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8화 (9/61)

제 8 장        준 비 가   되 었 느 냐

1

'탈각(脫殼)'이라는 말이 있다.

껍질을 벗는 다는 뜻이다.

인간에게도 껍질이 있다.

즉, '육체의 한계(限界)'가 있는 것이다.

나비가 껍질을 벗듯이 인간도 이 육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무인(武人)이라면 반드시 그 한계를

극복해야만 한다.

한계를 초월할 때 인간은 비로소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수련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때엔가는 자신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육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뇌에 계속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온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는 그보다 앞서 있다.

인간의 육체는 다른 무엇보다도 강해서 결코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육체는 파괴되지 않지만 막대한 고통은 뒤따른다. 육체가

파괴되는 듯한 그 고통을 참아야만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한계를 극복하는 순간 또 다른 한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을...

이처럼 인간의 지평(地平)은 끝이 없는 것이다.

무쌍류 필살무예는 바로 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 '무쌍류비전총요' 중에서

*                  *                 *

휘이이잉....

북해(北海)의 바람은 너무도 차가웠다.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토록 추운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그의 양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그의 손은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손톱끝부터 손목을 지나 팔뚝에 이르기까지 그의 양 손은 크고

작은 무수한 칼날에 의한 상처로 뒤덮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물망사로 된 장갑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손 뿐만 아니라 그의 전신이 그와같은  상처로 뒤덮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서 오직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은 노독행 자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독고무정이었다.

이 년(二年)!

이 년만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기간만에 그는 드디어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무쌍류에서는 그것을 '파탈(擺脫)'이라고 부른다.

육체로부터의 파탈, 평범(平凡)으로부터의 파탈, 모든

것으로부터의 파탈...

노독행은 알지 못했으나 그것은 무쌍류 역사상 최단시일내의

파탈이었다.

하지만 독고무정은 조금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독행이 지금까지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이 년이라는 기간을 결코 짧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死鬪)의 연속이었다.

자신과의 사투...추위와의 사투...모든 것과의 사투...

그중 어느 한 가지에라도 패했다면 노독행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독행은 자부심을 가질 만 했다.

하나 그는 전혀 자부심을 느끼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어떠한 감정의 빛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하나뿐인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 또한 북해의

하늘처럼 어둡고 침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찌보면 그의 몸에서 인성(人性)이라는 것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인간이라면 의당 지녀야할, 기쁜 일이 있을 때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 슬퍼하는 감정들이 모두 어디론가로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독고무정은 노독행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냉정하고 무심한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노독행은 비록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 초인(超人)의 몸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 다른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다. 그

무엇이 육체의 한계보다 귀한 것인지는 훗날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앉거라."

독고무정은 노독행에게 자신의 앞에 앉도록 했다.

그것 또한 독고무정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행동이었다.

독고무정은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서

있었다. 한때는 노독행도 그것이 궁금하게 생각된 적이 있었다.

왜 그는 항상 서 있는 것일까?

나중에야 노독행은 독고무정이 과거에 무릎을 심하게 다쳐

무릎관절을 제대로 구부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독행이 자신의 앞에 앉자 독고무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이제 무쌍류의 필살무예를 익히게 될 것이다. 그 전에

반드시 무쌍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독고무정이 말하는 무쌍류의 역사!

그것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독고무정의 첫 마디는 노독행을 놀라게 했다.

"무쌍류는 소림무예(少林武藝)에서 파생되었다."

무쌍류!

그 영원히 꺾이지 않는 무적의 필살무예는 너무도 뜻밖의

곳에서 시작되었다.

백옥봉(白玉峯)과 임잔몽(任殘夢).

그들은 모두 무림사상 일찌기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무학(武學)의 천재(天才)들이었다. 하나 하늘의 안배인지

공교롭게도 그들은 동시대에 이 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났다.

백옥봉이 임잔몽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능히 천하제일인으로 군림했을 두

사람이 한 시대에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더욱 나쁜 것은 두 사람이 모두 소림의 무예에 흥미를 느끼고

소림에 입산(入山)을 했던 것이다.

당시 소림의 장문인(掌門人)은 보리달마이후 최고의 고수라는

각원상인(覺元上人)이었다.

각원상인은 거의 동시에 소림을 찾아온 두 명의 절대천재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들이야말로 소림의 무예를 천하제일로

공인(公認)시킴과 동시에 천년 소림의 영광을 꽃피울 인재들임을

알아본 것이다.

