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11화 (1권 중) (12/61)

독보건곤 1부(중) - 용대운 저

제 11 장    당 신   때 문 이   아 니 야

1

그는 단순히 천천히 걸어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왠 쓸데없는 방해자가 끼어드는가

했다.

하나 그에게 시선을 돌린 순간 그들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검은 안대....그리고 번뜩이는

외눈...

그 눈빛을 보자 중인들은 절로 몸이 오싹해졌다.

사냥당하는 짐승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마치 사냥의 표적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서 전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는 곧장 서문정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그가 오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사람은

독두날심 여표였다.

아마 다른 장소, 다른 시각에 그를 만났다면 여표는

감히 그의 앞을 가로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표범의 앞을 가로막는 사슴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여러 사람이 그를 지켜보고 있으며, 특히 남삼노인의

존재가 그에게 대단한 중압감을 주었다.

일단 남삼노인의 눈밖에 나게 되면 적어도

강남(江南)일대에서는 발 붙일 곳이 없어지게 된다.

그것은 그의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汚點)으로 남게 될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도 모르는 놈때문에 그런 꼴을 당할

수는 없다.

여표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몸을 움직여 그의 앞을

막아섰다.

"멈춰라."

애꾸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방향을 바꾸지도 않고 그는 곧장 여표의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옆에 있던 벽력태세 포일광이 그와 가세하여

애꾸사내의 앞을 막아섰다.

"미친 놈.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아마 포일광으로서는 별 뜻없이 습관적으로 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나 그 한 마디가 그의 수명을 여표보다 짧게

만들었다.

애꾸사내의 외눈이 포일광에게로 향했다.

포일광은 그의 눈빛이 꼭 환하게 빛나는 태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애꾸사내의 몸이 포일광의 코앞으로 압축해

들어왔다.

피해야 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가

눈앞에 희끗하는 순간 포일광은 마치 거대한 철퇴에

전신을 강타당하는 충격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콰쾅!

"크아악!"

벼락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포일광은 피분수를 뿌리며

십 여장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여표는 무언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고 느끼자마자

자신의옆에 있던 포일광이 핏덩이가 되어 날아가자 너무도

놀라고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도끼를 쳐들었다.

그가 정말로 애꾸사내를 공격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인 동작을 한

것인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중인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도끼를 쳐든

여표가 채 손을 휘두르기도 전에 포일광과 마찬가지로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쿵!

바닥에 떨어진 여표의 몸은 전신의 뼈가 모두

으스러지고 오공으로 시커먼 선혈을 흘러내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중인들은 경악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망연자실,

애꾸사내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장내에 있는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이 강호무림을

질타하는 절정고수들이었으나 그들중 어느 누구도

애꾸사내가 대체 무슨 수법으로 포일광과 여표를 단번에

격살(擊殺)시켰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남삼노인만이 언뜻 애꾸사내가 아무런 손을 쓰지

않고 그저 어깨로 그들의 몸을 들이받은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다.

하나 그는 곧 자신이 잘못 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포일광과 여표는 비록 최절정고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상당한 실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단순히 어깨로 부딪치기만 했는데 그들이 피떡이 되어

날아갈리는 없는 것이다.

애꾸사내는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처음의 자세 그대로

서문정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노독행이었다.

노독행은 지금까지 커다란 나무 뒤에서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그는 장내의 일에 전혀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남이 자신의 일에 간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도 남의 일에 간여하지 않으려 했다.

하나 돌연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바뀌게 했는지는 자신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막봉은 계속 머뭇거렸다.

순리상으로 보아 그는 당연히 노독행을 막아야 했다.

남삼노인의 시선도 그걸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과연 이 자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오랜동안의 강호 경험으로 그는 세상에는 때로는 상식을

뛰어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는 반드시 신중을 기해야 한다.

눈앞의 이 괴이한 애꾸사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부류일 것이다. 그 자의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독특한 기운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어쩔 수가 없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법이다.

자신이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이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었다.

