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18화 (19/61)

제 18 장      이 곳 이   호 랑 이 굴 인 가 ?

1

태행산(太行山) 일천리(一千里).

태행산은 산서성 진성현(晋城縣) 남방에서 시작하여

서로는 분수(汾水), 동으로는 갈석(碣石)에 이르는 거대한

산이었다.

거의 남북으로 달리고, 장성 근방에서 대흥안령의

남단과 연결된다.

회남자(淮南子)에 보면 오행지산(五行之山)이라고도

불리웠고, 열자(列子)에서는 대형(大形)이라고 하여

천하의 허리라고일컬어졌다.

엽동은 태행산의 끝도 모르게 광활한 산맥을 보면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건 완전히 사막의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격이로군.'

그가 엽적화의 부탁을 받고 실종된 표향령주와 엽표를

찾아나선 지 벌써 열흘이 흘렀다. 그들이 실종된 지는

거의 한 달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처음 실종된 하북의 석문에서 시작하여

그들의 행로를 뒤 아 이곳까지 왔다.

그는 홍초혜라는 별호답게 이미 한 달 가까이나 경과한

그들의 행적을 용케도 추적해왔다. 하나 막상 태행산의

거대한 모습을 보자 이곳에서 그들을 찾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만 생각되었다.

아마 찾는 사람이 '그녀'와 자신의 친 동생이

아니었다면 엽동은 이대로 포기해 버렸을지 모른다.

엽동은 태행산의 산줄기가 빤히 내려다 보이는 높다란

산봉 아래에 털썩 주저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석문에서 진성현을 지나 이곳의 초입에 있는

금계령(金鷄嶺)으로 들어선 것이 분명하다. 금계령에서

마천령(摩天嶺)을 지나 부인봉(斧刃峯)까지는 흔적이

보이는데 부인봉 근처에서부터 종적이 묘연하니

이상하군.'

부인봉은 태행산에서도 험준하기로 유명한 봉우리였다.

마치 도끼날을 거꾸로 세운 것같다고 하여 부인봉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엽동은 이틀 밤낮을 꼬박 허비하여 부인봉의 구석구석을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하나 아무런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삼일째 되는 날.

엽동은 오늘은 부인봉에서도 가장 험한 북쪽 절벽

일대를 뒤져 보기로 결심했다.

그가 사람의 행방을 추적하는 방식에는 나름대로의 기본

원칙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움직이면 반드시 그 흔적이 남는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했다면 어딘가에

반드시 그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을 발견하면 남은 일은 그 흔적을 분석하여

상대의 이동방향을 추론(推論)하는 것 뿐이다.

아무리 작은 흔적일지라도 그것을 캐보면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게 그의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론이었다.

문제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미세한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예리한 안력과

관찰력,집중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반드시 흔적을 찾고야 말겠다는 집요한

열정(熱情)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결코 엽동같은 추적의 전문가는 될 수가

없다.

엽동은 부인봉의 북쪽 절벽을 차례로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북쪽 절벽은 경사가 유달리 가파르고 기암괴석이 많아서

올라가기도 힘들고 내려오기는 더욱 어려웠다.

엽동은 신중한 동작으로 조금씩 절벽을 따라 내려오며

바위와 바위 틈새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렇게 가파른 곳이라면 누군가가 지나갔을 때 흔적이

남지 않을리가 없었다. 더구나 이곳의 바위는 부서지기

쉬운 사암(砂岩)으로 이루어져 있어 더욱 더 흔적을

남기기가 쉬웠다.

하나 절벽을 거의 반이나 내려왔는데도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엽동은 차츰 초조해 지는 것을 느꼈다.

흔적을 찾을 때 초조해 하거나 서두르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엽동이었으나 그도 사람인이상 불안감이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엽표도 엽표지만 '그녀'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중 하나였다.

아니, 한때는 그의 일생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인생을 걸었었다.

이제 비록 그 의미는 퇴색해 졌다고 해도 이대로

'그녀'의 행방조차 찾지 못하고 헤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한 것은 절벽을 거의 다 내려와서였다.

그것은 너무도 작고 미세했는지라 하마터면 엽동도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막 아래로 내려가려던 엽동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춰졌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자신의 허리춤 아래에

있는 작은 암석을 살펴보았다.