하나 곧 그는 그들 두 사람의 기질이 전혀 판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옥봉은 인물됨이 광명정대하고 비범할 뿐 아니라 기억력이

비상하여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어 버리지 않는 천부의 두뇌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가문은 명문(名門)중의 명문이어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 지식의 깊이가 하늘에 닿을 듯 했다.

그야말로 무림사상 최고의 기재(奇才)라 할만 했다.

반면에 임잔몽은 부모의 이름도 모르는 비천한

천민(賤民)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심한 고생을 하고 자랐다.

성격적으로는 음침하고 살기가 짙어서 한번 눈밖에 난 사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그의 두뇌는 백옥봉에 미치지 못하나

대신 그는 천부적인 승부감각을 지니고 있어 실전에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각원상인은 그를 귀재(鬼才)중의 귀재라고 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소림의 무예에 흠뻑 빠져 들었다.

소림의 무예는 박대정심(博大精深)할 뿐아니라 수많은

운용(運用)의 묘(妙)를 지니고 있어 배우면 배울수록 새로웠다.

그들은 그야말로 침식을 거르다 시피하고 소림의 무예를

배우는데 몰두했다.

서로의 존재가 승부욕을 더욱 부채질했는지도 모른다.

각원상인은 내심 그들의 승부욕을 달갑게 생각했다. 그때문에

그들의 진경(進境)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났던 것이다.

하나 언제부터인가 일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발단은 소림무예의 해석(解析)에서 비롯되었다.

백옥봉은 소림의 무예는 천하무공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정통성과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잔몽은 전혀 달랐다.

그는 무예에 있어 정통성이나 품위는 그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예의 본질은 오직 이기기 위함일 뿐이다.

누구든 상대에게 이기기 위해서 무예를 익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격식이나 허례는 제거해야만 한다. 이것이

임잔몽의 사고방식이었다.

두 사람의 의견충돌이 점차로 잦아졌고, 마침내는 사소한 것에

까지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완전히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소림의 초식중 요보추(搖步推)라는 것이 있다.

소림권법(少林拳法)중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며 또한 널리

알려진 것이기도 했다.

백옥봉은 이 요보추를 시전할 때 손발의 동작을 크게 하고

보폭은 넓게, 자세는 낮게 해야 한다고 했다. 또 허리에서

겨누었던 주먹을 시원스럽게 앞으로 크고 길게 내질러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요보추 본연의 장쾌한 모습과 강대한 타격을 동시에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잔몽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커다란 동작은 전혀 불필요하며 자세와 겨누기도 극도로

작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폭은 가급적 좁게 해야 몸을

이동시키기 쉽고 발놀림도 신속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주먹이 확실하게 가 닿은 것을 최우선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의견이 옳다고 공방을 벌리다가 사부인

각원상인에게 평가를 부탁했다.

각원상인은 단번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요보추에 관한 일은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했으나 그 이면에

숨은 뜻은 앞으로 소림무예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백옥봉의 정통적인 방식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임잔몽의 지극히

실전적인 자세를 취할 것인가?

각원상인은 백옥봉을 선택했고, 임잔몽은 그날 저녁 소림사를

나왔다.

임잔몽은 그 길로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자신의 실전적인

무예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임잔몽에게 각원상인이나 백옥봉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임잔몽은 일단 무예를 익힌 이상 무슨 수를 쓰던 상대를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철칙(鐵則)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십 년후에 다시 만났다.

그때 백옥봉은 이미 소림제일인인 각원상인을 능가하는

소림사상 최고의 고수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꼬박 칠주야(七晝夜)를 싸웠고, 승부가 아직

가려지지 않았을 때 임잔몽은 스스로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무예에 크나큰 결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길로 그는 자신의 실전무예를 완성하기 위해서 뼈를

깎는 수련을 계속했다.

어떠한 상대라도 반드시 쓰러뜨리고야 마는 필살(必殺)의

무예를 만들겠다!

이러한 일념(一念) 하나로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불태웠다.

십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다.

다시 이십 년이 지났을 때 그는 '필살무예'에 대한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다.

하나 그 정립된 필살무예를 완성하기 까지는 아직도 요원한

시간이 필요했다.

임잔몽은 그 임무를 자신의 제자인 조천송(曹淺松)에게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조천송은 오십 년동안 천하를 떠돌면서 수많은 격전을 벌였고,

평생동안 싸우며 익힌 자신의 절예를 죽기 직전

희무광(姬無狂)에게 전했다.