남삼노인은, 아니 그가 대변하는 한 사람은 당금 무림의

법칙과도 같은 존재였다. 적어도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법칙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막봉은 힐끗 섭대명을 돌아보았다.

섭대명이 도와준다면 한 번 승부를 걸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섭대명도 마침 그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마주치고 무언(無言)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몸을 움직여 노독행의 몸을

앞뒤로 막아섰다.

"더 이상은 갈 수 없다."

막봉은 애꾸사내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하며 냉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무엇때문에 이 자를 구하려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자는 염라대왕의 생살부(生殺溥)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이 자를 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말을 하면서도 막봉은 자신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대체 자신이 무엇때문에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귀조 막봉은 단 한 번도 상대를 죽이면서 이런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지금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것은 상대가 두렵기

때문이 아닌가? 저 자가 지금이라도 발을 돌려 조용히

이곳을 떠나주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토록 두렵다면 대체 저 자의 앞을 가로막은 이유는

무엇인가?

무림의 법칙이란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인가?

물론 이런 생각은 순간적으로 막봉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 그의 얼굴은 여전히 냉막한 모습 그대로였다.

막봉과 섭대명은 모두 당금 무림의 유명한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앞뒤로 나란히 서자 장내에는 금세 팽팽한

살기가 감돌았다.

애꾸사내도 이번에는 조금전에 포일광과 여표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을 쉽게 쓰러뜨리지는 못할 것 같았다.

스릉!

나직한 음향과 함께 섭대명의 손에 독특한 모양의 칼이

쥐어졌다.

두껍고 뭉툭한 그 칼은 도룡도(屠龍刀)라고 했다.

평소에 섭대명이 이 도룡도로 자신의 절기인

혈명십삼도를 펼치면 그야말로 제대로 받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주위가 온통 도풍에 휩싸이는 가운데 상대는 몇

초 받아보지도 못하고 그 벼락치는 듯한 공세에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섭대명은 도룡도의 손잡이를 움켜쥔 자신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의 이 자는 지금까지 그가 만났던 어떤 고수들과도

달랐다.

마치 움직이는 화약고라고나 할까?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자신의 몸이 그대로 터져 나가

버릴 것만 같은 위험한 분위기가 이 자의 전신에 팽배해

있었다.

이런 자를 상대로 칼을 휘두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선택의 여유가 없었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귀조 막봉이었다.

막봉은 침묵을 지킨 채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애꾸사내의 투명한 시선을 더 이상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쉬악!

그의 검은 색으로 물든 손톱이 예리한 섬광을 뿌리며

노독행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갔다. 막봉이 회심의

절기로 생각하는 흑살조공이었다.

섭대명도 거의 동시에 출수를 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혈명십삼도중 최절초인

혈망라(血網羅)의 수법을 펼쳤다.

그의 혈망라는 완벽했다.

파팟!

주위가 온통 도룡도의 칼그림자에 휘감기며 금시라도

노독행의 등짝에서 핏물이 솟구쳐 나올 것만 같았다.

노독행은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막봉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더욱 빠르게 손을 내뻗어

노독행의 목덜미를 움켜잡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손이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무언가 지금까지 본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는

빠르고 강력한 것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머리끝이

쭈삣해졌다.

그 직후에 찾아오는 엄청난 충격!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나가자

막봉은 입을 딱 벌렸다.

"아악!"

자신의 몸이 전신의 뼈가 갈가리 부서지고 심맥이

끊어진 채 훨훨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막봉은 속으로

절규했다.

'이....이 자는 악마다...!'

절규가 채 입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막봉은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섭대명은 노독행이 등을 완전히 자신의 칼 아래

노출시킨 채 오히려 막봉을 향해 다가서는 것을 보았다.

또한 막봉이 피분수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러나 앞으로 쏘아나갔던 노독행의 몸이 언제 뒤로

움직여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왔는지는 전혀 보지 못했다.

