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4화 (5/61)

제 4 장        왜    걷 냐 고 ?

1

암도는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노독행은 질풍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암도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미친 듯이 달리지 않으면 그의 가슴은 그대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노독행은 자신이 형과 가족들을 죽음속에 놓아두고 혼자서만

도망친다는 생각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로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을

후벼파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는 의식적으로 한 가지 생각만을 하려고 했다.

-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서 이 복수를 해야만 한다.

멀리 짙은 어둠속에 암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곳을 빠져나가면 그는 우거진 숲속으로 모습을 감출 수

있을 것이다.

휘이잉!

차가운 밤바람이 암도의 끝에서 불어왔다.

그 순간 노독행은 우뚝 몸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이상한 종적을 알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본능(本能)이 갑자기 그를 제지했던 것이다.

노독행은 그 자리에 몸을 멈춘 채 한동안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다시 한 차례 밤바람이 불어왔다.

그때 비로소 노독행은 왜 자신이 몸을 멈추었는지를 깨달았다.

불어오는 밤바람속에서 한 줄기 희미한 냄새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냄새...

바로 사람의 냄새였다.

오랜 세월동안 사냥으로 단련된 그의 예민한 후각이

아니었으면 결코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암도의 밖에 사람이 있다.'

노독행은 머리끝이 쭈삣해졌다.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노독행은 두려움 따위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단지 그는 어떤 심각한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위험에 대한 그의 예감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때문에 몇 번이나 맹수들의 무서운 습격에서 살아난

적도 있었다.

평상시라면 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을 때는

다른 길로 돌아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위험은

부딪치는 것보다 피하는게 더 안전했다.

하나 이곳에서 다른 길이란 없었다. 온 길을 돌아갈 수 없다면

앞에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뚫고나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노독행은 즉시 겉옷을 벗어서 바닥에서 돌맹이 하나를 주어

벗은 겉옷으로 칭칭 싸맸다. 그런 다음 허리에 차고 있는

단도집을 뽑기 쉬운 상태로 다시 고쳐 매고는 죽창을 오른

손으로 힘껏 움켜 잡았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는 암도밖의 짙은 어둠속을 노려보다가 돌맹이로 싼 겉옷을

밖의 어둠속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쐐액!

겉옷이 막 암도를 벗어난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

싸늘한 폭갈이 터지며 어디선가 시퍼런 광망이 겉옷을 향해

그대로 짓쳐들었다.

쾅!

겉옷과 그 속의 돌맹이가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뿌렸다.

"속았다!"

탄성인지 신음성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오며 어둠속에서 몇

개의 인영이 번개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그들은 전신에 피처럼 붉은 홍포(紅袍)를 걸친 세 명의

괴인들이었다. 혈포괴인들은 암도의 입구에 내려서자 재빨리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저 쪽이다!"

그들중 중앙의 혈포괴인이 북쪽 수림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짙은 어둠속, 이십 여장 밖에 하나의 인영이 우거진

수림속으로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는 광경이 희미하게 드러나

보였다.

혈포괴인은 차갑게 웃었다.

"흐흐...제법 약은 수작을 부리는군. 하지만 그쪽에는 이미

넷째와 일곱째가 지키고 있다. 우리 장홍칠절(長紅七絶)이

있는한 네 놈은 오늘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혈포괴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다른 두 명의 괴인들과 함께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의 몸은 어찌나 빨리 움직이던지 시뻘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고 느낀 순간 그들의 신형은 어느 새 북쪽 수림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                *

'형(形)이 부정하면 법(法)은 존재하지 않는다.'

형이란 무엇인가?

형이란 형태다.

도자기의 그릇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예로 말하면

초식(招式)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진리이다.

도자기속의 물건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예로 말하면

무도(武道)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이 부정하면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뜻은 모든

무예는 형 속에 법이 존재한다, 즉 초식속에 무도가 있다는

말이다.

무도란 초식과 초식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며, 무도가 곧

초식 그 자체는 아니다. 마치 그릇으로부터 그릇으로 옮겨가듯이

초식과 초식의 움직임의 흐름에 따라서 무도가 움직이며, 이

흐름의 강약과 완급에 따라서 무도의 생명이 좌우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형(形)은 과연 무도를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릇은 그 빈 속을 이용하는 것 뿐이다.