희무광으로부터 육대(六代)동안 무쌍류의 후인들은 실전무예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천하의 각지를 떠돌아 다녔다.

그들은 고수라고 소문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덤벼 들었고, 그

싸움의 결과를 항상 기록했다.

이런 세월이 사백 년을 흘렀을 때 무쌍류 사상 최고의 기재가

탄생되었다.

그의 이름은 우문독패(宇文獨覇)라 했다.

우문독패는 수 백년동안 모여진 실전자료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무예를 창시해 냈다.

그것은 그동안의 어떤 문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초실전주의(超實戰主義) 무예였다.

우문독패는 이십 년간을 각고(刻苦)한 끝에 그 무예를

완성하고 무림에 출도했다.

그 이후 그의 행로는 '독보건곤(獨步乾坤)'이라는 네 글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의 발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제아무리 가공한 무예를 지닌 자라 해도 그의 손에서 불과 몇

초를 버티지 못했다.

그는 십 년동안 강호무림을 그야말로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너무도 막강하고 처절한

그의 무예를 '무쌍류(無雙流)', 즉 천하에 두 번 다시 없는

무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우문독패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삼십 년, 혹은 오십 년에 한 번씩 우문독패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무림에 나타나곤 했다.

그들은 모두 철저한 혼자였으며, 절정의 고수들만을

찾아다니며 비무(比武)를 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자신의 무예가 진정한

천하제일인가를 검증받기 위함일 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떠한 포부도, 야망도 없었다.

심지어는 무쌍류의 후예가 무림에 출도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무림의 최고고수 열 두 명이 모두 패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세월이 오백 년을 계속되었다.

이제 무쌍류는 하나의 전설(傳說)이 되었다.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정상을 달리는 극소수의

무인(武人)들 뿐이었다.

그들은 언젠가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를 무쌍류의 후예를 항상

초조하게 기다렸고, 그때를 위해서 뼈를 깎는 수행을 계속했다.

절정(絶頂)의 무인(武人)들은 누구나가 무쌍류의 후예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랬고, 또한 오지 않기를 더욱

간절히 바랬다.

무쌍류의 후예가 찾아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무예가 도전받을

가치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무도(武道)를 익히는

무인이라면 더할 나위없이 기쁜 일일 것이다.

하나 그 도전의 결과는 언제나 자신의 처참한 패배와 무쌍류의

일방적인 승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무쌍류의 모습은 강호무림에서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길어도 오십 년을 넘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이 육십 년,

칠십 년이 되어도 보이지 않았다.

점차 무쌍류라는 이름은 절정의 무인들 입에서도 오르내리지

않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무예가 실전(失傳)되었음이 틀림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 처절할 정도로 강하고 살기(殺氣)로 뭉친 무공은 결코

아무나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내에 그들은 후계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없어져 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떠들어댔다.

이런 세월이 거의 백 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제,

백 년만에 처음으로 무쌍류의 새로운 후계자가 탄생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왜 무쌍류의 후계자가 지난 백 년동안 무림에 나오지

않았는지 아느냐?"

독고무정의 물음에 노독행은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독고무정이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고무정의 얼굴에서 돌연 한 줄기 비통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나때문이다."

이 말을 내뱉었을 때 독고무정의 주름진 얼굴에는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고통의 빛이 가득했다.

"내가 무쌍류 천년의 역사에 오점을 남겼기 때문이다."

독고무정의 음성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무쌍류 천년의 역사에 남긴 오점!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2

독고무정은 한참동안이나  얼굴에 경련을 일으킨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얼음장같은 냉정과 무심함이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는 격동하고 있었다.

한참후에야 그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이제 너는 진실을 알 때가 되었다. 나는 무쌍류의

후예가 아니다."

노독행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말에 필시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하나 노독행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독고무정의 말에 무언가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독고무정의 얼굴에는 그답지 않은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무쌍류의 후예는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패했다.

그러므로 내가 무쌍류의 후예일리는 없는 것이다."

역설적(逆說的)인 말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노독행은 그 말속에

담긴 절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독고무정은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나는 원래 형산독고장(衡山獨孤莊)의 이십 칠대 후손이었다."

형산독고장이라는 이름은 무림에 거의 견문이 없던 노독행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호남(湖南)의 형산(衡山)일대에 뿌리를 두고

내려온 전통적인 무림의 명문세가였다. 그들의

무정십이검(無情十二劍)과 흡룡력(吸龍力), 비룡조(飛龍爪)는

누구나가 두려워 마지 않는 초절정의 절학들이었다.