금시라도 자신의 칼에 너덜너덜하게 변할 줄 알았던

노독행의 몸은 혈망라의 초식이 채 반도 펼쳐지기 전에

그의 칼 사이를 뚫고 섭대명에게로 바싹 쏘아져왔다.

섭대명은 노독행의 몸이 자신의 얼굴로 크게 확대되어

다가오는 모습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수중에 들고 있던 도룡도를

쳐들어 다가오는 노독행을 막는 일 뿐이었다.

하나 그것은 단지 생각일 뿐, 실제로는 그의 도룡도가

채 반도 들려지기 전에 노독행의 몸은 그의 가슴에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쾅!

"으윽!"

참으려고 했는데도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섭대명은 자신의 가슴뼈가 산산이 으깨진 채 코와

입에서 시뻘건 선혈이 뿜어지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도데체 자신이 왜 이렇게 맥없이 쓰러져야 하는지

도저히 알수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쿵!

칠 팔장이나 날아간 그의 몸은 땅바닥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섭대명은 문득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자 섭대명의 가슴속에는 한

줄기 기이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잘됐는지도 모르지...적어도 그녀를 서운하게

만드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섭대명의 싸늘하게 식어가는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동안 장내에는 죽음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순식간에 네 명의 절정고수들이 피떡이 되어 여기저기

쓰러져 버렸다. 그런데도 그들중 어느 누구도 노독행이

손을 쓰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알 수 있는 것은 노독행의 몸이

자신에게 쏘아져오고 있다는 강렬한 느낌뿐이었다.

"정말 굉장한 몸통공격이로군."

이제껏 한쪽에서 묵묵히 장내를 주시하던 남삼노인이

나직히 중얼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소림(少林)의 점의십팔질(漸意十八跌)과 비슷하면서도

위력은 훨씬 강하군. 소림의 제자인가?"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남삼노인은 느릿느릿 그의 앞으로 다가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자네같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을까?

아마 무림에 출도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게로군."

노독행은 말없이 외눈을 번뜩이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남삼노인은 누구도 감히 직시하지 못하는 그의 외눈을

빤히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멋진 눈을 가졌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완벽한

자유인(自由人)의 눈이야. 아쉽게도 요즘은 자네같은 눈을

지닌 사람을 보기가 점점 힘들어진단 말이야."

노독행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남삼노인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단천성(段天星)이란 사람일세. 남들은

새장자(賽莊子)라고도 부르지."

새장자 단천성!

아마 다른 사람들이 이 이름을 들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단천성은 당금 무림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네

사람중 하나였다.

그의 새장자라는 외호속에는 교활한 심기(心機)와

악독한 손속, 그리고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그는 한 번 눈밖에 벗어난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처참한 꼴로 만들고 말아 더욱 무서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단천성의 이름을 들었는데도 노독행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단천성도 그 점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는 강호에서 거의 활동한 적이 없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이런 자에게는 전혀 다른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자네같은

젊은이를 찾고 있는 분이 계시네. 나를 따라 간다면

자네를 그 분에게 추천해 주지."

단천성의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 분의 마음에 든다면 자네의 앞길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이 펼쳐질걸세. 그리고 자네같은 눈을

지닌 자라면 그 분은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는걸

보증하지."

노독행은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단천성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게 싫다면 자네는 지금 그냥 조용히 여기를 떠나면

되네. 오늘 보았던 일을 깨끗이 잊고 자네 갈 길을 가면

되는거지."

"........"

"자네는 무서운 적을 만들지 않게 되고 나도 번거로움을

피하게 되겠지."

"........"

"이것 마저 싫다면 남는건 이제 한 가지 뿐이네."

단천성의 입가에는 미소가 매달려 있었으나 그의

눈자위에 한 차례 푸르스름한 인광이 번뜩거렸다.

"내 일을 방해한 댓가를 치루어야겠지. 그리고 그

댓가는 가혹한 것이 될걸세."

단천성은 어떠냐는 듯 노독행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노독행은 단지 한 마듸를 내뱉었을 뿐이다.