무쌍류는 '그릇없는 속'과 같다.

무쌍류 무예의 본질은 상대에 따라 어떻게 응용하느냐 하는 것

뿐이다.

무쌍류는 형이나 초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쌍류는

무형지형(無形之形)이며 무식지식(無式之式)이다.

하지만 형이 없는 무쌍류속에 천하의 모든 기법이 있다.

최강의 무도는 바로 형을 초월하는 것이다.

무쌍류가 천 년동안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것은 바로 형을

초월한 최강의 무도이기 때문이다.

- '무쌍류비전총요' 중에서.

*             *               *

암도를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에 화악 닿아왔다.

노독행은 전력을 다해 겉옷을 던진 곳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암도의 밖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울창한

수림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나뭇가지와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얼굴이 잔가지에 사정없이 부딪쳐 왔으나 쓰라림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

노독행의 몸이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십 여장 앞.

칠흑같이 어두운 수림의 어둠속에 두 개의 희끗한 붉은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두 붉은 인영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은 어둠을 환히 밝힐

만큼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전신에 시뻘건 혈포를 걸친 삼십 대 초반의

괴인들이었다. 우측의 괴인은 수중에 두 자 크기의 붉은 빛이

감도는 손도끼를 들고 있었고, 좌측의 괴인은 독사를 연상시키는

채찍을 왼쪽 팔뚝에 칭칭 감고 있었다.

혈부(血斧)를 든 괴인이 노독행을 바라보며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과연 이곳으로 도망쳐 왔구나. 노가애송이! 이제

이곳이 네 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노독행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말없이 앞으로 질풍같이 달려가며 양 손을

휘둘렀다.

쾌액!

두 가닥 뇌전과 같은 광망과 함께 두 개의 단도가

혈포괴인들에게로 쏘아져갔다. 그 속도와 위력은 십 칠세 소년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 혈포괴인들의 얼굴에는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가소로운 짓을 하고 있군. 감히 우리가 누군줄 알고..."

까깡!

혈부를 든 괴인이 장난처럼 손을 휘두르자 두 개의 단도는

도끼에 맞아 맥없이 허공으로 튕겨져 올랐다. 하나 그때

혈부괴인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가 막 두 개의 단도를 튕겨내고 손을 거두려는 그 순간에

날카로운 죽창 하나가 어느 사이엔가 그의 코끝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설마 노독행이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을

해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완전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그는 다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황급히 혈부를 얼굴로

치켜올렸다.

땅!

아슬아슬하게 죽창의 끝이 혈부에 가로막혔다.

혈부괴인은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마터면 그 죽창에

그대로 머리를 꿰뚫릴 뻔 했던 것이다.

그가 미처 놀란 마음을 추스릴 사이도 없이 노독행의 발이

날라왔다.

하나 그때 다른 한편에 있던 혈편을 든 괴인이 오른손을 쭈욱

내뻗었다.

쉬악!

마치 하나의 시뻘건 독사가 꿈틀거리며 날아오는 듯 했다.

쫘악!

노독행의 오른발이 혈편에 휘감기며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통증을 느낄 사이도 없이 노독행의 몸은 혈편에 이끌려

그쪽으로 주르르 딸려갔다. 노독행은 자신의 오른발목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린 핏빛 채찍을 힘껏 잡고 오히려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혈편괴인을 향해 몸을 던지듯 날아가는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

새 하나의 단도가 예리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미친 놈!"

혈편괴인은 탄성인지 욕설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채찍을

든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파아앗!

노독행의 오른쪽 발목에 감겨 있던 채찍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허공으로 쭈욱 솟구쳤다. 노독행의 몸은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그런데도 그는 혈편괴인의 목을 찔러가는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빌어먹을..."

혈편괴인이 나직한 욕설을 터뜨리며 채찍을 거두고 훌쩍 뒤로

물러났다.

땅에 몸이 채 내려서기도 전에 노독행은 다시 두 괴인을

향해서 네 개의 단도를 내던졌다.

팟! 팟!