암석사이에 이상한 것이 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검은 반점인줄 알았다.

하나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핏자국이었다.

부인봉의 가파른 절벽 사이에 떨어져 있는 희미한

핏자국 하나!

이미 오래전에 말라버려 검은 색을 띠고 있는

핏자국만으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다. 그것이

사람의 피인지 짐승의 피인지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나 엽동은 그 핏자국을 보자 눈을 빛낸 채 주위를

더욱 샅샅이 수색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일단 피를 흘렸다면 결코 이 한

방울만 흘렸을리가 없는 것이다.

과연, 그곳에서 서쪽으로 칠 팔장 떨어진 암벽 위에서

다시 그는 검게 변색한 핏자국을 발견했다.

새가 아니라면 어떤 동물도 한 번의 도약으로 칠 팔장을

건너 뛸 수가 없다. 그리고 새라면 겨우 칠팔장 밖에 날지

못할 리가 없다.

단숨에 칠 팔장의 거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절정의 무공을 익힌 인간밖에는 없었다.

엽동은 다시 몇 개의 핏자국을 더 찾아낼 수 있었다.

핏자국의 간격은 처음에는 칠 팔장에 달했으나 조금씩

좁혀져서 다섯 번째 핏자국은 겨우 오장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것은 피를 흘린 자의 상처가 심각해서 갈수록 기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지막 여섯 번째의 핏자국은 다섯 번째 핏자국에서

불과 사 장 떨어진 툭 튀어나온 암반위에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 핏자국은 한 방울이 아니라 거의

어른의 손바닥만큼이나 커다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에서 피를 토한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핏자국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엽동은 반경 오십 장 내외를 철저하게 수색했으나 더

이상의 핏자국을 찾을 수는 없었다.

엽동은 다시 여섯 번째의 핏자국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바닥에 넙죽 업드려 검게 변한 핏자국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핏자국사이에 무언가 울퉁불퉁한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엽동의 안색이 핼쓱하게 굳어졌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그것이 잘려진

내장조각이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피를

토한 자는 거의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 자가 '그녀'나 혹은 엽표중 한 사람이라면?

엽동은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핏자국이 이곳에서 멈췄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밖에는

없었다.

하나는 피를 흘린 사람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게 된

경우이다.

물론 이것은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엽동은 이 경우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더 이상 뒤를 추적할 여지가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자가 누구이든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엽동은 억지로 다음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다른 하나는 피를 흘린 사람이 무언가에 태워져

운반되었을 경우이다.

가마나 마차(馬車)에 태워졌다면 물론 계속 피를 흘린다

해도 바닥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곳의 험악한 산세로 보아 마차가 올라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마를 이용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가마라면 당연히 두 명이상의 가마꾼이 있어야

한다.

두 명이든 네 명이든 가마꾼이 부상당한 사람을 운반해

갔다면 틀림없이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여러

사람이 움직였는데 흔적이 남지 않을리가 없다.

엽동은 암반 주위를 다시 한 번 훑어 보았다.

있었다.

암반의 끝부분에 미세한 균열이 그의 시야에 쏘아져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는 비바람에 풍화(風化)되어 자연적으로

발생된 균열같았으나 엽동의 날카로운 눈은 그 균열의

중앙에 희미한 자국이 나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발자국이었다.

누군가가 암반을 박차고 날아오를 때 발의 앞꿈치에

약간의 무리한 힘을 가하여 암반이 조금 깨어진 것이다.

아마 가마꾼중의 하나일 것이다.

부상을 당한 사람을 태웠기 때문에 가마의 무게가

무거워져서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지나친 힘을 준 것이

분명했다.

엽동은 발자국으로 다가가 신중한 동작으로 그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갖다 대어 보았다.

발꿈치를 들고 앞발을 정확하게 맞춘 다음 나머지 한

발을 자연스럽게 내려섰다.

그리고는 똑바로 선 그 방향으로 곧장 날아올랐다.

팟!

가마꾼이 했을 것이 틀림없는 동작 그대로 한쪽 발로

암반을 박찬 채로 그는 그 방향을 향해 직선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유난히 산세(山勢)가 가파른

서북쪽이었다.