"비켜."

단천성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는 무림에 출도한 이래 남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아니, 이런 말을 듣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해 본적이 없었다.

한쪽에 서 있던 서문정도 멍청해 진건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새장자 단천성에게 비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한단 말인가?

지금에서야 새삼 서문정은 세상이 참으로 넓고, 참으로

다채로운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단천성은 별로 화가 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더욱 짙어져서

금시라도 대소를 터뜨릴 것만 같았다.

하나 서문정은 단천성의 이런 모습이 마음속에

살심(殺心)이 들끓고 있을 때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단천성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노독행을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2

"패기가 대단하군. 하지만 강호에서의 일은 결코

패기만으로 처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해주지."

단천성은 중얼거리듯 내뱉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동작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단지 빨랐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한 줄기 우뢰와 같은 장력이

뿜어져 나왔다.

우르릉...

마치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장력이 채 노독행에게로

다가오지도 않았는데 뇌성(雷聲)이 울리며 엄청난 압력이

몰아닥쳐왔다.

노독행은 피할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멀리서 이것을 보고 있던 서문정이 안색이 대변해 급히

소리쳤다.

"피하시오. 그것은 뇌음장(雷音掌)이오!"

뇌음장은 천하에서 가장 양강(陽剛)한 장력중의 하나로

일단 격중되면 제아무리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해도

박살이 나버리고 마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뇌음장력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그제서야 노독행은 슬쩍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간단한 동작이었는데 뇌음장력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은

미끄러지듯 단천성을 향해서 육박해 들어갔다.

그의 몸놀림은 아주 특이했다.

두 발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허리와 무릎의 관절을

미묘하게 움직여 상대의 장력을 피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 동작이 어찌나 유연했던지 마치 물고기가

급류를 헤치고 나아가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단천성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단천성은 노독행이 너무도 수월하게 자신의 뇌음장

장세속을 헤치며 접근해오자 안광을 번뜩이며 두 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콰르르릉...

마치 수십, 수 백개의 뇌전(雷電)이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주위가 온통 시퍼런 번개에 휩싸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나 노독행의 몸은 단천성의 예상보다 배는 더 빨랐다.

단천성의 공격이 채 반도 뻗어나오기 전에 노독행은

어느 새 단천성의 코앞으로 육박해 오고 있었다.

단천성이 펼쳐낸 벼락같은 공세는 노독행의 몸 뒤쪽으로

흘러가 버렸다. 단천성은 미처 내뻗었던 손을 회수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그것이 그의 첫번 째 실수였다.

노독행의 몸은 단천성의 우측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윽!

분명히 옆을 스치고 지나갔던 노독행의 몸이 돌연

틀어지며 그대로 단천성의 정면으로 돌진해오는 것이

아닌가?

노독행이 달려들던 속도와 자세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동작이었다.

천하의 단천성도 이 순간만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졌다.

그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호신강기를 잔뜩

돋구어 노독행의 몸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그것이

단천성의 두 번째 실수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노독행과 몸통으로 맞부딛치는

일은 피했어야 했다.

단천성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노독행의 어깨와 자신의

어깨가 부딛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가 익힌 호신강기는 도가(道家)의 공력중 독보적인

칠양진력(七陽眞力)이었다.

칠양진력은 도가의 정종신공(正宗神功)중에서도 서열 십

위안에 드는 절정의 공력으로, 이것을 익히면

진기(眞氣)가 끊임없이 솟아나와 사지(四肢)가 잘라지지

않는한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 노독행의 몸과 부딛치는 순간, 단천성은 자신의

칠양진력이 산산히 흩어지며 무언가 거대한 쇠망치같은

것이 자신의 몸 전신을 샅샅이 분해하는 것을 느꼈다.

그제서야 단천성은 노독행의 몸통공격이 단순히 몸으로

부딛쳐오는 것만이 아닌 가공할 위력을 지닌

초상승(超上乘)의 절정수법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               *              *

인간의 몸은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살인흉기가 될 수

있다.