어둠속에서 시퍼런 광망을 뿌리며 날아드는 단도는 음산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두 혈포괴인이 다시 몸을 날려

네 개의 단도를 피했을 때는 노독행의 몸은 이미 짙은

수림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두 혈포괴인이 노독행의 앞을 가로막고, 노독행이 아무런

말없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격퇴시키고 사라지기 까지는

그야말로 숨 한 번 크게 내쉴 시간밖에는 흐르지 않았다.

두 혈포괴인은 어이가 없는지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은 일평생을 무림의 도산검림(刀山劍林)속에서 보내며

온갖 괴이한 일을 겪었지만 아직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녀석에게 이런 꼴을 당한 적은 없었다.

혈부괴인이 이를 부드득 갈아 붙였다.

"이런 찢어 죽일 놈...! 사도형(司徒兄). 어서 그 놈을

아갑시다. 내 오늘 그 놈의 배를 가르고 심장을 뽑아 내지

않는다면 성을 갈아 버리겠소!"

혈편괴인은 그보다는 한결 침착했다.

그는 냉정한 눈으로 노독행이 사라진 어둠속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서두르지 말게. 그 놈이 도망친 곳은 곽이형(郭二兄)이 있는

곳일세. 그 놈에게는 오늘밤이 지옥보다도 더 끔찍한 것이

될걸세."

쾌액!

검(劍)은 독사의 이빨보다 더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이었다.

노독행이 정신없이 앞으로 치달려 가고 있을 때 문득

어둠속에서 하나의 검이 불쑥 날아든 것이다. 그 검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빠르게 날아왔는지라 설사 알고 있다 할지라도

완벽하게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노독행이 그 살인적인 일검(一劍)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초인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반사신경덕분이었다.

우수수...

검날이 그의 머리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머리카락이 한 웅큼이나 잘려 허공에 나풀거렸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구! 구!

어둠속에서 무언가 희끄레한 인영이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두

가닥의 예리한 검광이 주춤거리고 있는 노독행의 미간과 오른쪽

어깨를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그 출수(出手)의 악독함과 방위의 완벽함은 치를 떨게할

정도였다.

창!

노독행은 간신히 죽창을 들어 미간으로 날아드는 검광을

막아냈다.

죽창이 반으로 잘려나갔다.

하나 그 순간 어깨를 향해 날아들던 검광은 사정없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팟!

오른쪽 어깨가 쫘악 갈라지며 핏줄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노독행은 거의 반사적으로 왼손으로 두 개의 단도를

어둠속으로 날렸다.

인영은 너무도 수월하게 두 개의 단도를 피하며 그에게로 바짝

다가들었다.

쾌액!

그와 함께 거의 빛살같은 검광 하나가 그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폭사되어 왔다.

그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노독행은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왼쪽 눈을 검에

관통당했다.

쭈악!

시뻘건 선혈이 하늘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비명을 지르기는 커녕 오히려 검으로 자신의 눈을

찌른 인물에게 덤벼들었다.

"엇?"

그 인영이 움찔하여 몸을 멈추는 순간에 노독행은 번개같이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그 인영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물체를 손으로 잡았다.

순간 그는 질겁을 했다.

그의 손에 잡힌 물컹한 물체는 다름아닌 시뻘건 선혈이 묻어

있는 사람의 눈동자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검에

관통당했던 노독행의 눈알이었다.

그 인영은 장홍칠절의 둘째인 홍검유명(紅劍幽命)

곽일로(郭一怒)였다.

곽일로는 수 십년간 강호를 종횡(縱橫)하면서 수많은 잔혹한

장면을 겪어왔지만 자신의 눈알을 파내 상대에게 던지는 인물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동안에 노독행의 몸은 벌써

저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곽일로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노독행이 사라진 곳을 바라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입가에 잔혹한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과연 노가살수문의 제일가는 독종(毒種)답군. 하지만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음산한 미소를 날리며 노독행이 사라진 쪽으로 몸을

날려갔다.