이십 여리쯤 전진했을 때 그는 다른 종적 하나를

발견했다.

그가 진행하는 방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나뭇가지에

작은 헝겊 쪼가리가 찢어져 있었다.

그는 급히 그 헝겊조각을 움켜 잡았다.

헝겊조각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검은 색 망사에서 찢겨져 나온 부분이었다.

검은 망사....

'그녀'의 망사였다.

'그녀'만이 입는 망사였다.

만져보기만 해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망사는 그가 직접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삼년전 그녀의 생일날에 손수 시장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자신이 선물한 검은 망사를 두르고 미소짓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엽동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엽동은 더욱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가마는 지나가면서 간간이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작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던지 수풀을 밟고 지나갈 때 풀잎이

꺾인 부분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엽동이 가고 있는 곳의 지형이 점점 더 험준하게

변했다.

부인봉도 무척 험하고 가파른 봉우리였는데 이곳은

부인봉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기암괴석과 깎아지를

듯한 벼랑이 연신 앞을 가로막았다.

엽동은 정신없이 앞을 치달려 가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우뚝 몸을 멈춰 세웠다.

백 여장의 앞에 하나의 기이한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의 형세는 기이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계곡의 양쪽으로는 유리벽같이 매끄러운 절벽이 끝도

모를 정도로 높이 솟아 있고, 앞에는 검붉은 수림이 짙게

우거져 있었다.

계곡의 폭은 어른 세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협소했다. 게다가 살짝 드러난

계곡의 안은 짙은 운무(雲霧)가 깔려 있어 도저히 안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가마는 그 계곡안으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엽동은 계곡에 접근하지 않고 잠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서 계곡의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계곡의 앞에 펼쳐진 검붉은 수림이 마음에

걸렸다.

수림이라면 의당 푸르고 싱싱한 색으로 물들어 있어야

하거늘 눈앞의 수림은 이상하리만치 검고 붉은 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왠지 음산해 보였다.

게다가 수림의 위에는 아지랑이같은 칙칙한 기운이

감돌았다.

'검붉은 수림이라...거기에 좁고 길다란

협곡....어디선가 이런 곳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엽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돌연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태행산...흑혈림(黑血林)...그리고

운무관(雲霧關)...이곳은 바로 귀왕곡(鬼王谷)이구나!"

어찌나 놀랐던지 그의 음성이 격하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의 뇌리속으로 오래전부터 무림에 퍼져있던 전설같은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 태행심처귀왕곡(太行深處鬼王谷),

유혼무귀막행인(幽魂舞鬼莫行人).

태행산 깊은 곳에 귀왕의 계곡이 있으니...

혼이 떠돌고 귀신이 춤추는 곳이라 인간은 갈 곳이

못된다...

귀왕곡!

귀왕곡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아뭏든 언제부터인가 태행산의 깊은 곳에 귀왕의 계곡이

있었고, 그 근처에 가는 사람은 누구도 살아나오지

못했다.

피처럼 붉고 먹물처럼 검은 수림을 지나 짙은 안개의

바다를 헤치고 나가면 귀왕의 계곡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 귀왕의 계곡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무림인들이 귀왕곡의 신비를

헤치기 위해 이곳으로 뛰어들었는지 모른다. 하나 그들중

다시 나온 사람은 전무(全無)했다.

이제는 귀왕곡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가 두려움을

느끼는 공포스런 존재로 변하고 말았다.

엽동은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일이 고약하게 되었군.'

가마가 귀왕곡으로 들어간 이상 저 안 어딘가에

'그녀'와 엽표가 있을 것이다. 물론 살아 있다면 말이다.

자신이 과연 그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무사히 구출해 올

수 있을까?

솔직히 엽동은 별로 자신이 없었다.

귀왕곡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한 무림인들중에는

그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엽동의 얼굴에 잠시 갈등어린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엽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군. 모험을 해보는 수밖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흑혈림을 향해 다가가려 했다.

그때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흑혈림의 앞에 하나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 엽동을 놀라게 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타난

인영의 모습이 너무도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칙칙한 검은 흑의에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검은

안대...

흑혈림 앞에 나타난 인영은 바로 노독행이었다.