독고무정은 천룡거사(天龍居士) 독고적(獨孤翟)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무골(武骨)로 소문이 파다했다.

독고무정이 십 팔세가 되었을 때 한 사람이 독고장으로

찾아왔다.

그는 약관 이십 세의 젊은이였는데 스스로를

동방유아(東方唯我)라고 했다. 동방유아가 독고장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 동방세가(東方世家)의 무공이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는

것을 인증받고자 왔소!

당시 동방유아에 대한 소문은 천하무림을 온통 진동시키고

있어서 독고장에서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동방유아는 혜성처럼 무림에 나타난 신비(神秘)의 고수인데,

비단 무공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할 뿐 아니라 손속이

맵고 날카로워서 젊은 층의 고수중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제일인자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무공이 생각보다 더욱 무서워

전대(前代)의 몇몇 기인(奇人)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설사

전대의 기인들이 다시 나온다고 해도 그를 이길 수는 없을거라고

떠들어 대기도 했다.

천하의 뭇 고수들을 연파(連破)하며 혁혁한 명성을 날리던

동방유아가 도전해 오자 독고장에서도 섣불리 대할 수가 없었다.

하나 독고무정은 젊은 혈기에 자신의 무공을 믿고 동방유아에게

덤벼들었다.

결과는 비참한 것이었다.

단 삼 초만에 독고무정은 오른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져 나가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던 것이다.

동방유아의 무공은 소문을 훨씬 뛰어넘는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독고무정은 자신이 거의 나이차이도 나지 않는 동방유아에게

맥없이 당하자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하나 그로 하여금

피눈물을 쏟게 만들 일이 조금 후에 벌어졌다.

동방유아와 비무를 하던 독고적이 십 초만에 목뼈가 부러진 채

피를 뿌리며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던 것이다.

동방유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독고무정은 그저 바닥에 엎드린 채 아버지의 꺼져가는 눈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

독고적은 십 일간을 꼬박 침상에 누운 채 고통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독고적은 독고무정을 향해 말했다.

"복수를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언제고 반드시 그

자를 꺾어 독고장(獨孤莊)이 결코 허명(虛名)을 날린 것이

아님을 알려다오."

독고무정은 피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며...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무덤을 덮은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독고무정은 홀홀

단신으로 집을 나왔다.

그는 동방유아를 꺾을 무공을 익히기 위해 천하의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녔다.

하나 돌아다닐 수록 그는 암담한 절망감만을 맛보았을 뿐이다.

어느 문파를 가도 동방유아라는 이름을 듣게 되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때 동방유아는 구대문파(九大門派)의 최고고수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연거푸 격파하여 그 명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삼 년동안 그는 백 스물 일곱 개의 문파를 찾아갔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수들을 만났다. 하나 그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대답뿐이었다.

- 당대(當代)에는 결코 동방유아를 이길 수 있는 무공이 없다.

마지막 기대를 안고 찾아간 섬서(陝西)제일의 고수

철필선생(鐵筆先生) 허지량(許志亮)에게서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독고무정은 속으로 결심했다.

'좋다. 당대에 없으면 전대(前代), 전전대(前前代)의 무공을

익혀서라도 반드시 동방유아를 꺾고야 말겠다.'

그는 과거에 명성을 떨쳤던 문파의 무공을 찾아 헤맸으며

그러다가 우연히 무쌍류의 전설을 들었다.

무쌍류의 전설을 단 한 번 듣는 것 만으로도 그는 완전히 그에

매혹되었다.

'바로 이것이다. 무쌍류의 무예야 말로 동방유아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무쌍류의 무예를 찾아 천하를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하나 천하를 아무리 헤집도 다녀도 무쌍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독고무정이 알 수 있는 것은 오십 년전에 당시

강북제일고수였던 낙뢰수(落雷手) 추명(秋銘)에게 무쌍류의

후예가 나타난 것이 제일 마지막이라는 것 뿐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추명은 단 일 초만에 갈비뼈가 송두리째

박살나고 말았다고 한다.

독고무정은 그 소문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그것외에는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었다.

추적한 지 일년만에 그는 하나의 작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추명의 서동(書童)중 한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었던

것이다. 독고무정은 다시 몇날 몇일을 수소문하여 그 서동을

찾아갔다.