2

형의 시체를 보았을 때 노독행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형의 시체는 그가 달려가는 귀면암의 한쪽 바위모퉁이에 보기

흉하게 걸려 있었다. 바위 사방에 횃불이 환하게 불타고 있어

그는 형의 시체를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갈가리 찢겨져 거의 누더기처럼 변한 옷...멀쩡한 곳이라고는

단 한군데도 없이 철저히 짓이겨진 양 팔과 다리...난자질당한

가슴과 아랫배....

그리고 풀어 헤쳐진 머리....

그 머리를 보는 순간, 그 머리의 중앙에 뚫려 있는 두 개의

눈을 보는 순간 노독행은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그것은 너무도 눈에 익은 형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한쪽 눈이 검에 꿰뚫렸다는 고통은 어디론가로 달아나

버렸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형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원한에 가득차 부릅떠진 형의 눈동자를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서 있었다.

"크흐흐...이 놈!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겠지?"

그의 등뒤에서 한 줄기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을 때도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가 칼로 그의 등을 찌르지 않았으면 그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 것이다.

하나의 차갑고 예리한 것이 자신의 왼쪽 등허리부근을

파고들자 노독행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는 고통보다는 엄청난

분노를 느끼며 홱 몸을 돌렸다.

그의 등뒤에 청삼중년인 하나가 막 그의 등을 장검으로 찌르고

있다가 그가 몸을 돌리자 움찔하여 쳐다보았다. 노독행은 단번에

그 청삼중년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는 그대로 청삼중년인에게로 달려들며 주먹을 날렸다.

청삼중년인, 조양홍은 노독행의 왼쪽 눈에 뚫린 시뻘건 구멍을

보고 한순간에 기가 질린 것이 분명했다.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져 움찔해 있을 때 노독행의 주먹은 정통으로 그의 콧등을

가격했다.

쾅!

벼락치는 듯한 음향이 울리며 조양홍의 우뚝솟은 콧날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조양홍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나

그는 이를 악물며 노독행의 등에 꽂았던 검을 더욱 깊숙히 밀어

넣었다.

푹!

장검이 노독행의 옆구리를 뚫고 반대쪽으로 삐져나왔다.

노독행은 고통을 모르는 한 마리 야수처럼 조양홍을 향해 거푸

주먹을 날렸다.

한 마리의 미친 야수와도 같았다.

옆구리에 검이 꽂힌 상태에서도 그는 거의 광기(狂氣)에

가까운 살기에 사로잡혀 조양홍의 전신을 무차별로 강타했다.

조양홍의 광대뼈를 움푹 꺼지게 했을 때 노독행의 오른쪽

손목뼈가 탈골(脫骨)되었다. 조양홍의 갈비뼈 두대를 부러뜨렸을

때 왼쪽 손목뼈도 금이 갔다. 그래도 노독행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조양홍이 참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여...여러분...어서 이 놈을..."

열려진 그의 입으로 노독행의 반쯤 부서진 주먹이 틀어박혔다.

쾅!

조양홍의 앞이빨 다섯 개가 모조리 부러져 나갔다.

그때쯤에야 노독행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장홍칠절의 세

사람은 서서히 움직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장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노독행과

조양홍의 치고 받는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직 이토록 일방적이고 무자비한 싸움은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조양홍이 노독행의 등에 장검을 꽂았을 때는

싸움은 이미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 뒤에 벌어진 일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조양홍은 이미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지 않았다.

가장 우측에 선 인물은 홍장회풍(紅掌廻風) 이태(易颱)였다.

이태는 말없이 몸을 날려 노독행의 왼쪽으로 다가갔다.

스윽!

그때까지도 노독행은 정신없이 조양홍을 향해 주먹과 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태의 손바닥은 사정없이 노독행의 옆구리에 가서 쳐박혔다.

쾅!

단 일수(一手)였지만 그 위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노독행의

왼쪽 갈비뼈는 이태의 그 일수에 모두 부러지고 말았다.

막 조양홍의 턱을 가격하려던 노독행은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코에서 시커먼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거의 몽롱해질 정도의 통증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 노독행의

머리속으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너는 절대로 화를 내어서는 안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냉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

바로 형의 음성이었다.

형의 마지막 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 노독행은 그 말을 잊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 이꼴은 무엇인가?

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탈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다니...