무쌍류의 고산팔벽( 山八壁)이 그것을 증명한다.

고산팔벽은 천하최강(天下最强)의 몸통공격이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그 가공할 파괴력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고산팔벽이란,

개산(蓋山), 압산(壓山), 철산(鐵山), 붕산(崩山),

파산(破山), 절산(絶山), 평산(平山), 그리고

이산(移山)의 팔벽(八壁)을 말한다.

이 여덟 가지의 몸통공격이야 말로 무쌍류 필살무예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무쌍류비전총요' 중에서

*              *               *

뚝...뚝....

입가로 시뻘건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단천성은 쓰러지지 않았다.

전신의 뼈가 모조리 어긋나고 그중 반 이상이 부러졌다.

핏줄은 엄청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모세혈관까지 모조리

터져 몸속 전체가 온통 핏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심지어 근육과 혈맥마저 뒤틀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단천성은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무공인가?"

입을 열자 더욱 진한 선혈이 흘러나왔다.

노독행은 그의 전면에 우뚝 서있었다.

그는 털끝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도

그대로이고 조그만 상처조차 입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의 전신은 강철과 얼음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입이 열리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개산벽(蓋山壁)."

단천성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개산벽이라...그래. 마치 거대한 산이 덮쳐오는 것

같았어..."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단천성은 필사적으로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며

노독행을 향해 억지로 미소지었다.

"젊은 친구...자네는 운이 좋았어...내가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텐데...하...하지만...앞으로 조심하게..."

단천성의 눈빛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자...자네는 앞으로 두 번 다시 편하게 잘 수

없을걸세. 나..나를 쓰러뜨린 이상 산장(山莊)에서는 결코

자네를 용서하지 않을테니까....각오해 두는게

좋을거야..."

그의 마지막 음성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쿵!

단천성의 몸은 마치  은 고목이 쓰러지듯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실로 너무도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새장자 단천성이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차가운

시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문정은 눈으로 보고도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단천성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단천성은 산장에서는 단지 일곱 명의 빈객(賓客)중 제일

말석(末席)에 불과했지만 당금 무림에서의 지위는 가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무공과 심기, 수법의 잔인함은 보는 사람의 치를

떨게 할 정도였다. 그런 단천성이 너무도 허무한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그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는 노독행이 자신의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생전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이 정체불명의

괴인을 가까이서 대하자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노독행은 서문정의 앞에 우뚝 선 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정은 그의 의중을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노독행이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를 모르는군."

서문정은 어리둥절한 빛을 숨기지 않았다.

"귀하는 대체 누구요?"

언뜻 노독행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기

때문에 안력이 예리한 서문정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서문정이 영문을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노독행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동자에 그린 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모용추수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그녀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독행은 말없이 그녀를 지나 앞으로 걸어나갔다.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녀는 그의 나직한 음성을

들었다.

"당신 때문이 아니었어."

그것은 마치 탁하게 쉬어버린 듯한 음성이었다.

그녀는 그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한쪽 눈에 걸친 검은 안대만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달랐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단지 그의 평범해 보이는 얼굴 어딘가에 사람의 마음을

사정없이 잡아끄는 강력한 자석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노독행은 힐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그때 두 사람의 가슴속에 각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곧 고개를 돌렸다.

단지 그 뿐이었다.

그녀는 서문정에게로 다가갔고, 노독행도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곧 그의 몸은 짙은 수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서문정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녀의 음성에 서문정은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그 자는 갔소?"

모용추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정의 얼굴에 한 줄기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 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당체 생각이 나지 않소."

모용추수의 눈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그를 아세요?"

서문정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전 그 자의 말투에서 그 자가 나를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소. 그래서 그 자의 얼굴이나 거동을 유심히

살폈는데 과연 나도 어디선가 그를 보기는 보았던 것

같소. 한데 그게 어디에서 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료."