그때 서동은 이미 칠십이 다 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서동은 벌써 오십 년전의 일이건만 아직도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잊을리가 있나? 그 무시무시한 싸움을...그런 싸움은

금생(今生)에는 두 번 다시 없을 걸세.

- 그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 말해주고 자시고도 없네. 주인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낙뢰수중의 가장 무서운 초식을 펼쳤지.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뿌리며 십 여장이나 밖으로 나가

떨어졌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지. 그리고는 그만이었네. 아마

땅에 닿기도 전에 숨이 끊어졌을 걸세.

- 상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머리를 산발하고 짐승가죽같은 옷을 입은 깡마른

사나이였네.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이 맹수처럼

무섭더군.

- 그 자에 대해 더 아시는게 없습니까?

- 난 그때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서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네. 나 뿐만 아니라 천하의 누구라도 그럴걸세. 그렇게

무섭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일찌기 본 적이 없었네.

-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릅니까?

- 글쎄...그는 처음 왔을 때부터 주인어른을 쓰러뜨리고

돌아갈 때 까지 단 한 마듸 밖에는 하지 않았지.

- 그게 무엇입니까?

- "나는 무쌍류다." 아주 짧은 말인데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괜히 모골이 송연해 지더군. 주인어른도 그 말을 듣더니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네.

- 그외에는 없었습니까?

- 없었네...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있군.

- 그게 무엇입니까?

- 그의 말투에 어딘지 북쪽지방의 사투리가 섞여 있었네.

- 북쪽지방?

- 왜 있잖은가? 저기 저 먼 북쪽...

- 몽고(蒙古) 말입니까?

- 아니...더 멀리....

- 북해?

- 그렇네.

독고무정은 그 길로 북해로 달려갔다.

오 년동안 그는 북해의 구석구석을 그야말로 구석구석까지

뒤지고 다녔다. 북해는 넓고, 추위는 뼈를 에릴 듯 했지만 그의

마음속 열정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마침내 북해에 온지 육 년만에 그는 무쌍류의 후예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그가 독고장을 나온지 십 년만의 일이었다.

하나 그는 너무 늦게 왔다.

그때 무쌍류의 후예는 너무 나이를 먹어 생(生)이 얼마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연철산(燕鐵散)이라고 했다.

연철산은 무쌍류의 스물 여덟 번째 후예였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를 찾아 천하를 뒤지고 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북해로 돌아와 이승을 마감하려고 했던 것이다.

독고무정을 본 연철산은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 아깝구나....네가 십 년만 더 일찍 나를 찾아왔어도...

연철산은 독고무정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후계자를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어느 장소에 무쌍류의 절예를 보관해 놓았다고

한다.

독고무정이 그 장소를 알려달라고 하자 연철산은 말했다.

- 장소를 알려주는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 무쌍류의 무예는 천년동안 수많은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려

쌓은 것이다.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천부의 재질과 필사의

각오가 필요하다.

- 저에겐 필사의 각오가 있습니다.

- 그렇겠지. 문제는 너의 재질이다.

- .......!

- 너의 재질은 분명 탁월하다. 하지만 무쌍류의 무예를

익히기에는 아직 미흡하다.

- 저는 노력하겠습니다.

-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에게 십 년의 시간이

있었다면 어쩌면 너의 부족한 재질을 다스려 무쌍류의 무예를

익힐 수 있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 그럼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 너를 무쌍류 이십 구 대(代) 후계자로 삼겠다. 대신 너는 한

가지 사명이 있다.

- 그것이 무엇입니까?

- 무쌍류의 무예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 인재를 찾아 그에게

무쌍류의 무예를 전해 주어라. 무쌍류의 천년 무예는 결코

절전(絶傳)되어서는 안된다.

- 저는...

독고무정은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했으나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연철산은 한 달동안 독고무정에게 무쌍류의 가장 기본적인

무예를 가리켰다.

무쌍류 무예의 가장 기본이 되는 그 구결들은 고( ), 전(纏),

수(須)의 삼결(三訣)이었다. 그 삼결들은 결코 혼자서는 터득할

수 없으며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전수를 받아야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한달 후 연철산은 독고무정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연철산이 죽자 독고무정의 마음에는 한 가지 욕망이 솟구쳐

올랐다.

- 나의 재질은 천하제일이다. 이 재질로 익히지 못할 무공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나는 반드시 무쌍류의 무예를 익혀야할

이유가 있지 않은가?

천하제일에 대한 열망보다는 동방유아에 대한 복수심이 그를

더욱 부채질했다.