그 순간 이태의 손바닥이 다시 무서운 힘으로 아랫배를

가격했다.

쾅!

노독행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나 그의 몸은 쓰러질 때보다 더욱 빨리 일어났다.

이태는 자신의 두 번에 걸친 강력한 공격을 맞고도 상대가

다시 일어날 줄은 몰랐는지라 몸을 움찔거렸다. 노독행은 아직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왼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쾌액!

두 개의 단도가 섬뜩한 광망을 뿌리며 이태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이태는 황급히 쌍장(雙掌)을 휘둘러 날아오는 단도를 쳐냈다.

그 순간 노독행은 전력을 다해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 장내에는 이태말고도 장홍칠절중의 두 명이 더 버티고

있었다.

그의 신형이 채 일 장도 움직이기 전에 붉은 빛이 어른거리며

두 인영이 그의 앞뒤를 막아섰다. 그의 앞을 버티고 선 인물은

홍지단혼(紅指斷魂) 조표(趙杓)였고, 뒤를 막은 인물은

장홍칠절줄에서도 가장 악랄하다는 홍안사심(紅眼蛇心)

북리강(北里薑)이었다.

노독행은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조표를 향해

달려들었다.

삐식!

조표의 메마른 입꼬리에 스산한 미소가 감돌았다.

조표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노독행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오른손이 갈쿠리처럼 변해 노독행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갔다. 그의 손가락은 특이한 철마지력(鐵魔指力)을 익힌

것이라 일단 그 손가락에 걸리기만 하면 황소의 힘줄도 그대로

끊어지고 마는 살인적인 위력을 담고 있었다.

노독행은 오른손을 마주 내밀었다.

(미친 놈...내 손이 어떤 것인줄 알고 감히...)

조표의 내심 쾌재를 부르며 더욱 빠르게 손을 뻗어갔다.

그의 손가락과 노독행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얽혔다.

뿌드득!

그 순간 노독행의 손가락은 그대로 부러지고 말았다.

조표의 철마지력이 담긴 손가락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 그때 노독행의 왼손은 어느 새 단도 하나를 움켜쥔 채

조표의 옆구리를 가격하고 있었다.

"조표, 조심해!"

뒤에 있던 북리강이 노독행의 왼손에 들린 단도를 보고 놀란

외침을 토하며 달려왔다.

조표는 막 노독행의 오른손가락을 모두 부러뜨리고 득의해

하다가 그 음성을 듣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북!

그의 옆구리부근 옷자락이 길게 잘라지며 피가 솟구쳤다.

노독행의 단도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피부를 베고 지나갔다.

조표는 모골이 송연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마터면 영문도 모른 채 옆구리에 단도가 박힌 채 쓰러질 뻔

했던 것이다.

노독행은 그림자같이 그에게 달라붙으며 다시 단도를

휘둘렀다. 하나 그때 북리강의 무쇠같은 주먹이 노독행의 등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쾅!

노독행의 허리가 이상하게 꺾이며 코와 입으로 시커먼 핏물이

왈칵 치밀어 올라왔다.

"컥!"

처음으로 노독행의 입에서 한 가닥 비명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독행의 몸이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것을 보고 물러나 있던 조표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그것이 조표의 일생일대의 실수가 될 줄이야...

조표는 방금전의 공격으로 불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라

단숨에 노독행의 숨통을 끊어놓을 욕심에 전력을 다해 오른손을

내밀어 노독행의 목덜미를 잡아갔다.

노독행은 등뼈가 반쯤 부서진 채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콱!

조표의 매발톱같은 손가락이 노독행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하나 그 순간,

"헉!"

조표는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것이 자신의 아랫배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그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힌 노독행이 왼손에 들고 있던

단도로 그의 아랫배를 쑤셨던 것이다.

"이...이..."

조표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분노와 고통으로 노독행을

노려보았다. 노독행은 전신에 유혈이 낭자한 채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자 조표는 고통속에서도 한 줄기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 눈빛속에는 실로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할 만큼

냉혹하고 살기어린 빛이 가득했던 것이다.

"이...괴물같은 놈..."

조표는 이를 부드득갈며 노독행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가했다.

부득!