2

노독행은 걸음을 멈춘 채 자신의 앞에 펼쳐져 있는

검붉은 수림과 그 뒤에 자리잡은 좁고 깁다란 협곡을

응시했다.

북리강의 흔적은 그 협곡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이 호랑이굴인가?'

노독행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검붉은 수림과 그

안의 안개가 자욱한 협곡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북리강이 자신을 이곳으로 유인한 이상 이 안에는 필시

무서운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호랑이면 호랑이인데로, 악마라면 악마인데로

박살내주고야 말겠다.

생각하면서 천천히 흑혈림으로 다가가던 노독행의

걸음이 돌연 멈추어졌다.

"그만 나오는게 어때?"

한 사람이 멀지 않은 수림속에서 쭈삣거리며

걸어나왔다.

홍초혜 엽동이었다.

엽동은 노독행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또 만났구료."

노독행의 번뜩이는 외눈이 엽동의 눈을 쏘아보았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엽동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허험...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오."

노독행은 한동안 엽동을 응시하다가 무언가를 느낀 듯

외눈을 번쩍하고 빛냈다.

"표향령주가 이곳에 있나?"

엽동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걸...어떻게 알았소?"

노독행의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표향령주가 실종되었다기에 당신이 그녀의 행방을  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럼 당신도 그녀를 찾아온거요?"

"나는 다른 자에게 볼 일이 있어."

엽동은 혹시나 했다가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당신이  는 자가 이 안에 있소?"

노독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엽동은 활짝 웃으며 손뼉을 탁 쳤다.

"잘됐군. 나도 마침 이 안에 들어가야 하니 우리 함께

들어갑시다."

이어서 그는 노독행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흑혈림을 향해 걸어갔다.

노독행은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무런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흑혈림은 두 종류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었다.

묵송(墨松)과 혈선목(血線木)이었다.

묵송은 특이하게도 잎이 검은 소나무이고, 혈선목은

줄기가 기이할 정도로 붉고 곧은 길다란 나무였다.

두 검고 붉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흑혈림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음침한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비단

색깔 때문만이 아니라 숲 전체에 느끼한 비린내같은 것이

배어 있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엽동은 흑혈림으로 들어와서 채 열 걸음도 걷기 전에

벌써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정말 기분나쁜 곳이구료. 그렇지 않소?"

그는 노독행을 돌아보며 말했으나 노독행은 묵묵부답,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엽동은 공연히 머쓱해져서 까치집같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흑혈림 안은 아주 어두웠다. 워낙 많은 나무들이 숲을

뒤덮고 있어서 햇살이 안에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엽동이 막 두 발자욱을 떼었을 때였다.

돌연 하나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상처로 뒤덮힌 손.

노독행의 손이었다.

엽동은 노독행이 자신의 어깨를 잡자 어리둥절하여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채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노독행은

턱으로 그의 발 아래를 가리켰다.

발 아래를 내려다 본 엽동의 안색이 핼쓱하게 변했다.

바닥에는 검은 솔잎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솔잎들이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솔잎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의 손가락굵기만한 크기의 거미들이었던

것이다.

단지 색이 검었고, 주변에 묵송의 검은 잎들이 많이

있던데다가 주위가 워낙 어두어서 안력이 예리한

엽동으로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엽동은 흑혈림에서 나는 느끼한 비린내가

무엇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그 검은 거미들은 거미중에서도 맹독(猛毒)을 품고

있다고 알려진 흑색지주(黑色蜘蛛)이 분명했다.

흑색지주는 독성이 강력한 만큼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거의 수천, 수만 마리가

바닥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어 보기만 해도 절로 소름이

돋았다.

엽동은 자신이 하마터면 흑색지주의 무리속으로 태연히

걸어들어갈 뻔 했다고 생각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벌써 한 줌의 핏물로 변해 있었을 것이다.

"도데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흑색지주들이..."

말을 하다 말고 엽동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스으으으...

흑색지주의 무리 가운데가 심하게 요동을 치더니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일어났다.

그 그림자의 크기는 거의 삼 장에 달했다.

마침내 그림자가 모두 일어나자 엽동은 입을 딱 벌렸다.

그것은 엄청나게 커다란 흑색지주였다.