결국 그는 연철산의 유언(遺言)을 깨뜨리고 무쌍류의

비전절예가 있는 장소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십 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하나 아무리 익혀도 그는 자신이 완벽하게 그 무에를 익혔다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무언가 허전한 공허함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십 년만에 그는 그곳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 이곳에서 더 이상 익힐 것이 없다. 나는 무쌍류의 무예를

완성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중원으로 향했다.

그가 중원으로 돌아왔을때 그는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방유아는 이미 절대불가침(絶對不可侵)의 신성(神聖)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앞에는 '무신(武神)'이라는

호칭이 붙었고, 사람들은 동방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외심을

감추지 않았다.

독고무정은 단신으로 동방유아를 찾아갔다.

이십 년전 독고장의 혈한(血恨)을 갚으러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동방유아는 빙그레 웃으며 승부를 허락해 주었다.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독고무정은 자신이 무쌍류의 후예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아마 마음 한구석에 사부인 연철산에 대한

죄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니면 무쌍류의 무예를 익히면서 느꼈던 공허함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독고무정은 동방유아와 이 백 초를 싸웠다.

그것은 동방유아가 출도한 이후 싸운 것중 가장 치열한

격전이었다.

독고무정의 전신에는 유혈이 낭자했고, 동방유아도 몇 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이 백 초만에 독고무정은 두 다리가 부러진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무쌍류의 무예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비단 완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무적의 필살무예를 수박

겉일기 만큼도 익히지 못했다는 것을...

동방유아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두 다리에 있는 연골(軟骨)을 제거해 버렸을

뿐이다.

무릎 관절 사이의 연골이 없다해도 생활을 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단지 무공을 익히는 무인이라면 그것은 가히 치명적인

것이었다. 도저히 상승(上乘)의 무공을 익힐 수가 없는 것이다.

독고무정은 거의 걷다시피하여 북해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 그는 당노오랍산에서 상처를 치유하는데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검은 대지(大地)를 발견했으나 그 신비의 땅도 없어진

연골을 되살려 주지는 못했다.

북해로 돌아온 독고무정은 제일 먼저 연철산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피보다 진한 울음을 이틀동안 터뜨렸다.

삼일 째 되는 날 그는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후로 그는 무쌍류의 무예를 익힐만한 인재를 찾기 위해

천하를 뒤지고 다녔다.

독고무정은 자신의 일이 절대로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쌍류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완벽한 재질을 갖춘 자를 찾아야 한다.

천지(天地)가 아무리 광활하고, 인재(人才)들이 널려 있다고

해도 그런 인물은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어떠한 고통에도 견딜 수 있는 끈기와 집념, 불꽃같은 투지와

강인한 체력을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 낙타와 같은 지구력과

동물적인 본능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필사(必死)의 각오(覺悟)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 필사의 각오!

이것이야말로 무쌍류의 무공을 익히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강인한 육체를 지닌 사람을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투지와 집념이 강한 인물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무공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이것이 필요했다.

무쌍류의 무공을 배우려면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그 무엇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천년(千年)의 비법(秘法)은 결코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자를 찾아야 한다!

찾을 수 없더라도 찾아야 한다!

천하를 이잡듯이 뒤져서라도 최고의 육체와 최고의 정신력,

그리고 필사의 각오를 지닌 자를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은 하늘이 주신 재능이다.

그리하여 그 재능과 천년(千年)의 노력이 결합할 때,

비로소 '무쌍류'...즉,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무적(無敵)의

'필살무예'가 완성되는 것이다.

3

독고무정은 그런 자를 찾아 천하를 헤매고 다녔다.

십 년이 흐르고, 이십 년이 흘렀다.

독고무정의 머리위에도 어느 새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하나 둘 씩 늘어갔다.

그래도 독고무정은 포기하지 않고 찾아 다녔다.

그리고 마침 내 삼십 년째 되는 해에 그는 한 사람을

찾아냈다.

"내가 그를 본 것은 장백산의 어느 이름 모를 협곡에서였다.

그때 그는 죽창 하나를 든 채 커다란 백호랑이의 뒤를  고

있었지."

독고무정의 시선은 노독행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노독행은 고개를 들어 독고무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독고무정의 강팍하고 차가운 얼굴에 언뜻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고 느낀 것은 노독행의 착각이었을까.

"나는 꼬박 삼 일동안 그의 뒤를 따라 다니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그의 모든 것은 내가 바라는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것이었다. 단 한 가지 내가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은...."