노독행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그의 입으로 다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노독행은 얼굴이 핼쓱하게 질린 채로

조표의 아랫배에 꽂은 단도를 더욱 힘껏 틀어박았다.

조표는 아랫배를 관통당하는 예리한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보다 못한 이태가 노독행의 등을 향해 맹렬하게 쌍장을

휘둘렀다.

퍼펑!

노독행의 등짝이 너덜너덜해지며 그의 몸이 조표와 함께

앞으로 쭈욱 밀려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의 몸은 서로 뒤엉킨 채 바닥을 몇 차례나 계속 굴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표는 노독행의 목을 바싹 움켜쥔 채 목을

졸랐고, 노독행은 조표의 몸에 박힌 단도를 더욱 깊숙히 꽂아

넣고 있었다.

"지독한 놈!"

북리강이 두 눈에 흉흉한 살기를 뿜은 채 허공을 날아왔다.

쐐액!

그의 손에는 어느 새 뽑아 들었는지 날카로운 유엽비수가

섬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한 마리의 먹이를 본 매처럼 사 오장을 날아 조표와

뒹굴고 있는 노독행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노독행은 사력을 다해 조표의 배에 꽂힌 단도를 위로

쳐올렸다.

"으으윽..."

마침내 조표가 참지 못하고 그의 목을 움켜쥐었던 손을 놓으며

자신의 아랫배를 가르고 올라오는 단도를 붙잡았다.

그 순간 노독행은 무릎으로 그의 가슴을 강타하며 그 탄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쾅!

조표의 몸이 저만큼 나가 떨어졌다.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 노독행은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북리강의 앞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북리강이 노독행의 뜻밖의 행동에 놀라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옆으로 일 장쯤 움직였다. 노독행이 기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남아 있던 다섯 개의 단도를

번개같은 속도로 북리강과 이태를 향해 내던졌다.

파파팟!

다섯 줄기의 빛살같은 섬광이 어둠을 뚫고 북리강과 이태를

향해 쏘아져갔다. 그와 함께 노독행의 몸은 귀면암의 옆에 있는

절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북리강은 이대로 단도를 피했다가는 노독행을 또 다시 놓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고 두 눈에 악독한 빛을 떠올렸다.

"살아서 갈 수 없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두 개의 단도를 피하지 않고

왼손으로 막으며 오른손에 들고 있는 유엽비수를 세차게

내던졌다.

파팍!

그의 왼팔에 두 개의 단도가 박히며 피가 솟구쳤다.

"윽!"

북리강은 왼팔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에 휘청거리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단도를 피한 이태가 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괜찮은가?"

북리강은 팔의 통증도 잊고 급히 물었다.

"그 놈은 어떻게 되었소?"

이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세상에 그런 독종놈은 보다 보다 처음 보았네. 유엽비수가

목에 꽂힌 채로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네."

북리강은 안색이 변한 채 황급히 노독행이 뛰어내린 절벽가로

달려갔다.

절벽은 높이가 사 오십장 정도된 가파른 협곡이었다.

협곡의 아래는 칠흑같이 어두워서 도저히 노독행의

생사(生死)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북리강은 이를 부드득갈았다. 그는 진땀을 흘리며 자신의 팔에

박힌 두 개의 단도를 뽑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절벽아래를 보며 말했다.

"아래로 내려가 봐야 겠소."

이태가 눈쌀을 찌푸렸다.

"등뼈가 박살나고 목에 비수가 꽂힌 상태에서 이런 절벽아래로

떨어졌다면 살아있을리가 없네."

북리강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그 놈의 시체를 보기 전에는 절대로 안심할 수 없소. 당신도

보지 않았소? 그 놈은 절대로 쉽게 죽을 놈이 아니란 말이오."

이태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내려가보세."

두 사람은 곧 어두운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3

"크륵...크륵..."

거친 숨소리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노독행은 커다란 암벽 아래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전신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여서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고통은 이루 말할 나위 없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유엽비수가 박힌 목에서 도저히 참기 어려운 통증이 밀어 닥치고

있었다.

하나 그는 목에 박힌 유엽비수를 뽑지 않았다.