사람의 허벅지만한 다리가 여덟 개나 달려 있었고,

몸통은 거의 황소의 몸집만했다. 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엽동과 노독행을 노려보는 거미의 얼굴이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검은 자위만 가득한 두 눈과 납작한 코,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이 번득이는 입...그야말로 어둠속에서

본다면 사람의 얼굴로 착각할만큼 유사한 모습이었다.

거대한 거미의 목에 사람과 흡사한 머리가 달린 채

꿈틀거리고 있는 광경은 왠지 징그럽고 구역질 나는

것이었다.

엽동의 입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흑색인면지주(黑色人面蜘蛛)...."

흑색지주가 백 년동안 살게 되면 몸통이 처음보다 두

배쯤 커지게 된다. 백 년이 지날 때마다 몸이 두 배씩

커져서 일천년이 흐르면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거대한 몸통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된 흑색지주는 영성(靈性)을 지니게 되어서 거의

마물(魔物)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영성을 지닌

흑색지주는 얼굴 또한 사람과 유사하게 변해 마침내

이와같은 인면지주가 되는 것이다.

엽동은 말로만 들었지 인면지주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직접 본 인면지주는 막연히 말로만 듣고 머리속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츠으...츠으...

흑색인면지주는 듣기 거북한 괴음을 흘리며 그들앞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흑색지주들이 그 뒤를 따라 움직이자 마치 땅

전체가 그들을 향해 밀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엽동은 절로 당황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정신없이 물러나던 그의 등에 무언가가 닿았다. 엽동은

그것이 노독행의 몸임을 깨닫고 얼른 몸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

그래도 당당한 사내대장부라고 자처하는 자기가 한낮

미물 따위를 두려워해 물러났다는 것이 약간은 계면쩍었던

것이다.

하나 노독행의 시선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노독행은 자신을 향해 여덟 개의 다리를 움직여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인면지주를 바라본 채 우뚝 서

있었다.

쉬익...쉬익...

인면지주가 다가옴에 따라 구토할 것만 같은 느끼한

비린내가 진하게 풍겨왔다.

엽동은 다시 초조해져서 노독행을 돌아보았으나

노독행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인면지주의 얼굴에 수북하게 나 있는 검은

털마저 생생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가까이 서 본 인면지주의 모습은 끔찍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이 움직였다.

팟!

엽동이 귓전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을 때 노독행의

몸은 어느 새 십 여장을 날아 인면지주의 머리위에 떠

있었다.

엽동은 아직 이토록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쉬아악!

인면지주는 노독행의 몸이 자신의 머리위로 날아오자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시커먼 독액(毒液)이 빛살처럼 뿜어나왔다.

하나 그때 이미 노독행의 몸은 그곳에 없었다.

노독행은 인면지주의 머리를 지나 등뒤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아아...

인면지주가 뿜어낸 독액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흑색지주들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반경 일장 안에 있던 흑색지주들이 악취를 풍기며 검은

핏물로 변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가공할 광경에 엽동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저...정말 무서운 독이구나!"

탄성을 내지르면서도 그의 시선은 노독행을  고

있었다.

노독행은 인면지주의 머리를 타넘어 뒤로 내려서더니

오른손으로 인면지주의 왼쪽에 있는 네 개의 다리중

하나를 후려갈겼다.

콰직!

인면지주로서는 알아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빠르고 강력한 일격이었다.

크와아아...!

고막을 찢을 듯한 괴이한 비명소리가 인면지주의 입을

뚫고 터져나왔다.

사람의 다리통 만큼이나 굵었던 인면지주의 다리가

그대로 부러져 나가며 시퍼런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인면지주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전신을 뒤틀며 몸을

돌렸다.

하나 그때 노독행은 어느 새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인면지주는 한 번 당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재빨리

그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하나 채 반도 돌아서기 전에

노독행의 오른손은 다시 인면지주의 반대쪽 다리를

사정없이 강타하고 있었다.

쾅!

비린내가 화악 풍기며 인면지주의 다리 하나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끄아아아..!

인면지주는 소름이 오싹 돋는 괴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인면지주가 한 번 몸부림을 칠

때마다 그 밑에 있던 흑색지주들이 수십 마리씩 밟혀

죽었다.