독고무정의 눈에서 번쩍하는 빛이 흘러나왔다.

"과연 그에게 필사의 각오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인 채 묵묵히 독고무정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어느 이름모를 산봉우리

아래에서였다. 그때 그는 전혀 다른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내 눈을 의심했지."

독고무정은 노독행의 눈을 마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것은 거의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죽었나보다 하고 그를 내려 보았다. 그때 그는 하나남은

외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지. 그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노독행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하나 그의 몸은 언제부턴가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움켜쥔 두 손은 거의 반쯤이나 살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런 상태로 그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몸을 안아들으면서 나는 생각했지. 만약 이 자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강호무림에는 백 년만에 처음으로 무쌍류의 진정한

후예가 탄생하게 될 것이라고..."

독고무정은 한동안 노독행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는 훌륭하게 살아났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라고는 무쌍류의 전설이 숨어 있는 마지막 장소로 그를

인도하는 것 뿐이다."

노독행은 냉정을 되찾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냉정을 잃은 적도 없었다.

단지 잠시 감회어린 슬픔이 밀려왔을 뿐이다.

그 슬픔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독고무정이었다.

"준비가 되었느냐?"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무정의 메마른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제 가자."

*                 *              *

북해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십팔 층 지옥보다도 더욱 무섭게

여겨지는 하나의 절지(絶地)가 있다.

야차곡(夜叉谷).

야차곡은 북해의 오지(奧地)인 합자호강(哈刺浩羌)의 깊숙한

산중에 위치한 좁고 은밀한 협곡이었다.

이 협곡은 그 주위의 형세가 기이하고 가파라서 왠만한 사람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설사 접근한다 할지라도 조그맣게

벌어진 야차곡의 안에서 인간의 몸으로는 견딜 수 없으리만치

가혹한 한풍(寒風)이 불어와 도저히 곡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간혹 몇 사람의 절정고수들이 영약의 힘을 빌어 그 한풍을

뚫고 야차곡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하나 그들중 어느 누구도 살아서 나온 사람이 없었다.

게중 운이 좋은 자들은 시체나마 곡밖의 빙하(氷河)에 파묻혀

발견될 수 있지만 거의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그 존재가

사라지고 만다.

대체 야차곡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혹독한 북해에서도 왜

그곳에만 유독 강렬한 추위와 한풍이 몰아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이 근처에 가면 참화(慘禍)를 면치 못한다는 소문만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지금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절지(絶地)중의 절지가 되었다.

독고무정은 가파른 절벽의 한쪽에 우뚝 선 채 칼날처럼 예리한

야차곡의 입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야차곡은 거대한 얼음벽의 한쪽 구퉁이에 마치 종이장이

찢어지듯 얄팍한 공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서 제아무리 안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그곳에 그런 계곡이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쿠쿠쿠쿠.....

귀를 기울이자 마치 멀리서 우뢰가 치는 듯한 음향이

들려왔다.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달려오는 듯한 그 음향은 바로

야차곡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것은 야차곡 내에서 불고

있는 가공할 살인한풍(殺人寒風)이 휘몰아치는 소리였던 것이다.

독고무정이 보고 있을때 하나의 작은 인영이 야차곡에서 멀지

않은 얼음벽위에 나타났다.

그 인영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머리를 산발한

괴인이었다.

산발괴인은 유연하면서도 빠른 동작으로 얼음벽을 올라

야차곡으로 접근했다.

쿠콰콰콰...

사람의 접근을 알았는지 야차곡에서 불어오는 한풍이 한층더

매서워지며 곡안에서 얼음조각이 섞인 광풍이 노도처럼 밖으로

밀려나왔다.

적어도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그 무시무시한 한풍에

대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산발괴인은 별로 두려워 하는 빛도 없이 조금씩

야차곡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독고무정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우두커니 서서 산발괴인이

야차곡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락!

산발괴인의 짐승가죽옷중 일부가 매서운 한풍을 견디지 못하고

얼음조각이 되어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산발괴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야차곡의 입구까지 도달했을 때 산발괴인은 문득 몸을

돌려 독고무정을 바라보았다.

독고무정은 멀리서도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산발괴인의

외눈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독고무정은 하염없이 그 외눈을 들여다 보았다.

산발괴인의 외눈에는 북해의 잿빛 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독고무정은 마음이 강인한 사람이었으나 그 외눈을

바라보고 있자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외눈의 산발괴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야차곡의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쿠콰콰콰....

