계한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노독행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형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침울하게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아버님이 월영도를 내게 맡기신 것으로 보아 이번 길은

생사(生死)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험하고 위험한 여정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이 무사히 돌아오실 때까지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

노독행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에는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붉은 노을이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었다.

정말 붉은 노을이었고, 아름다운 석양이었다.

노독행은 묵묵히 붉게 물든 황혼을 바라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형은 그 핏빛 노을과 같은 불길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도 형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참 후에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하나 그가 채 장비를 푸르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들을

찾아왔다.

그 사람은 하나의 상자를 들고 있었다.

사람 하나.

상자 하나.

상자는 그리 크지 않았다. 질좋은 오동나무로 만든 상자는

사방 길이가 한 자 정도 되어 보였다.

상자를 들고 온 사람은 흑의를 입고 비쩍 마른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낮빛이 유령처럼 창백했고, 두 눈에도 별다른

신광(神光)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 흑의중년인을 보는 순간 형의 안색은 약간 변했다.

"저 자는 천상회의 삼대사자(三代使者)중 하나인

냉면판관(冷面判官) 임빙(任氷)이다."

형은 노독행에게 소근거렸다.

노독행은 강호의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냉면판관

임빙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천상회의

삼대사자가 천상회주(天上會主)의 측근중의 측근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형이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임빙은 불쑥 상자를

내밀었다.

형은 조금 망설이다가 상자를 받았다.

노독행이라면 상자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유없이

남에게서 물건을 받지 않는다.

하나 어찌되었건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받았던 받지

않았던 상자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금새 알게 되었을 테니까.

뚝...뚝....

상자밑으로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그리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비릿한 피비린내...

형은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상자속에는 하나의 잘려진 손이 있을 뿐이었다.

피가 잔뜩 묻은 채 손목아래로 잘려져 나간 커다란 손.

바로 아버지의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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