노독행은 다시 몸을 날려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말은 길었지만 그의 몸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희끗한 흑선(黑線)이 이리저리

날아가는 광경 뿐이었다.

흑선이 한 번 날아갈 때마다 인면지주의 다리가 하나씩

부러졌다.

순식간에 인면지주의 다리중 대 여섯개가 부러지거나

아예 박살이 났다.

인면진주는 몇 번이나 몸을 돌려 노독행에게 독액을

쏘아보내려 했으나 도저히 그 엄청난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애 은 흑색지주들만 희생시키고 있었다.

파스스...

다시 한 떼의 흑색지주들이 인면지주의 독액에 맞아

매퀘한 연기를 피워내며 녹아들어갔다.

노독행이 인면지주의 마지막 여덟 번째 다리를

부러뜨리고 나자 그토록 미친 듯이 날뛰던 인면지주의

움직임도 극도로 둔해졌다.

다리가 모두 부러진 인면지주는 자신의 커다란 몸통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괴이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인면지주가 보기 흉한 몸통을 꿈틀거린 채 바닥에서

바둥거리고 있을 때 노독행은 인면지주의 머리위로

날아갔다. 인면지주의 검은 눈동자가 노독행의 움직임을

뒤따라 오다가 그대로 멈춰섰다.

카아오!

인면지주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괴성과 함께 거의 한 바가지나 되는 엄청난 양의 독액을

뱉어냈다.

시커먼 독액은 반경 오장 이내를 자욱하게 뒤덮으며

날아들었다.

그 광경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엽동 조차도 안색이 대변해 허겁지겁 다시 십 여장이나

뒤로 물러나 버렸다.

노독행은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인면지주의 얼굴쪽으로

바짝 다가들었다.

인면지주가 토해낸 독액이 막 그의 옷에 닿으려는

순간에 그의 발은 어느 새 인면지주의 아래턱을 사정없이

강타하고 있었다.

쾅!

굉음과 함께 인면지주의 머리통이 목에서 분리되어

하늘높이 솟구쳤다.

동시에 노독행이 양쪽 소매를 세차게 휘두르자 그를

향해 날아들던 독액이 허공으로 튀어져 올랐다.

쿵!

거의 오 장이나 솟구쳤다가 바닥에 떨어진 인면지주의

머리통은 이미 산산히 부서진 채 너덜너덜한 걸레조각처럼

변해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발길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무쌍류가 천하에 자랑하는

단혈철각(丹血鐵脚)의 엄청난 위력이었다.

머리통이 분리된 인면지주의 몸통은 몇 차례의 발작적인

꿈틀거림을 보이다가 서서히 동작이 완만해지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인면지주가 죽자 인면지주의 주위에 구름처럼 모여있던

흑색지주들이 신속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인면지주가 발출하는 강력한 독기(毒氣)에

억제되어 있던 흑색지주들이 급속도로 결속력을 잃고

분산되는 것이다.

일 각도 흐르지 않아 흑색지주들은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리고 장내에는 오직 인면지주의 조각난 시체만이

보기 흉한 모습으로 널려져 있을 뿐이었다.

엽동은 그때까지도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가공할 독기를 지닌데다 영성(靈性)을 띠어 제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닌 절정고수라 해도 당해내기 어렵다는

전설의 인면지주가 너무도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엽동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노독행의 몸은

인면지주의 시체를 넘어 흑혈림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엽동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강인한 뒷등을

바라보았다.

'정말 터무니없이 강하구나. 그의 능력은 대체 어디가

그 끝이란 말인가?'

엽동은 보면 볼수록 이 애꾸 눈의 사나이가

신비스럽게만 생각되었다.

그 가공할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일단 손을 쓰면

인정사정을 보지 않는 냉정한 손속과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움직임 하나 하나가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자를 적(敵)으로 만드는 것은 너무나 미련한 짓일

것이다.

그런데 귀왕곡의 안에 있는 누군가가 그런 미련한 짓을

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잠시후면 알게 될

것이다.

엽동은 그답지 않게 흥분되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노독행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3

흑혈림을 지나자 끝도 없이 솟아오른 듯한 두 개의

가파른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두 절벽의 사이에 세 사람이 겨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통과할만큼 좁다란 틈이 벌어져 있었다.