야차곡에서 쏟아져 나오는 얼음섞인 한풍이 천지를 휩쓸어버릴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높이 솟구쳐 올랐다.

독고무정은 멍하니 산발괴인의 모습이 야차곡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산발괴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독고무정은

비로소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이제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군."

그의 뇌리에는 오래전에 연철산이 했던 말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무쌍류의 후계자는 한 시대에 오직 한 명 뿐이다.

네가 무쌍류의 후계자를 구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독고무정은 잿빛으로 가라앉은 하늘을 올려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사부. 사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실가닥같은 소문 하나만을 믿고 무작정 북해로 찾아온

일...매서운 눈보라를 헤치며 전설로만 알려진 무쌍류의

후계자를 찾아 북해의 얼어붙은 빙원위를 헤매던 일...그리고

마침내 만난 연철산...

그의 얼굴 모습 하나 하나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때의 독고무정은 혈기왕성한 젊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연철산처럼 늙어 버렸다.

독고무정의 주름진 눈가에 언뜻 한 줄기 눈물이 고였다.

하나 그 눈물은 끝내 흘러내리지 않았다.

미처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전에 그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독고무정은 삼십 육년만에 사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               *               *

- 무쌍류 무예의 본질(本質)은 무엇인가?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겨본 적이 있다.

과연 무쌍류 무예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쌍류, 그 영원히 꺾이지 않는 필살무예의 요체(要諦)는 과연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실전무예를 추구하는 문파들이 주창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와 동작이다.

그들은 자세에서 입침평송(立沈平 )을 요구한다.

입이란 입신중정(立身中正)을 말한다. 등뼈를 똑바로 세우고

목덜미를 펴고 아랫배를 앞으로 치켜 올리고 엉덩이를

들어가게한다.

침이란 침견추주(沈肩墜 )를 가리킨다. 양쪽 어깨를 떨어뜨려

내리고(沈肩), 팔꿈치가 항상 밖으로 벌어지거나 위로 향하게

하지 않는다(墜 ).

평이란 이목평시(二目平視)다. 이것은 항상 양쪽 눈이

수평선상에 위치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얼굴이 좌우의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송이란 전신송개(全身 開), 즉 전신을 느긋하고 부드럽게

하여 전신의 어느 부분에도 힘을 주어서는 안되는 것을

가리킨다.

동작에 있어서는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우선 수법세밀(手法細密)이다.

일반적인 초식외에 실전무예를 추구하는 문파에서는 다른

파(派)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작고 세밀한 수법이 많이

있다. 그 다양한 수법들을 사용하여 극히 빠르게 연속적으로

공격하므로 막기가 곤란하다.

다음으로 공방일체(攻防一切)다.

실전무예에서 공격을 막은 후 반격이란 있을 수 없다. 거의

모든 기법이 공격을 받음과 동시에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간혹 공방이 분리되는 경우는 오직 공격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할 때 뿐이다.

세 번째는 장단겸상(長短兼相).

즉, 멀리 있는 적이나 가까이 있는 적을 모두 공격할 수 있다.

네 번째로 강유상제(剛柔相濟)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강과 유의 기법이 혼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상련부단(相連不斷)이다.

이 말은 일단 한 번 공격을 하기 시작하면 시작부터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단 한 번도 중단되거나 끊어지는 일이 없이

맹공을 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숨쉴 사이도 없을

정도로 질풍노도와 같은 공격을 하는 것이다.

실전무예를 추구하는 문파들은 이것이 갖추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대성(大成)할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

하나 과연 이런 것들이 실전무예의 본질일까?

사실 이와 같은 것들은 무예를 익히는 가장 극히 당연한

기본들이다.

단순히 이런 것들만으로서는 실전무예, 특히 무쌍류의

필살무예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무쌍류 무예는 이들과 현격히 다른 무엇이 있다.

무쌍류는 기본을 중시하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올바른 자세같은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굳이 입신중정을

하지 않아도, 이목평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실전에서 남과 겨룰때도 공방일체를 하라거나 상련부단하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저 싸움에 임하여 강렬하고 신속하게 수족(手足)을 움직여

상대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무쌍류는 필요한 것을 취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버린다.

필요한 기술속에 자신의 특기를 합하여 사용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무쌍류 무예의 본질이다.

- 자아발견(自我發見)!!!

무쌍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자신을 파악한 후에 모든 기법을 총동원하여

실전에서 승리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무쌍류 필살무예의 요체인

것이다.

- '무쌍류비전총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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