그는 결투시에 사람이 죽는 것은 검(劍)이 꽂혀졌기 때문이

아니라 뽑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검이 꽂히면서 검이 박혔던 자리에 공기가 드나들어 상처를

치명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검을 뽑으면 바깥의 공기가

침범하는 구멍이 생기지만 검이 꽂힌 채라면 구멍이 열리지 않아

출혈(出血)은 곧 막을 수 있다.

옆구리에 박힌 장검은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대로 쉬고 싶었다.

그에게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나 그는 쉬는 대신에 기를 쓰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두 다리와 두 팔을 필사적으로 바둥거려서

간신히 일어섰다.

그의 앞,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홍포중년인이 우뚝 선 채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홍포중년인의 얼굴은 네모지고 눈빛은 유성처럼 차고 맑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는 하나의 기형도(奇形刀)가 메어져

있었다.

핏빛 홍포....허리춤의 기형도!

바로 당금 강호에서 가히  공포스런 존재로 군림하는

장홍칠절의 우두머리인 홍도낙백(紅刀落魄)

영호명(令狐命)이었다.

노독행은 영호명을 힐끗 바라보다가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장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런다음 이를 악물고 그 손잡이를 세차게 잡아 당겼다.

"우욱!"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토록 사력을 다했는데도 검은 채 반도 뽑혀져 나오지

않았다. 오른손의 손가락이 모두 부러져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고 다시 한 번 힘껏 뽑았다.

스으윽...!

왠지 소름이 끼치는 음향과 함께 그의 옆구리를 관통하고 있던

장검이 간신히 뽑혀 나왔다. 장검이 뽑혀 나온 자리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노독행의 낮빛은 아주 창백했다. 노독행은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양손으로 장검을 잡았다.

이로서 그도 상대의 칼에 대항할 무기를 갖게된 것이다.

영호명은 얼음장같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노독행이

옆구리에 박힌 칼을 뽑아 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자세를 갖추자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스르르...

별다른 신법을 펼친 것 같지 않았는데 그의 몸은 마치

미끄러지듯 노독행의 앞으로 다가왔다.

노독행은 흔들거리는 신형을 억지로 멈춰세우며 두 손으로

검을 쥔 채 그를 노려보았다.

영호명은 노독행의 이 장 앞에 다다러서야 몸을 멈추었다.

그는 노독행을 바라보다가 백지장처럼 얄팍한 입술을 살짝

열었다.

"너는 운이 없었다. 애송이."

눈빛만큼이나 차갑고 냉정한 음성이었다.

노독행은 말없이 그를 노려본 채 서 있었다.

영호명의 눈빛은 칼날과도 같았다.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네게 경의를 보낼 수 있었을텐데

자리가 나빴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건 죽음 뿐이다."

"......."

"내 한 칼을 막을 수 있으면 너를 그냥 보내주겠다. 하지만

너는 결코 내 칼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스릉!

영호명은 칼을 뽑았다.

칼도 붉고, 사람도 붉었다.

그 붉은 칼이 붉은 사람과 함께 움직이자 노독행의 눈에는

그저 하나의 붉은 그림자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수중에 들고 있는 검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막는 일

뿐이었다.

창!

한 차례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노독행은 자신이 가슴에 세운

장검이 부러지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자신의 가슴에서 아랫배를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

한동안 장내에는 죽음같은 정적이 흘렀다.

뚝...뚝...

노독행의 가슴에서 아랫배까지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그어지며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혈선은 점차

짙어지며 흘러내리는 피의 양도 많아졌다.

노독행은 천천히 양손을 늘어뜨려 배를 감싸안았다.

그러지 않으면 배가 갈라져 내장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호명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칼을 허리춤에 꽂은 자세로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노독행의 갈라진 배가

아닌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약속대로 나는 한 칼만 사용했다. 네가 떠나도 나는 너를

막지 않을 것이다."

노독행은 아랫배를 움켜쥔 자신의 열 손가락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내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영호명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결코 영호명의 한 칼을 받아낼 수 없었다.

하나, 비록 영호명의 칼이 그의 몸을 가를지라도 그의

정신만큼은 가르지 못할 것이다.

주춤!

노독행은 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옮겨진 그의 발자국밑에 선혈이 흥건하게 고였다.