엽동이 그 절벽의 앞에 도착했을 때는 노독행은 이미 그

좁다란 협곡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엽동은 황급히 노독행의 뒤를 따라갔다.

협곡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공기가 훈훈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의 협곡은 그 폭이 일장 반

정도 되었는데 길이는 대략 백 여장 쯤 되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이 십 여장쯤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스으으....

갑자기 협곡의 안에서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밀려왔다.

그와 함께 공기가 진동하는 듯한 미세한 음향이

들려왔다.

엽동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별 생각없이 앞으로

전진했다. 그때 문득 그는 노독행의 외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물러서."

노독행의 짤막하면서도 강렬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엽동은 움찔하여 자신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그는 보았다.

자신들을 향해 자욱하게 밀려오는 수천, 수만 마리의

벌떼들을...

협곡안에서 밀려나온 것은 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엄지손가락만한 커다란 벌떼들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공기의 진동처럼 들렸던 미세한 음향은 벌떼들의

날개가 파드득거리는 소리였다.

허공을 온통 뒤덮으며 자욱하게 밀려오는 벌떼들의

엄청난 행렬에 엽동은 한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도저히 그 끝없이 밀려나오는 벌떼들을 막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짙은 잿빛을 하고 하나하나의 크기가 어른의

엄지손가락만한 그 벌떼들은 벌중에서도 가장 흉폭하고

독성이 강한 일종(一種)인 대황봉(大蝗蜂)임이 분명했다.

대황봉은 남만(南蠻)의 더운 습지에서만 서식한다고

알려진 것인데 설마 태행산의 깊은 계곡에서 보게 될

줄이야 엽동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대황봉의 무리들은 그들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노독행은 엽동의 앞을 막아선 채 천천히 왼손을 들어

올렸다.

엽동은 제아무리 노독행이라 할지라도 이번에는

맨손으로 저 엄청난 벌떼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암담한 표정이 되었다.

하나 노독행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왼쪽 소매를 약간 걷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돌연 그의 왼손에서

섬뜩한 도광(刀光)이 피어올랐다.

파아앗!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광채가 번뜩이며 실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엽동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견문이 풍부한 그로서도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칼.

한 자루의 칼.

칼 한 자루가 제아무리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절정의 수련을 쌓은 도객(刀客)이라면 한 번에 수십,

혹은 수백개의 변화를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 그 도광만으로 아무 것도 뚫고 들어올수 없는

무형(無形)의 벽(壁)을 만드는 것은 적어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소한 엽동은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한데 그 믿음이 지금 그의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노독행의 수중에 있는 칼은 아무리 안력을 돋구어도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대신에 그의 전면에 하나의

거대한 벽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순수하게 도광으로만 이루어진 벽이었다.

그들을 향해 노도처럼 밀려들었던 대황봉의 무리들은 그

도광의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파파파파.....

벌떼들은 도광의 벽에 부딛치는 순간 조각조각난 채

사방으로 잘려져 나갔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치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 오다가 거대한 담벼락을 만나자 뚫지 못하고

빗방울이 튕겨져 나가는 모양을 연상시켰다.

엽동은 그 엄청난 광경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도법(刀法)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                  *                  *

무쌍류의 무예중에도 병기를 사용하는 것이 있는가?

간혹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 대답은 당연히 '있다' 라는 것이다.

무쌍류의 무예는 거의 가 맨손으로 펼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무쌍류 만큼 다양한 병기들을 사용할

수 있는 유파도 없을 것이다.

무쌍류의 무예는 천하에 산재한 모든 병기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무쌍류에 있어서 병기는 곧 손의 연장이며, 병장기의

사용법은 맨손무예와 동일한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무쌍류의 모든 무예는 맨손이나 병장기로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붕추권의 강맹한 찌르기는 창법(槍法)의 찌르기로

변형될 수 있고, 전사(纏絲)의 비틀기 수법은

검법(劍法)에 자주 사용된다.

그리고 최고의 수비수법이라는 요란수(搖亂手)를

도법으로 펼치면 아무도 뚫을 수 없는 불패(不敗)의

요란도(搖亂刀)가 되는 것이다.