모용추수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디선가 보았다면 언젠가는 기억이 날거에요. 억지로

떠올리려고 할 필요 없어요."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음성이었다.

서문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는 그의 시선에는 복잡미묘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서문정은 한참동안이나 여러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결국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이제 어디로 갈거요?"

모용추수는 웃었다.

웃음이라고 해보았자 단순히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 미소를 보자 서문정의

마음속에는 다시 한 줄기 애잔한 감상(感傷)이 떠올랐다.

왜 그녀의 미소는 이렇게도 슬픈 것일까?

대체 언제쯤에나 그녀는 그 슬픈 미소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외할아버지가 살고 계셔요.

우선 그 분에게 가겠어요."

서문정은 더 이상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더 보고 있다가는 눈물이라도 흘러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곳이 어디요?"

모용추수는 동쪽을 쳐다보았다.

"쌍성(雙城)."

서문정은 힐끗 그녀를 돌아보다가 자신도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쌍성이라는 지명을 듣자 그의 뇌리에는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미 오래전에 무림에서 사라져 버린 전설같은

인물이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혹시 그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산장'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그를 건드릴 수는

없을테니까...

아니면 오히려 일이 더욱 악화되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그'라 하더라도 산장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서문정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곳마저 안전하지 않다면 천하에서 자신이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한 여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댓가로는 너무도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서문정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산장에서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그녀에게는 산장에서의 하루하루가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자신에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설사 그것때문에 자신의 일생이 파탄에 이르게 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이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사나이에게 있어 일생의 불꽃을 태울 기회는 단 한

번으로 충분한 것이다.

3

북만주의 하늘에 노을이 물들자 연한 주황색 빛이 온통

세상을 감싸 안았다.

북만주의 석양은 북해와는 또달랐다.

누런 황토바람에 휘감긴 석양은 붉은 빛도 아니고 누런

빛도 아닌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로 변해가고 있었다.

노독행은 시시각각으로 다른 색으로 물들어가는 석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노독행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 기이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서문정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어떤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면 외로움일까?

서문정은 노독행의 형인 노군행과 절친한 사이였다.

한때는 노가살수문으로 와서 몇 일동안 묶은 적도

있었다.

물론 나이차이가 나서 노독행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몇 번인가 얼굴을 마주치기도 했었다.

그런데 서문정은 십 여년만에 만난 노독행을 알아보지

못했다.

노독행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서문정의 기억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것일까?

서문정은 과거의 노독행을 알고 있었던 극소수의 인물중

하나였다.

그마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과연 어느 누가

노독행을 알아볼 것인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은 과연 자유로운 것인가? 고독한 것인가?

노독행은 웃었다.

자유롭든 고독하든 상관없다. 그런 것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한

사람만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설사 기억하고

있지 않더라도 이제 곧 기억하게 될 것이다.

기억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노독행이 웃고 있을 때 그의 등뒤에서 하나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자인가?"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등뒤에는 세 명의 인물들이 우뚝

서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중앙의 인물은 붉은 장포를 걸친 훤칠한 키의

중년인이었다.

어깨가 유난히 길고 손이 컸다.

몸의 자세도 창(槍)처럼 곧아서 보기만 해도 추상같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홍포중년인의 허리춤에는

자신의 옷색깔과 같은 붉은 색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

홍포중년인의 우측에는 깡마르고 회색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따르고 있었다.

흡사 한 마리 독사를 연상시키는 싸늘한 용모의

인물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장포의 소맷자락 아래로 드러난

그 자의 손목에 한 쌍의 금빛 팔찌가 매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인물은 노독행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음양필 예일청이었다.

예일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노독행을

가리켰다.

"바로 저 놈입니다. 저 놈이 이대형(李大兄)을

살해했습니다."

예일청은 소리를 지르다가 노독행과 시선이 마주치자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차마 노독행의 번쩍거리는 외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노독행은 그들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중앙의

홍포중년인에게 고정시켰다.

홍포중년인은 나타날 때부터 줄곧 노독행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예리했다.