영호명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노독행은 다시 한 발자국을 떼었다.

더욱 많은 선혈이 아랫배를 타고 하체를 지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답답할 정도로 느렸으나 그는 멈추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호명의 눈에 한 줄기 기광이 번쩍거렸다.

그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서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노독행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저벅...

노독행이 지나가는 자리는 그야말로 피의 바다였다.

사람의 몸에서 이토록 많은 피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지금 노독행을 지탱하는 것은 한 가지 밖에는 없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서 복수를 해야 한다!

자신은 결코 혼자만의 목숨이 아닌 것이다.

일흔 여섯 개 혼백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

아니, 일흔 여섯까지도 필요없다.

오직 하나, 형의 혼백이 그를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결코 죽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죽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걸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그는 끊임없이 걸었다.

너무나도 많은 피가 흘러 정신이 아득해져 왔고, 아랫배를

움켜잡은 양 손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푸르스름한 내장이 삐져 나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걸을 뿐이었다.

왜?

나는 살아야 하니까.

살아서 이 복수를 해야 하니까.

그는 이 소리만을 중얼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그의 다리가 풀리고 몸이 바닥으로 쓰러질 때도 그는 걷고

있었다.

쿵!

자신의 몸이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를 듣는 그

순간에도 그는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리 뿐만 아니라 몸의

어느 한 부분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채로 누워 있었다.

다리가 꼬이고 배를 움켜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차가운

바위위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하늘은 검었고, 별빛은 차가웠다.

그는 한동안 차가운 별빛을 받으며 누워 있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그를 비추는 별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의 시야가 갈수록 좁아져 하나의 별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멍하니 그 별을 올려본 채 누워 있었다.

그 별빛조차 점차로 희미해져 갔다.

그때 문득 그는 그 별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형의 얼굴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생전 처음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꺼져가는 의식속에서 노독행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별이

아니라 진짜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주름살이 가득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이었다.

백발노인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는 그 주름살 만큼이나 많은

상처들이 잔뜩 나 있었다. 노독행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

상처투성이의 백발노인이 자신을 내려다본 채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난 죽지 않아..노인장....비웃지 말라구...)

노독행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의식의 끈을 잃고 끝없는

암흑의 심연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먼저 공(功)을 추구하고, 다음에 의(意)를 배우며, 그런 후에

무도를 깨닫는다.'

이것은 무쌍류무예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구결이다.

공이란 자신이 배워서 터득한 하나, 하나의 무공의 위력을

말한다.

의란 올바른 무공의 사용기법을 가리킨다.

위 말의 뜻은 무공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공과 의를 합쳐서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느 쪽이 결여되어도 실전에서

승리를 얻기는 어렵다.

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자세로 초식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그 다음에는 기본기를 바른 동작으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연습해야 한다. 그것은 철저한 본인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의를 배우기 위에서는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다.

여기에 바로 일인계승(一人繼承)의 무쌍류 천년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무쌍류의 무공은 천 년동안 전해 내려왔다.

그것은 무수한 선조(先祖)들이 필승(必勝)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건 체험과 처절한 수련을 쌓아 수십 대(代)에 걸쳐 창조된

것이다. 실로 무쌍류의 기법속에는 실전(實戰)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경우에 응용하기 위한 완벽한 필승의 절예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처럼 선조들의 피와 땀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절예라

할지라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올바른 의(意)를 이해하지

못하면 단순한 것이 되고 만다.

본인 스스로가 그 기법 하나 하나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실로 너무도 많은 세월이 소비된다.

때문에 무쌍류의 무예는 절대로 혼자서는 익힐 수 없다.

사부의 도움이 없이는 무쌍류의 필살무예는 완성되지 않는다.

무쌍류의 무예를 익힌 사람은 한 가지 사명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후계자에게 완벽한 무쌍류의 무예를 전수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무쌍류의 무예는 일인(一人)에게 계승되어

왔다.

두 명은 필요없다.

오직 단 한 명에게라도 무쌍류의 절예를 완벽하게 전수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쌍류가 천 년동안 오직 일인에게만 전해져

내려온이유였다.

- '무쌍류비전총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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