일례로 요란수중의 성막밀밀(星幕密密)은 맨손으로

펼치면 제아무리 변화무쌍한 공격이라도 막을 수 있고,

이것을 도로 펼치면 물방울조차 새어 나가지 못하는

금성철벽(金城鐵壁)을 쌓을 수가 있다.

이처럼 무쌍류의 맨손무예와 병기무예는 마치

수레바퀴와 같은 관계에 있는 것이다.

- '무쌍류비전총요' 중에서

*                  *                  *

파파파파....

대황봉은 끝없이 밀려들었다.

하나 그것들중 단 한 마리도 노독행이 펼쳐내는

성막밀밀의 도광속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노독행의 앞에는 잘려져나간 대황봉의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의 몸속에는 끝없는 진력(眞力)이 샘처럼 솟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의 칼을 휘두르는 동작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엽동은 그의 이마에 땀 한 방울 나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새삼 노독행에 대해서, 그리고 무쌍류에 대해서 경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무쌍류에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는게 분명했다.

엽동은 협곡안에서 밀려나오던 벌떼들의 기세가 한 풀

꺾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토록 노도처럼 밀려오던 대황봉의 무리들도

금성철벽과 같은 노독행의 도법앞에는 대단한 위협이 되지

못했다.

엽동은 어림잡아 대황봉이 처음보다 반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대황봉의 무리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협곡

안에서 무언가 어른의 주먹만한 것이 빠르게 쏘아져

나왔다.

그것은 여왕봉(女王蜂)이었다.

대황봉의 무리들을 이끌고 있는 여왕봉이 참지 못하고

공격에 나선 것이다.

여왕봉은 다른 대황봉보다 크기가 몇 배나 더 클 뿐

아니라 색깔이 화려하고 동작도 훨씬 빨랐다. 더구나 다른

벌과는 달리 뾰쪽하고 날카로운 독침이 몸밖으로 나와

있어 몇 번이고 계속 사용할 수가 있었다.

여왕봉이 날아오자 주춤했던 대왕봉의 무리들이 다시

기세등등하게 덤벼들었다.

윙...윙....

벌떼들의 파득거리는 소리가 귀청이 아플 정도로 크게

울려퍼졌다.

하나 대황봉이 빠르게 달려들면 달려들수록 그들의

시체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될 뿐이었다.

노독행의 칼을 휘두르는 자세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정말 무섭도록 냉정하고 강인한 모습이었다.

파팍!

다른 벌들을 독려하던 여왕봉의 한쪽 날개가 도광에

부딪쳐 날아갔다.

여왕봉의 몸이 기울어지며 바닥으로 쓰러지려 했으나

용케도 다시 일어나 위로 날아올랐다. 하나 그때 노독행의

칼은 한 치의 사정도 없이 여왕봉의 몸을 그대로 가르고

지나갔다.

팟!

여왕봉의 몸은 수십 조각으로 잘려져 허공에 흩어졌다.

여왕봉이 사라지자 대황봉의 무리들이 눈에 띠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우왕좌왕하여 자기들끼리 부딪치거나 허공을 날아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리는 경우가 속출했다.

얼마되지 않아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날아들었던

대황봉의 무리들은 거의 대부분이 흩어지거나 바닥에

쓰러졌다.

그제서야 노독행은 천천히 칼을 멈추었다.

슥!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월영도는 어느 새 왼쪽 소매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주위에는 대황봉의 시체들이 작은 동산처럼 쌓여져

있었다.

노독행은 몇 마리 허공에 남아 있는 대황봉들을 손을

휘둘러 내 고는 태연히 그 동산처럼 쌓여진 대황봉의

시체들을 밟고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엽동도 말없이 그뒤를 따랐다.

바삭!

발밑에 밟히는 대황봉의 촉감은 결코 기분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노독행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발밑에 쓰러져 있는

것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를 밟고 있는 것은 대황봉의

무리들이었겠지.'

엽동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노독행을 만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새삼 느끼고 있었다.

협곡을 지날 동안 다른 이상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의 독충(毒蟲)도 나타나지 않았고 별다른

기관장치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협곡을 벗어나자 그들의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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