하나 그 칼날같은 눈빛도 노독행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가볍게 흔들거렸다.

노독행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홍포중년인은 잠시 노독행의 눈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한 눈을 가지고 있군.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게 결정되는건 아니지."

노독행은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홍포중년인은 냉랭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나는 대복보(大伏堡)의 큰 주인인 단홍검(斷虹劍)

강대년(姜大年)이다. 너에게 본 보의 수석총관에 대한

혈채(血債)를 받으러 왔다."

대복보의 수석총관은 얼마전에 노독행의 손에 쓰러진

낭심수사 이새붕이었다.

대복보에는 세 명의 총관과 두 명의 보주(堡主)가

있었다.

그중 단홍검 강대년이 큰 보주이고, 그의 오른쪽에 서

있는 회포중년인이 둘째 보주인 마환(魔環)

악괴익(岳魁翼)이었다.

강대년과 악괴익은 북만주일대에서는 누구나가

첫손가락에 꼽는 절정고수들로, 그들이 세운 대복보는

지난 십 여년간 관외(關外)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새붕은 대복보의 명성을 떨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그 이새붕이 무명(無名)의 괴인에게 어처구니없이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자 불같이 노한 강대년과 악괴익이

그의 복수를 하기 위해 대복보를 뛰쳐나왔다.

강대년은 이번 사건을 처음부터 목격한 예일청을 추궁해

이새붕을 살해한 흉수의 뒤를 추적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북만주의 패자(覇者)인 강대년 조차도 막상

노독행을 직접 만나자 어딘지 꺼림칙한 기운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자에게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강대년의 오랜 강호경험이 이 자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신호를 계속 보내오고 있었다.

강대년은 자신이 이 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너무 성급하지  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나 이제와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호에 살다보면 수시로 위험한 일을 만날 수가 있다.

그때마다 두렵다고 피해서는 도저히 강호에서 생활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강대년의 현재의 지위와 신분으로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핏빛은 피로 갚는다. 이게 본 보의 철칙(鐵則)이다.

너는 각오해라."

강대년은 차가운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하며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마환 악괴익과 음양필 예일청도 각기 안광을 번뜩이며

노독행의 양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악괴익의 손에는 어느 사이에 뽑아들었는지 손목에 차고

있던 금색 팔찌가 쥐어져 있었다.

악괴익은 노련한 인물답게 단번에 노독행이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무기를 꺼내든 것이다.

예일청도 음양필을 뽑아든 채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 사람의 절정고수가 품(品)자 형태로 압박해 들어오자

장내의 공기는 아연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가운데 서 있는 노독행만이 양 손을 늘어뜨린 채 방심한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노독행은 여전히 허공을 올려본 채 미소짓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가?

그의 웃음에 별다른 뜻은 없었다.

단지 노독행은 그때 문득 싸우고 있는 동안만큼은

자신은 결코 외롭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다.

결국 진실은 거기에 있었다.

싸움이 있는 한, 승부(勝負)가 있는 한 남자는 외롭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승부에서 무쌍류는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은 강대년을 향해서 정면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쾅! 쾅! 쾅!

세 번의 폭음.

세 개의 시체.

노독행의 몸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장내에는 한 구의

시체가 더 늘어갔다. 노독행은 세 번 움직였고, 그것으로

모든 상황은 끝이 났다.

이렇게 싱거운 싸움도 없을 것이다.

하나 쓰러진 사람들이 누구인지 안다면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북만주일대를 호령하던 단홍검 강대년과 마환 악괴익,

그리고 음양필 예일청이 제대로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모두 피떡이 되고 만 것이다.

그들이 약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오늘 상대를 잘못 만났을 뿐이다.

노독행은 단숨에 세 명의 절정고수를 한 줌 핏덩이를

만들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갔다.

외롭다는 생각은 의식적으로라도 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앞으로 해야할 일을 생각한다면 외로움을 느낄

겨를같은 건 절대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독행은 문득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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